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공자께서 말씀하길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하라.”





정초에 올해는 『논어(論語)』 공부를 목표로 삼았다고 자신 있게 말했는데 5월말이 되어서야 「학이(學而)」편 마지막 장을 살펴보고 있다. 처음부터 허언(虛言)이 될 줄 알았다지만, 먼저 말부터 하지 않고서는 그나마 스스로에게 한 약속조차 지키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말부터 앞세웠으나 그것을 변명삼지는 않겠다.




「학이(學而)」편 첫 번째 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학이(學而)」편의 처음과 끝은 수미일관(首尾一貫)하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며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며 배우고 익히는 것 자체를 기쁨으로 여기고, 그 가운데 벗이 멀리서도 찾아와 준다면 그것이 곧 나의 즐거움이다.’



얼마 전 나는 성공회대에서 매년 개최하는 매스컴특강에 강사로 초빙되는 영광을 안았다. 성공회대의 매스컴특강은 해마다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서 나름의 일가를 이룬 여러 사람들이 초빙되어 젊은 대학생들을 상대로 강의하고, 강의 내용을 녹취하여 그것을 다시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고 있다. 그런 자리가 나에게까지 왔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대단한 영광이고 한 편으론 커다란 부담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나는 이런 특강이 요사이 젊은 대학생들이 목을 매고 있는 자기계발식 담론으로 흘러가는 것을 경계해야 했다. 자신을 계발한다는 논리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며 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 자기계발론은 사회모순이나 구조적으로 발생하는 실업과 빈곤의 문제까지 자기책임론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양날의 검이다.



신영복 선생은 『강의-나의 동양고전독법』(돌베게, 2004)에서 “노예제 사회에서는 학습이 의미가 없다”고 강조한다. 앞서 공자의 시대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 시대는 전통적인 종법(宗法)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던 격변기였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교육자로서 공자의 위대함은 그가 신분질서에 구애받지 않고 찾아오는 누구에게나 교육의 혜택을 베풀었던 최초의 전문 교육자였다는 점이다. 고대노예제 사회의 지배계층은 혈연으로 지위와 권력이 승계되었으며 처음부터 지배계급으로 양육되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교사가 노예 신분이었던 까닭도 거기에 있으며 동양에서도 노예제 사회하의 지배계급 역시 학교에 가지 않았다. 대개의 교육은 가정에서 이루어졌으며 엄격한 위계질서에 의해 통제되던 시대에는 학업에 의한 결과로 신분이 상승하는 일도 매우 드물었다. 이런 시대에 학습이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학습과는 매우 다른 양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시대는 전통적인 종법질서가 붕괴되던 시대였으므로 출신이나 신분의 고하가 아니라 실력이 가장 중요하고 우대받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춘추전국(春秋戰國),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는 백성들이 전쟁과 부역으로 도탄에 빠진 시대였지만 다른 한 편으론 그동안 백성들을 억누르고 있던 종법질서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신분상승이 가능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공자 자신도 식읍(食邑)을 봉토로 받는 대부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공자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그와 같은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과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는 고대노예제 사회처럼 신분이 고착된 상황일까? 아니면 춘추전국 시대처럼 자유로운 신분 상승이 가능한 시대일까? 이런 시대의 학습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우리 시대를 좀더 거시적인 안목으로 바라본다면 세계적으로는 춘추전국시대이지만, 내부적으로는 고대노예제 사회처럼 신분이 고착되어가는 상황처럼 보인다.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천하를 통일한 진(秦)이 2대를 넘기지 못하고 붕괴한 까닭은 여럿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봉건적 토지제도에 바탕을 두었던 정치경제구조를 급격히 군현제(郡縣制)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충격을 흡수할 만큼 체제가 유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동네구멍가게를 하던 이들은 비록 영세하지만 어딜 가도 소상공인이었고, 사장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SSM(Super Supermarket)이 동네 구석구석까지 차지하고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이들이 몰락해 버리는 것처럼 전국 시대엔 비록 작은 나라였지만 귀족이자 지배계급에 속했던 사람들이 일거에 몰락해버리면서 그에 따른 불만과 불안요소가 팽배해졌다. 그러나 통일 이후 진(秦)이 시행했던 급격한 사회개혁에는 아무런 완충장치도 없었다.



세계화 이전과 이후 제조업의 이윤율이 저하되면서 자본은 자본의 집중으로 이윤을 창출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양극화는 진의 군현제와 마찬가지로 과거 중산층에 속했던 사람들을 급격히 사회적 약자로 만들었고, 과거 노동계층에 속했던 사람들은 고용과 해고의 유연화를 명목으로 비정규직이 되었다. 좋은 직장은 점차 규모가 축소되었고, 이제 젊은이들은 땀 흘려 일해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상황(working poor)에 내몰리고 있다. 사회적 신분상승(좋은 직장)의 길목은 좁아졌지만 이를 추구하는 이들은 줄지 않았으므로 교육을 통해 신분상승의 꿈을 이루려 하는 경쟁은 더욱 극심해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이미 기득권을 쥐고 있는 세력은 이를 대물림하기 위해 막대한 자본을 교육에 투자하고 있다. 구조적으로 교육 불균등 상황을 해소하기 위한 시스템이 취약한 데다 이를 시정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한 상황이므로 취업이나 학업 자체를 포기하는 이들도 출현하고 있다.



공자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하라.”고 했다. 공자의 말은 나의 실력만 출중하다면 언젠가 자신의 실력을 알아줄 사람이 있다는 말이지만 지금의 사람들에게 이 말은 그다지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 듯싶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가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에 대학 4년을 다니면 공부하는 기간만 16년이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 그 대부분을 우리는 공부로 지새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사회에 나오면 필요한 사람이 아닐 수 있다. 나는 공자의 저 말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하라.”는 말의 의미는 겉으로 드러난 실력만 있다면 언젠가 다른 이가 알아줄 날이 온다는 의미 말고 좀더 본질적인 의미가 있다.



현대의 교육은 대부분 직업교육이 되어 버렸다.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어떤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살 것인가?를 배울 기회는 사라졌고, 지금의 교육은 의식주를 마련하는 것이 공부의 가장 큰 목적인 것처럼 배운다. 물론 우리의 육체는 물질이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물질을 섭취해야만 한다. 그러나 16년간 열심히 공부했는데 당장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갈 데가 없고, 취업을 했다손 치더라도 기껏 인턴이고, 정규직으로 채용되었어도 사오정, 오륙도가 되어버리면 우리의 삶은 참 하잘 것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본인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처음부터 출발선이 다른 사람들은 도처에 있고, 우리 사회는 그것을 강제하는 시스템이다. 며칠 전 뉴스를 보니 주식 가격이 떨어졌을 때 대한민국 1%에 속한 사람들은 이번 기회를 이용해 자녀들에게 주식을 물려줘서 7살짜리 아이가 230억원어치 주식을 증여받았다고 한다. 잘못된 자기계발론, 다시 말해 지금까지 내가 아닌 남을 겨냥해 해왔던 공부는 결국 강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착시 현상에 빠뜨릴 뿐이다. 자기 혼자만의 입신출세를 위한 사다리 경쟁은 결국 아무리 노력해도 그 자리에 올라갈 수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내 안의 이기적인 자아가 나의 참된 자아를 착취하는 악순환에 빠뜨리고 마는 것이다.



