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양의 시대로/ 이필렬 지음 / 양문 / 2004년 7월

"푸른 바다 저 멀리, 새 희망이 넘실거린다~"라는 노래가 흘러나오면 지금도 저절로 기분이 흥겨워진다. 지난 1982년 12월부터 매주 화요일마다 방송되었던 "미래소년 코난". 이 작품은 잘 알려진 대로 알렉산더 케이의 "남겨진 사람들(The Incredible Tide)"이란 작품을 원작으로 한 TV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작품에서 세기말적인 상상력을 발휘해 화석 에너지가 고갈된 미래의 지구를 그려내고 있다. 물론 작품 속에서 미래의 인류가 에너지 고갈 상태에 빠지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제3차 세계대전 때문인 듯 보이지만 그 3차 세계대전의 원인은 아마 화석 에너지인 석유를 누가 지배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 전쟁이었을 거다. 이라크 전쟁의 원인에 대해 이런저런 명분을 가져다 붙이지만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이 전쟁의 궁극적인 원인으로 석유를 지목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지난 150년간 그리고 이필렬 교수에 따르면 향후 50년간 인류사에 있어 보기드문 제2의 화석시대를 살고 있다. 백악기와 쥐라기의 공룡, 거대 양치 식물들이 만들어 논 화석연료를 불태우며 만든 화석 문명 시대 말이다. 사실 석유시대의 종말을 예언하고 다른 대안을 모색하자는 주장을 펼친 책이 "다시 태양의 시대로" 하나만은 아니다. 이 책의 저자 이필렬 교수는 지난 2002년에도 "석유시대, 언제까지 갈 것인가"란 책을 낸 적이 있는데, "다시 태양의 시대로"에서 담고 있는 주장,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그때(불과 2년 사이에 이 분야에 경천동지할 무슨 일이 벌어진 건 아닐 테니)도 했었다. 그런 점에서 "다시 태양의 시대로"는 "석유시대, 언제까지 갈 것인가"의 자매품이라 할 수 있는데, 두 책이 차이가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석유시대, 언제까지 갈 것인가"가 특별히 어렵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환경에 대한 우리 사회 일반의 인식이 비교적 낮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약간의 난이도가 있는 편이라면, "다시 태양의 시대로"는 이 방면에 대해 사전지식이 거의 없는 이들도 손쉽게 읽을 수 있는 난이도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미래 소년 코난"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물론 인류가 화석에너지를 연료원으로 삼기 이전에도 인류는 문명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자연을 개조하고, 극복하려는 시도를 해왔고, 일부분 성공했다. 그러므로 석유 자원이 고갈된다면 다시 범선을 타고 다니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하이하바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의 욕망,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끝도 없는 욕망의 부추김을 통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절제의 미덕은 환경에너지의 개발이란 주장 만큼이나 밑도 끝도 없는 도덕론자들의 주장으로 폄하되기 일쑤다. 인간의 소비는 극적인 파탄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이필렬 교수 이하 현대문명비평가들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세기말은 20세기가 아니라 21세기에 비로소 시작될 가능성이 크다.

19세기 말부터 2003년까지 생산된 석유의 양은 모두 1조 배럴 가까이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매장량이 2조 1000억 배럴이므로 2003년 현재 매장되어 있는 석유의 양은 1조 1000억 배럴쯤 된다. 거의 절반 가까운 양을 퍼낸 셈이니, 인류는 석유 생산이 최대값에 도달하는 시점, 그리고 동시에 석유 생산이 줄어드는 시점에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이다. 석유 자원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계산에 따르면 이 시점은 2010년 즈음에 닥칠 것이라고 한다. 그 자음부터는 석유 생산량이 매년 2-3퍼센트씩 감소할 것이라고 한다.
<본문 18쪽>


어떤 이들은 그러므로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에선 원자력 발전을 많이 해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과연 그럴 듯한 말이다. 고갈된 운명을 피할 수 없는 데다가 지난 1970-80년대 버블경제의 덕으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한 일본조차 다국적 석유기업 가운데 속하려는 시도가 실패할 만큼 완고한 국제 석유 자본의 장벽을 뚫을 수도 없고, 현실적으로 그런 국력을 가질 수 없는 우리 현실에서 원자력은 가장 적절한 대안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필렬 교수는 이것도 부질없는 시도라고 말한다,

현재 전세계에는 430여개의 원자로가 있다. 여기에서 현재 연료로 사용될 수 있는 우라늄은 50년이 지나기 전에 고갈된다. 원자로가 1000개로 늘어나면 원자력의 사용연한도 반비례해서 줄어든다. 20여 년으로 줄어드는 것이다.거기에다 원자력 발전은 위험한 방사능을 내뿜는 폐기물까지 내놓는다.
<본문 39쪽>


그렇다면 원자력도 대안이 될 수 없다. 이필렬 교수는 그 대안으로 무엇을 주장하고 싶은 걸까? 이미 책 제목에도 드러나 있는 것처럼 그는 '태양에너지'를 주장한다.

태양에서 1년 동안 지구로 오는 에너지는 인류가 1년간 사용하는 에너지의 1만 5000배나 된다. 사하라 사막에는 햇빛이 아주 강하게 내리쬔다. 1년 동안 내려오는 햇빛이 제곱미터당 2100kWh에 달한다. 사하라 사막 4만 제곱킬로미터, 그러니까 가로, 세로 각각 200km(남한의 절반 정도의 면적)에 1년간 비치는 햇빛에 담겨 있는 에너지는 전세계 인류가 1년 동안 사용하는 에너지와 같다. 거기에 들어오는 햇빛의 10퍼센트만을 전기나 열로 바꾸어 쓰면 면적은 가로, 세로 각각 700km가 된다, 재생 가능 에너지원이 충분하다는 것은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본문 41-42쪽>


중국도, 러시아도, 일본도 그리고 우리 한국도 미국의 이라크 전쟁이 잘못된 전쟁이란 사실은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나라들이 군소리없이 있는 까닭은 석유 때문이다. 미국에 밉보이면 향후 석유 자원 수급에 막대한 차질을 빚을 수 있고, 석유 자원 수급에 차질을 빚는다는 건 정권 안보 차원이 아닌 국가 안보 차원에서 심대한 타격을 빚는다. 게다가 우리나라가 현재처럼 에너지를 사용한다면 앞으로 15년 후엔 세계 최고의 에너지 소비국인 미국처럼 될 것이란 사실은 불문가지다. 미국은 전세계 가솔린 소모양의 42%를 차지한다.

