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책을 쓸 때 바츨라프 스밀의 도움을 약간 받았다. 국내에는 두 권의 책이 출간되어 있는 것으로 아는데 하나는 교양서에 해당하는 "에너지란 무엇인가"(삼천리)이고, 다른 하나는 좀더 심도가 깊은 책인 "새로운 지구를 위한 에너지 디자인 - 에너지.경제.환경의 통합적 전망과 대안"(창비)이란 책이다.

바츨라프 스밀에 대한 소개는 ...




"캐나다 매니토바대학 환경지리학과 교수. 캐나다 왕립과학아카데미 회원. 1943 년 체코에서 태어나 프라하 카를로바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에너지와 환경, 식량, 인구, 경제, 역사, 공공정책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연구와 강의를 해 오고 있으며 유럽연합을 포함한 국제기구의 정책 자문을 맡았다. 2010년 11월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가 발표한 ‘지구적 사상가 100명’에 선정되었다. Energy Myths and Realitie(2010), Why America is Not a New Rome(2010), Energy at the Crossroads(2005, 《새로운 지구를 위한 에너지 디자인》, 창비, 2008), Feeding the World(2000) 등 학술서와 대중교양서 30여 권을 펴냈다."


"에너지란 무엇인가"의 번역자인 윤순진 교수는 이 책을 번역하게 된 계기를 "내가 몸담고 있는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지속가능한 에너지 정책과 계획’이란 과목을 열고 있는데, 학생들 대부분이 에너지란 용어 자체에는 익숙하지만 에너지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하여 보다 총체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고 했는데 여러 곳에서 에너지가 중요하다고 말은 하는데, 실제로 에너지를 아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에너지란 무엇인가"는 에너지에 대한 대중을 위한 교양서라서 그런 점에서 분명 도움이 된다. 다만, 이 책을 뭔가 화끈한 대안이나 세상을 뒤집어 엎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점철된 책이라고 생각해서 펼치는 것은 이 책을 가장 재미없게 읽는 방법이다. 그는 과학자이고, 과학자로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책이 읽을 만한 책이라고 추천하고 싶다. 그렇다고 바츨라프 스밀이 반생태론적인 입장에 서 있는 과학자란 뜻은 아니다. 다만 온도차가 있다는 말이다. 일단 그는 화석연료 자체를 전면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잘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어떤 의미에선 그것이 현실적인 입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바츨라프 스밀은 1970년대 이래 석유시대의 종말과 에너지 위기에 대한 경고가 끊이지 않았지만 그런 비관적인 전망이 반드시 옳은(이건 정치적으로 옳고 그르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망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 세계 유수의 에너지 기관과 각종 연구소들이 가지고 있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정도의 예측모델로는 세계의 1차 에너지 수요 및 가격 등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계량적 예측 혹은 예언은 세계 경제와 각국의 에너지 정책에 혼란과 혼선을 빚었고, 석유시대의 종말론, 에너지 위기 경고는 마치 늑대소년의 이야기처럼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틀린 예측이었을까? 바츨라프 스밀은 큰 틀로 보았을 때는 그런 주장 자체가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극적이라 대중을 손쉽게 경각시킬 수 있는 비관적 전망보다는 좀더 현실적인 에너지 연착륙 정책(소프트랜딩)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바츨라프 스밀은 지구자원의 본질적인 불가지성, 에너지 문제와 긴밀히 결부된 정치, 경제, 국제안보의 불확실성을 인식하고, 단지 (화석)에너지가 얼마나 남았는지 맞히는 예측게임 같은 방식에서 벗어나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존엄과 적절한 삶의 질의 유지, 생물권의 대체 불가능한 통합성의 보전을 목표로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예방하고 그 영향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예측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에 출판된 시기를 보면 창비에서 나온 "새로운 지구를 위한 에너지 디자인"이 조금 더 빠르지만 에너지 문제에 대해 관심은 있지만 초심자라면 "에너지란 무엇인가"로 시작해서 "새로운 지구를 위한 에너지 디자인"으로 넘어가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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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가난 - E. F. 슈마허 외 지음 | 골디언 밴던브뤼크 엮음 | 이덕임 옮김 | 그물코(2010)



환경과 생태를 전문분야로 하고 있는 그물코에서 지난 2003년에 펴냈던 책 『자발적 가난-덜 풍요로운 사람이 주는 더 큰 행복』을 재출간했다. 내가 알기로는 이번이 세 번째 개정판 같은데, 흔히 소개되고 있는 것처럼 생태학의 태두라 할 수 있는 E.F.슈마허(Ernst Friedrich Schumacher) 한 사람만의 글로 채워져 있지는 않다. 