공자가 「학이편」에서 가르치려 하는 것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며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며 배우고 익히는 것 자체를 기쁨으로 여기고, 그 가운데 벗이 멀리서도 찾아와 준다면 그것이 곧 나의 즐거움’이란 것이다. 공부와 놀이에는 공통요소가 있다. 멀리 우회할수록 성취했을 때의 만족도가 커지고, 그것이야말로 진짜 공부가 된다는 것이다. 판소리 “흥보가”에서 가장 재미있는 대목 중 하나는 놀부가 화초장을 얻는 대목이다. 놀부는 화초장 하나를 얻고 너무 기쁜 나머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화초장 이름을 기억하려고 계속 외운다.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얻었구나. 얻었구나. 화초장 한 벌을 얻었다. 화초장 한 벌을 얻었으니 어찌 아니가 좋을소냐.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또랑 하나를 건너뛰다, 아뿔까, 잊었다. 이것 무엇이라고 허등만요? 응, 이거 뭐여? 뒤붙이면서도 몰라, 초장화? 아니다. 장화초? 아니다. 화장초?”



그런데 놀부는 개울 하나를 건너다 그만 화초장의 이름을 까먹어 버린다. 놀부는 가진 거라곤 물욕 밖에 없는 사람이지만 화초장의 이름을 까먹는 순간부터 화초장은 더 이상 금은보화 같은 물질적인 대상이 아니라 탐구의 대상이 된다. 놀부가 화초장의 이름을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화초장은 욕구와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아니다. 어따, 이것이 무엇인고? 간장, 고초장, 꾸둘장, 방장, 송장? 아니다. 어따, 이것이 무엇이냐? 천장, 방장, 꾸둘장? 아니다.”하면서 놀부는 화초장의 이름을 알기 위해서 제법 먼 길을 돌아간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온 후, 아내에게 “얼른 썩 알아맞춰, 죽이기 전에”라고 말하면서 묻습니다. 놀부 마누라가 “이전에 우리 친정 아버지가 그런 걸 보고 화초장이라고 허던구마”라고 말하자 “놀보가 어찌 반갑던지, 아이고, 내 딸이야!”라고 말한다. 욕심쟁이 놀부지만 그 순간만큼은 공부의 즐거움에 흠씬 빠질 수 있었을 것이다. 공자는 공부를 무엇보다 큰 즐거움으로 여겼지만, 이때의 공부는 입신출세를 위한 공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앎을 사랑하는 일이었으며 이때의 앎이란 지인(知人), 사람을 아는 것이며, 사람을 알고자 하는 까닭은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것(愛人)이고, 애인(愛人)이 바로 공자의 인(仁), 군자가 추구하는 이상이었다.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

- 「안연(顔淵)」 22장



우리는 남을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공부하지만, 그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은 배워서 다른 이에게 나눠주는 즐거움(樂), 다른 이를 사랑(愛)하는 인(仁)을 통해 삶(生)을 즐기는(好)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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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 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먹는데 배부름을 구하지 아니하며 거처하는데 편안함을 찾지 아니하고, 일을 행하는 데는 민첩하지만 말을 삼가며 도를 지닌 이에게 나아가 자신을 바르게 한다면 가히 배움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논어』가 처음부터 끝까지 통일된 순서를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논어』의 가장 첫 머리에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로 시작되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논어』를 통해 드러난 공자의 말과 행동이 일관되게 보여주는 것은 공자가 배움, 공부하는 것을 진실로 사랑했던 사람이란 것이다. 언젠가 농담처럼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지만 좋아하는 것은 다른 대체재를 찾을 수도 있지만, 사랑은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것이란 차이점이 있다. 비록 표현은 ‘好學’이지만 의미는 배움에 대한 사랑이다.

세계 3대 성인(聖人)이니 4대 성인이니 해서 석가모니, 예수 그리스도, 공자를 꼽고, 거기에 더해 소크라테스를 넣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석가모니와 예수 그리스도와 공자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앞선 두 성인이 초월자인데 비해 공자와 소크라테스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고행 끝에 도를 깨닫고 초월자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신이자 대리자로서 지상에 왔다. 이들의 행위는 초월자로서 현세를 넘어선 피안의 세계를 상정하고 있지만 공자에게는 죽음 이후의 세계로부터 오는 후광(後光)이 없다. 또한 공자는 스스로를 성인으로 내세운 적이 없다.

공자는 앎에는 세 단계가 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자(生而知之)는 최상이고, 배워서 아는 자(學而知之)는 그 다음이고,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배우지 아니하는 자는 최하”<계씨편, 9장>라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자(生而知之)가 곧 성인인데, 공자는 스스로에 대해 말하길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도를 안 사람이 아니다(我非生而知之者)”<술이편, 19장>라고 했다. 즉, 스스로 성인이 아니라고 말한 셈이다. 공자에게 있어 배움이란 그 자체가 ‘도(道)’이자 ‘도(道)’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군자(君子)란 이미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배움의 길 위에서 끊임없이 스스로 갈고 다듬어가는 존재, 다시 말해 학생(學生)이었다.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라면 그곳이 어디든 낙원이 된다. 배우는 사람이자 삶으로서의 학생(學生)이 배움을 사랑한다면,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그곳이 어디이든 공부하는데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이다. 또한 스스로 배우는 과정이기에 말로서 얕은 지식을 드러내 보일 필요도 없을 것이며 어딘가 나보다 나은 사람이 있다면 찾아가 묻고 가르침을 얻는 것을 꺼리지 않을 것이다. 그와 같은 과정 속에서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바른 가르침을 얻고 행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배움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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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子曰 禮之用和爲貴, 先王之道斯爲美 小大由之. 有所不行, 知和而和 不以禮節之 亦不可行也.

유자가 말하길 “예의 쓰임은 조화가 귀한 것이니 선왕의 도는 이것을 아름답게 여겨, 작은 일과 큰 일이 모두 여기에서 말미암았다. 그러나 행하지 못할 것이 있으니 조화를 이루는 것만 알고 조화만 이루고 예로써 절제하지 않는다면 또한 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공자 혹은 유가를 생각할 때마다 예법(禮法)의 까다로움이 먼저 떠오르고, 제례(祭禮) 절차를 비롯해 유교적 예법의 번거로움에 대해서는 조상들도 까다롭게 여겨 번문욕례(繁文縟禮)라 할 지경이었다. 심지어 조선시대에는 상복을 1년을 입을 것(기년설)인지, 3년을 입을 것인지를 놓고 예송(禮訟)논쟁이 당쟁으로까지 비화되기도 했다. 『논어』를 공부하며 새삼 느끼는 것은 유교문화권 안에서 ‘예’ 혹은 ‘예법’이 지배이데올로기의 표면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본래 공자가 예를 강조하긴 했지만 유교의 사도 바울이라 할 주자의 성리학에 의해 경직되기 까지 예는 그 자체가 절대적인 덕목이기 보다는 실천론 정도였을 것이라 추측한다.