이필렬 교수는 이 대목에서 매우 재미있는 주장을 하는데,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때 독일이 끝까지 반대할 수 있었던 현실적인 힘은 독일의 주요 석유 수입원이 중동이 아니라 러시아나 북해 유전이기 때문이며, 독일이 석유로부터 자립해나가기 위한 장기 계획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란 거다. 그러면서 "한국도 에너지 고갈과 기후변화로부터 벗어나려면 두말할 필요 없이 덴마크나 독일처럼 재생가능 에너지로 넘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는 이런 에너지 전환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두려워한다. 아니, 그보다는 "지금까지처럼 석유와 원자력을 계속 사용했으면 하고 생각하고,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그러면서 이필렬 교수는 다시 한 번 미국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미국은 이 길을 택한 것 같다. 우선 미국은 기후변화를 역제하기 위한 교토 협약에서 탈퇴했다. 이 조처는 화석에너지 이용을 줄이지 않겠다는 뜻으로 계속해서 석유 의존을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라크를 침공해서 석유를 확보함으로써 (완전히 성공할지는 두고 보아야겠지만) 수십 년은 에너지 걱정을 안 해도 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한국도 이라크 파병을 결정함으로써 미국을 따라가고 있다."고 말이다. 이 부분이 꼭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약간의 보충이 필요할 듯 싶다. 우선 이 글의 문맥만 살펴보면 미국이 교토 협약을 탈퇴한 것이 화석에너지 사용을 줄이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은 맞다. 그러나 미국이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석유에 대한 의존도를 확대해가겠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다. 미국이 실제로 교토 협약을 탈퇴한 것은 화석 에너지 소모를 줄이지 않겠다는 뜻이긴 하지만, 교초 협약에 가입하지 않은 미국조차 대안 에너지 개발 문제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감소시키기 위한 용도의 예산 확보와 지출면에서는 다른 나라들에 결코 뒤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미국은 현재 화석 연료에 대한 주도권을 계속 장악한 채로 대안 에너지 분야에서도 지속적으로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것이다. 미국이 어떤 나라인데, 21세기에 대한 계획이 없겠는가? 이럴 경우 문제가 되는 나라는 한국이다. 우리가 지금처럼 살아가는 동안에도 다른 선진국들은 21세기 대안 에너지 기술과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경쟁과 국익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이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뒤처지는 걸 원하지 않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런 점에 대해서는 눈감고 있지만 말이다. 이필렬 교수와 같은 이들이 환경적인 대안 에너지를 주장한다고 해서, 그가  "하이하바" 같은 원시적인 풍력 사회를 주장한다고 짐작한다면 그것은 대단한 오해이다. 이필렬 교수가 주장하는 대안에너지는 바로 현재의 물질문명이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고스란히 유지하면서도 화석 에너지가 고갈되었을 때를 대비한 과학 기술의 축적에 의한 대안을 모색하자는 주장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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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아웃사이더 - 세상을 바꾼 지식인 70인의 수난과 저항/ 김삼웅 지음 / 사람과사람 / 2002년 10월

인류가 지구상에서 '사회'라는 이름의 공동체를 이룬 이래 오랫동안 인류 공동체를  지배해 나간 것은 분명 소수의 사람들이었다. "민중"이나 "인민"의 개념을 중요시 여기는 이들조차 선뜻 이런 말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좌파적 입장에 서 있는 사람도, 세상은 이름없는 무수한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만들어 나갔다고 열변을 토할 순진한 우파들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다수가 참여하는 민주주의적 제도를 완비했다고 하는 서구 선진국에서조차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해 회의하는 까닭은 결국 지배기구를 장악한 이들 손에 다수의 민의가 성실하게 반영되고 있지 못하다는 반성에서 출발하는 것일게다.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시작된 귀족들의 사회 지배는 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고, 현대에 이르러서도 일부 국가에서는 그대로 답습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프랑스 혁명을 거치며 프롤레타리아트 계급과 연합한 부루주아지들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바야흐로 '대중사회'로 전이되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속에서 새로운 얼굴의 합리적인(?) 지배 엘리트들을 만나게 되는데 우리들은 그들을 가리켜 "지식인"이라고 부른다.

지식인이란 용어에 대한 개념을 '일정한 수준의 지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 또는 지식층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식의 사전적 정의만으로 그친다면, 우리들이 끊임없이 지식인론을 입에 담아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그런 사전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사유의 힘, 나아가 시대적 요구를 저버리지 않는 양심과 용기에 대한 기대가 함께 녹아있기 때문이다. 저자 김삼웅은 그렇게 시대를 움직인 지식인 상을 "아웃사이더"에서 찾았다. 아웃사이더라는 것은 시대의 주류에서 한풀 빗겨난 사람들, 즉 마이너리티성을 말한다. 마이너리티란 이유만으로 아웃사이더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발적인 국외자이기 때문에 "아웃사이더"의 명칭을 획득한다.

역사적으로 등장하는 혁명가들의 계급적 분포를 보았을 때, 기층 민중에서 출현한 예는 극히 드물다. 그 이유는 그들은 당장의 삶에 급급하여 교육이나 기타 세상의 문제에 미처 눈돌릴 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는 한다. 지배 계급의 권력에 대항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때때로 민중의 의식에서 비롯되기도 하겠지만, 그것을 정교하게 다듬고 이끌어내는 집단이 바로  "이너써클'에 들 수 있는 역량이 있음에도 스스로 국외자의 길을 선택한 지식인들인 것이다. 지식인을 참된 지식인으로 이끄는 것은 결국 그들이 자발적으로 개인의 이익을 희생하고, 자신의 욕망을 공동체의 이익에 부합시킬 때 가능해진다. 여기 역사적으로 이름난 70명의 반항적인 지식인들이 그려져 있다. 물론 대단히 깊이있는 서술이 녹아든 책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지식인의 면모들을 발견하는데는 매우 좋은 책이다. 때때로 평이한 서술이란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또 이만한 책도 찾아보면 흔치 않은 것이 현실이고 보면 일독을 권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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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읽기와 비평적 글쓰기
김정은 지음 / 어진소리(민미디어) / 2003년 5월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어떤 이론이나 사상, 주의를 다이제스트로 읽는 것은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과서에 실리는 문학작품들, 혹은 예술작품들의 생명력이 훼손되는 까닭은 그것이 체제내로 포섭된다는 문제에서도 발생하지만, 그보다 더큰 이유는 논술시험을 잘 보기 위해 다이제스트(digest)판으로 읽는 고전, 작품을 통해 마치 자신이 그것에 대해 전부를 아는 양 착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원전을 읽는다고 해서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는 보장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요점만 간단히"라는 다이제스트의 용도가 설명하듯 텍스트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원전의 많은 것을 잃게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다이제스트의 이런 효용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이제스트의 유용함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대중문화 읽기와 비평적 글쓰기"는 매우 좋은 사례가 된다. 이 책은 다이제스트 도서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성격이긴 하다. 왜냐하면 책의 목적이나 구성 모두가 대중문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공부할 것인가에 합당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대중문화 이론가들, 비평가들의 이론이 일부 다이제스트되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부분들은 어째서 다이제스트가 필요한가를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모두 334쪽의 제법 두툼한 편에 속하지만 책을 펼쳐보면 한 페이지당 여백이 제법 많아서 읽는데 뻑뻑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이런 점, 여백이 많은 책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 책의 여백은 반갑다.

나는 앞서 다이제스트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했고, 여백이 많은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어째서 "대중문화읽기와 비평적 글쓰기"에 대해서는 긍정하고 있는가? 그것은 이 책의 목적과 용도가 대중문화에 대한 공부를 위한 교과서의 용도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저자 김정은 선생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책에 나온 약력에 따르면 경희대학교 언론정보대학 대중예술학과를 졸업하고, 대중예술연구소 PAN연구원으로 있다고 한다. 저자 서문에 의하면 "이 책은 대중예술연구소 PAN에서 열렸던 '대중문화 비평일기 워크숍'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워크숍은 10주 과정으로 진행되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책의 구성 역시 전체가 10개의 장, 아니 10개의 강의로 구성되어 있다.

