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골드베르크 변주곡(Goldberg Variations)"은 "첼로무반주모음곡(Bach suites for solo cello No.1)"과 더불어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바흐의 음악일 것이다. 아마도 바흐의 기악곡들 가운데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오르간곡'들이라고 생각하지만, 클래식 음악을 처음 접하는 입문자들에게 친숙한 곡들은 "G선상의 아리아"를 제외하고는 앞서 말한 두 개의 곡이 아닐까 싶다.

첼로무반주모음곡과 파블로 카잘스에 얽힌 일화에 대해선 내 홈피(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 파블로 카잘스 편)에 소개되어 있으니 넘어가기로 하자. 첼로무반주모음곡의 경우엔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라는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 존재하기에, 로스트로포비치를 비롯한 수많은 첼리스트들이 도전하더라도 여전히 첼로무반주모음곡하면 일단 파블로 카잘스를 이야기한 뒤 다른 연주자로 넘어가기 마련이다. 이름하여 '절대명반'인 셈이다.

그에 비해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많은 연주자들의 뛰어난 연주(완다 란도브스카, 칼 리히터, 로잘린 투렉, 구스타프 레온하르트, 안드라스 쉬프, 머레이 페라이어 등)가 각축을 벌이는 격전장이라고 할 수 있다. 나만하더라도 글렌 굴드의 연주(연도별 녹음)을 비롯해 여러 연주자들의 다양한 버전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을 가지고 있는데, 같은 작곡가의 같은 곡이라도 어떤 연주자이냐에 따라 해석도 가지각색이라는 것이 클래식 음악 감상의 묘미이기도 하다(물론, 내게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을 단 한 장만 가져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무조건 글렌 굴드, 굴드다. 그 다음엔 아마도 어떤 굴드일 것인가로 고민하며 머리가 터지겠지만).





바흐가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작곡할 무렵엔 이미 피아노가 나와 있었으나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피아노가 아니라 악기로서는 아직 좀더 시일이 걸려야 만 하는 미완성 상태에 머물렀기 때문에 바흐는 집에서는 '클라비코드(Clavichords)'를 주로 연주했고, 일반적인 독주나 협주곡 등에서는 하프시코드, 클라브생, 클라비쳄발로라고도 불리는 '쳄발로(cembalo)'를 즐겨 사용했다.

바로크 시대의 가장 인기있는 건반악기 중 하나였던 클라비코드는 단순한 단현 악기(monochord)에서 발전된 것으로 당대의 가장 예민하고 감응력이 있는 건반악기였지만 이 악기는 음량이 작았기 때문에 조용한 가정에서 독주 악기로 적절했다. 그러나 바흐는 이 클라비코드 특유의 섬세한 음을 즐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클라비코드는 훗날 가정용 건반악기 자리마저 피아노에 넘겨주던 18세기까지 인기를 누렸다.

우리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둘러싼 잘 알려진 일화는 이 곡이 드레스덴 주재 러시아 대사였으며 바흐에게 평소 많은 관심과 배려를 베풀었던 카이저링크 백작이 불면증에 시달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작곡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일화가 널리 퍼지게 된 것은 바흐의 초기 전기 작가인 포켈에 의한 것인데, 그에 따르면 카이저링크 백작을 모시고 있던 음악가 고틀리프 골드베르크는 잠 못 이루는 자신을 위해 편안하고 경쾌한 곡을 작곡하라는 백작의 지시를 받고 고민 끝에 스승 바흐를 찾아가게 되었고,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있던 바흐는 즉시 작곡을 시작해 완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불면증에 시달리는 백작은 커녕 잠이 쏟아지던 사람도 깨울 만큼 아름답고 때로는 시끄럽다고 말해야 할 정도의 음악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후세의 음악사가들은 포겔의 주장에 대한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포겔의 주장을 받아들이던 그렇지 않건 간에 1741년이나 1742년에 '다양한 변주곡과 아리아'라는 딱딱한 이름으로 출판되었던 작품집이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란 다소 간편한 이름으로 바뀐 점만큼은 골드베르크와 카이저링크 백작에게 신세를 진 셈이리라(실제로 카이저링크 백작은 이 곡을 '나의 변주곡'이라 부르며 애호했다고 하는데, 바흐에겐 거금의 작곡료를 지불해 당시 재정적 어려움에 처해있던 바흐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작품의 공식 표제 "Aria mit verschiedenen Veraderungen vors Clavicimbal mit Manualen"이 말해주듯 이 작품은 '두 단의 건반을 지닌 쳄발로'를 위해 쓴 곡이다. 30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중 열 곡은 두 단의 건반을, 열 다섯 곡은 한 단 그리고 세 곡은 둘 또는 한 단을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하고, 남은 두 곡에는 아무런 지시도 없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오늘날의 대표적인 건반악기인 피아노는 한 단의 건반밖에 없으므로 사실상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자장가라는 설을 불식시키는 또 하나의 증거는 이 악곡 자체가 가지고 있는 뛰어난 구조 때문이기도 하다. 바흐는 이 작품의 구조를 '주제(Aria) - 30개의 변주 - 주제(Aria da Capo)'라는 틀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리아를 뺀 30개의 변주는 놀라울 만큼 치밀한 수학적 논리로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어 수미쌍관의 구조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32개의 곡들은 16번 변주곡을 기준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 그러나 이 곡이 가진 진정한 아름다움, 바흐라는 한 작곡가의 위대함을 엿보이게 만드는 것은 대위법도, 수학적 엄밀함도 아닌 30번 변주에서 쏟아져 나오는 파격에 있다. 정교한 도미노 퍼즐처럼 겹겹이 포개어 놓았던 구조적 엄밀함을 후반부(30번 변주)에 가면 당시 독일에서 유행한 민속적 선율이 등장하면서 한 번에 허물어뜨리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이 인간 바흐의 참 얼굴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완전무결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고, 예술의 매력이자, 개성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본래 쳄발로를 위해 만들어진 곡이었지만 훗날 피아노 연주를 위한 편곡을 부조니가 진행했지만 20세기 들어 폴란드 바르샤바 태생의 완다 란도브스카(Wanda Landowska)에 의해 원전 연주가 시도되면서 이 곡 역시 새롭게 각광 받기 시작했고, 이후 수많은 피아노 연주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내가 어제 들은 피에르 앙타이(Pierre Hantai)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완전 디지털 녹음이자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쳄발로 원전연주란 점에서 비록 'OPUS111'이란 마이너레이블에서 발매되긴 했지만 이후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음반을 처음 CD플레이어에 장착하면 쏟아져나오는 쳄발로의 영롱한 음색과 풍부한 잔향에 저절로 귀가 솔깃했진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답고 투명하며 명징한 소리가 있다니'라는 감탄이 절로 든다. 프랑스 출신의 쳄발로(하프시코드) 주자답게 피에르 앙타이는 매우 유려한 선율과 찰랑거리는 소리에 빠져들게 만들지만 문제는 후반부로 갈수록 뭔가 조금 지겹다는 느낌이 들게 만든다는 아쉬움이 있다.