반드시 공자의 유학이 아니더라도 철학으로 성립된 동양의 사유체계가 추구하는 근본정신은 조화(調和)에 있었다. 조화의 영역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하여 ‘나’로부터 시작해서 ‘우주’로 확장되었다. ‘나’라는 작은 영역에서는 육신의 욕망과 도덕 의지의 대립을 조화시키고, 도덕 의지로써 기질을 다스리고(克己復禮), 다른 한 편으론 자신의 기질이 지닌 잠재적인 에너지를 발현시켜 자아실현의 도구로 삼게 하는 것이었다. 가정에서는 효(孝)를 통해 겸손(悌)과 자애를, 공동체에서는 믿음과 공경을 통한 충(忠)과 신(信)의 덕목으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조화시키도록 했다. 더 나아가서는 인간과 자연(우주)의 관계 역시 일방적인 수혜자와 시혜자의 관계가 아닌 서로에게 보탬이 되는 평등한 입장에서 조화를 추구했다.


“예의 쓰임은 조화가 귀한 것이다(禮之用和爲貴)”라는 말은 형식적 규범인 예(禮)의 근본이 조화에 있으며 조화 역시 인(仁)에 도달하는 하나의 방법이므로 이 둘 사이에는 긴장관계가 형성된다. 예를 너무 강조하면 융통성이 사라져 경직된 형식만 남게 될 것이고, 조화를 너무 강조하면 서로의 구분이 없어지고, 질서가 무너지므로 이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유자는 특히 조화에 신경 쓰느라 예가 무너지는 것이 더욱 문제라고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선왕의 도(先王之道)’ 연결시켜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때의 선왕이란 요, 순, 우, 탕(堯舜禹湯) 등 중국 고대의 성왕(聖王)을 비롯해 공자가 흠모해 마지않았던 주(周) 문왕(文王)일 수도 있다. 다만 이들은 통치자이기 이전에 성군(聖君)이었고, 이들이 행(실천)하는 바는 예를 의식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에 따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영위한 결과이다. 그들이 행한 예는 작게는 개인의 행동으로부터 크게는 국가경영에 이르기까지 예에서 어긋나는 것이 없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었다. 다시 말해 억지스럽게 행하거나 작위적으로 꾸며서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본성을 발현(自由)한 것인데도 그것이 예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는 없기에 우리는 예를 배운다. 스스로 깨우쳐 예의 실천과 본성의 실현 사이에 조화를 이룰 수 없다면 규범을 익히고 몸에 체득시키는 것, 이른바 교육(敎育)의 힘에 의존하라는 것이 유자의 가르침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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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禽問於子貢曰 夫子至於是邦也 必聞其政. 求之與 抑與之與. 子貢曰 夫子 溫良恭儉讓鎰之. 夫子之求之也 其諸異乎人之求之與.
자금이 자공에게 묻기를 “부자(공자)께서는 어느 나라에 가시든지 반드시 그 나라의 정사에 대해 듣게 되는데 이는 스스로 구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준 것입니까?” 자공이 답하기를 “선생님께서는 온화하고, 어질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겸양함으로써 얻으셨으니, 선생님께서 구한 것은 다른 사람이 구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자공(子貢, BC 520 ?~BC 456 ?)은 중국 춘추시대 위(衛)나라 출신의 유학자로 공자가 위나라 망명시절에 문하로 들인 제자라고 추정된다. 그는 공문십철(孔門十哲) - 「학이」편 4장 소개 - 중 한 사람으로 재아(宰我)와 함께 언어에 뛰어난 재질을 지녔다고 한다. 성은 단목(端木)이오, 이름 사(賜)였다. 공자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안회나 훗날 공자를 계승했다고 평가되기는 하지만 공자 문하에는 늦게 들어온 증자에 비해 자공에 대한 평가는 사람들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편이다.
그러나 『논어』에 등장하는 제자들 중 자공과 자로(子路, BC 543~BC 480)가 없었다면 『논어』가 지금처럼 생생한 재미를 선사하기는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안회는 너무나 이상적인 제자였기 때문에 스승인 공자조차도
“안회는 내게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다.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선진」편, 3장>며 재미없어 했다. 자로는 공자보다 9살 아래로 제자 그룹 중에서도 최고 연장자이며 장자가 아쉬워했을 만큼 두각을 나타낸 협객(俠客)이었지만 자공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인물이었다. 그는 본래 무뢰한(無賴漢)이었으나 공자의 문하로 들어선 뒤부터는 순진한 양처럼 공자의 훈육을 따랐다. 비록 등장하는 횟수는 자로가 자공에 비해 앞서지만(자공이 35회) 두 사람 중 누군가를 주연급 조연으로 격상시켜야 한다면 단연 자공이다.

가르칠 때는 좀 힘들지 몰라도 가르치는 재미를 느끼게 하는 제자는 스승을 공경하면서도 뭔가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제자들이다. 그런 점에서 공자 역시 늘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자공에 대해 때로는 적당하게 야단치고, 때로는 자공의 자부심을 부추겨주기도 하면서 제자로서 자공을 사랑했다. 자공은 늘 공자와 대립각을 형성하지만 평생을 두고 공자에 대한 존경과 흠모를 거두지 않았으며 공자의 생전에는 언제나 묻고, 또 물어가며 배움의 갈급함을 채워가는 제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논어』에 자공이 빠진다면 시쳇말로
“공자왈 맹자왈”하는 교훈적인 이야기로 가득한 엄청 재미없는 책이 될 뻔했다.

「학이」 10장에서 자공에 질문하고 있는 자금(子禽)은 『사기열전』에 공자의 제자로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공의 제자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그러나 『열전』에 오르지 않았다고 해서 자공의 제자일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그도 공자의 죽음 이후 오랫동안 공자 문하에 남아있던 유학자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금은 성은 진(陳)이고 이름은 항(亢)으로 자공에게 묻고 있는 질문의 내용을 보면 성품이 자공 못지않게 외향적이며 도발적이었으리라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다만 자공이 공자와 나눈 문답의 내용에 비해 자금의 질문은 질이 좋지 않다.