즉, 이 책은 애초의 목적인 워크숍의 용도로 쓰인 뒤 보강되어 책의 형태로 나온 것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의 목적과 자신의 관점을 공개하고 있다. "애당초 이 워크숍의 목적은 대중문화를 난도질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기존의 비평가들에게 속지 않기 위한 자기만의 눈을 가지게 해주는 것을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나는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비평적 시각이 달라져야 한다고 믿는다""기본적으로 대중문화는 즐기는 문화"라고 규정한다. 이 책이 쓰여진 이유는 대중문화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자세와 대중문화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함께 갖출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다. 끝으로 저자는 자신의 존경을 대표적인 좌파 문화이론가인 레이몬드 윌리엄스에게 바친다(물론 레이몬드 윌리엄스는 저자 자신이 소개하듯 마르크스주의와 구조주의를 함께 고민한 문화이론가이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이 책의 처음 시작은 문화(culture)의 정의와 대중(mass 혹은 popular)의 정의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양자가 결합된 대중문화의 정의로 이어진다. 수학에서 정의(定義, definition)라하면 기호(記號)에 대하여 그 수학적 의미를 규정한 것을 의미한다. 수학적 정의라는 것은 "한 내각의 크기가 직각인 삼각형을 직각삼각형이라 한다"는 식의 똑부러지는 정의가 될 것이지만, 이를 인문학으로 가져오면 정의 자체가 어렵거나 정의하는 일 자체가 하나의 입장을 드러내는 일이 된다. 저자는 레이몬드 윌리엄스의 말을 빌어 "문화를 영어에서 가장 까다로운 말 중 하나"라고 말문을 연다. 그러면서 문화란 특정집단이 지닌 삶의 방식이자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며 생활 속의 작은 몸짓 하나하나가 문화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문화에 대해 흔히 생각하게 되는 문화를 자연과 대립되는 뜻으로 생각하기보단 "나를 가꾸고, 자연을 가꿈으로써 자연적으로 문화적 실천을 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한다.

저자의 뜻을 제대로 요약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저자의 바램이 문화를 어려운 어떤 것이 아닌 대중(popular)이  즐기는 것이 되길 원하는 것처럼 이 책은 그렇게 쉽게 쓰였고,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다른 대중문화이론들에서 간추려낸 대중문화의 정의를 여섯 가지로 정리해 보여준다.

첫째.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문화다.
둘째. 고급문화 이외의 것이 대중문화다.
셋째. 대량생산된 상업문화다.
넷째. 민중계층으로부터 스스로 발생한 문화다.
다섯째. 문화적 헤게모니를 쟁취하기 위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경쟁결과가 대중문화다.
여섯째. 대중문화의 경계란 없다. <본문 24쪽>

이렇게 정리해놓고 보니 대중문화가 한 눈에 잡히는 것 같은가? 그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좀 특이한 사람이다. 윤곽이 잡히기는커녕 오히려 더 미로에 빠진 기분이 들 것이다. 그리고 앞의 정의들이 피부에 와닿아 감동을 주는 문장은 분명 아닐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뼈만 남은 앙상한 문장은 생기와 온기를 전해주지 못한다.<본문 25쪽>

저자가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인데 정작 자기 자신은 그런 문장력밖에 없다면 큰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저자는 생기와 온기를 겸비한 문장을 구사한다. 그렇게 저자의 글들을 따라가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대중문화에 대해 좀더 잘 알게 된, 아니 그 말은 이 책에 대한 예의는 아닐 성 싶다. 그보다는 자신이 문화이론 내지는 대중문화에 대해 어찌 공부하면 좋을지에 대한 최소한 뼈마디와 길잡이는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김정은 선생은 "대중문화 읽기와 비평적 글쓰기"를 통해 일반 대중(혹은 문화비평에 이제 막 입문하고 싶어 하는 욕구를 품은 이)에게 그 실천방법으로 "비평일기" 쓰기를 권장한다. 비평일기를 잘 쓰기 위해 저자는 "나는 내법을 쓴다(我用我法). 入語有法 出語無法, 모든 것을 강조하면 아무 것도 강조되지 않는다. 몸으로 써라. 즐겨라" 같은 방법을 일러준다. 이 네 가지 방법 가운데 "모든 것을 강조하면 아무 것도 강조되지 않는다"를 제외하면 실제로 가르침은 한 가지로 압축되는데, 그것은 "나의 눈으로 보고, 즐기며, 나의 느낌을 말하라"는 것이 된다. 이 책 전체에서 말하고 있는 대중문화와 이론들은 실제로는 매우 생경하고, 난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글쓰기는 자신이 말한 저 원칙들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당연히 독자들도 함께 읽어가며 신나게 대중문화의 세계로 자맥질해 들어갈 수 있다.

강의 하나하나는 나름의 주제와 각각의 문화이론가들의 주장과 개념들이 녹아들도록 꾸며져 있다. 예를 들어 "제2강|소통하는 사람, 소통하는 문화"에서는 발터 벤야민과 마샬 맥루한이 다뤄지는데 흔히 마샬 맥루한하면 바로 "미디어는 메세지"란 이야기를 떠올리면서도 정작 이 말이 어떤 함의를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잘 깨닫지 못할 수도 있는데, 저자는 이것을 매우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

마샬 맥루한이 말했다. '미디어는 메시지' 라고. 조선일보가 북한에 대해 말할 때 보면 맥루한의 이 명제가 얼마나 진리인지를 느낀다. 그러나 이 진리가 증명되는 순간이 어디 조선일보의 경우뿐이겠는가. 관제언론에서 정치를 논할 때, 방송에서 공익성 운운할 때 우리는 맥루한의 통찰력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무엇을 말하는가보다는 어디에서 말하는가가 더 중요해져버린 현실에서 매체는 이미 권력이다.<본문 50쪽>

이렇게 마샬 맥루한에 대해 살려보면서 동시에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문제를 실제 독자 자신의 경험에 대입시켜 살펴볼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구성은 실제 그대로 따라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잠시의 상상만으로도 좀더 폭넓은 추체험(追體驗)을 가능케 한다.

같은 대중이라 할지라도 mass냐 popular냐에 따라 대중문화를 부정적 시선으로 바라보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별할 수 있는 일차 기준이 될 수 있는데, 앞서 이 책의 저자인 김정은 선생이 존경하는 인물로 레이몬드 윌리엄스를 꼽은 것을 통해 짐작해볼 수 있는 것처럼 저자는 이 양자 사이에 적절한 거리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이 책에서는 마르크스주의 문화이론, 구조주의 문화이론에 대해 일방적인 비판, 찬양과도 모두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한다.
(물론 저자의 관점이 좌파적인 것에 더 가깝다는 것은 당연히 짐작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레이몬드 윌리엄스의 주장에서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습득하고 창조하고 소통하는 존재(a learning, creating, communicating being)라면, 인간의 이러한 본성에 걸맞는 유일한 사회적 체제는 참여민주주의이다. 그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의 고유한 개체로서 습득하고 소통하고 스스로를 지배한다. 이보다 열등하고 제한적인 체제는 인간에게 주어진 진정한 삶의 원천을 소진시켜 버린다."고 "레이몬드 윌리엄스"는 "장구한 혁명"에서 말한 바 있다.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듯 레이몬드 윌리엄스는 인간에 대한 낙관, 대중을 해방적 기획의 주체로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근대의 혹은 근대에 대한 해방적 기획(정치실천)은 공동체의 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주체적이고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믿었고, 이런 해방적 기획의 회복은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구분짓기가 아닌, 고상하고 위대한 선각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경험과 가치, 사상, 행동, 욕망 등이 종합적으로 조립된 문화에 의한 것으로 바라본다. 그렇기에 대중들의 문화는 그들만의 경험을 통해 기존 체제에 대해 대항하는 힘을 지니고 있으며 대중들의 자발적인 실천은 더욱 강조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읽는 것은 대중의 자발적인 실천이란 첫걸음이 될 수 있다.