뒷심이 달린다는 건 아마 이럴 때 쓰는 말 같다. 후반부로 가서도 여전히 뛰어난 기교와 즐거움을 선사하지만 뭔가 조금 지루하고 응집력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다. 그것은 아마도 이 음반을 녹음(1993)할 당시만 하더라도 피에르 앙타이가 아직 젊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연주적으로 뛰어난 소리와 우아한 멜로디, 고운 음색의 찰랑거리는 즐거움을 주긴 하지만 다른 대가들의 연주에 비해선 '심지'가 없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http://youtu.be/ZLI8oh8wY6A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음반이 주는 음악적 쾌감과 이제는 대가로 성장한 피에르 앙타이의 젊은 시절 연주를 소장한다는 측면에서 권할 만한 음반임에는 틀림 없다. 앞의 것은 OPUS111 레이블의 1993년 녹음, 뒤의 것은 Mirare MIR 9945 레이블의 2003년 녹음으로 음악적 완성도를 따진다면 당연히 후자를 선택해야 한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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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노스 쿼텟(Kronos Quartet) - Pieces Of Africa






어제는 편집자문회의가 있었던 데다가 편집위원들이 모두 귀가한 뒤에 한홍구 교수님이 차나 한 잔 하자고 하셔서, 여인들이 있는 카페에 가서 드립커피를 마셨다(정말 드립이더라.  보리차처럼 맑고 투명한, 커피만 마셨다. 믿어라~ 제발!).

요즘 시국 이야기로 시작해 현재의 상황이 지식인(사회)의 소멸로 치닫고 있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우려까지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집에 돌아가니 12시였다. 만약 예전처럼 파주에 살았다면 더 걸렸을 테지만 지금 우리 집은 인천이니까~ ㅋㅋ

집에 가서 '크로노스 쿼텟(Kronos Quartet)'의 초기 앨범 중 하나인 "Pieces Of Africa"를 오랜만에 들었다. 크로노스 쿼텟(Kronos Quartet)의 이 앨범만 듣노라면 아프리카의 젊은 뮤지션들이 클래시컬한 연주를 한다고 느낄 만큼 아프리카 냄새가 물씬 나는 앨범이지만 이 그룹은 미국의 현대음악 4중주단으로 매우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하는 그룹이다.

이들 음악세계의 폭이 하도 넓어서, 가끔은 이 녀석들이 음악으로까지 제국주의를 하는가 싶을 때가 있을 만큼 그 폭이 광대역이다.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지에서 서구 선진 국가들이 '생물학적 탐사(Biological Prospecting)'를 빙자한 '생물해적질Bio-Piracy'을 일삼는 것처럼 이들은 세계 각지의 음악적 전통을 자신들 것으로 가져와 현대음악으로 변주해낸다. 물론, '생물해적질'처럼 악의적으로 말할 성질의 일은 아니다.

K.마르크스가 "양이 질을 변화시킨다"고 했던 것처럼, 가끔은 폭이 깊이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폭 넓게 많이 아는 것[博覽强記]가 항상 지혜로운 것도 아니고, 때로는 깊이가 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것도 나름이다.

최근 지식사회 풍토를 보면 다방면으로 폭이 넒은 것처럼 보여도, 막상 자신이 아는 범위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일반 시민만 못한 인식을 보이는 경우도 많은데, 이건 비단 이공계열 지식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계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단 서로 만나질 않고, SNS로만 대화와 소통을 하니 일이 되지 않는 측면도 분명 있을 게다.

어제 한홍구 선생과 나눈 이야기도 그런 것이었다.





어쨌든 크로노스 쿼텟(Kronos Quartet)의 음악은 이처럼 광대역으로 전 세계의 음악적 전통과 자원을 두루 섭렵해 재해석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거친다. 그 깊이가 어느 정도 깊이를 가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제3세계를 사는 시민이라면 충분히 의심해보아야 할 일이지만 그들은 이런 작업을 제1집 "Winter Was Hard(1990)"부터 해왔다는 사실에 대해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란 관념도 궁극적으로는 지역이 아닌가. 난 크로노스 쿼텟(Kronos Quartet)의 이 꾸준한 축적과 탐사의 저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노마십가(駑馬十駕), 둔한 말도 열흘 동안 수레를 끌 수 있다는 뜻으로, 재주 없는 사람도 노력(努力)하고 태만(怠慢)하지 않으면 재주 있는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어제 크로노스 쿼텟(Kronos Quartet)의 음악을 들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http://www.youtube.com/watch?v=VNPn98_9jFM&feature=share&list=PLN83DP26dOxsIMfunwVsaavE3iMiKDID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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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는 세계 여러 나라 국가들 가운데 가장 잔인한 가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를 혁명 이전의 국가로 되돌려 놓기 위해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프랑스를 침공했고, 프랑스는 혁명을 사수하기 위해 때로는 전파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결정된 후인 1792년 4월 25일 스트라스부르에 주둔하고 있던 공병대 대위 루제 드 릴은 스트라스부르 시장인 디트리슈 남작으로부터 군인들의 사기를 높일 수 있는 노래를 하나 작곡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애국심에 충만해 있던 그는 하룻밤 사이에 노래 하나를 작곡하는 데 그 곡이 바로 라 마르세예즈이다. 그런데 스트라스부르에서 작곡한 이 노래에 갑자기 마르세이유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2개월 후 몽벨리에 출신의 프랑수아 미뢰르가 마르세이유의 의용군들과 함께 파리로 행진할 계획이었다. 마르세이유부터 파리까지 800Km를 행군하는 동안 600여명의 의용군들은 목이 터져라 이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는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해있던 파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마르세이유에서 온 사람들이 부른 노래라고 해서 라 마르세예즈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 의용병들은 유럽 여러 나라의 상비군들에 맞서 조국을 방어하고 마침내 혁명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노래는 혁명의 이상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이 노래가 다시 불린 것은 우리도 얼마 전 영화 <레미제라블>을 통해 보았던 감동적인 장면 1830년 7월 혁명 당시 파리의 바리게이트 앞이었다. 이후 이 노래는 1879년 프랑스 제 3공화국 시절 다시 프랑스의 국가가 된다. 애초 ‘루제’ 대위가 썼던 6절까지의 가사에 나중에 다른 사람이 추가한 7절 가사가 붙은 ‘라 마르세예즈’는 공식행사에서는 1절과 6절만 부른다.  