자공의 제자란 추측이 나오는 까닭도 공자의 직접 제자라면 어떻게 저런 질문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인데,
‘공자가 이 나라 저 나라 떠돌며 그 나라 정사에 대해 지분거렸는데 이건 관직이라도 하나 구해보려고 한 것이 아니냐?’는 투의 물음이기 때문이다. 비록 자공이 공자 생전에는 외향적인 성품과 이재(理財)에 밝은 탓에 가끔 공자의 잔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공자 사후 3년간 무덤을 지켰고, 다른 제자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3년을 더 남아 여묘했던 인물이라는 점만 놓고 보더라도 자금과 자공은 격이 다르다. 자공은 생전에 공자는 허명(虛名)뿐이며 실제로는 제자인 자공이 공자보다 낫다는 평을 듣기도 했으나 자공은 스승 공자를 받드는 일을 한 번도 등한히 해본 적이 없었다.

“자공은 중니(仲尼, 공자)보다 낫다”고 숙손무숙(淑孫武淑)이 이야기하자 자공은 “궁실의 담장에 비유하면 나의 담장은 어깨에 미치므로 집안의 좋은 것을 들여다볼 수 있지만, 선생님의 담장은 여러 길이므로 그 문을 열어서 들어가지 못하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풍부함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간 자가 적으니 그 사람의 말이 또한 당연하지 아니한가?”<「자장」, 23장>

「자장」편에는 숙손무숙이 두 차례, 「학이」 10장에 등장하는 자금(子禽)까지 등장해서
 '솔직히 말해보라며 자공 그대가 실은 공자보다 낫지 않느냐' 고 도합 세 번을 묻는 장면이 있다. 마치 예수가 체포된 직후 베드로가 첫 닭이 울기 전까지 세 차례 예수를 부인할 것이란 『성서』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대목인데, 자공은 단 한 번도 공자를 부정하거나 자기보다 낮춰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공은 도리어 성을 내며 “공자는 해와 달과 같아서 헐뜯을 수 없고, 넘어설 수 없다”, “선생님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은 마치 하늘에 계단을 놓아 올라갈 수 없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자공은 공자의 문하에 들어설 당시에도 이미 상당한 부를 축적한 상인이었을 것이다. 공자는 젊을 적을 말고는 별도의 직업(관직)을 가져본 적이 거의 없는 인물이었다. 요즘 같으면 스승이 제자를 기르는 일도 직업이 될 수 있었으나 춘추시대엔 가르치는 것만을 전담하는 직업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교육이란 지배계급에 속하는 귀족들만의 몫이었고, 귀족들은 실제 통치자였기 때문에 자기 자식을 제외하고 누군가를 가르칠 여력도, 이유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도 공자는 최초의 스승이었다.

하지만 자공의 재력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공자는
“사(賜)는 타고나지 않았는데도 재화를 늘렸다. 예측하면 잘 맞았기 때문이다.”<「선진」편, 18장>라고 자공의 재산증식 능력을 평했다. 자공은 뛰어난 상인으로 공자의 유세를 후원했다. 공자가 열국(列國)을 떠돌았다고는 하지만 위나라를 중심으로 놓고 그 주변을 순회했다는 점만 놓고 보더라도 자공의 경제적 도움이 얼마나 중요했을지 추측해볼 수 있다.

“자공은 사두마차에 올라 기마행렬까지 어마어마하게 이끌게 했다. 비단 꾸러미를 예물로 가지고 다녔으므로 여러 제후들로부터 초빙되었으며 또한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그가 방문하는 나라의 왕자들은 몸소 뜰로 내려와 대등한 예의를 그에게 베풀어야 했다.”

위에 나오는 내용은 『사기』의 기록이다. 자공은 공자가 열국(列國)을 유세할 때 공자의 물질적 후원자가 되었으며 제후들에게 선물과 같은 선심공세를 펼쳐 스승의 유세를 도왔다. 그렇다고 자공이 단순히 이재에만 밝은 인물은 아니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노나라가 제나라로부터 침공의 위기를 겪을 때 자공의 다섯 나라를 돌며 유세한 결과에 대해 기록하고, 자공이 쌓은 부에 대해서는 별도로 「화식열전」에서 다룰 지경이었다.

“자공이 한번 유세를 떠나니, 노나라는 사직을 보존하고(魯國存), 제나라는 엉망되고(齊國亂), 오나라는 멸망하고(吳國亡), 진나라는 강성해지고(晉國强), 월나라는 패자되었다(越國覇).”


공자를 능가한다는 평을 받은 자공이었다. 만약 공자가 자공을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공자가 열국을 주유할 수 있었을까? 공자의 사후 공자 교단이 존속하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공자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묻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질문은 반대로 공자의 존재가 없었다면 과연 자공이 기억될 수 있었을까를 물어볼 필요가 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질서가 엄격한 사회였다. 비록 송(宋)대에 이르러 중국의 상인 계급이 급성장하기는 했지만 중국의 지배계급은 상인계급의 성장을 적절하게(?) 통제하는데 성공했다. 도리어 그것이 결과적으로 서구와 달리 근대화, 자본주의의 길로 접어드는 것을 방해한 것이긴 하지만 봉건질서의 입장에서는 매우 성공적인 통제였다. 

춘추시대가 봉록과 정전제라는 경제 질서의 파괴로 인해 출현한 것이지만 여전히 상인의 지위는 귀족들의 지위에 비하면 형편없었다. 춘추시대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좌전』에는 이 시대 상인들의 지위가 어떠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 있는데 귀족과 상인 사이의 맹세의 내용이다.
‘너는 나를 배반하지 말고, 나는 너의 물건을 강제로 사지(강탈하지) 않겠고, 구걸하거나 강탈하지 않겠고, 네가 장사에서 이문을 남겼거나 값진 보화를 소유하더라도 참견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얼핏 보기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이것을 맹세로 남길 정도라면 실제 상인들의 처지가 어떠했을지 짐작할 만하다.

앞서 공자는 자신만의 학설을 가르치지 않고, 많은 것(六藝)을 접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공자는 단순히 여러 학문을 배울 수 있도록 한 것뿐만 아니라 누구나 차별 없이 가르친(有敎無類)<「위령공」, 38장> 스승이기도 했다. 공자는 스승에 대한 속수(束脩, 육포 열 개를 묶은 것)의 예(禮)만 나타낸다면 위로는 사마우(司馬牛) 같은 대부 출신부터 아래로는 세간의 낮은 평가를 받는 사람까지 가르쳤다. 자공 역시 상인 출신으로 공자가 아니었다면 학문하는 자로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며, 훗날 제후들과 교류하며 유세가로서 『사기』에 기록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자공이 공자의 덕을 높이 흠모한 까닭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자공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뒷부분에서 다시 다뤄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쯤에서 간단하게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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曾子曰 愼終追遠 民德歸厚矣.
증자가 말하길 “부모의 장례를 정성껏 모시고 먼 조상까지 추모하여 제사를 지내면, 백성의 덕이 두터워질 것이다.”


신종추원(愼終追遠)의 신종이란 부모의 장례에 예를 극진히 하는 것을 말하고, 추원이란 부모의 조상에 이르기까지 오래 되어도 잊지 않고 추모하여 제사를 받드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종교적인 이유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더라도 가까운 사람을 잃고 추모하는 마음을 품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것이 인정(人情)에 해당하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認定)하는 것과 달리 이것이 조상이 아닌 조상신을 받드는 행위로 이해되는 것은 공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매우 억울할 것이다.