대중문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선 더욱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대중문화에 대해 고민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자발적인 실천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이 책을 무척 권하고 싶다. 이 책의 말미엔 100여쪽이 약간 넘는 분량으로 문화이론의 중요 용어들에 대한 사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또한 매우 유용한 자료가 될 것이다. 쉽게 쓰이는 것이 반드시 천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긴 쉽지만 실제로 그렇게 쓰는 것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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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브럼 - 미군과 CIA의 잊혀진 역사/ 녹두(2003)

이란, 리비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중국, 캄보디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 한국, 이탈리아, 그리스, 과테말라, 볼리비아, 쿠바, 니카라과, 파나마....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나라들은 고작 19개 나라에 대한 이야기가 전부다. 우리는 정부기관에서 하는 일들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국민을 위해 생산적인 일만 할 것 같은 산업자원부, 한 국가의 산업자원을 총괄하는 부서라고 배웠지만 그 밑에 얼마나 많은 산하기관이 있고, 그네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수자원공사는 단지 수자원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정부가 만든 공사형태의 기업체로 생각하고, 원자력공사는 원자력의 안전한 관리를 위해 정부가 우리들 세금으로 만든 기업체 형태로 생각해버리고 마는 경향이 있다.(이들 공사가 산자부 직할 기관인지는 잘 모르겠다.)


왜? 미국의 국부 토마스 제퍼슨은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라고 말했을까? 왜? 헨리 데이빗 도로우는 이런 그의 말에 동의하여 "시민 불복종"이란 말을 했을까? 수자원공사는 단지 수자원관리만을 하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댐을 만든다. 그런데 이 기구는 한 번 만들어지고 나면 계속해서 많은 예산을 소모하고, 보다 많은 댐을 건설하기 위해 사업을 추진한다. 원자력기구가 한 번 만들어지고 나면 계속해서 이에 따른 핵발전소 건설을 추진하게 된다. 이유는? 그것이 조직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상비군이 존재하게 된 뒤, 세상이 더 안전해졌는가? 세계 각국은 상비군이 존재하기 전보다 더욱 많은 전비(군비가 아니다, 전비다)를 소모한다. 이유는 군비경쟁이 전쟁의 위험을 고조시키고, 전비 소모는 군산복합체의 수지타산을 맞춰준다. 군산복합체에 근무하는 노동자는 자신의 아들, 이웃 형제가 전쟁터에서 전사하더라도 이를 영웅적인 죽음으로 추모할 지언정, 자신이 만든 미사일이, 총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에겐 돌봐야 할 가족이 있고, 안정된 직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교생에 의해 일어났던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이 미국 최대 규모의 군산복합체 공장 인근이었다는 것은 무시될 수 없는 진실이다.

이렇듯 한 번 만들어진 정부기구는 계속해서 사업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는 속성을 지닌다. 그렇다면 미국의 정부기구 중 가장 많은 예산을 소모하면서 그 내용 자체가 금기시되는 정보기관들은 과연 국민들의 합리적인 감시 아래 놓여 있을까? 이 책의 저자인 윌리엄 브럼은 그런 의문에서 이 책을 저술하게 되었다. 원래 외교관이 되고 싶었던 윌리엄 브럼은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면서 이 꿈을 버리고,  1967년 국무성을 떠나 그 후 워싱턴에서 최초의 대안언론인 「워싱턴 자유언론」의 설립자 겸 편집자가 되었다. 그는 현재까지 미국, 유럽, 중남미 지역에서 프리랜서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1969년 이미 CIA와 원수처럼 될만한 일을 저질렀는데, 200명 이상 되는 직원의 이름과 주소가 담긴  
란 책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소개하는 책은 그가 1986년 지은 것을 다시 개정하여 1994년에 재출간한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희망 죽이기(Killing Hope - U.S. Military and CIA Interventions Since World War II)"이다.

우리에게 CIA는 이미 매우 친숙한 이름이다. 소위 '랭글리'라는 애칭(?)으로도 불리우는 미 중앙정보부는 한국에도 그 아류를 설립한 적이 있는데 지금은 국정원이란 이름으로 변모한 "중앙정보부"가 그것이다. 중앙정보부를 지칭했던 영문약자가 KCIA였다. 나는 이런 류의 책들 - 첩보의 세계를 다룬 책들에 대해 -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대개 이런 류의 책들은 그 성격상 후일담에 그치기 때문이다. 정보기관의 비밀 사업들은 대개의 정부에서 비밀문서로 보관해 일정기간 동안 일부 관계자를 제외하고는 열람 자체가 금지된다. 세계의 많은 역사학자, 사회학자들이 미국의 비밀문서 해제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도 그 탓이다. 심지어는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미모의 첩보원이었던 마타 하리에 대한 정보 역시 2017년에야 비로소 프랑스 정보 당국에 의해 비밀이 유지되도록 규정해두었다고 한다.

죽은자는 말이 없다고 하던가? 국민을 속이고 비밀리에 정보기관들은 정보수집은 물론 쿠데타음모, 정적암살을 비롯해 여론 조작, 테러, 매수, 선동공작을 획책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적인 무력침략조차 서슴치 않는다. 우리는 단지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을 가지고 그 내용을 유추해볼 뿐 명확한 증거는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비밀정보기관들은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국민의 눈과 귀를 속이고 활동한다.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내용들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와 의회도서관에서 찾은 자료와 기밀 해제된 각종 문서를 참고하여 19개의 사건을 전개 과정에 따라 순차적으로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책의 내용들은 이미 사건이 일단락된 뒤의 이야기들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에서 500만명 이상을 죽이거나 죽도록 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쉼없이 정보공작과 직접적인 침략행위를 계속하고 있다.

저자는 조지 오웰과 마이클 파렌티의 매우 인상적인 말로 저자의 말을 마감하고 있다.

과거를 다스리는 자는 미래를 다스리고,

현재를 다스리는 자는 과거를 다스린다.
- 조지 오웰, <1984> 중에서


언젠가 공산주의가 세계의 대부분을 장악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반공주의가 이미 세계를
장악한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
- 마이클 파렌티, <반공주의의 충격> 중에서


윌리엄 브럼의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사실(fact)이다. 그러나 그걸 읽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주의해야 한다. 한 가지는 잘 믿기지 않지만 믿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갑자기 세상 모든 일이 미국과 CIA의 공작으로 보일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주의하시고, 동시에 이 책의 몇몇 단점을 소개하자면 한 가지는 저자 자신이 때로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녹두 출판사의 책임이겠지만 군데군데 인명이나 지명 표기에서 실수가 보인다. 그래서 이 책을 구입한지는 좀 되었는데, 처음에 읽다가 그런 부분이 보여서 덮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못 읽을 정도는 아니다. 참고로 이 책은 다음의 책과 함께 읽으면 정말 좋을 것이다. 그것은 이삼성 교수의 <세계와 미국:20세기의 반성과 21세기의 전망>(한길사)란 책이다. 이 책은 다소 두께가 있으므로 그것이 좀 어렵다면, 같은 저자의 <20세기의 문명과 야만>(한길사)를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책 내용에 대한 자세한 소개를 하지 않는 까닭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 중 상당수는 이미 "문망"에서도 다루었거나 앞으로 다룰 내용들과 겹치는 부분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인데, 책을 읽기 전에 한 가지 들려주고 싶은 재미난 이야기는 미국이 그동안 사용해온 국방비는 예수 탄생 이래 매 시간 당 1만 7,000달러 이상이란 것이다. 올해가 2004년이니까, 계산들 잘 해보시길.... 그들은 그 돈으로 2,000만명 이상의 제3세계 민중을 살해했다. 한 사람 죽이는데 드는 돈이 한 사람 살리는데 드는 돈보다 늘 훨씬 많이 지출된다는 것, 그것이 인류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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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Sex - 정치적으로 올바른 섹스 스토리 / 김이윤 / 이프 / 2000년

"여자가 기저귀차고 강단에 올라가? 안돼!"