 

『자발적 가난』은 골디언 밴던브뤼크가 편집한 것으로 “Less is more(결핍이 오히려 많은 것이다)”라는(본문에서는 “적은 것이 오히려 많다”고 번역하고 있지만)라는 슈마허의 생태적인 명제(?)를 중심으로 많은 이들의 - J.K.갤브레이스, 이반 일리히 같이 잘 알려진 인물들을 비롯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는 사람들을 두루 포함한 - 말들을 엮어놓은 책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연말이면 누구나 하나쯤 얻어가질 수 있는 - 명언이 수록된 - 공짜 다이어리는 아니지만, 길게 리뷰를 늘어놓을 성질의 책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결론도 간단히 말하고자 한다. 이 책을 이번 설 연휴 때 한 번쯤 읽어봄직한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연자주색과 연분홍색이 어우러진, 에어컨과 파워 핸들과 파워 브레이크가 달린 자동차를 타고 그 가족은 나쁜 도로를 따라 쓰레기와 좀먹은 빌딩으로 추레한 모습을 한 도시를 지나 야유회를 간다. 그들은 곧 상업적인 건축물 때문에 거의 제 모습을 잃은 시골길을 지나친다. 그들은 오염된 시냇물에 담가 두었던 휴대용 아이스박스를 꺼내어 그 속에 담긴 포장 음식을 먹으며 소풍을 하고 밤을 보내기 위해 공중건강과 도덕에 위협적인 공원으로 간다.
썩어가는 폐물들의 악취 속에서 나일론 텐트를 치고 매트리스에서 졸기 직전에, 그들은 희미하게나마 이 신기한, 들쭉날쭉한 축복을 반성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정말로 현대적 정신인가? -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본문 204쪽>


 

제논은 그가 가진 유일한 배가 화물과 함께 바다 한가운데서 침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말했다.
“운명이요, 나에게 자비를 베푸는구나. 넝마 조각으로 된 옷과 철학자의 삶을 살도록 하는구나.”
그는 편히 쉴 수 있었고, 방해받지 않고 산책하고, 읽고 잘 수 있었으며 디오게네스처럼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필리포스 왕이 허락할 때만 먹을 수 있었다. 디오게네스는 아무 때나 자기가 원할 때 먹을 수 있었다.” - 플루타르크 <본문 101-102쪽>


모두가 아리스토텔레스를 꿈꾸는 시대, 잠시동안만이라도 디오게네스가 되어보면 안될까? 끝으로 한 마디 더 하자면 『자발적 가난』의 서문은 E.F.슈마허가 썼는데, 이 책을 받자마자 앉은 자리에서 그의 글을 읽고 난 뒤 전문(全文)을 타이핑으로 고스란히 옮길 만큼 아주 좋았다. 이 역시 맛보기로 일부만 소개해본다.

 

그러므로 생존을 위해선 직선 논리가 필요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것과 대비되는 논리인 곡선 논리는 삶을 가치있게 만든다.
‘적음이 곧 많음’이라는 말은 오직 곡선논리로써만 이해가능하다.

삶에 있어서 곡선 논리의 발견보다 더 즐거운 발견은 없다. 적음이 많음이라는 논리는 당신을 해방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더 적게 요구할수록 걱정할 필요도 적어진다. 그리고 더 적게 염려할수록 당신을 둘러싼 온갖 관계들도 더 나아질 가능성이 높다. 당신은 쥐들의 경주에 끼어들 필요가 없다. 경제적으로 대단히 성공할 필요도 없다. 설사 담배에 붙는 세금이 오르더라도 당신이 담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걱정할 게 뭐가 있는가?

지구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단순한 것,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단순한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 다른 사람이 네게 해주길 바라는 것을 그들을 위해 행하라.
●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 모든 것을 시험해보고 좋은 것을 꼭 붙들어라.

