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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일 -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1~5 | 출판사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1~5 | 최성일 | 출판사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이 책의 저자 최성일 씨는 우리나라에서 몇 안되는 출판평론가이다. 몇 사람 안되니까 그 희소성만으로 소중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무엇보다 그의 고집을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이다. 클래식음악 애호가들의 수준이 높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들은 때로 어느 음반의 어느 연주가 보다 수준이 높고 진정한 명반인가를 가리기 위해 수일 밤낮에 걸쳐 토론 벌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주도(酒道)에 층위가 있는 것처럼 애호가에도 층위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독서에 그런 층위를 부여하는 것은 때로 우스운 일이다. 그 까닭은 독서라는 것 자체가 감성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다분히 이성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고, 그 대상 범.. 더보기
고은 - 하루 하루 - 고 은 저물어 가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하루가 저물어 떠나간 사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오 하잘것없는 이별이 구원일 줄이야 저녁 어둑밭 자욱한데 떠나갔던 사람 이미 왔고 이제부터 신이 오리라 저벅저벅 발소리 없이 신이란 그 모습도 소리도 없어서 아름답구나 * 아침 출근길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별한 뒤엔 사람이 달라진다. 보이지 않던 것들, 보이지 않던 소리들, 보이지 않던 사람들, 보이지 않던 감정들이 죄다 안아달라고 달려든다. 늙어서 더이상 이별할 것이 제 목숨 밖에 없는 사람도 이별을 구원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삶에서 이별은 불가피(不可避)한 것이다. 불가피하다는 것은 피할 수 없다는 뜻이지만 이 말의 의미가 강렬하면 할수록 가능한 한 피하고 싶다는 그 마음은 .. 더보기
나의 쌈마이 의식 '쌈마이'란 말은 본래 영화판 용어이다. 우리 문화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일본어 중 하나인데 일본 가부키에 나오는 삼류배우, 시시한 역할이나 하는 배우란 뜻, '삼마이메(三枚目, さんまいめ)'에서 온 말이다. 나는 비난이나 비판보다 칭찬이 더 무섭다. 내가 칭찬을 고대하는 사람이기에 더욱더 칭찬을 경계하고 두려워한다. 나는 나에게 이익이 되는 모든 일을 두려워한다."守株待兎(수주대토)"란 말이 있다. 송(宋)나라 사람 중에 밭을 가는 사람이 있었다. 밭 가운데 나무 그루터기가 있었는데, 풀숲에서 갑자기 한 마리의 토끼가 뛰어나오다가 그루터기에 부딪쳐 목이 부러져 죽었다. 농부가 이것을 보고 그 후부터 일도 하지 않으며 매일같이 그루터기 옆에 앉아서 토끼가 뛰어나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토끼는 두 번 다시 나.. 더보기
사랑이 아픈 이유 좋아하는 건 조금 덜 좋아하는 다른 것으로 아니면 그것과 비슷한 성질을 지닌 다른 것과 대체될 수 있지만 사랑은 대체불능이다. 그래서... 사랑이 아픈 거다. 전부를 포용하던지 아니면 버리던지.. 그런데 이때의 '버림'은 사실 포기(抛棄)가 아니라 포기(抛己)다. 그래서... 사랑이 아픈 거다. 버린 사람도, 버림 받은 사람도... 더보기
시를 읽는 이유 장정일은 책을 내는 자신을 일컬어 '위조지폐범'이라고 말했다. 8,900원 하는 책 한 권을 내면 인세 10%를 받으니 자신은 890원짜리 지폐를 발행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읽고 보니 맞는 말이라 피식 웃었다. 한국은행이 지불을 보증한 한국은행권의 액면 가치로 환산되긴 하지만 그는 분명히 책 한 권당 890원어치의 가치, 화폐 가치와는 다른 가치를 창출해내는 위조지폐범이다. 얼마전 누군가 나에게 '왜 시를 읽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그저 '글쎄'라고 답했지만 오늘 최영미 시인의 신작 시집 "도착하지 않은 삶"을 읽으며 마음에 드는 시에 포스트잇을 가만히 붙여 나가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어쩌면 나는 강태공이 곧은 바늘로 세월을 낚듯 그렇게 시의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운 어부처럼 앉아 .. 더보기