어제 뉴스를 보니 총신대학교의 채플 시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쪽 총회장인 임태득 목사(대구 대명교회 당회장)가 최근 “우리 교단에서 여성이 목사 안수를 받는다는 것은 턱도 없다”며 상식이하의 여성 비하 발언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임 목사는 지난 12일 오전 서울 동작구 총신대학교 채플시간 설교에서 “대한민국 어느 교단이든지 여자 목사, 여자 장로 만들어도, 우리 교단은 안 돼. 그게 보수고, 그게 성경적이고, 그게 신학에 맞는 거야”라며 “여자들이 기저귀 차고 강단에 올라가? 안 돼!”라고 말했다는데, 예장 합동 교단은 국내에 신자가 200만명 정도로 추산되는 거대 교단이다.


책 이야기를 하면서 갑자기 가십성 기사 이야기를 왜 들먹이는가하면 이 책의 저자인 김이윤 선생이 현직 목사 신분이라는 것과  이 책 "Happy Sex"가 성서(Holy Bible)상에 등장하는 여러 성(sex)적인 이야기들과 현재 고착되어 있는 우리 사회의 성적인 역할(gender) 혹은 성(sex)차별적인 요소 - 바탕에 기독교적인 윤리관이 근저에 깔려 있음을 - 들을 직접적으로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Happy Sex"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기란 다소 난감하다. 판갈이를 하면서 현재는 표지가 핑크빛에서 녹색톤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겉표지에 큼지막하게 책명이 적혀 있으니 그냥 들고 타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가기가 다소 난감해 보인다. 제목만 놓고 보면 책 속에 온갖 기기묘묘한 체위들과 방중술이 소개되어 있을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솔직히 그런 책도 재미있기는 하다. 은근히 즐기는 편? 흐흐) 그런데 책 내용은 그보다는 훨씬 더 건전하다. 물론 앞서 말한 총신대 채플 시간에 '기저귀 찬 여자들이 목사 안수 받는 것은 성서적으로 그르다'고 판단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마귀들린 이단자들이나 할 수 있는 말로 비칠 수도 있겠다.

이 책의 필자 김이윤은 목사 신분으로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나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의 논리들에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기독교의 보수종단들에 대한 인식을 공격하면서도 그 모든 바탕에 기독교적인 윤리관(?)이 근저에 깔려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기독교 근본주의(보수주의)에 대한 공격에는 매우 유효하게 보이지만, 타종교를 들먹이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당연하게도' 서구적인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기존의 고루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충격일 테지만, 어떤 부분은 뭐 당연한 얘기를 하는 정도이기도 하다. 그의 주장을 거칠게 압축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기존의 종교(특히, 개신교)는 대중(혹은 평신도들)에게 성에 대한 인식에 있어 부정적인, 혹은 심각한 왜곡을 가하고 있다. 그런 부작용으로 말미암아 남존여비의 인식을 강요하게 되었으며, 정신에 비해 몸을 악으로 규정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종교적 구원, 즉 정신해방은 결국 몸의 해방에 이른 남녀간 서로에 대한 영혼과 육체의 결정권을 자신들이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의 성을 소유하려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이야 지독히 맞는 말 아니겠는가? 그의 주장이 건전하고 상식적이라는 것은 그의 생각이 가치전복적이라거나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체제내적인 혹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구조적인 모순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돌을 던지지 말자! 목사님이 아닌가.

나는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부제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섹스 스토리"라고 했을 때 '올바른 섹스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한 장벽에 대해서 필자는 적시하고 있고, 그 부분들에 대해 매우 효과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6장의 구분 속에 진행된다. 첫번째는 우리 사회가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해 흔히 가지고 있는 편견에 대해 지적하고, 둘째 장에서는 결혼 제도, 셋째 장에서는 성직자들 - 종교에 관련한 서비스업종 종사자들의 성의식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넷째 장에 이르러서는 성서 상의 여러 성애 사건들에 대해 다루면서 어떻게 가부장제적 질서 속에 성서의 말씀들을 변형시키고, 그것을 그 자체의 말씀으로 가부장제적 질서를 강제하는 기능과 권위를, 성서를 통해 부여받게 되었는지를 밝힌다. 그리고 다섯 째 장에 이르면서 남성성과 여성성의 문제에 대해 지적하고, 다시 여섯째 장에 이르면서 본인이 생각하는 최종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일견 당연한 말이지만 이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장은 '성서 속에 나타난 인간의 섹슈얼리티' 문제를 다루고 있는 넷째 장이고, 가장 재미없어지는 부분은 매우 상식적일 수 있고, 어느 경우에는 그것 또한 편견으로 보이는 다섯째 장이다. 그리고 여섯째 장에서 제시하고 있는 대안은 이제는 상식일 수도 있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재미가 적다. 게다가 이 책은 군데군데 틀려서는 안 될 부분들에 대해 필자의 실수인지, 도서출판 '이프' 측의 실수인지 모를 오식들이 보이고, 필자의 육성이 거칠게 묻어나는 몇몇 문장들이 보인다. 물론 이 책의 가장 큰 문제 혹은 부족한 점은 이 모든 문제들 - 성차별을 비롯한 성과 관련한 여러  문제들에 대해 - 을 종교적 혹은 관념적인 문제로 치환하고 있는데 있다. 정치경제학적인 문제들은 이 책에서 등한히 되고 있거나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한 저자가 세상의 어떤 현상에 드러나는 혹은 배후에 숨겨져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무척 많은 장점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전 망명지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토론들을 한 적이 있다. 이 책에는 그 때 논의 되었던 논쟁거리들의 상당수를 잘 정리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 제목 때문에 주저되시는 분이라면 당신의 편견 때문에라도 더욱더 추천하고 싶다. 꼭 구해서 읽어보시길 바란다.

<200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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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역사가 쓴 자서전 / 이석우 지음/ 시공사/ 2002년


이 책에는 "역사학자 이석우의 명화 속 역사 찾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에 걸맞게 책의 시작 역시 원시 시대 라스코 동굴 벽화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중세와 르네상스, 프랑스 혁명과 양차 세계대전, 모더니티와 끝 부분에 부록처럼 이석우 자신의 개인사적인 미술편력이 담겨 있다. 이 책은 그간 <국민일보>에 연재되던 '이석우의 역사가 있는 미술'에 수록되었던 글을 보충하고 끝에 자신의 에세이를 첨가하는 것으로 한 권의 책이 완결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먼저 이 책의 장점부터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역사학자 이석우 선생은 그간 우리 인문학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자신의 주전공 분야와는 관련없다고도 할 수 있는 미술 분야의 여러 좋은 책들을 상재해두고 있는 분이다. 그는 특히 우리 미술에 대해서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가나아트에서 지난 1990년 "예술혼을 사르다 간 사람들"을 통해 우리 현대 미술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화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소나무에서 "역사의 들길에서 내가 만난 화가들(상,하권)"을 통해 변함없는 애정을 과시하고 있다. 그가 "그림, 역사가 쓴 자서전"의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곰브리치, 부르크하르트 등도 역시 역사학자인 동시에 화가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시인 보들레르가 뛰어난 미술평론가였음을 기억해야 하고, 아도르노가 음악 이론가였음을, 발터 벤야민이 영화에 대해, 롤랑 바르트가 사진에 대해, 아놀드 하우저가 20세기의 예술사에 대한 통사를 기록했었음을 더불어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학문간, 학제간의 상호 교류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하고, 심지어는 무식하다. 인문학이란 것이 결국 인간이란 생물에 대한 학문일진데 연계 학문간의 교류 없는 인문학이란 것이 결국 우리 인문학의 위기를 자초한 것은 아닌가? 나는 역사학자 이석우 선생의 이런 시도들이 우리 사회의 인문학자들에게 더할 수 없이 중요한 가르침이고, 더불어 우리 사회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품격높은 축복이 될 것임을 믿는다.