왜 이 말들처럼 한 번에 핵심에 이르지 않고 변죽만 울리는가? ‘이것’이 바로 삶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많은 게 더 많다’는 논리는 우리가 진실에 이르는 것을 방해한다. <본문 10~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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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아  :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 - 제임스 러브록 | 홍욱희 옮김 | 갈라파고스(2004)


신화가 죽은 것을 산 것과 동일시한다면 계몽은 산 것을 죽은 것과 동일시한다. - T.W. 아도르노


세상 모든 믿음의 시작은 자연을 섬기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한정된 수명을 지닌 인간은 끊임없이 순환하며, 사라지는가 하면 다시 나타나고, 죽었는가 하면 되살아나는 힘을 지닌 자연의 놀라운 생명력에 경외심을 품었다. 인간의 신화적 상상력은 지구가 하나의 거대한 신이란 생각에 이르렀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화 속에서 ‘대지의 여신'을 일컬어 대지모신(大地母神), 즉
“가이아(Gaia)”라고 불렀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은 인간의 엄지손가락이 지닌 복잡한 기능만 보더라도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있다고 말했는데, 만약 그가 불안정한 지구의 대기가 이루고 있는 절묘한 균형과 유지방법을 알았다면 그는 지구 자체를 하나의 신이라 불렀을지도 모른다.

“가이아 이론”이란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은 1978년 「지구상의 생명을 보는 새로운 관점(A New Look at Life on Earth)」이란 책(『가이아 -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을 통해 주장한 하나의 새로운 과학적 가설이다. 러브록의 가설에서 ‘가이아’란 지구와 지구에 살고 있는 생물, 대기권, 토양, 대양까지를 포함하는 하나의 범지구적 실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대지모신의 이름을 빌어 사용한 말이다. 그에 따르면 지구는 생물과 무생물이 상호 작용하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임을 강조한다. 가이아 이론이 처음 등장했을 때 많은 과학자들은 ‘가이아’라는 이름 때문에 지구를 하나의 인격체로 취급한다는 오해를 했다(러브록은 도리어 그 반대의 측면에서 지나친 환경주의를 경계하며, 철저히 과학적으로 사고하고자 노력한 과학자였고, 과학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그의 이론을 과학을 빙자한 유사과학으로 취급하고,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자 했으나 지구 온난화 현상 등 지구의 환경 생태 문제와 관련해 가이아 이론은 더욱 큰 힘을 얻고 있다.


▶ 제임스 러브록 박사


제임스 러브록은 1950년대 후반 전자포획기라는 새로운 물질 분석장치를 발명해 과학자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전자포획기를 이용하면 지구상의 어느 곳이라도 대기에 섞여있는 미세한 원소를 분석해낼 수 있었다. 미 항공우주국(NASA)은 러브록에게 화성탐사우주선 바이킹호에 탑재할 생명체 탐지장치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러브록은 화성의 대기를 분석한 결과
“화성에 생명이 존재하는지 알고 싶다면 굳이 탐사선을 보낼 필요가 없어요. 여기서도 알 수 있지요. 화성은 광물처럼 완전히 죽은 존재”라고 단언했다. 러브록이 이렇게 단언할 수 있었던 것은 화성의 대기를 분석한 결과(화성을 비롯한 천체들은 빛의 스펙트럼 분석을 통해 화학적 조성을 알 수 있다)였다. 분석 결과 화성의 대기는 대부분 이산화탄소로 구성되어 있고 산소는 거의 없었다. 무수한 생명체가 살아가고 있는 지구의 대기에 산소는 21%나 되었고, 이산화탄소는 1% 미만이었다.

생명체가 호흡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산소는 실제로는 매우 불안정한 기체로 다른 물질들과 반응성이 크고, 잠재적인 폭발성까지 가지고 있다. 산소에 의한 산화작용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세포를 늙게 만들고, 불이 계속 타오르도록 하며, 쇠를 녹슬게 만든다. 호흡도 녹이 스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느리게 진행되는 연소현상(산화작용)이다. 즉 인간의 호흡은 자신도 모르게 불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구상에 산소가 생겨난 이래 그토록 오랫동안 갖가지 산화작용, 연소 반응들이 진행되어 왔다면 마땅히 지구상의 대기 속의 산소 역시 닳아 없어졌어야 할 것이다. 지구상의 생명체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산소나 암모니아와 같은 공기 중의 기체들은 언제나 적당한 수준으로 유지되어야 하고 만약 이런 수준에서 약간만 벗어나더라도 생물들에겐 치명적인 결과를 빚을 수 있다. 그런데 무엇이 지구의 산소 농도를 수억 년이 넘도록 일정하게 유지시켜 왔는가?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들이 이루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생물권(biosphere)이 지구의 다른 부분들과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절묘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가이아 이론의 핵심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외부 환경으로부터 자유 에너지를 섭취하여 자기 생존에 맞게 조절하는 능력(자기조절능력)을 지녔고, 살아있는 지구는 지구의 생물권, 대기권, 대양 그리고 토양까지를 포함하는 하나의 복합적인 실체이며, 가이아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을 위하여 스스로 적당한 물리적·화학적 환경을 조성(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피드백 장치나 사이버네틱 시스템(cybernetic system)을 구성한 총합체”라는 것이다. 그 결과 러브록은 지구를 생물과 무생물이 상호 작용하는 생물체로 설정한 가이아 이론, 지구가 생물에 의해 조절되는 하나의 유기체라는 가설을 펼쳤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단순히 주위 환경에 적응해 간신히 생존하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지구의 물리 ․ 화학적 환경에 영향을 주는 능동적인 존재로 규정한 가설을 담은 것이 이 책 『가이아 -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이다.