공자를 가리켜 세계 최초의 인본주의(人本主義) 사상가라고 하는 이유는 그가 제사지내는 일조차 인간의 일이지 조상신(귀신)을 받드는 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해 상상하게 되면서 인류는 비로소 오늘이 아닌 내일을 사는 존재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다시 청동기로 넘어가는 도구의 혁명보다 더 큰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인간의 의식이 처음 열리고 자연에 의해 지배당하던 시절의 인류는 자연(우주만물)의 모든 질서를 관장하는 것이 신(神)이라고 여겼다. 신의 존재는 세상 만물에 조화(調和)를 제공하고, 정당성을 부여했다. 다시 말해 임금은 임금이오, 신하는 신하이고, 백성은 백성으로서 존재하도록 하는 질서는 하늘이 내린 것이란 말이다. 따라서 임금은 하늘의 뜻을 받드는 자로서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신에게 제물을 올리는 제례를 봉행함으로써 인민을 단속하는 방편으로 삼았다.

영성(靈性)이란 말은 종교 간의 차이를 떠나 인간이 세상 만물을 지배하는 초월적인 대상과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로서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지금은 판타지와 신화의 세계에서나 엿볼 수 있는 것이 되었지만 고대에 사람과 신령은 서로 교통할 수 있는 존재였다. 소크라테스 이전에 이미 소피스트들이 존재했던 것처럼 공자가 제사조차 인간의 도리일 뿐이라고 설파하기 전에 이미 중국에는 인본주의의 싹이 움트고 있었다. 춘추시대에 이르러 이미 중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귀신의 존재에 대해 믿지 않았다. BC 722∼BC 481년의 역사를 다룬 『좌전(左傳)』에는
“나라가 장차 흥하려면 백성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나라가 장차 망하려면 귀신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國將興, 聽於民. 將亡, 聽於神)”고 했다.

공자 역시 몇 차례에 걸쳐 귀신에 대해 말하는데 그의 기본적인 자세는 공경하되 멀리하는(敬而遠之), 실증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면 믿지 않는다(無徵不信), 괴이한 일과 완력에 대한 것,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 그리고 귀신에 관한 것은 말하지 않는다(存而不論)는 것이었다.

樊遲問知. 子曰 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之義.
번지가 안다는 것이란 무엇인지 물었다. 공자가 말씀하길 “인간의 도리에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 하면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논어』, 「옹야(雍也)」편, 20장>

子曰 夏禮, 吾能言之, 杞不足徵也. 殷禮, 吾能言之, 宋不足徵也. 文獻不足故也. 足則吾能徵之矣.
공자가 말씀하길 “하나라의 예에 대해서는 내가 능히 말할 수 있으니 (그 후예인)기나라의 것은 실증하기에 부족하며 은나라의 예는 내가 능히 말할 수는 있으나 (그 후예인)송나라는 그것을 실증하기에 부족하다.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들이 충분하다면 내가 능히 실증할 수 있을 것이다.” <『논어』, 「팔일(八佾)」편, 9장>

子不語怪力亂神
공자는 괴이한 일과 완력에 대한 것,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 그리고 귀신에 관한 것은 말하지 않았다. <『논어』, 「술이(述而)」편, 20장>

이런 공자였으므로 유교적 의미에서의 제례가 조상을 신적인 존재로 떠받들도록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에 가깝다.
그런데 먼 조상까지 추모하여 제사를 지냄으로써 백성의 덕이 두터워질 것이란 말은 무슨 뜻일까? 단순히 공자 시대의 사회경제적 조건으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는 일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와 같은 해석은 또 그 만큼 소박한 것이기도 하다. 공자 자신이 효제(孝悌)를 중요한 실천 덕목으로 하도록 가르쳤으므로 조상의 사후에도 공경함을 다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긴 하다. 일단 소박하게나마 살펴보자. 공자가 살았던 춘추(春秋)시대의 주(周) 왕실은 이미 이름만 남은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주 왕실로부터 분봉(分封)된 제후국들 대부분 - 제(齊)와 송(宋)을 제외하고 - 은 주 왕실과 같은 성씨인 희(嬉)성이었다. 그들은 제후로서의 권위와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주의 권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실력을 으뜸으로 치던 전국(全國)시대에 비해 춘추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씨족공동체의 유습이 강하게 살아남아 있었던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종법(宗法) 질서는  주 왕실과 공통의 조상을 모시고 있는 각 제후국들에게 정치적 정당성을 담보해주는 중요한 체제였다. 그러므로 조상에 대한 제례의식은 혈연공동체를 강화하고 주 왕실과 각 제후국들을 유지시켜주는 중요한 정치행사였을 것이다. 공자 역시 제례를 중시했으나 다른 제자백가들에 비해 심한 것은 아니었고, 그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앞서 말한 것이었다. 공자 역시 제사를 받들 때에는 눈앞에 조상이 있는 듯 하고, 신에게 제사를 올릴 때에도 역시 그러한 것처럼 행하라 일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선을 다하란 의미였지 그 존재 자체를 믿으라는 말은 아니었다.

공자와 묵자(墨子)는 모두 춘추전국시대의 사회적 상황을 도덕이 땅에 떨어진 무도(無道)하고, 불인(不仁)하고, 불의(不義)한, 이기적이고 파멸적인 상황으로 보았다. 두 사상가가 현실에 대해 내린 진단은 사실상 거의 동일했지만 이에 대한 해법은 상당히 달랐다. 그 중에서도 귀신의 존재에 대해 공자는 앞서 말했던 것과 같은 태도를 취했으나 묵자는 「명귀(明鬼)」(귀신의 존재를 밝히다)편에서 세상이 이처럼 혼란스러워진 까닭은 세상 사람들이 귀신의 존재에 대해 의혹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귀신은 신상필벌(信賞必罰)의 대행자이기에 존재하는 것인데 세상 사람들이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으므로 이기적이고 파멸적인 상황이 초래되었다는 주장이다.

비록 『논어』와 마찬가지로 『묵자』 역시 진위(眞僞) 여부
(「겸애」와 「비공」편을 제외하고는 후세의 첨작으로 생각된다)는 물론 이후 300여년에 걸쳐 만들어진 책으로 추측되고, 이것이 묵자가 반드시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기 보다는 귀신의 존재를 통해 겸애의 마음을 가다듬는 방편으로 삼으려 한 것이라 이해한다 할지라도 공자의 태도에 비해서는 확실히 비합리적인 것이었다. 공자는 이전까지 귀신의 일에 해당하는 제례와 같이 조상을 받드는 일조차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보은지의(報恩之義)로 보았으므로 그 자신이 실제로 원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임금의 권위조차 신에게 부여받은 정통성(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아니라 인간에 의한 일이 되었다. 겸애와 평화를 주장한 묵자가 후세에 와서는 도리어 현실순응적인 태도로 변화(혹은 상명하복의 전체주의적 강자의 논리화)하는 것을 보면 공자의 합리적인 인본주의적 태도는 도리어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진보적이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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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 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공자가 말씀하길 “군자의 몸가짐이 장중하지 못하면 위엄이 없어지고, 그 학문도 견고하지 못하게 된다. 충성과 신의를 중심으로 행동하며, 자기만 못한 자를 벗으로 삼지 말라.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라.”