억지스러운 것이 아니길 바라면서 이 책의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지은이 이석우 선생은 "그림은 곧 역사이고, 모든 그림은 어떤 형태로든지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의 처음 출발점이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은 앞서 이미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 한 권으로 역사의 모든 부분을 말하기 위해 기획된 것은 아니라고 전제하더라도 이 책은 역사의 몇몇 국면들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첫째 이 책이 서양사 중심이라는 것, 둘째는 책 전체에서 분량면으로나, 내용면으로 러시아 혁명과 그 여파에 대한 부분은 사실상 거의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석우 선생의 전공이 서양중세사라는 점을 고려하고, 이 책이 역사서라거나 미술사적인 연구서적이라기 보다는 미술작품을 통해 본 역사 에세이적인 입장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형평성의 문제에서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그런 아쉬움들을 뒤로 하고 이 책은 많은 난관을 뚫고 훌륭한 성취를 거두고 있다. 작가의 말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미술은 시간 속에서 형성되므로 거기에는 역사가 묻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 쓰고 있는 그림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역사를 담고 있으며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필자는 그들 그림에 얽힌 사연과 그것을 그린 작가의 이야기, 그리고 그 시대 미술의 특징을, 역사와 미술이라는 두 입을 통해 동시에 이야기" 하고자 했던 의도는 서로 상충되는 것은 아니나 성공적으로 이룩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역사와 미술이라는 서로 다른 두 전문 분야를 한데 아울러 어우러지도록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두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과 더불어 문학적인 감수성이 요구되는 것인데, 이석우 선생은 이 어려움을 어려움으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수월하게 봉합해낸다. 앞으로 이런 시도들이 우리 인문학계에서 잦은 일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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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보수의 영국사 - 케임브리지 세계사 강좌 4  / W.A. 스펙 (지은이), 이내주 (옮긴이) / 개마고원/ 2002년 9월 9일

출판사 "개마고원"에서 일련의 시리즈로 번역하고 출간하고 있는 책이 "케임브리지 세계사 강좌" 시리즈인데, 이 책(이하 "케임브리지 영국사)은 그중에서 네 번째 권이다. 첫 권이 독일사, 이탈리아사, 프랑스사 그리고 네번째가 영국사인데, 개인적으로 이 4권의 시리즈가 모두 흡족할 만큼 좋은 책이다. 케임브리지와 늘 비교 대상이 되기 좋은 옥스포드대학에서도 영국사를 출판해서 그 책도 국내에 번역되어 있는데, 그 책은 국내에서는 한울출판사에서 출간되어 있다. 옥스포드 영국사의 정가가 24,000원이고, 이 책은 15,000원이다. 액수만 놓고 보자면 당연히 케임브리지 것을 사는 것이 좋아 보인다. 하지만 영국사를 단 한 권으로 끝내고  싶다면(그닥 권하고 싶지 않지만) 옥스포드 것을 구입해야 한다. 왜냐하면 케임브리지판은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역사로부터 1970년대 영국이 유럽공동체에 가입한 대략 300여년의 영국 근현대사에 중점을 두고 쓰인 책이기 때문이다. 옥스포드 영국사는 알프레드 대왕으로부터 시작되는 통사의 성격이 강한 반면에 케임브리지 영국사는 "진보와 보수"라는 관점에서 쓰인 영국근현대사이다.


두 책에는 모두 장단점이 있다. 일단 가격 대비 분량과 도판, 통사라는 측면을 놓고 보자면 옥스포드판을, 진보와 보수의 관점에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으며 읽는 재미를 추구한다면 케임브리지판을 권하고 싶다. 옥스포드판이 교과서를 읽는 기분이라면 케임브리지판은 그에 비해 확실히 하나의 관점으로 쓰인 재미난 영국사이다. 영국이 스코틀랜드와 통합 이후 내부적인 결속을 다지고 이후 세계 대제국으로 융성해가는 과정이 드라마틱하게 다뤄지는 반면, 글래드스톤의 아일랜드의 분리독립 시도가 좌절된 이후, 식민주의자 고든 수단 총독의 살해 장면에 이르는 과정은 결국 영국이라는 대제국이 제국주의를 스스로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몰락의 과정을 걸어가는 과정 역시 담담한 어조로 기술해가고 있다.

어느 나라 역사든 그 나라 사람이 지은 것을 읽을 때는 저절로 경계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은연 중에 그 나라의 부끄러움은 감추려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세계적 관점 - 제국을 경영해 본 국가의 신민이었다는 측면을 두고 보자면 더욱 그러한 - 에서 기술되고 있는 탓에 영국의 부끄러움이라고 해서 애써 축소하지도 않았고, 타국의 입장에서 이것은 분명한 역사왜곡이라고 말할 부분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앙드레 모로와 역시 영국사를 기술한 바 있는데, 앙드레 모로와의 프랑스사와 비교해보면 확실히 영국사가 처지는 기분이 드는 것과는 다르다. 물론 나머지 시리즈도 모두 추천할 만한 신뢰도를 갖추고 있다.

우리는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을 소위 명문대학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명문대학을 명문대학답게 만드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한 가지는 그 대학의 출판부가 출간하는 책이 갖는 권위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이 두 대학은 역시 명문대학의 반열에 올릴 만하다. 과연 국내의 명문대학에서 이들만한 권위있는 출판부를 그들 대학 산하에 두고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이 시리즈에 줄 수 있는 평점의 최고치가 별 5개라면(이런 식의 점수 매기기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최소 4.5개의 별은 줄 수 있을 것이다. 영국사를 읽을 수 있는 몇 권의 좋은 책은 나중에 개별적으로 한 번 더 다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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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 나카지마 아츠시 지음/ 명진숙 옮김/ 이철수 그림/ 신영복 추천·감역 / 다섯수레/ 1993년

책을 읽다보면 가끔 문학평론가 김현의 한탄스런 독백이 떠오르곤 한다. 세상엔 매일같이 책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 책을 평론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 평론가로서 자신이 읽어낼 수 있는 책은 한계가 있으니 이를 어쩔 것이냐는 것이 그의 한탄이었다. 물론 김현은 이 부분을 능숙하게 변명하고 넘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을 수밖에 없지 않는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의 성실함에 대해서야 누군들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책의 초판이 나온 것은 지난 1993년이고, 내가 구한 것은 2002년 4판째의 것이다. 거의 10년에 걸쳐 모두 4판을 인쇄했으니 결코 많은 부수가 팔린 책은 아니며, 어쩌면 거의 주목받지 못한 책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나는 이 책이 우연한 기회에 위에 올린 '달나라의 장난'님의 독후감을 읽고 대관절 어떤 책이길래 저런 서평이 가능한가 하는 궁금증에서 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 책을 만나게 해준 그 인연에 대해 몹시 감사하는 마음이다.