가이아 이론의 핵심인 자기조절능력은 인간의 체온(36.5℃)이 주변 환경의 변화나 급격한 열량 소모 등으로 체온이 급격히 오르거나 내려갈 수도 있지만 신체대사를 조절하는 기능을 통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자신의 체온을 조절하는 것처럼 지구 역시, 아니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협력하고 공존하는 방식으로 지구의 산소량과 대기의 온도를 유지해왔다는 것이다. 그것은 러브록이 지구의 모든 것(지구의 생물권, 대기권, 대양 그리고 토양 등)을 이르는 복합적인 실체로서의 지구를 은유적으로 가이아라고 표현한 데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결과다. 지금까지 우리가 발견한 은하계의 어떤 행성도 지구처럼 생물권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행동하며,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낸 곳은 없다. 어떤 행성도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 의해 조절되는 절묘한 환경조절 메커니즘, 사이버네틱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은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를 죽은 것으로 간주해 이용과 정복의 대상으로만 취급해 왔다.




그 결과 지구는 점점 자기조절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인류는 가이아의 파트너이자, 가이아의 일원 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자기들의 농장으로 간주해왔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지구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바라보는 일은 칼 G 융이 주장하는 인간 영성의 회복으로 나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러브록은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우리에게 말한다.

대부분 정치가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성장과 교역증대이며 환경문제는 기술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이런 사람들의 일반적인 낙관론은 내게 2차 세계대전 직전의 런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그 당시 나는 독일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어느 한 방공호 속의 공기의 적합성 여부를 평가하는 일에 종사했다. 그 방공호는 템스강을 따라 진흙탕 속에 조성된 과거의 하수관 시설이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나는 좀도둑들이 그 폐기된 하수관의 접속 철판 부분에 조여진 볼트를 풀어 훔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만약 그 풀어진 이음새 사이로 강물이 침범하게 된다면 순식간에 온 터널이 물바다가 될 판이었다. 하지만 그 터널을 방공호로 이용하는 지역 주민들은 자신들이 진흙탕 속에 묻혀버릴 수도 있다는 위험가능성에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그들은 공습 경보와 폭탄의 폭발음에 더 놀라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게는 그 방공호 속이 훨씬 더 위험해 보였다. 어떤 점에서는 현재의 우리도 역시 그 방공호 속의 런던 시민들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여전히 하수관의 이음매 볼트를 빼내어 팔아먹고 있으면서도 지금 당장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는 것에 만족하여 정작 우리가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본문 29~30쪽>

러브록은 우리가 부주의하여 고래를 멸종으로 이끌면 그것은 분명 일종의 종족학살(genocide)이며, 또한 게으르고 완고한 국가관료주의에 빠진 결과라고 경고하면서 마르크스주의자나 자본주의자를 막론하고 인류는 이 같은 범죄의 심각성을 깨우치지 못했다고 말한다. 한나 아렌트는 “더불어 사는 사람들을 세상과 자연, 우주에 대해 함께 기뻐할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여길 때 비로소 우리의 인간성이 유지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수정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세상과 자연, 우주가 우리와 함께 살아있는 존재라고 여길 때 비로소 우리의 인간성도 유지될 수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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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과학기술과 인간해방
조홍섭 옮겨엮음 / 한길사 / 1984년 1월