『논어』의 「학이」편 8장은 「학이」편 6장
“제자들은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하도록 하라. 행실을 삼가하고 믿음이 있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진 이를 가까이 하라. 이를 행하고서 남은 힘이 있으면 글을 배우도록 해야 한다.(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8장의 군자(君子)는 6장의 제자(弟子), 다시 말해 ‘학문하는 자’를 의미하고, “군자의 몸가짐이 장중하지 못하면 위엄이 없어지고, 그 학문도 견고하지 못하게 된다(不重則不威 學則不固).”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하도록 하라(入則孝 出則弟).”에 해당한다. “충성과 신의를 중심으로 행동하며, 자기만 못한 자를 벗으로 삼지 말라(主忠信 無友不如己者).”는 “행실을 삼가하고 믿음이 있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진 이를 가까이 하라(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라(過則勿憚改).”“이를 행하고서 남은 힘이 있으면 글을 배우도록 해야 한다(行有餘力 則以學文).”와 서로 연결된다.

가정의 도리가 효제(孝悌), ‘정이 주가 되고 논리가 그 뒤를 따르는 것(情主理從)’이라면 사회의 도리는 충신(忠信), ‘논리가 주가 되고 정이 그 뒤를 따르는 것(理主情從)’이라 할 수 있다.

子曰 主忠信 毋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공자가 말씀하길 “충성과 신의를 중심으로 행동하며, 자기만 못한 자를 벗으로 삼지 말라.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라.” <「자한(子罕)」 24장>

「자한」 24장에서는 없을 무(無)를 말 무(毋)로 바꿔놓았을 뿐 같은 말이 반복된다. 이처럼 앞의 가르침이 뒤에서도 반복되는 경우는 『논어』에서 상당히 많은 편인데 특히 배움의 자세에 대한 공자(孔子)의 각별한 배려와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논어』는 기본적으로 스승인 공자와 제자들의 대화를 통한 훈육의 과정을 담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사실 「학이」 8장의 가르침에서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자기만 못한 자를 벗으로 삼지 말라(無友不如己者)”이다.

공자는 “세 사람이 함께 가면 그 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으니, 좋은 면을 골라 그것을 따르고,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나의 허물을 고친다(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술이(述而)」, 21장>고 했다. 공자는 자기만 못한 자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으니 스승으로 삼도록 가르쳤으나 자기만 못한 자를 벗으로 가까이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공자는 어째서 그렇게 가르쳤던 것일까? 공자가 자기만 못한 자를 벗으로 삼지 말라고 가르친 까닭은 공자가 생각하는 ‘벗’의 의미가 단순히 동학(同學)의 의미가 아니라 동지(同志)의 개념이기 때문이었다. 「안연(顔淵)」편 24장에는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인을 돕는다(以文會友 以友輔仁).”고 했다. 글이란 자신의 뜻을 펼치는 것이고, 뜻이 맞는 이들과 벗을 맺고, 함께 인을 돕는다는 것은 실천행위를 의미한다.

공자는 인의도덕(仁義道德)의 이상을 실현하는 방편(실천의 방식)으로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강조했다. 그러나 ‘효제충신’이란 것이 개인적인 실천의 방식이라 조금 부족했다고 여긴 탓인지 공자를 계승한 맹자(孟子)는 사회적인 실천을 강조한다는 의미에서 『관자(管子)』에게서
“예의염치(禮義廉恥)”를 따온다. 맹자에게 있어 정치란 인(仁)을 실제 현실에서 실현하는 것이므로 유학자들은 당연히 정치인이자 관리였다. 도덕주의적인 담론만으로 통치에 임할 수는 없었기에 맹자는 관자의 구체적인 실천방식도 유학에 도입했다. 예의염치란 본래 관중의 말을 기록한(엄밀하게 말해 『관자』가 관중이 저술한 책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관자』 「목민(牧民)」편에 나오는 국가지도(國家之道)의 사유(四維)에 해당하는 말이다.

사유란 국가를 지탱하는 네 가지 도리란 말인데, 관자는 이 중에서 한 벼리가 끊어지면 국가가 기울고, 두 벼리가 끊어지면 국가가 위태해지며, 세 벼리가 끊어지면 국가가 전복(顚覆)되고, 네 벼리마저 끊어지면 국가는 멸절(滅絶)되고 만다고 경고했다. 첫째가 예(禮)이고, 둘째가 의(義)이며, 셋째가 염(廉)이고, 넷째가 치(恥)인데 이것이 예의염치(禮義廉恥)다. 관자는 예란 절도를 넘어서지 않는 것(不踰節), 의란 벼슬(출세)을 쫓아 스스로 나아가지 않는 것(不自進), 염은 악을 숨기지 않는 것(不蔽惡), 치는 굽은(잘못된) 것을 좇지 않는 것(不從枉)을 의미한다. 관자는 물론 맹자 역시 법에 의존한 통치에 앞서 예의염치를 통해 사회기강을 바로 세우고, 이를 통해 국가기강을 확립하고자 했다.

후세의 유학자들은 유학은 왕도(王道)의 길이고, 관자는 패도(覇道)의 길이므로 관자를 멀리하라 가르치고, 관자를 멀리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지만 이것은 배울 수 있다면 누구에게라도 배우라던 공자의 본래 의도가 아니었다. 공자의 제자가 비록 3,000명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람 많은 중국에서 3,000명의 제자는 별로 많은 수가 아니었다. 노나라에서 죄를 짓고 발뒤꿈치가 잘리는 형벌을 받은 왕태(王駘)라는 자를 추종하는 자가 공자의 제자와 맞먹었다고 전해지고, 실존 유무조차 불명확하긴 하지만 공자의 최대 라이벌이었다고 할 수 있는 소정묘(少正卯, ?~BC 496)의 변설에 놀아난 공자의 제자들이 그에게 휩쓸려 안연만 빼놓고 모두 몰려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공자는 누구나 차별 없이 가르쳤다. 당시 공자와 경쟁관계에 있던 제자백가(諸子百家)들과 공자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제자백가들은 모두 자신만의 학설을 중심하여 가르치고 배우도록 하였지만 공자는 제자들에게 각종 서적을 가르쳤고, 각종 과목(六藝)을 널리 배우도록 했다는 것이다. 공자의 수제자였던 안연은
“글로써 나를 넓혀주시고 예로써 나를 단속해주었다(博我以文, 約我以禮).” <「자한」, 10장>고 했다. 이는 공자가 자신의 학파를 넓히려 하기보다 국가와 천하를 위한 인재양성에 본래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후세에 이르러 유학(儒學)이 유교(儒敎)로 변모하며 유연함을 잃기는 했지만, 공자의 가르침이 2,500년의 시공을 초월해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생생한 가르침으로 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기본적으로 그의 가르침이 유연하고 융통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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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
공자께서 말씀하길 “제자들은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하도록 하라. 행실을 삼가하고 믿음이 있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진 이를 가까이 하라. 이를 행하고서 남은 힘이 있으면 글을 배우도록 해야 한다.”