소설이란 것이 어느 때부터인가, 잠시의 여가를 위한 노리개로 전락해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사무실에서 점심 시간이 지난 뒤 입가심을 위해 껌을 씹는 동안 잠시 읽거나 출퇴근 지하철 안에서 소일 삼아 잠시 읽는 데 적합한 소설이 대량으로 쏟아지는 시대에 어찌보면 200쪽이 조금 넘는 이 소설집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작가. 나카지마 아츠시는 1909년 일본 동경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용산국민학교와 경성중학교를 나오고,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1942년 요절한 사람이다. 식민지 시절 조선에서 살았던 일본 작가의 작품을 펼쳐들고 읽는 소회도 만만치 않건 만 이 작가의 작품 안에 담긴 이야기들은 도저히 말로 퍼 옮길 수 없는 깊이가 있다. 반추(反芻)라는 말이 있다. 소나 염소 같은 짐승이 씹어 삼킨 먹이를 다시 입 속으로 끄집어 올려 씹는 행위에서 비롯된 이 말은 이 책 <역사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에 정말 부합하는 말이다.

"사실은 자신의 부족한 재능이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비겁한 두려움과 고심을 싫어하는 게으름이 나의 모든 것 이었던 게지. 나보다도 휠씬 모자라는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그것을 갈고 닦는데 전념한 결과 당당히 시인이 된 자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말야.호랑이가  되어 버린 지금에야 겨우 그것을 깨달었지 뭔가. 그것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가슴이 타는 듯한 회한을 느낀다네" - <산월기> 中에서

<산월기>, <명인전>, <제자>, <이능> 4편의 짤막한 단편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고전 속의 인물들을 다시 만나게 한다.  그것도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감동의 열기가 가슴 저 밑으로부터 끓어오르도록 한다. <산월기>와 <명인전>은 각기 다른 의미에서 서로 호응하게 되어 있는데, <산월기>의 경우엔 세상과 담쌓은 한 예술가가 결국 몰락해가는 모습을 때로는 카프카의 <변신>처럼 그리면서도 동양적인 고전미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명인전>은 노장의 세계에 빠져든 예술가, 장인이라 불러야 할 한 인물의 모습을 수묵화처럼 담담하게 묘파하고 있다. 그러나 공자와 그의 제자 자로를 다루고 있는 <제자>에 이르면 이 젊은 작가의 정신세계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서양의 고전주의와는 다른 동양의 고전주의가 과연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가끔 왜 우리에게는 그리스 로마신화 같은 그런 세계가 없냐고 투덜대는 이들에게 늘 해주고 싶은 말은....그런 무식한 소리하지 말고....먼저 <논어>를 읽고, <사기>를 읽으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렇지만 역시 하늘은 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이능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보고 있지 않은 듯하면서 역시 하늘은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숙연한 두려움으로 떨었다. 지금도 자신의 과거가 옳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소무라고 하는 남자의 존재가, 전혀 문제가 아니었던 자신의 과거를 부끄럽게 여기도록 하고, 그 흔적이 지금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아무래도 이능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가슴이 쥐어뜯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기개 없는 자신은 소무를 말할 수 없이 부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능은 몹시 두려움에 떨었다." - <이능> 中에서

작가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란 것이 무엇인지 이 네 편의 각기 다른 이야기와 각기 다른 주제를 통해 전달하는데 막힘이 없고, 읽는 동안 내내 숨이 턱턱 막혀오는 감동을 준다. 하마터면 묻혀버렸을 이 책을 근 10년이란 시간 동안 절판시키지 않고 꾸준하게 출판해준 <다섯수레>라는 출판사와 이 책이 소문나지 않은 스테디셀러로 꾸준하게 팔리도록 해 어느덧 4판을 찍어 내 손에까지 들어올 수 있도록 이 책을 읽어준 안목있는 독자들에게도 감사해야 할 일이다.

결국 우리는 세상의 모든 책을 읽을 수는 없다. 하지만 꾸준히 읽을 수는 있다. 그러므로 계속 좋은 책을 찾아 읽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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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김성동 천자문 - 하늘의 섭리 땅의 도리/ 김성동 쓰고 지음 / 청년사 / 2003년 12월



1.

소설가 김성동하면 먼저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것은 그의 소설 "만다라(曼陀羅, 1978)" 그리고 "병 속의 새를 어떻게 꺼낼 것인가?"하는 "화두(公案)"이다. 중학교 2학년 무렵에 읽은 "만다라"는 '빨간 책'에 버금갈 만큼 성적(性的)인 책이었다. 소설의 내용은 한국전쟁 당시 공산주의자로 처형당한 아버지를 둔 '법운'이란 젊은 사문이 '지산'이란 사문을 만나 번뇌를 거듭하며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아버지를 비명에 잃은 어머니는 들리지도 않는 아버지의 퉁소 소리를 찾아 헤매다 뜨거운 피를 주체하지 못하고 가출해 버리고, 법운은 입산수도의 길을 택한다.

지산은 스스로를 잡승(雜僧), 땡땡이 중으로 자처하면서 불교의 계율을 어기고 술과 여자도 거침없이 범하는 파계승이었다. 법운은 점차 지산에게 경도되어 가지만 파계승도 못 되고, 대승세계의 자유인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서 방황하게 된다. 어느날 지산은 법운과 함께 암자 아래 술집에서 만취한 채 돌아오다 산중에서 동사(凍死)하고 말았다. 법운은 오랜 고민 끝에 여자와 동침하고 나서 세상에 뛰어든다. 이 소설엔 작가 김성동의 자전적인 내용이 상당히 많이 녹아들어 있다고 하는데, 법운이 처한 가계사와 흡사한 것이다. 사실 한국전쟁 당시 가족의 일원을 잃은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전쟁의 희생자라는 가계사가 지속적으로 비극일 수밖에 없었던 데에 우리 역사의 비극이 숨어 있다. 이 비극의 근본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주변 친척 중 전시 빨갱이로 몰려 죽은 사람은 그렇다치더라도, 대한민국 정부는 수도 서울을 끝까지 사수하고, 방어할 테니 정부를 믿고 수도 서울을 지켜달라는 말을 믿고 피난을 떠나지 않았던 시민들까지 '부역자'로 몰아 두고두고 연좌제로 괴롭힌 우리 사회의 이념적 강팍함때문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작가들 중에서도 각기 다른 작품 세계를 보이고는 있으나 김성동은 물론, 이문구, 김원일, 이문열 등도 역시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보이는, 보이지 않는 낙인의 피해자들이었다. 얼마 전 작고한 이문구 선생은 스스로의 삶을 '내 삶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 삶'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너는 절대로 공부를 잘해서는 안된다. 공부를 잘하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고, 눈에 띄면 빨갱이 자식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이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살아남을 수 없다. 너는 절대로 공부를 못해서도 안 된다. 공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고, 눈에 띄면 빨갱이 자식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바로 그 순간 죽임을 당할 수 있다. 적당히 공부해라. 잘하지도 못하지도 말고 중간을 고수해라.'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싹쓸이로부터 우리 사회가 경험적으로 터득한 처신법이었다(이와 관련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김동춘 지음 / 돌베개 / 2000년 6월"를 참고하는 것도 좋다).