조홍섭 선생이 옮기고 엮은 이 책 "현대의 과학기술과 인간해방"은 지금의 세태로 보면 다소 촌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는 "민중을 위한 과학기술론"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 이 책이 처음 나온 것이 지난 1984년의 일임을 상기해보면 촌스럽다고 탓할 일은 아니다. 이전에도 첨단을 달리는 과학기술에 대한 시민사회적 접근이 필요하단 생각을 계속 해왔으나 최근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소동을 겪으며 과학기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탓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부터 이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내 아는 어떤 이는 황우석 박사 덕분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온국민들이 오랫동안 손놓아왔던 생물 공부는 이참에 충분하게 했으니 그것만은 황우석 박사의 공적이 크다고 할 수 있다며 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책은 현재로서는 절판된 책이라 구하기가 쉽지 않은데, 나 역시 이 책을 헌책방에서 우연히 구하게 되었다. 아마 황우석 박사 사건이 없었다면 이 책과 내가 만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니 나역시 그의 덕을 입긴 입은 셈이다. 이 책을 구입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노동사회"에서 "문화사회"로의 전환이라는 문화사회론을 주장하여 문화연구자들과 생태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비교적 잘 알려진 "앙드레 고르"의 글 "에콜로지스트 선언"이 "미셸 보스케"란 이름(필명)으로 이 책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이 책에는 힐러리 로즈, 스티븐 로즈의 "과학의 중립성에 관한 신화"란 글도 수록되어 있다.

이책의 편역자인 조홍섭 선생 자신도 우리 사회에서 과학분야 전문 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해 왔으며 환경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필자들 중 한 명이다. <과학동아>로부터 <한겨레> 생활과학부 기자, 부장으로 오랫동안 환경과 과학분야를 취재하고 보도해왔고, 2005년 현재 환경기자클럽 회장, 한국과학기술학회 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그가 지은 책 가운데 <이곳만은 지키자> 등은 나도 읽어 보았고, 가지고 있는 책 중 하나였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 저명한 순수과학자 47명으로 구성된 미국의 제이슨 연구단은 '이글루 화이트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3년 동안 3억 달러를 들여 진행된 이 사업의 주요 내용은, 고속의 비행기를 이용하여 호지명 루트 위에 고성능의 음향탐지기와 지진탐지기를 배치하는 것이었다. 열대식물로 위장된 안테나를 제외하고는 땅에 묻힌 이 정교한 탐지기는 미세한 진동과 소리를 탐지하여 정찰기로 송신하고, 이것은 다시 타일랜드에 있는 컴퓨터 센터에 전송되어 B52 폭격기의 출격으로 연결된다. 이 계획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미국은 지상에 단 한 명의 군인도 출동시키지 않고서도 남하하는 병력의 80%(대략 1만 2천 대의 트럭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북베트남군)를 섬멸할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어렸을 적 우리들은 대개 한 번쯤 과학자를 꿈꾼다. 대중문화를 통해 표상되는 과학자들은 대개 정의로운 인물들이거나 비록 현재는 매드 사이언티스트라 할지라도 나름대로는 과학을 통해 인류 문명의 증진을 위해 노력해온 인물들로 그려진다. 우리는 그런 과정을 거치며 과학자에 대한 꿈, 로봇 공학자, 유전 공학자의 꿈을 꾸어왔다. 또한 과학계에 종사하는 이들은 "오랫동안 과학이 순수하게 그 자체를 위해서만 추구되는, 실제로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이상적 상태"를 꿈꾸고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학은 결혼이나 가족, 사랑이 그러하듯 한 번도 순수해본 적이 없으며 고도의 정치성을 띠고 있는 행위였음을, 과학의 역사가 잘 증명하고 있다.

