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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곱씹어 읽는 고전

논어(論語)-<학이(學而)편>11장. 其志其行

 

子曰 父在觀其志 父沒觀其行. 三年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
공자가 말씀하길 “아버지가 살아계실 동안엔 그 뜻을 살피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 행적을 살핀다. 삼년동안 아버지가 하던 바를 바꾸지 말아야 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라면 삼년상(三年喪)을 치르진 않아도 누구라도 삼년간의 시묘(侍墓)살이에 대해서는 들어서 알고 있는 이야기다. 장례를 치르는 제도(喪葬制)는 그 자체가 하나의 관습이자 문화이기 때문에 한번 뿌리를 내리면 나름의 의미와 존재 이유가 사라지지 않는 한 지속되는 제도이자 풍속이다. 사실 고려시대에는 삼년상을 치르지 않았다. 백일상(百日喪)을 치르거나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해서 치루는 역월단상제(易月短喪制)를 시행하였다고 하는데, 이 역시도 일반적인 풍습이 아니라 지배계급에 속하는 이들이 치르는 방식이었다. 대개는 불교식으로 화장을 하거나 빈소를 사찰에 모시는 방식(追遷祭)이었다.

고려말 주자가례(朱子家禮)가 도입되기 이전까지는 전통적인 무속에 의한 방식과 불교식 장례인 무불식(巫佛式) 장례풍속이었으나 고려말부터 본격적으로 주자학이 도입되면서 유교식 상장제(喪葬祭)가 무불식 장례방식을 대체하기 시작한다. 주자가례에 의한 사례(冠婚喪祭)는 이후 수백 년을 거쳐 오는 동안 우리의 전통 문화의 일부가 되었고,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양반이나 상민의 구별 없이 누구나 행하는 제도가 되었다. 어떤 이는 이것이 너무나 까다롭고 시행하기 어려워 번문욕례(繁文縟禮)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유교식 전통상례인 삼년상을 대신해 과거 고려시대로 회귀하여 무불식 장례풍속인 49제를 치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전통의 뿌리란 이런 점에서 참으로 깊고도 오묘한 것이다. 삼년상의 번거로움이 현대에는 어울리지 않으므로 뭔가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할 터인데 이럴 때 또 다른 과거의 전통에서 새로운 대안이 마련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조선시대에도 신진사대부가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르는 중종 이전까지는 국상이 나더라도 칠칠제(7일×7=49일)를 행하였는데, 혼령이 이승을 방황하다가 49일째 되는 날 승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삼년상이 주자가례에서 새삼 강조된 것이긴 하지만 삼년상 장례제도는 공자 이전에도 일반적인 법도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몇몇 문헌에 따르면 삼년상을 지내기 시작한 시기에 대해 각기 다른 이야기가 있는데, 요순(堯舜)시대를 기원으로 하는 설이 있고, 주(周)나라 성왕(成王)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앞서 「학이」편 9장에서 이미 이야기했지만 공자와 유가에서 바라본 제사란 성실을 다해야 하는 일이긴 했지만 그 자체가 귀신이나 혼령을 받들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가 삼년상을 천하의 법도라고 인정한 까닭은 무엇일까? 또 공자는 어째서
“3년간 아버지가 하던 바를 바꾸지 말아야 효라고 할 수 있다(三年無改於父之道)”고 한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해 공자는
“자식이 태어난 지 3년이 된 뒤에라야 비로소 부모의 품을 떠나는 것이다. 대체로 3년상은 천하의 공통된 법이다.”<『禮記』>라고 말하고 있으며, 『논어』 「양화」편 21장에서 제자 재아와의 문답을 통해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삼년상을 모시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식이 태어나 혼자 먹고 활동할 수 없는 젖먹이 기간과 그 후 부모의 지극한 보살핌 속에 자라야 하는 2년, 부모가 품안에서 길러준 은혜에 대한 보답, 보은지의(報恩之義)를 다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자식이 태어나 부모의 품을 떠나는 기간을 3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한 사회를 조직하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상응하는 원리가 있고, 그것을 지탱해주는 윤리가 있는 법이다. 공자가 살아가던 시대는 농경사회였고, 지금처럼 세대와 세대가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다른 문화 속에 살았던 시대가 아니었다.

대를 이어 전통적인 농법에 종사하였고, 종법(宗法)질서에 따른 엄격한 가부장적 질서 속에 살았다.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하더라도 부모의 묘소를 멀리 모실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또한 농사에는 때가 있는 법이므로 모든 일을 작파할 수도 없었다. 조선시대에도 군역을 져야하는 평민의 경우엔 삼년상을 치를 수 없도록 했다. 군역의 의무가 우선했던 까닭도 있지만 삼년상을 핑계로 군역을 회피하려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주(周)나라가 세운 전통적인 사회체계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사회혼란이 초래되었다고 생각했으므로 이를 의례란 이름을 빌려 복원시키는 것이 혼란을 바로 잡는 방법이라 여겼다. 공자는 효제(孝悌)를 개인의 단순한 품성이 아니라 사회가 유지되는 정치경제적 토대의 으뜸가는 기초 질서로 보았다. 효제는 개인적인 실천이지만 이를 확장하면 충의(忠義)로 사회적 실천이 된다.
비록 공자가 주의 법도로 회귀하길 희망했지만 이것은 이미 변해버린 사회를 단순히 과거로 복귀시키자는 것을 의미하진 않았다. 그는 이미 사회가 과거로 완전히 돌아가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현실주의자이자 실용주의자였기 때문이다.