라 마르세예즈 (La Maseillaise)

나가자, 조국의 자식들아.
영광의 날은 왔도다!
폭군에 결연히 맞서서
피묻은 전쟁의 깃발을 올려라,
피묻은 전쟁의 깃발을 올려라!
우리 강토에 울려 퍼지는
끔찍한 적군의 함성을 들으라.
적은 우리의 아내와 사랑하는 이의
목을 자르러 다가오고 있도다!
무기를 잡으라, 시민동지들이여!
그대 부대의 앞장을 서라!
진격하자, 진격하자!
우리 조국의 목마른 밭이랑에
적들의 더러운 피가 넘쳐흐르도록!

Allons enfants de la Patrie
Le jour de gloire est arrive.
Contre nous, de la tyrannie,
L'etandard sanglant est leve,
l'etandard sanglant est leve,
Entendez-vous, dans la compagnes.
Mugir ces farouches soldats
Ils viennent jusque dans nos bras
Egorger vos fils,
vos compagnes.
Aux armes citoyens!
Formez vos bataillons,
Marchons, marchons!
Qu'un sang impur
Abreuve nos sillons.

내가 갑자기 이 노래 이야기를 다시 꺼낸 이유는 박근혜 정부가 5.18기념식을 위한 새로운 추모곡을 공모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지난 이명박 정권 때 정부는 5.18추모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대신 '방아타령'을 연주시켜 국민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기념과 추모는 결국 기억을 위한 투쟁이다. 올바르게 기억할 것인가?의 문제는 멀리 현해탄 건너 일본의 교과서 문제만이 아니다. 바로 오늘 우리 앞에서도 역사 왜곡 시도는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역사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역사적 사실성(진실)을 가지고 오랫동안 추모곡으로 불려오던 노래가 있는데 새로 추모곡을 만들어 이를 대체하려는 시도야말로 역사 앞에 부끄러운 짓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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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Concert - Live
도어즈(Doors) 노래 / 워너뮤직코리아(WEA) / 1991년 5월



아버지, 난 당신을 죽이고 싶어.
어머니 난 당신을 밤새도록 사랑하고 싶어.
그건 가슴시리도록 당신을 자유롭게 하지. <The end 중에서>


"도어즈"
란 그룹의 이름은 종종 "짐 모리슨"과 동격으로 다뤄지곤 한다. 그럴 경우 가장 손해를 입는 그룹 멤버는 역시 "레이 만자렉"이다. 짐 모리슨이 그룹에 카리스마를 부여했다면, 레이 만자렉은 그룹의 음악에 골격을 세워줬다. 도어즈 특히 짐 모리슨은 당시 팽배해 있던 마약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애시드 록(acid rock)의 느낌이 강하다. 거기에 클래식 음악 교육으로 단련된 레이 만자렉의 신서사이저 연주의 반복적인 리듬과 멜로디는 청중을 사이키델릭한 환상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러나 도어즈의 음악적 성향은 단순히 사이키델릭이나 애시드 록적인 분위기였다고 단언할 수 있는 단순한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도어즈의 음악적 성향은 자유로움으로 충만해 있었다. 60년대 당시의 록그룹들은 블루스를 모태로 하고 있었다. 도어즈가 연주한 곡들 중 Back door man과 같은 곡은 블루스맨 윌리 딕슨의 작품으로 하울링 울프가 불러 유명했던 곡이기도 하다. 이 곡이 지닌 의미는 도어즈란 그룹이 그 시대의 다른 록그룹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음악적 뿌리가 블루스에 있었음을 선언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들의 그룹명인 도어즈는 영국의 시인 월리엄 블레이크의 싯구
"If Doors of were cleansed, All Things Would Appear Infinite"를 인용한 것이다.


짐 모리슨 자신이 고백하고 있듯
"나의 영웅들은 예술가들과 작가들이고 그러기에 난 예술과 문학이란 게임에 코를 꾀인 사람이다. 나는 언제나 무언가 쓰고 싶었지만 손이 펜을 잡고 자동기술마냥 내가 아무 것도 할 필요없이 스스로 움직 여지기 전까지는 쓰지 않는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았지. 물론 나는 얼마간의 시를 썼다." 그는 문학적인 열정에 사로잡혀 있기도 했다. 그들의 음악에 종종 나타나는 거친 메시지들 역시 짐 모리슨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핑크플로이드와 같은 프로그레시브록 그룹은 정교한 프로듀싱 작업을 거쳐 음악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한동안 그네들의 라이브공연에서 제대로 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개인적으로도 록그룹의 라이브 자체는 선호하면서도 라이브 음반을 구입하는 것을 꺼려하는 편인데, 그 까닭은 아무래도 라이브 현장 녹음이 주는 생생함이 좋기는 하지만 음질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어즈의 음악은 라이브 공연에서 더욱 그 진가를 발휘했다. 도어즈는 그룹 구성원 네 명의 음악적 실력이 든든히 뒷받침되고 있는 그룹이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짐 모리슨의 야수와 같은 보컬과 레이 만자렉의 단단한 구성으로 꾸며진 신서사이저 연주 실력이 뒷받침하고 있었다. 짐 모리슨은 라이브 공연에서 샤머니즘의 제의와 같은 의식을 진행하곤 했는데 그 의식들은 오만하고 광기가 넘쳐 흘렀다.
(물론 거기에는 아직 라이브 공연의 상업적 기술들이 현재와 같이 고도로 발전되지 못한 상태에서 그들만이 지닌 특별한 테크닉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들은 사이키델릭한 약간의 조명만으로도 관중을 흥분시키는 재주를 지녔었다.)