훼엘에 의해 1840년 처음으로 과학자(scientist)란 말이 등장한 이래 과학자들은 의사와 마찬가지로 점점 전문화된 직업으로 분화되어 왔으며, "인간을 위한 지식에 지나침이란 있을 수 없다", 과학은 "신의 위대한 영광과 인류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며 찬미되거나 혹은 관념론에 기초한 수구세력들에게는 위협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과학과 지식이 보편적으로 확산되면 이 세계에서 가장 잘 구성된 정부라도 곧 전복될 것"이라는 영국과학진흥협회의 논쟁은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일어난 노동자계급의 과학교육을 위한 운동, 과학적 사고가 갖는 혁명적 잠재력에 대한 체제측의 공포와 자본주의  사회가 보다 숙련된 노동자를 요구한다는 깨달음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을 반영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그의 자본론 중 한 권을 찰스 다윈에게 기증하려 했으나 다윈이 이를 정중히 거절했던 일화는 사회주의가 과학을 그들의 편으로 간주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순수과학은 이렇듯 우파에게도 좌파로부터도 동시에 이데올로기적인 포섭과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과학이 국가기구 내로 포섭되기 전에 일어난 막간극에 불과하다.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과학은 더이상 순수한 민간 차원의 연구로 머물 수 없게 되었고, 과학은 정부로부터 급료를 지급받게 되었다. 그 연구들의 대부분은 전쟁(혹은 국가방위)에 대한 급료였다. 앙드레 고르는 솔직하게 말하자면서 과학자들은 프롤레타리아이면서도 "과학을 공부하게 되면 흥미롭고, 높은 급료를 받으며, 안전하고 존경받는 지위를 얻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대부분은 내재적으로 과학에 대해 엘리트 의식 - 지식을 가진 사람은 소수이고 소수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의식 - 을 가졌거나 아직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과학은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종의 우월한 전문지식이라는 것이고, 지배 계급의 아카데미 문화 속에서 체계화되고, 통합될 수 있는 지식만을 '과학'의 이름으로 인정하려 든다. 예를 들어 아카데미 속에서 습득한 의학 지식만이 과학적이고, 전래의 전통적인 의학은  비과학적인 사이비 과학으로 치부하려 드는 경향이 그것이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과학은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를 습득하고, 우리들은 교육을 통해 과학에 대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게 된다.

또한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 생산 관계에 통합될 수 없고, 자본주의를 위해 아무런 쓸모도, 가치도 없는 따라서 교육제도 안에서 가르치지 않는 기법(혹은 지식)에 대해서는 '과학', '과학적'이라는 칭호를 수여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학교 교육의 정규과정을 통하여 전달되고 학교에서 수여하는 졸업장으로 인정받는 개념과 기법만으로 과학적이라 부르고 스스로 터득한 지식은 아무리 효율적이라 하더라도 지배적 문화의 틀 속에서는 인정받지 못한다. 자본주의제 성장에 기여한 프로테스탄트적 금욕적 윤리의식은 과학자로 하여금 자본주의적 사업가처럼 금욕적이며 무감각하고, 따라서 '비인간적'(이 말을 오해하지 마시라)이어야 하며, 그래야만 과학적인 사고를, 합리적인 사고를 지닌 과학자일 수 있다는 의식을 만들어냈다. 자본주의는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그러하듯 이론과 실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전문가와 대중 사이에 전례없이 먼 격차를 만들어냈다.

오늘날 황우석 박사 사건 혹은 우리 사회의 전 분야가 그러하지만 특히 과학 분야에서 촉발된 이 사태의 책임(당장은 논문조작 사건만을)을 황우석 박사 일개인에게 묻는 것은 편리한 책임회피의 방식이다. 우리 사회는 당장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생산성을 향상하는 기술, 차세대 국가경제 성장의 동력으로서의 과학, 유전공학을 지목했고, 젊은 순수과학도들에게 지급되었어야 할 연구비까지 차용해 특정 과학 분야에 지원하는 경박함을 보였다. 무엇보다 진리를 추구해야 할 과학적 성과에 대해, 진실 규명보다 국익이 앞선다는 명분으로 온 사회가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작금의 상황을 놓고도 우리는 그 근본적인 대책과 반성에 앞서 여전히 내 탓 네 탓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책의 속표지에 누군가 이렇게 적어놓았다. "오늘 햇빛 이렇게 화사한 마을/ 빵 한 조각을 먹는다/ 아 부끄러워라/ 나는 왜 사나/ 벚꽃 - 이외수" 이 책을 처음 구입한 사람은 무슨 마음이 들어 저렇게 적어놓았을까. 이 책을 읽으며 나 역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라도 헌 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하시거든 조금의 주저도 하지 말고 집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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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다시 태양의 시대로/ 이필렬 지음 / 양문 / 2004년 7월