살다보니 느끼게 되고, 알게 되는 것 중 하나가 일류대학 나왔다고 해서 삶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행복한 것도 아니며, 지혜가 생기는 것도 아니더라는 사실이었다. 만 권의 책을 읽어도 때때로 허망하며, 세상에 대해 한 가지를 알게 되면 열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겼다. 많이 알아갈수록 고독했다. 사실 이것은 공자의 삶이기도 했다.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으며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隣)”고 하였지만 공자는 생전에 예수가 나사렛마을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것처럼 세상의 인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공자만큼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상가는 없었다. 그러나 공자는 제자들에게 공부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가르쳤다. 효제충신(孝悌忠信)을 다한 뒤에, 다시 말해 덕행(德行)을 실천한 뒤에도 여력이 있거든 글을 공부하라(行有餘力 則以學文)고 가르쳤다. 공자가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朝問道, 夕死可矣)”고 한 말은 진심이었다. 그에게 있어 공부란 세속적인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람이 되는 공부였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살아가지 못할 바에야 그 삶이 어찌 인간의 삶이라 할 수 있겠느냐고 공자는 그렇게 가르쳤다. 공자는 공부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다. 공부를 한 자로서의 처신이 어떠해야 하는지 - 들어와서는 효를 실천하고, 나가서는 공손하도록 처신하며, 행실을 삼가고 믿음이 있게 하라 - 배움의 진정한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 애중(愛重)하고 친인(親仁)하는 것 - 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청소년 중 84%가 대학교육을 받는 시대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육은 부모 세대가 성취한 계급적 성취의 조락(凋落)에 대한 공포, 자식 세대에서는 쓰레기가 되는 삶에 대한 공포를 가속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

현재 우리 사회의 교육은 당신의 삶이 어째서 보잘 것 없는가에 대한 피난처 역할을 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 이유는 당신의 자식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고, 당신의 아버지가 부자가 아니며, 당신의 어머니가 적극적인 뒷바라지를 하지 않았다. 그 결과 당신은 일류대학을 나오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신의 삶은 쓰레기가 되고 있다고 가르친다. 우리 교육이 위기인 진정한 이유는 글로벌스탠더드에 맞는 인재를 키워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나머지를 쓰레기가 되도록 하는 교육, 그에 대한 적당한 핑계가 바로 교육이 되도록 하는 것이 위기의 본질적인 원인이다. 비록 세속적인 의미에서 부유하지 못해도, 출세하지 못하였더라도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우리 교육이 나아가야 할 본령(本領)일 것이다.

배우는 학생을 일컬어 제자(弟子)라 한다. 이 말의 본래 뜻은 자신의 아우와 자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내 아우, 내 자식의 삶을 쓰레기처럼 여기도록 하고 싶은 스승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라 인정해버린다면 우리는 지금의 이 상황을 영원히 극복할 수 없다. 맹자는 “학문하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다. 놓쳐버린 자기 마음을 다시 찾는 것일 뿐이다.(學文之道無他, 求其放心而已矣. 고자 상)”라고 했다. 경제적으로 궁핍할 수는 있어도 마음까지 궁핍하게 만들지 않는 것, 그것이 교육이 지닌 진정한 힘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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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공자가 말씀하길 “말을 교묘하게 꾸미고 얼굴빛을 좋게 하는 자는 어진 이가 드물다”


교언(巧言)이란 말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고, 영색(令色)이란 낯빛을 좋게 꾸미는 것을 말한다. 어디선가 신사와 바람둥이는 한 끗 차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이왕이면 같은 이야기라도  듣기 좋게 이야기해주고, 듣기 싫은 이야기를 들었더라도 그 표정을 숨길 줄 아는 사람이 편하다. 세상을 너무 곧이곧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위인전에서 읽을 때는 좋지만 실생활에서 맞닥뜨리거나 함께 일하게 된다면 그런 사람만큼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존재도 드물다. 공자가 말하는 교언영색이란 말을 꾸미거나 낯빛을 좋게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진실하게 처신하란 말이다.


『논어(論語)』 자로(子路)편 27에는 인(仁)에 대해 “剛毅木訥近仁”이라 하여 인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좀더 자세히 소개하는 대목이 있다. 강(剛)이란 사사로운 욕심 없이 강직한 것을 의미하고, 의(毅)란 뜻이 굳세어 의연하다는 것을 뜻한다. 목(木)이란 꾸미지 않아 질박한 것을, 눌(訥)이란 말이 어눌한 것을 의미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곧 인이라 하지는 않았다. 다만 비록 이것이 인은 아닐지라도 인에 좀더 가까운 품성이라는 뜻이다.

앞서 공자에게 있어 인(仁)이란 ‘내 안의 본성을 깨우쳐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소박하게 정의한 적이 있다. 공자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생각하는 성선설(性善說)에 가까운 편이었다. 물론 그는 기본적으로 현실적인 합리주의자였지만….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라고 말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쉽고 간단한 말이지만, 막상 인간은 본래 이기적인 본성을 지녔다고 입증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당장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조차 품지 못하는 인간도 세상엔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공자는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한 자는 남을 사랑할 수 없으며, 남과 더불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고 여겼다. 스스로를 냉정하게 돌이켜볼 때 그다지 본성이 선한 존재라고 여기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에겐 우선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깨우치지 못한 자로서 내 안의 본성이란 쉽사리 온갖 욕망과 잡념들로 들끓고, 유혹에 쉽사리 흔들리고 만다. 거친 바다처럼 출렁이는 마음 밭 속에서 영혼은 언제나 낮은 포복 중이다.

‘인’을 남녀의 사랑으로 치환해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라 해보면 교언영색의 의미는 좀더 명확해진다. 최소한 내 경험으로 보아 사랑이란 말을 이루는 주성분의 99.9%는 헛된 맹세였다. 사랑이 깨진 뒤에야 비로소 나의 모든 말이 교언이었으며, 나의 좋은 낯빛은 영색이었음을 알게 된다. 나의 사랑만큼은 진실하다고 말할 수 없다면 그는 공자가 말하는 세상의 어진 이가 아닌 셈이다. 그래서 공자는 세상에 어진 이가 드물다고 했는지 모른다.