규율과 억압의 질서를 죽임으로써 이들이 얻고자 한 것은 자유였다. 그들 음악의 프로듀서를 맡았던 폴 로스차일드는
"녹음할 당시 짐 모리슨은 마치 무당이 된 듯한 분위기에 휩싸였으며 몰아의 경지로 빠져 들어갔다"고 회상한다. 도어즈의 라이브 음반은 음향기술에 의한 여과가 거의 없는 순수한 의식의 산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두 장의 CD로 도어즈의 명곡들을 두루 수록하고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는 음반인데, 불행히도 현재는 품절 상태에 있다.




그들의 음악은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에 즐겨 삽입되곤 하는데, 코폴라 감독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는 도어즈의 명곡 <The End>가,  1991년 올리버 스톤 감독은 영화 <The Doors>를 통해 그 자신의 청춘에 대한 헌사를 표하고 있다. 짐 모리슨 만큼이나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았던 아티스트도 드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든 그는 남들이 평생에 걸쳐 도전하더라도 도달하기 힘든 명성을 단시일 내에 폭발적으로 얻어냈고, 그 자신의 천재적 광기를 견뎌내지 못하고 타개하고 말았다. 짐 모리슨이 세상을 떠난 지도 30년 가까이 흘렀다. 하지만 그의 천재성과 광기는 그가 남긴 다른 앨범들로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본격적인 장마도 시작되었으니 오늘은 도어즈의 "Riders on the st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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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vis Presley - Elvis 30 #1 Hits - BMG 플래티넘 콜렉션 (수입)
엘비스 프레슬리 (Elvis Presley) 노래 / SonyBMG(수입) / 2002년 12월


영화 "MIB"엔 이런 대사가 있다. "엘비스가 죽었다구? 천만에 그는 고향 별로 돌아갔어."

1935년 1월 8일 소위 미국의 딥 사우스(deep south)인 미시시피주 미시시피 주 투펠로에서 태어나 1977년 8월 16일 숨질 때까지 엘비스 프레슬리는 살아있는 신이었다. 에드가 모랭은 그의 저작 "스타"를 통해 스타됨의 미덕이랄까, 스타의 조건을 다음의 네 가지로 규정했는데, 그것은
‘미모,젊음, 착한 이미지,초인격적 행위' 이다. 스타가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존재란 것을 "MIB"의 대사는 그들을 외계인으로 묘사함으로써 역설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란 셈이다.


굳이 에드가 모랭의 조건들을 제시하지 않더라도 엘비스 프레슬리는 스타가 지닐만한 모든 요소를 지녔다. 미모와 젊음, 착한 이미지와 초인격적 행위들은 물론 그 삶을 마감하는 비극, 가난하고 굶주렸던 어린 시절 등 그는 과거 신화 속의 영웅이 운명을 딛고 일어섰다가 다시 몰락하는 비극의 주인공과 같은 삶을 살았다. 미국의 가장 진지한 뮤지션 중 하나로 손꼽히는 브루스 스프링스틴조차 "에드 설리번쇼"에 출연한 엘비스를 본 순간 어머니에게
"나도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라고 말했다고 하지 않던가. 엘비스의 존재는 단순히 당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후대에도 꾸준하게 이어져 간다. 존 레논은 엘비스의 "헛브레이크호텔(Heartbreak Hote)"을 들은 뒤의 삶은 이전의 삶과 완전히 다른 삶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밥 딜런 역시  "That`s All Right Mama"에 완전히 매료당했다고 말한다.



이 음반 "Elvis 30 #1 Hits"은 그런 엘비스의 베스트음반이다. 음악평론가 임진모 선생은 "시대를 빛낸 정상의 앨범"에서 엘비스의 "Elvis' Golden Records(1958)"를 시대를 빛낸 정상의 앨범 가운데 하나로 손 꼽았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LP시대의 뮤지션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엘비스는 존 레논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킨 뮤지션으로 손 꼽고 있음에도 "비틀즈" 이후 세대의 사람들에겐 머리에 포마드나 바르고, 느끼하게 다리나 흔들흔들하는 엔터테이너 이상의 의미를 얻기 힘들었다. 그런 점에서 BMG에서 제작한 이 음반은 지금의 세대에게 엘비스의 매력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기획일 것이다. 디지털 세대의 귀를 움직일 수 있도록 리마스터링된 음반은 디지털 음반 제작기술의 장점을 잘 살려주고 있다.


엘비스는 흑인의 음악성을 백인의 목소리로 표현해주길 원하던 시대에 출현한 뛰어난 뮤지션이었다. 이 앨범에 수록된 곡들은 그의 58년 골든디스크 앨범에 수록된 곡들을 거의 전부 재수록하고 있다. 그가 군입대 이전 발표한 곡들부터 군에서 제대한 뒤 발표한 곡들까지.... 어떤 의미에서 엘비스는 그와 선배이자 경쟁자였던 프랭크 시내트라에게 패배했다. 그는 록큰롤의 신기원을 이룩했으나 이것을 좀더 밀고나가지 못하고 군 제대 이후엔 서서히 프랭크 시내트라 풍의 스탠더드 팝으로 전이해 갔기 때문이다. 엘비스는 위대했으나 선배인 플랭크 시내트라와 후배인 비틀즈 사이의 과도기 속에 놓인 다리였는지도 모른다. 엘비스는 늘 자신의 인기에 대해 불안해 했다. 그는 한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대체 소녀들을 그토록 열광하게 만드는 요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아마 그 또한 신이 주신 선물일 겁니다. 전 그렇게 믿어요.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지 제가 두려워 하는 게 있다면, 흡사 전구에 불이 들어오듯 갑자기 들어왔다가 갑자기 꺼져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거죠."라고 답한다. 그에겐 늘상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고압의 전류가 흘러들었다. 110V 전구에 흘러든 전류는 순간 엄청난 빛을 발하다 어느 순간 꺼져 버린다. 엘비스의 흔적은 그렇게 점차 잊혀져 갔으나 그가 세상에 보낸 빛은 광속의 속도로 여전히 날아다닌다.