"푸른 바다 저 멀리, 새 희망이 넘실거린다~"라는 노래가 흘러나오면 지금도 저절로 기분이 흥겨워진다. 지난 1982년 12월부터 매주 화요일마다 방송되었던 "미래소년 코난". 이 작품은 잘 알려진 대로 알렉산더 케이의 "남겨진 사람들(The Incredible Tide)"이란 작품을 원작으로 한 TV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작품에서 세기말적인 상상력을 발휘해 화석 에너지가 고갈된 미래의 지구를 그려내고 있다. 물론 작품 속에서 미래의 인류가 에너지 고갈 상태에 빠지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제3차 세계대전 때문인 듯 보이지만 그 3차 세계대전의 원인은 아마 화석 에너지인 석유를 누가 지배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 전쟁이었을 거다. 이라크 전쟁의 원인에 대해 이런저런 명분을 가져다 붙이지만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이 전쟁의 궁극적인 원인으로 석유를 지목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지난 150년간 그리고 이필렬 교수에 따르면 향후 50년간 인류사에 있어 보기드문 제2의 화석시대를 살고 있다. 백악기와 쥐라기의 공룡, 거대 양치 식물들이 만들어 논 화석연료를 불태우며 만든 화석 문명 시대 말이다. 사실 석유시대의 종말을 예언하고 다른 대안을 모색하자는 주장을 펼친 책이 "다시 태양의 시대로" 하나만은 아니다. 이 책의 저자 이필렬 교수는 지난 2002년에도 "석유시대, 언제까지 갈 것인가"란 책을 낸 적이 있는데, "다시 태양의 시대로"에서 담고 있는 주장,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그때(불과 2년 사이에 이 분야에 경천동지할 무슨 일이 벌어진 건 아닐 테니)도 했었다. 그런 점에서 "다시 태양의 시대로"는 "석유시대, 언제까지 갈 것인가"의 자매품이라 할 수 있는데, 두 책이 차이가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석유시대, 언제까지 갈 것인가"가 특별히 어렵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환경에 대한 우리 사회 일반의 인식이 비교적 낮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약간의 난이도가 있는 편이라면, "다시 태양의 시대로"는 이 방면에 대해 사전지식이 거의 없는 이들도 손쉽게 읽을 수 있는 난이도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미래 소년 코난"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물론 인류가 화석에너지를 연료원으로 삼기 이전에도 인류는 문명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자연을 개조하고, 극복하려는 시도를 해왔고, 일부분 성공했다. 그러므로 석유 자원이 고갈된다면 다시 범선을 타고 다니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하이하바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의 욕망,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끝도 없는 욕망의 부추김을 통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절제의 미덕은 환경에너지의 개발이란 주장 만큼이나 밑도 끝도 없는 도덕론자들의 주장으로 폄하되기 일쑤다. 인간의 소비는 극적인 파탄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이필렬 교수 이하 현대문명비평가들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세기말은 20세기가 아니라 21세기에 비로소 시작될 가능성이 크다.

19세기 말부터 2003년까지 생산된 석유의 양은 모두 1조 배럴 가까이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매장량이 2조 1000억 배럴이므로 2003년 현재 매장되어 있는 석유의 양은 1조 1000억 배럴쯤 된다. 거의 절반 가까운 양을 퍼낸 셈이니, 인류는 석유 생산이 최대값에 도달하는 시점, 그리고 동시에 석유 생산이 줄어드는 시점에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이다. 석유 자원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계산에 따르면 이 시점은 2010년 즈음에 닥칠 것이라고 한다. 그 자음부터는 석유 생산량이 매년 2-3퍼센트씩 감소할 것이라고 한다.
<본문 18쪽>


어떤 이들은 그러므로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에선 원자력 발전을 많이 해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과연 그럴 듯한 말이다. 고갈된 운명을 피할 수 없는 데다가 지난 1970-80년대 버블경제의 덕으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한 일본조차 다국적 석유기업 가운데 속하려는 시도가 실패할 만큼 완고한 국제 석유 자본의 장벽을 뚫을 수도 없고, 현실적으로 그런 국력을 가질 수 없는 우리 현실에서 원자력은 가장 적절한 대안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필렬 교수는 이것도 부질없는 시도라고 말한다,

현재 전세계에는 430여개의 원자로가 있다. 여기에서 현재 연료로 사용될 수 있는 우라늄은 50년이 지나기 전에 고갈된다. 원자로가 1000개로 늘어나면 원자력의 사용연한도 반비례해서 줄어든다. 20여 년으로 줄어드는 것이다.거기에다 원자력 발전은 위험한 방사능을 내뿜는 폐기물까지 내놓는다.
<본문 39쪽>


그렇다면 원자력도 대안이 될 수 없다. 이필렬 교수는 그 대안으로 무엇을 주장하고 싶은 걸까? 이미 책 제목에도 드러나 있는 것처럼 그는 '태양에너지'를 주장한다.