「학이」 11장은 그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其志其行”의 해석에 대해서는 몇 가지 남다른 해석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아버지의 뜻과 행적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3년간 아버지의 뜻과 행적을 살피라는 의미는 개인적인 효의 차원에서는 부모를 잃은 죄인으로 근신하여 스스로 행실을 삼가란 뜻이다. 이 기간은 삼년상을 치르는 기간과도 겹친다. 앞서도 말했듯이 효는 개인적인 실천이자 동시에 사회적 실천, 다시 말해 정치적 실천이다. 고대농경제 사회에서의 변화란 매우 작은 일조차 급격한 변화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사회의 변화가 현재와 비교하더라도 그만큼 더딘 속도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농경제 사회라 할지라도 변화는 일어났을 테고, 봉건왕조에서도 이에 따른 개혁은 필요했을 것이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하여 삼년상은 부모의 경우에만 치르지 않았다. 임금이 죽으면 신하가, 스승이 죽으면 제자된 입장에서 치르는 것이기도 했던 것처럼 전통적 봉건제 아래에서 가부장은 작게는 집안(가문)의 최고 통치자이지만 크게는 한 국가의 통치자일 수도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왕(王)에 가장 가까운 존재는 기업체의 최고경영자이고, 국가의 최고통치자일 것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인데, 지금까지의 대통령들은 임기 초반인 1년 이내 뭔가 성과를 보이기 위해 매우 조급한 정책을 추진해왔다.

봉건제 국가에서 권력서열 2인자인 태자들은 어려서부터 군주로서의 처신과 온갖 교양들을 두루 섭렵하도록 교육된다. 이른바 제왕학이란 것이다. 그 과정이 선대 군왕의 급작스런 죽음과 같은 급격한 정치변동에 따라 미처 준비되지 못한 상황에서 제위에 올랐을 때 왕조에는 위기가 찾아오고, 국가와 백성들은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급격한 정치변동이 아닌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제위에 오르더라도 왕재(王才)가 부족한 인물이거나 외부로터 전란과 같은 급격한 위기가 닥칠 때, 선대 임금의 제신(諸臣, 오늘날로 말하자면 행정관료나 기관의 수장)들을 절차나 명분에 따르지 않고 핍박하는 등 자충수를 두어 위기를 자초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사회이든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파워엘리트들을 잘 교육하고 준비시켜야만 한다. 공동체를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재생산되기 위해 파워엘리트를 성장시키는 과정은 사회의 준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 파워엘리트가 되기 위해 처음부터 그에 합당한 자질과 경력을 쌓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것을 소명의식이라 불러도 좋고, 노블리스 오블리쥬라 말해도 좋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민주국가에서는 이 과정을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을 연마하는 민주교육이라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정치계급(파워엘리트)은 정권의 유지나 확보를 위해 그때그때 새로운 스타를 급조해왔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파워엘리트들은 그 자리에 임하기 전까진 파워엘리트로서의 과정을 준비하지 않다가 갑자기 사회의 공공영역에 출현하는 경향이 있다. 출마에 임박해서야 저자도 명확하지 않은 책 한 권을 출판하거나 짧은 기간 동안 선출직이나 임명직 관료, 의원으로 잠시 활동한 공적을 바탕으로 출마해서 대통령이 되고, 국회의원이 된다.

현 대통령은 기업체 간부로 성장해 개인적인 부를 축적하는데 우선했고, 국회의원들 역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변호사, 기업체 간부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정권 교체 과정이 축적되는 과정이 몇 차례 있었으므로 과거에 비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같은 기구도 만들어지기는 하지만 국정을 어떻게 끌어갈 것인지, 정책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행정기구를 정식으로 장악하기 이전엔 아무래도 봉건왕정 아래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이들을 능가할 수가 없다. 물론 과거의 왕정 아래에서 임금에게는 통치기간에 제약이 없었으므로 3년간
“其志其行”할 시간도 길다고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 임기가 5년이라면 최소한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급격한 변화 대신 전임 대통령과 비록 정파는 다르다 하더라도 지속시킬 정책과 점진적인 변화를 모색해볼 기간으로 삼아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다.  

실 정파나 정당이 다른 통치자뿐만 아니라 우리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통치자라 할지라도 뭔가 전임 통치자와는 다른 면모를 일신하여 보여주려 하는 편이었다. 뭔가 보여주기 위한 정책을 전시행정(展示行政)이라 하고, 시쳇말로는 쇼(show)라 한다. 공자는 “삼년동안 아버지가 하던 바를 바꾸지 말아야 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무조건 바꾸지 말란 말도, 아비의 잘못된 길을 그대로 따르란 말도 아니다. 다만 그 뜻을 충분히 살피고, 결과를 미루어 짐작해본 연후에 이를 고쳐도 늦지 않다는 말이다. 

* 이명박 대통령은 정권이나 정파와 관계없이 지속되어야 할 민족화해 통일정책을 10년 전으로 되돌려놓았고, 임기가 남은 기관의 수장들을 강제로 몰아냈을 뿐 아니라 특히 문화예술분야에서는 대개 직접 정치 혹은 정권과 무관하게 자기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온 사회의 원로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욕보이기 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