* 리믹스된 보너스 트랙도 매우 재미있으니 놓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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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11월 17일에 태어나 1997년 5월 29일에 세상을 떠난 뮤지션이 있다. 세상에 수많은 노래가 있듯 세상엔 별 만큼이나 수많은 가수가 있다.  그러니 단 한 장의 정규 앨범을 내고 세상을 떠나버린 30살의 뮤지션이 계속해서 기억에 남으리란 기대는 허망할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기 한 명의 가수가 기억에 남는다. 제프 버클리.... 그의 노래에는 알 수 없는 힘이 있다. 알 수 없다는 형용은 얼마나 무책임한가? 그렇다면 우리 그의 목소리를 무책임하다고 해두자. 제프 버클리의 목소리는 무책임하게 고막을 후벼 판다. 들판을 헤매는 미친 고아 소녀를 그린 들라크루아의 그림이 있다. 맨발에 헝클어진 머리 카락, 반쯤 벌려진 입, 허공을 가르는 희멀건 눈동자. 제프 버클리의 음성에서는 그런 고아의 느낌이 든다.

 

 

갓 서른에 한 장의 앨범을 내고 미시시피 강에 수영하러 들어갔다가 영원히 떠오르지 못한 젊은 가수가 세상을 알면 얼마나 알았겠는가. 그렇다면 그의 목소리는 도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걸까. 그래서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무책임한가? 제프 버클리의 아버지는 팀 버클리였다. 그의 아버지 역시 제프 버클리 못지 않은 매니아들의 지지를 받는 가수였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역시 28살의 나이로 요절해버렸다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운명이 아들에게서 반복되도다. 헤밍웨이처럼, 이소룡처럼... 그의 데뷔 앨범이자 유작처럼 남겨진 한 장의 앨범이 "Grace"이다. 그 중에서 6번째 곡 "Hallelujah"는 본래 레오나드 코헨(L.Cohen)의 곡이었다. 이 곡이 디즈니 애니메이션 "슈렉"에 삽입되어 국내의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편이기도 하다. 코헨의 노래는 마치 김목경의 "어느 불행한 노부부 이야기"가 김광석에 의해 부활하듯 제프 버클리에 의해 새로운 노래가 되었다.

 

 

"I heard there was a secret chord"라는 "Hallelujah" 첫 소절이 불리워지기 전에 우리는 제프 버클리가 가볍게 내쉬는 한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 가슴이 천길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가 미시시피 강에 가라앉은 것은 혹시 그의 영혼이 그토록 무거웠던 탓은 아닐까. "Lilac wine"에서 어쩌면 우리는 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Listen to me, why is everything so hazy? Isn't that she, or am I just going crazy, dear? Lilac wine, I feel unready for my love... 내 말을 들어봐요, 왜 모든 것이 희미해져 가는 거죠? 그녀가 아닌가요? 아니면 내가 미쳐가고 있는 건가요? 라일락 와인, 난 아직 내 사랑을 위한 준비를 못했는데..." 그의 보컬은 흔히 이야기되는 위대한 보컬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건 김광석도 마찬가지다. 김광석의 고음 처리는 때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태롭게 들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김광석의 노래는 그만의 목소리에서 풍겨나는 맛이 있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그것이 무엇이든 진실하게 들린다. 제프 버클리의 보컬 역시 그러하다.

 

 

우리는 누구나 가슴 속에 맨홀 같은 깊은 구멍 하나를 파놓고 산다. 그 안에서 누군가 당신을 부른다. "Listen to me, why is everything so hazy?" 혹시 그의 노래를 듣고 후회하는 마음이 든다면... 그건 당신의 맨홀이 너무 얕거나 혹은 귀가 막힌 것이 아니라면 전적으로 당신의 슬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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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 Am Fenster

그룹 City는 특이하게도 동독의 록그룹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곳은 "Am Fenster"였다. 내 개인적으로 고등학생 시절 성시완이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다, 처음 들어보고 너무나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탓에 이후 언젠가 한 번은 다시 이 프로그램에서 방송을 해주리란 기대를 품고, 나와 비슷한 세대라면 누구나 경험해 봤음직한 일을 나도 했다. 작은 워크맨 라디오에 카세트 테잎을 꽂고 이 음악이 방송되기만을 목을 빼고 기다리는 일 말이다. 결국 그렇게 해서 City의 Am Fenster를 녹음하는데 성공했고, 그 다음엔 그 테입이 늘어질 때까지 반복해서 듣고 또 듣고는 했었다.

내 세대의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이는 전영혁을 통해, 어떤 이는 성시완을 통해 새로운 록음악의 경계를 넘어갔으리라. 물론 많은 이들이 두 사람 모두의 영향권 아래 있었지만 내 경우엔 전영혁도 전영혁이었지만 특히 성시완의 팬이었다. 나는 그 덕분에 아트록과 프로그레시브, 그리고 월드뮤직을 넘나드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특히 성시완은 시완 레코드라는 별도의 음반사를 힘겹게 꾸려 나가며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국내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음악들을 소개했다. 시완 레코드를 통해 국내에 소개된 대표적인 아티스트가 안젤로 브란두아르디(Angelo Branduardi)일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 그가 만든 영화 '모모(MoMo)'의 OST는 영화음악 베스트를 꼽으라면 반드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것이다. 



다시 City의 Am Fenster로 돌아와서 1991년 국내에서 LP음반으로도 발매된 적이 있다(고 하지만 아무리 구해보려 해도 서울 변두리 소년이 구할 수 있는 건 아니었고, 게다가 내가 처음 이 음악을 접했던 것이 1987년을 전후한 무렵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더더군다나 구할 방법이 없었다). 나중에 시일이 좀더 흐른 뒤에야 CD로 발매된 것을 구할 수 있었다. 당시 동독에도 이런 그룹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고, 지금도 인상적인 이야기는 그들이 동베를린에서 공연을 할 때면 반대로 서베를린 시민들이 동베를린으로 넘어가는 일들이 벌어졌다는 일화였다. 아트록에 입문하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이 그룹과 이 곡을 접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으리라....