스스로의 본성을 깨우치는 일조차 어렵거늘, 그와 같은 마음으로 나뿐만 아니라 남도 사랑하라는 공자의 가르침 속에 나타나는 인(仁)이란 실천하기가 참으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인간의 진심(眞心)과 진심 사이에도 벽이 있나니, 사랑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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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라 하지 않겠는가?” 『논어(論語)』 - 학이(學而)편



새해 목표 중 하나로 『논어(論語)』 읽기를 삼았다. 감히 논어 공부라 하지 못한 까닭은 여럿이 있지만 논어 첫 머리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공자에게 있어 공부, 즉 학습(學習)이라는 것은 배우고 익혀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익혀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인데, 이때의 습(習)이란 자전거를 타는 것과 흡사하다. 로봇 공학에서 가장 힘든 것 중 하나가 로봇으로 하여금 인간처럼 이족보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란다. 사람도 생후 10개월이 지나야 간신히 걸음마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을 보면 걷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닌 셈이다.


걸음마가 일종의 본능에 해당한다면 자전거 타는 것은 본능이 아니므로 배우는 과정에서 걸음마와 같은 난이도를 가졌지만 공부와 가장 흡사해 보인다. 몇 차례고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해야만 균형을 잡고 움직일 수 있다. 자전거를 한 번 배운 사람은 잘 타고 못 타고의 차이야 있겠지만 세월이 가도 자전거를 다시 탈 수 있다. 자기 몸에 자전거 타기가 온전히 익은 탓이다. 습(習)이란 흰 새가 날갯짓하는 것을 본 따 만들어진 말이다. 공부란 그저 배우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익혀서 온전한 내 것을 만든다는 말이니 감히 논어를 공부한다고 말하지 못하였다. 공자는 자장(子張)편에서 “日知其所亡 月無忘其所能”이라 하여 “수시로 익혀 날마다 모르는 것을 날마다 그 모르는 것을 알아가고 달마다 그 할 수 있는 바를 잊지 아니할 때” 비로소 그 배운 것이 몸에 익어 완전히 내 것이 된다고 했다.

『논어』에 대해서는 인터넷을 약간만 검색 해봐도 숱한 정보들이 나오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이야기도 상당수는 결국 동어반복일 수밖에 없다. 원래 공부를 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술이부작(述而不作)’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한데 내 경우엔 앞으로도 그 경지에 이를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는 까닭은 누군가에게 알아달라고 하기 보다는 나 자신을 위해서일 뿐이다.

『논어』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대부분 공자의 사후에 그의 제자들이 공자의 말씀을 정리한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 『논어』는 공자의 죽음 직후에 편찬된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400여년이 흐른 뒤에 엮인 것들이다. 따라서 책에 수록된 내용 중 정말 공자가 한 말이 맞는가 여부를 놓고 현재까지도 논쟁이 빚어지는 말들도 상당수가 있다. 그런 점은 『성서』와 흡사한 측면이 있다. 개인적으로 공자를 높이 평가하는 것 중 하나는 그가 종교를 세우지 않았다는 점이다. 공자의 생존 당시는 물론 그의 사후 현재까지도 인간세계에서 주술적 세계관(혹은 광신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공자는 고도의 합리적 사유를 바탕으로 인간 본위의 이성적 세계관을 확립한 인물로서 이후 우리가 유학(유교)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부분도 더욱더 파격적이고 현실적인 합리주의자였다고 생각한다.

『논어』에 각각의 편들은 해당 편의 첫머리에 나오는 것을 따서 붙인 것이다. 『논어』의 구분을 이루는 각각의 편(編)들은 사실 체계적인 것이 아니므로 『논어』의 어느 부분부터 읽어도 무방하다 할 수 있으나 처음 『논어』를 엮을 시기의 사람들이 이와 같은 점을 고민하지 않았을 리 없다는 점을 생각하고, 내가 이보다 나은 독서법을 알 수 없으리라 생각해 일단 차근차근 읽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까닭으로 『논어』에는 앞과 뒤의 이야기가 다르거나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상당히 많다. 수천 년을 이어온 동양의 고전임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논어』에 대해 주석을 달려고 하는 시도가 있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또 한 가지 미리 밝혀둘 만한 것은 『논어』를 비롯한 사서(四書)에 주석을 단다는 것은 유교 질서가 지배한 동아시아에서는 사상가로서 입론(立論)한다는 뜻이기도 하며, 고려 시대 한반도에 유학이 전해진 이래 지금까지 이것을 실천에 옮겼던 이는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뿐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13경에 주해를 단다고 하니 그로서는 동양학 전공자로서 필생의 업적에 도전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찌되었든 “學而時習之, 不亦說乎”가 『논어』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혼자 생각하기에 이 문구가 가장 첫 머리에 온 까닭은 이 말들이 공자의 일생과 목표를 압축적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습(習)이 배움의 실천적인 태도와 상태를 의미한다면,  학(學)이란 말은 단순히 배운다는 것이 아니라 앞서 읽었던 『대학(大學)』에 나오는 바로 그 학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親民하며, 在止於至善하니라.
큰 가르침의 길은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과 하나 되는 것에 있으며, 지극히 선한 상태에 머무르는 것에 있다. <『대학』, 經一章>


공자는 뜻을 품었으나 그것을 정치에 직접 반영해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는 점에선 매우 불행한 인물이었다. 공자는 덕이 높았으나 그의 생전에는 별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13년간 방랑했으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참담한 좌절감뿐이었다. 제자 키우는 것을 군자의 삼락(三樂) 중 하나로 높이 평가했으나 학문적 계승자였던 안회(安回)를 잃고, 예수에게 베드로라 할 수 있는 자로(子路)마저 앞세워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학문을 배우고 익혀 덕이 높아지면 외롭지 않다(德不孤 必有隣一)”<이인>이라 하였고, “학문을 통해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이 모여 나의 부족함을 보완해준다(以文會友 以友輔仁)<안연>”이라 했다. 이처럼 학문하기를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그였지만 생전엔 사람들이 따르지 않았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에 노여워하고 비탄에 잠겼더라면 오늘날의 공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공자는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하여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고, 그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배움은 나 자신을 완성하는데 뜻이 있지, 남에게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헌문>”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을 기르며 홀로 고독하게 자신의 학덕을 연마했다. 하지만 고향에서 후학을 얻어 기르는 것만으로는 대학의 큰 길(大學之道)을 이루는 것은 아니었다. “군자는 세상의 도가 행하여져 학문이 인정받고 쓰여지게 되면 나아가 천하만민을 위해 배운 바를 다 펼칠 것이요, 그렇지 못하다면 물러나 조용히 학문을 연마할 뿐이다.(用之則行 舍之則藏)<술이>, (邦有道則任 邦無道則可券而懷之)<위령공>” 그런 그였기에 멀리서 찾아오는 벗의 반가움이야 오늘날을 살아가는 고독한 현대인들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으리라.

비록 『논어』의 첫 문장이 겉으로 보기엔 덤덤하게 군자의 기쁨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그 안에는 공자가 평생을 두고 실천하며 살아온 일생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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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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