2.
어려서 김성동처럼 한학이 깊은 할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운 적은 없지만, "한석봉 천자문"을 앞에 놓고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루황"을 공부한 적은 있었다. 누런 갱지에 괴발새발 글씨를 쓰는 건지 그림을 그리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으로 천자문의 한자들을 옮겨 적었다. 결과적으로 나의 한자 공부는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는 어려서 천자문을 배운 것이 훨씬 더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 조기 교육이다, 뭐다해서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대유행인데 만약 어려서 가르쳤을 때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하나만 고르라면 나는 영어니, 미술이니 하는 것보다는 개인적으로는 한자를 가르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내 개인적으로는 한자의 유용성도 유용성이지만 우리 말 단어의 70% 정도를 구성하고 있는 한자말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 말을 이해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고, 글씨가 미술의 영역 안에 들어가는 서예란 점에서 조형감을 배우는데도 한자는 유익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물론 천자문은 한문을 처음 배우는 이들을 위한 학습서인 것이 사실이나 그 격을 너무 낮춰잡는 경향이 있다. 중국 남조(南朝)시절 양(梁)나라의 주흥사(周興嗣:470?∼521)가 글을 짓고, 동진(東晉) 왕희지(王羲之)의 필적 중에서 해당되는 글자를 모아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형식은 사언고시(四言古詩)로 250구(句), 합해서 모두 1,000자의 각각 다른 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며 , 우주는 넓고 거칠다"라는 첫 구절이 상징하듯 '천자문'은 중국에서 기원하여 동양적인 사유 체계로 확장해간 중국의 철학 체계, 사상의 역사가 녹아들어 있다. 그런 점에서 천자문은 단순한 아동용 한자 학습서가 아니다.

그간 천자문엔 여러 서예가들의 이름이 붙어왔다. 전세계적으로 글자 자체가 예술의 경지로 평가받는 문화권은 내 개인적인 평가에 국한시키자면 한자 문화권과 이슬람문화권, 그리고 '타이포그라피'란 명칭을 만들어낸 라틴어문화권이 있다. 이슬람 문화권의 아랍문자는 종교적 금기상의 이유로 꾸란의 문자를 장식미로 승화시켰고, 라틴어는 성서를 양피지에 옮겨적는 수도사들의 작업과정에서 역시 장식성있는 알파벳으로 변환되어가며 여러 글자체가 되었다. 이 세 문화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문자를 대했으며 그 차이에 따라 각기 다른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냈다. 알파벳에서의 서체는 활자라는 도구를 통해 기계화되어, 문자의 대량생산에 적합한 형태로 발전해가는 형식이 되었고, 아랍문자는 아라베스크나 모스크의 입구를 장식하는 꾸란의 글귀처럼 회화나 조각을 대신하는 미적 대체제로 발전해갔다. 그에 비해 한자는 특정한 종교나 대량생산 방식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 되었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놓치지 말고 주목해야 할 것은 동양에서는 글씨가 한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 즉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인격 도야의 도구로서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옛 선인들이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강조한 것은 단지 한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 자체로서의 의미보다는 이 기준에 맞춰  자신의 인격을 도야하는 잣대로 삼으란 뜻이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때의 身은 단순히 풍채나 용모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자세와 올바른 몸가짐을, 言은 말의 들고 남에 있어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할지를,  書는 단지 글씨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글이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따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왕희지의 천자문, 한석봉의 천자문도 있는데 구태여 김성동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다시 천자문을 썼을까?

3.
앞서 이 책의 저자인 소설가 김성동의 "위험한 가계(?)"를 이야기한 것은 그것이 이 책에 상당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김성동의 "천자문"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천자문"이면서 동시에 소설가 김성동의 산문집이기도 하다. 시인은 시를 통해 말하지만 시를 통해 말하지 못하는 것을 산문을 통해 말한다. 역시 소설가도 소설을 통해 말하지만 소설로 말하지 못하는 것을 산문을 통해 말한다. 우리는 한가한 마음으로 또는 가벼운 기분으로 이리저리 거니는 행위를 산책(散策)이라 말한다. 이때 우리는 "산책"의 "산"자가 산문(散文)의 "산"자와 같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성동 천자문"은 그런 맥락에서 우리에게 "천자문"에 대한 새로운 해석 혹은 이 책 앞에서 어째서 "김성동"이란 이름이 붙는지 설명해준다. 저자는 어려서 한학자인 할아버지에게 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소설 "만다라"의 '법운'처럼 불가에 입문해 번뇌했다. 그렇게 성장한 지은이가 직접 1천 자의 글씨를 쓰고, 이를 다시 '사언고시'를 두 편씩 묶어 문구를 해석하고 그와 관련한 자신의 상념 혹은 생각을 정리하여 에세이 형식으로 쓰고 있다. 이 책은 "천자문" 책이자, 천자문에 대한 해설서, 그리고 저자 김성동의 에세이집의 형태를 지닌다. 그리고 곳곳에 그의 가계사가 드러나고, 당대에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에 대한 저자의 날카로운 비판 정신이 녹아있다.

책 속에는 소설가 김성동의 선친인 김봉한이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가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연희! 내 목숨이나 달음업시 그대를 사랑하오.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귀치 안이하고, 모-든 사람이 다- 목석과 같이 차고 쓸할지라도 ..... 신이여! 사랑하는 나의 안해 젊은 연희의게 가호하심을 앗긔지 말으시고, 연희여! 만리전정에 사시장춘의 행복을 사양하지 말어주오." 저자는 천자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자기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세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은 단지 "천자문"이 아니라 "김성동"의 천자문이다. 책에는 단단한 유학자로 살아온 할아버지의 가르침에 대한 추억과 더불어 '빨갱이 자식(?)'으로 살아가며 그간 숨겨야 했던 저자 김성동의 간난신고와 부친에 대한 애끓는 그리움이 곳곳에 녹아 있다. 국가보안법이 엄존하고 있는 이 땅의 현실에서 국가가 정한 법률은 때로 가족간의 사랑보다 국가에 대한 충성을 우선적으로 강제하는 법 규정을 두고 있다. 알베르 까뮈는 혁명을 지지한다 하더라도 그 총구가 내 어미를 향하면 그에 저항하겠다 하지 않았던가?

비사란야(非寺蘭若·절 아닌 절)가 쓰여 있는 자신의 집 대문 앞에 선 소설가 김성동씨.
(사진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1291729015&code=960205)



4.
그렇다고 김성동의 <천자문>이 저자 자신의 사변에 빠져 신변잡기 수준의 글을 나열하고 있는 그런 책은 아니다. 김성동은 우선 "천자문"의 기본 내용과 형식에 충실하게 임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책 "김성동 천자문"의 판형이 기존 단행본들의 두 배 정도 크기라 들고 다니며 읽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예로부터 "천자문"이란 신언서판의 길로 들어서는 입문서였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책의 판형은 오히려 적당하다 할 것이다. 자고로 천자문은 서안(書案)에 정좌하고 앉아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가며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니던가? 게다가 이 책의 부제는 "하늘의 섭리, 땅의 도리"라 하였으니 마땅히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줄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의 판형이 커진 명목상의 이유라면 실용적인 이유는 천자문, 즉 한자(漢字)는 서예(書藝)라는 생각해본다면 이 책을 미술 서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게다가 이 책에 실린 도판들은 그만한 대접을 받을 만하다. 그래도 초스피드 사회에서 편리성을 강조하고 싶다면 일반 신국판 판형으로 '보급판'도 나왔다고 한다. 하기사 과거 정약용 선생도 누워서 책읽기를 좋아해 손에 들어오는 작은 책을 구해 읽었다고 하니, 보급판을 읽는다고 문제될 일은 없을 터...

올해는 천자문을 다시 손에 잡고, 하늘의 섭리, 땅의 도리를 배우고 익혀보는 것... 무척이나 의미있는 일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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