전체 17분짜리 대곡이라 라디오에서도 쉽게 들을 수 없었던 그 음악이다. ^^

Am Fenster

Einmal wissen dieses bleibt für immer
ist nicht Rausch der schon die Nacht verklagt
ist nicht Farbenschmelz noch Kerzenschimmer
Von dem Grau des Morgens längst verjagt
이것이 영원히 남아있을 거라는 걸 한번 아는 일은
이미 밤을 잊게 만든 마약과 같은 것도 아니네
그건 색채의 (아름다운) 혼합과 같은 것도 아니며
새벽의 어스름에 오래전에 쫓겨난 흔들리는 촛불도 아니네

 

Einmal fassen tief im Blute fühlen
Dies ist mein und es ist nur durch Dich
Nicht die Stirne mehr am Fenster kühlen
Dran ein Nebel schwer vorüber strich
핏속 깊숙히 느껴지는 것을 한번 만져보는 일
이건 나의 것 그리고 단지 너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
그건 이마를 창에 대고 식히는 느낌도 아니네
안개가 무겁게 지나가는 것같은 느낌.

 

Einmal fassen tief im Blute fühlen
Dies ist mein und es ist nur durch Dich
Klagt ein Vogel ach auch mein Gefieder
Näßt der Regen flieg ich durch die Welt
핏속 깊숙히 느껴지는 것을 한번 만져보는 일
이건 나의 것 그리고 단지 너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
새가 탄식하고 나의 날개도 탄식하네
이슬비가 내리고 나는 세상을 날아가네

(가사는 강태호님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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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파크닝(Christopher Parkening) - Bach, Prelude

 


고등학교 때 친구 중에 클래식 기타를 정말 잘 치던 친구 한 명이 있었다. 학교에 클래식기타 써클이 있었음에도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 써클에 들지 않고, 혼자서만 기타를 쳤다. 축제 기간에 그 클래식 기타 동아리에서 연주회를 갖게 되면 꼭 이 친구를 불러 게스트로 초대한 것으로 보아도 그 녀석의 기타 솜씨는 터부나 아집이 세다면 셀 수 있는 아마추어 동호회 모임에서도 인정해줄 만한 정도였던 거다. 그런 그가 어째서 그렇게 같은 취미를 가진 친구들과 어울리기 보다는 나랑 더 잘 어울렸던가에 대해서는 좀 의문이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 친구의 집에 갔다가 내 기억에 클래식 기타만 서너대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통 기타와 일렉트릭 기타는 별개로 하고 내가 알기로 검정색 가죽 하드 케이스에 담긴 클래식 기타만 서너 대가 있었으니 그 녀석 방은 정말 기타의 방이었다.


클래식 기타는 의자에 앉아 한 쪽 발을 지지대에 올리고 기타를 허벅지에 기대듯 하고 연주하므로 얼핏보면 어린 아이 감싸안는 자세로 보이기도 했다. 그는 이마에 진땀을 송글송글 맺힐 만큼 연습할 때도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늘 못마땅한 점이 한 가지 있었는데, 나는 그의 기타에 반해 언제라도 최고의 찬사를 보내줄 마음이 있었음에도 그럴 만한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연주를 마치고는 무척 기분 나쁘다는 듯 기타를 케이스에 집어넣고는 날 바라보면서 '형편없지'라고 말은 하지 않더라도 그 이외의 다른 말은 기대할 수도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이곤 했다. 본인이 본인의 연주에 만족하지 못하는데 옆에서 백날 '훌륭해'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사정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으므로 나역시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다 돌아오곤 했다.



그 무렵 내가 알고 있는 클래식 기타리스트는 안드레스 세고비아(Andres Segovia), 나르시소 예페스(Narciso Yepes), 존 윌리암스(John Williams) 정도였다.  줄리언 브림(Julian Bream)이나 페페 로메로(Pepe Romero), 앙헬 로메로(Angel Romero) 형제를 알게 된 것은 그 뒤의 일이었고, 크리스토퍼 파크닝(Christopher Parkening), 마뉴엘 바루에코(Manuel Barrueco) 등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도 또 한참 뒤의 일이 된다. 세고비아의 기타는 바로크 풍의 가벼운 곡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묵직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크리스토퍼 파크닝은 안드레아스 세고비아(하긴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기타리스트가 있을까?)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고 하더라도, 분위기가 흡사하다고 하더라도 매우 섬세하고 가벼운 느낌을 준다. 그는 차분하고 잔잔하지만 기댈 수 있는, 잠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는 느낌의 연주를 펼쳐보인다.


크리스토퍼 파크닝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교수로 후학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플라이 낚시에도 대단한 능력을 발휘해 플라이 낚시의 윔블던 대회랄 수 있는 국제골든 컵 타폰 토너먼트에서 챔피언이 된 적도 있다고 한다. 기타 줄과 낚시 줄의 차이를 눈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나의 무식한 관점에서도 어쩐지 이 둘이 묘한 공통점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는 첼리스트 피아티고라스키로부터 음악의 해석을 배웠고, 세고비아에게 배우기도 했다.


이 곡은 'A Bach celebreation' 에 수록된 곡이다. 다시 옛날 친구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매듭짓자면 그의 아버지는 승려였다. 이상하게 목사의 아들은 이해가 되는데, 승려의 아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던 친구들이 있었다. 같은 크리스트교 아래에서도 가톨릭과 개신교가 있는 것처럼 불교의 여러 종파에서도 결혼을 허용하고 있는 종파가 있는데, '중놈의 자식'이란 상소리가 있는 것처럼 그는 자신에 대해서 아버지의 직업에 대헤서도 콤플렉스가 있었다면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 무렵의 나는 비교적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수녀님 한 분을(혹은 수녀가 되려던 어떤 분) 몹시 사모하고 있었던 탓이었는지 종교인들이 어째서 누군가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되어서는 안 되는지 약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약간이었다.