태양에서 1년 동안 지구로 오는 에너지는 인류가 1년간 사용하는 에너지의 1만 5000배나 된다. 사하라 사막에는 햇빛이 아주 강하게 내리쬔다. 1년 동안 내려오는 햇빛이 제곱미터당 2100kWh에 달한다. 사하라 사막 4만 제곱킬로미터, 그러니까 가로, 세로 각각 200km(남한의 절반 정도의 면적)에 1년간 비치는 햇빛에 담겨 있는 에너지는 전세계 인류가 1년 동안 사용하는 에너지와 같다. 거기에 들어오는 햇빛의 10퍼센트만을 전기나 열로 바꾸어 쓰면 면적은 가로, 세로 각각 700km가 된다, 재생 가능 에너지원이 충분하다는 것은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본문 41-42쪽>


중국도, 러시아도, 일본도 그리고 우리 한국도 미국의 이라크 전쟁이 잘못된 전쟁이란 사실은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나라들이 군소리없이 있는 까닭은 석유 때문이다. 미국에 밉보이면 향후 석유 자원 수급에 막대한 차질을 빚을 수 있고, 석유 자원 수급에 차질을 빚는다는 건 정권 안보 차원이 아닌 국가 안보 차원에서 심대한 타격을 빚는다. 게다가 우리나라가 현재처럼 에너지를 사용한다면 앞으로 15년 후엔 세계 최고의 에너지 소비국인 미국처럼 될 것이란 사실은 불문가지다. 미국은 전세계 가솔린 소모양의 42%를 차지한다.

이필렬 교수는 이 대목에서 매우 재미있는 주장을 하는데,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때 독일이 끝까지 반대할 수 있었던 현실적인 힘은 독일의 주요 석유 수입원이 중동이 아니라 러시아나 북해 유전이기 때문이며, 독일이 석유로부터 자립해나가기 위한 장기 계획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란 거다. 그러면서 "한국도 에너지 고갈과 기후변화로부터 벗어나려면 두말할 필요 없이 덴마크나 독일처럼 재생가능 에너지로 넘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는 이런 에너지 전환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두려워한다. 아니, 그보다는 "지금까지처럼 석유와 원자력을 계속 사용했으면 하고 생각하고,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그러면서 이필렬 교수는 다시 한 번 미국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미국은 이 길을 택한 것 같다. 우선 미국은 기후변화를 역제하기 위한 교토 협약에서 탈퇴했다. 이 조처는 화석에너지 이용을 줄이지 않겠다는 뜻으로 계속해서 석유 의존을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라크를 침공해서 석유를 확보함으로써 (완전히 성공할지는 두고 보아야겠지만) 수십 년은 에너지 걱정을 안 해도 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한국도 이라크 파병을 결정함으로써 미국을 따라가고 있다."고 말이다. 이 부분이 꼭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약간의 보충이 필요할 듯 싶다. 우선 이 글의 문맥만 살펴보면 미국이 교토 협약을 탈퇴한 것이 화석에너지 사용을 줄이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은 맞다. 그러나 미국이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석유에 대한 의존도를 확대해가겠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다. 미국이 실제로 교토 협약을 탈퇴한 것은 화석 에너지 소모를 줄이지 않겠다는 뜻이긴 하지만, 교초 협약에 가입하지 않은 미국조차 대안 에너지 개발 문제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감소시키기 위한 용도의 예산 확보와 지출면에서는 다른 나라들에 결코 뒤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미국은 현재 화석 연료에 대한 주도권을 계속 장악한 채로 대안 에너지 분야에서도 지속적으로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것이다. 미국이 어떤 나라인데, 21세기에 대한 계획이 없겠는가? 이럴 경우 문제가 되는 나라는 한국이다. 우리가 지금처럼 살아가는 동안에도 다른 선진국들은 21세기 대안 에너지 기술과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경쟁과 국익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이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뒤처지는 걸 원하지 않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런 점에 대해서는 눈감고 있지만 말이다. 이필렬 교수와 같은 이들이 환경적인 대안 에너지를 주장한다고 해서, 그가  "하이하바" 같은 원시적인 풍력 사회를 주장한다고 짐작한다면 그것은 대단한 오해이다. 이필렬 교수가 주장하는 대안에너지는 바로 현재의 물질문명이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고스란히 유지하면서도 화석 에너지가 고갈되었을 때를 대비한 과학 기술의 축적에 의한 대안을 모색하자는 주장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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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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