무쇠인간 | 테드 휴즈 지음 | 서애경 옮김 | 비룡소(2003) - 테드 휴즈의 작품은 국내에선 별로 인기가 없었지만 외국에선 제법 인기있는 작품이라 비룡소판의 삽화를 그린 '앤드류 데이비슨'이 아닌 다른 작가의 삽화로 된 판본도 있다. 무쇠인간 | 테드 휴즈 지음 | 서애경 옮김 | 비룡소(2003) 내가 '테드 휴즈(Ted Hughes)'를 알게 된 건 그가 1998년 10월 28일 6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영국의 계관시인이라는 유명세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그의 아내이자 같은 시인이었던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때문이었다. 이것은 실비아 플라스가 결국 자살에 이르게 된 이유 중 하나라고 알려져 있는, 시인으로서 테드 휴즈의 성공과 유명세에 비해 실비아 플라스가 가정에서 아이들을 양육하며 자신의 재능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비관에 기인한 것이라는 .. 더보기
문충성 - 무의촌의 노래 無醫村의 노래 - 문충성(文忠誠) 바다가 휘몰아오는 어둠이 바람 속에 바람이 어둠 속을 걸어 오는 아이가 빛을 찾아 미닫이 새로 얼굴 내밀고 호롱불 곁으로 비집어드는 마을, 불치의 병든 아이들이 모여 산다, 東西南北 아이야 어디를 가나 끝이 없는 시작은 장만이 되는 것, 맨발에 빠져든다, 겨울의 깊이 그 차가운 깊이 속 아이들은 한 줌의 무게를 찾아 빈 손을 들고 바다로 떠나간다 그렇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삼백 예순 날 아이들의 발걸음은 바다 끝에서 칭얼칭얼 열려 죽음을 살려내는 자맥질 속 숨 가빠라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숨 가빠라 누더기를 벗지 못한 채 누더기 속에 바람을 키우며 떠났지만 떠난 자리로 자꾸만 떠나가고 있다, 깨어진 사발에 구겨진 꿈을 담고 꿈속에 일렁이는 바닷길을 절뚝절뚝 달려가.. 더보기
정끝별 - 안개 속 풍경 안개 속 풍경 - 정끝별 깜깜한 식솔들을 한 짐 가득 등에 지고 아버진 이 안개를 어떻게 건너셨어요? 닿는 순간 모든 것을 녹아내리게 하는 이 굴젓 같은 막막함을 어떻게 견디셨어요? 부푼 개의 혀들이 소리없이 컹 컹 거려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발 앞을 위태로이 달려가는 두 살배기는 무섭니? 하면 아니 안 우서워요 하는데요 아버지 난 어디를 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바람 속에서는 바다와 별과 나무, 당신의 냄새가 묻어 와요 이 안개 너머에는 당신 등허리처럼 넓은 등나무 한 그루 들보처럼 서 있는 거지요? 깜박 깜박 젖은 잠에서 깨어나면 어느덧 안개와 한몸되어 백내장이 된 우우 당신의 따뜻한 눈이 보여요 덜커덩 덜컹 화물열차가 지나가요 그곳엔 당신의 등꽃 푸르게 피어 있는 거지요? 나무가 있으니 길도 있.. 더보기
無題 1. 내가 한 번도 학자로 살아볼 생각을 하지 않은 까닭, 사회과학이나 경제학, 자연과학을 전공하거나 이 분야의 지식인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까닭은 내가 문학을 선택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이유와 정확히 겹친다. 나는 우유부단하고, 모호한 인간이기에 오래도록 논쟁을 거듭하며 제련되는 결론, 혹은 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부단한 논쟁을 거듭하고, 훈련을 쌓는 일을 싫어한다. 더욱 더 큰 문제는 설령 그렇게 해서 얻은 결론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 결론(논리)을 방어하기 위해 누군가와 논쟁을 벌일 만큼 그 결론을 사랑하지도, 믿지도 않는다. 나는 결론을 믿지 않는다. 학문이 정의를 내리고, 명제를 만드는 동안 문학이나 예술은 말한다(혹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고, 사람이.. 더보기
귀속(歸俗)과 귀속(歸屬) 불교에서는 세상과 인연을 끊고 출가했던 승려가 다시 속세로 돌아가는 것(在家生活)을 일컬어 환속(還俗)이라고도 하고, 귀속(歸俗)이라고도 한다. 생사일대사의 인연을 걸고 용맹정진하여 도를 깨우치겠다는 발심으로 승려가 된 자라 할지라도 속세로 돌아가는 일, 환속이든, 귀속이든, 퇴속(退俗)이든 자유의지로 돌아갈 수 있으며 누구의 허락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슷한 발음인 '귀속(歸屬)'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예를 들어 지금 나는 갑자기 북한산에 오르고 싶지만 도저히 갈 수가 없다. 그곳에서 하늘도 보고 싶고, 추운 공기를 마음껏 들이키며 서울 시내를 굽어보고 싶지만,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회사에 귀속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 수 없으며,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