나는 자신의 부모를 긍정하는 아이들보다는 부정하는 아이들과 늘 더 친했던 것 같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부모를 부정하는 줄 알았다. 그러다 혹여 자신의 부모를 몹시 존경하는 아이들을 만나게 되면 그 아이들의 심성이 어딘가 유치하고 덜 떨어진 탓이라고 종종 혼자 생각하곤 했는데, 나중에는 그것이 내가 문제가 있는 것이란 뜻임을 알았다. 그 친구는 스스로의 부모를 부정하고 싶었던 탓에, 또 그 아이를 그렇게 몰고간 것이야 어디 그 아이 탓만은 아닐 것이다. 주위 시선 역시 곱지 않았으리란 것은 미루어 짐작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니까.... 어쨌든 나는 그 녀석의 기타가 탐이 난 탓에 그 녀석의 집, 그러니까 절집에 자주 들락거렸고, 그런 와중에 녀석의 아버지와도 인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녀석은 자신의 아버지에게도 허리를 깊숙이 기울여 두 손으로 합장하고 인사를 드렸다.


녀석의 인사 하는 방법 한 가지만 보고서도, 나는 더이상 녀석에게 아버지에 대해 깊이 묻는다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상처는 본인이 스스로 치유하기 전까지는 건드리기 어려운 것도 있는 법이니까. 우리는 서로의 상처에 대해 깊이 알게 되는 과정에 이르지 못하고 헤어졌지만(내 인생에 유난히 사단이 많았던 1987년 겨울 명동성당 시위가 실패로 끝나고 도망다닐 때 잠시동안 녀석의 집에 기거한 적이 있었구나) 나는 아직도 그 녀석의 마음을 알 것 같고, 녀석이 계속 기타에 정진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어떤 예술가는 자신을 미워하기 위해 예술을 하지만, 예술을 하면서 끝까지 자신을 미워할 수 있는 예술가도 흔치 않은 법이다. 창작이든 연주든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아픔이지만 동시에 상처를 소독하고 치유하는 일이기도 하기에... 녀석이 자신의 연주를 못마땅해 한 원인, 그가 계속 기타 연주하는 일을 지속시키지 못하고 포기했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가 끝끝내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는지 아니면 그것을 배웠기 때문에 그것을 그만두었는지까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클래식 기타 연주를 들을 때마다 나는 버릇처럼 그 녀석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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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동 - 바람의 소리


부끄럽지만 나는 다룰 줄 아는 악기가 하나도 없다. 노래방에 가도 탬버린으로 리듬 맞추는 일조차 내가 하면 영 흥이 나질 않기 일쑤다. 악기를 배워보고 싶었던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어려서는 주변 여건이 그러했고, 중학교 이후부터는 그것이 내게 사치라는 마음이 나로 하여금 악기 다루는 일에 등한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렇게 철 따라 나이 먹는 것이 일이 되어 나는 그저 듣는 귀동냥이나 열심히 하자는 축이 되었을 뿐 악기는 지금까지 단소 시험에 응하느라 중학교 때 단소를 배워본 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다.

 

요새는 그저 거문고를 다뤄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그것도 욕심일 뿐 실제로 배우기 위해 떨치고 나설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빈말인 셈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거문고냐? 그저 그 소리가 좋을 뿐 다른 의미는 없다. 우리 국악에서 거문고는 기악의 편성상 중요한 악기란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 거문고는 특히 정신을 중히 여기는 우리 음악에서도 더욱 정신세계에 가까이 다가가 있는 악기란 생각이다. 그것은 선비들의 악기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가 거문고를 배우고 싶다는 마음 속에는 그들의 정신세계를 흠모하는 마음이 조금은 들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김영동의 "바람의 소리"를 틀어놓고 앉아있다. 그때의 내 마음은 나도 조금은 바람을 닮았으면 좋겠다는 심정일지도 모르겠다.


그처럼 나도 무위하였으면,
그처럼 나도 무익하였으면,
그처럼 나도 무해하였으면,

하는 바람이 그 안에 조금은 있는 것이 아닌지...


 

 

바람에게 무슨 생각이 있어 불어오고 불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불교에서 말하는 세상사 마음먹기 달렸다는 경구는 이처럼 자연과 세상을 대면한 인간의 깨달음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도시에 살면서 다시 이런 마음을 먹고자 하는 것은 나의 몸과 마음이 그만큼 자연의 소리, 자연의 깨달음과 대면할 겨를이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도가연하는 어설픈 도인들도 싫지만, 자연이 인간에게 내려준 풍부한 자연적 천성을 부인하는 거만한 휴머니스트들도 싫다.

 

디지탈 시대라고 한다. 그 기본이 되는 비트(bit)란 따지고 보면 있고, 없고의 구분이다. 그것은 소유의 이분법이기도 하다. 디지탈 기기들을 눈 앞에 두고 순간 숨막힘을 경험하는 것, 자연이 내게 너무 멀리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자연이란 스스로 그럴듯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존재의 이유를 남에게 물을 필요도 없고, 그것을 다시 자신에게 반문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내가 이 음악을 들으면 저절로 노자연하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동양의 음과 양 혹은 빌공자 하나를 써도 그것이 구분짓고자 하는 것은 있다, 없다의 의미도 옳다 그르다의 의미도 아니란 것이다. 그것은 단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동양적인 사유란 정말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김영동은 이 앨범 <바람의 소리>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바람의 소리'는 우리 음악을 통해 자연의 소리를 표현해 보자는 취지에서 제작된 앨범입니다. 그간 잘 쓰이지 않던 전통악기 훈을 사용해 바람소리를 표현했지요. 훈의 소리는 마치 영혼을 불러들이는 듯 신비롭습니다. 들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머리가 맑아지지요."

 

내가 지닌 능력으로 이 음반이 어떤 음악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말하기엔 역부족이다. 그러나 이 음반이 사람을 편안케 하고, 흙탕 같은 내 머릿속을 맑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설명하는데는 부족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동의 음악은 전통적인 세계를 단 한 번도 벗어난 적 없으나 한 번도 전통 그 자체만을 노래한 적도 없다는 사실을 나는 증거할 수 있다. 듣기에 따라 김영동의 음악은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하다. 이 음반은 듣기 어렵지 않다. 머리 아픈가? 봄꽃이 너무 멀리 있는가? 그렇다면 귀만이라도 자연에 적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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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자클린느 뒤 프레가 세상에 온지도 60년이 넘어 버렸구나. 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올해로 만 60환갑이었을 텐데 불행히도 그녀는 지난 1987년 세상을 떠났다. 나는 87년에 대한 몇 가지 기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상하게 87년은 내게 짙은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지도... 아마 97년의 요맘 때였을 거다. 연립이라기 보다는 다세대에 가까운 곳에 나는 원룸 자취방을 얻어 생활하고 있었다. 7년을 사귀던 여자와 헤어진 남자에게 세상은 220V전기 콘센트에 연결된 110V전구이거나 선풍기이다. 그것은 순간 지독한 빛을 발하거나 맹렬한 속도로 뜨거운 바람을 쏟아내다가 한순간 퍽하고 나가버리고, 매캐한 연기를 내뿜는다.

 

세상이 맹렬하게 빛을 내다가 어느 순간 마치 매트릭스의 그 사내처럼 일순간에 느려진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런 어느날 나는 마음 둘 곳 없어 음악에 정 붙이고, 오디오에 마음을 두었다. 나로서는 처음 누려보는 순전히 나만을 위한 호사였다. 그것은... "모던쇼트 10i 스피커, A1-X 앰프, 인켈 CD-7R"가 내가 장만했던 최초의 오디오였다. 나만을 위한 사치품이었고, 동시에 나에게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 날도 지난 어느 여름밤처럼 비 오기 전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A1-X는 비록 싸구려 입문기였지만 A급 동작으로 유명한 기종이다(A급 동작이란 기술적으로 설명하긴 곤란하지만 하여간 앰프의 발열량이 장난이 아니란 뜻이다). 에어콘을 틀어놓아도 시원치 않은 판에 라디에이터를 틀어논 셈이니 그날 밤 공연히 내 방으로 초대받은 친구들은 얼마나 더웠을까.

 

비가 내리는 어느 깊은 밤, 그날 따라 우리는 아주 외로웠는지도 모른다. 나는 친구들을 내 자취방에 불러모으고 뒤 프레의 첼로협주곡(엘가)을 틀었다. 그리고 친구들과 나는 모두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밖으로는 비가 후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자클린느의 보우잉은 힘차게 현을 긁었다. 연주가 끝나고 친구는 자클린느의 사진이 담긴 CD재킷을 들고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쩐지 이 여자는 일찍 죽을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 친구는 뒤 프레의 음악을 처음 접한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 깃든 그 활달한 미소를 바라보면 어딘지 모르게 요절할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모양이었다.

 

뒤 프레 그의 이름을 들으면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라는 말이 생각난다. 아마도 요절한 천재들에 대한 선입견 탓일 수도 있고, 그녀를 앗아간 ‘다중 경화증’이라는 희귀한 병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 교수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자클린느는 세 살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여러 악기 소리 가운데, 특히 첼로 음을 지적하며 그 소리를 내고 싶다고 졸랐다고 한다. 네 살 때 자기 키보다 큰 첼로를 선물 받고 다섯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첼로를 공부한 그녀는 카잘스와 토르틀리에, 그리고 로스트로포비치에게 사사해 어린 나이에 금세기 첼로계의 모든 흐름을 두루 섭렵할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금세기 최고의 여성 첼리스트로 손꼽히는 그녀가 너무나 일찍 무대를 떠나야 했던 것에 대한 우리들의 아쉬움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연주한 엘가의 첼로 협주곡(바비롤리 경 지휘의 EMI음반)은 아마도 두 번 다시 나오기 힘든 명반 중 하나이다. 다중경화증을 앓으며 그녀가 잃어 버린 것은 첼로 뿐이 아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잃어 버릴 것이 없을 만큼 아무 것도 갖지 못했다. 최후의 비참했던 연주회로부터 시작하여 두 다리, 양팔 그리고 몸 전체의 균형을 잃었고, 사물이 두 개로 보일 지경이어서 책도 읽을 수가 없었다. 전화의 다이얼 돌리는 일도, 돌아눕는 일도 그녀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심지어 1975년 이후로는 눈물을 흘릴 수도 없게 되었다. 남편 바렌보임을 비롯하여 사람들은 바쁘다거나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뒤 프레에게 연락하는 횟수를 줄였고 차츰 아무도 찾지 않게 되었다.뒤 프레는 아무도 없는 밤에는 혼자 절망에 떨며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에게 와달라고 조르곤 했다. 뒤 프레는 병으로 쓰러져 휠체어에 앉아 보내던 시절 이렇게 고백했다.

 

 “첼로는 외로운 악기다. 다른 악기나 지휘자가 있는 오케스트라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첼로로 음악을 완성시키기 위해선 음악적으로 강한 유대를 가진 보조자가 필요하다. 나는 운이 좋아 다니엘을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연주하고 싶었던 곡을 거의 다 음반에 담을 수 있었다.”

 

그의 음반으로는 엘가의 협주곡(EMI)이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며, 코바셰비치와의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EMI)도 수작이다. 그녀의 미소와 그녀의 연주를 들으면 누구라도 자클린느 뒤 프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뒤 프레의 전기 작가 캐롤 이스턴은 읽기도 말하기도 힘들게 된 말년의 뒤 프레는 자신이 연주한 엘가의 협주곡을 틀어놓고 멍하게 있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들을 때마다 몸이 튕겨나가는 기분이 들어요.……눈물 조각처럼" 그러곤 고개를 떨구고서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죠?"

 

사실 그녀의 탄생 60주년을 기념하여 나온 이 음반에 수록된 음원들은 다니엘 바렌보임과 함께 한 것을 제외하곤 이미 모두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나는 자클린느 뒤 프레의 무덤을 한 번도 찾지 않은 다니엘 바렌보임이 미워서 그의 음반은 한 장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음반은 한 장 가지고 있어야 할 듯 싶다. 나를 대신하여 울어준 눈물, 자클린느 뒤 프레를 위하여...

그녀는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죠?"라고 물었다.


나는 그녀의 음악을 들으며 이 세월을 견뎌내고 있다.

* 자클린 뒤 프레에 대해 좀더 자세한 내용은....
http://windshoes.new21.org/classic-dufr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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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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