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한 낙서*

- 고은

여름방학 초등학교 교실들 조용하다

한 교실에는
7음계 '파'음이
죽은 풍금이 있다
그 교실에는
42년 전에 걸어놓은 태극기 액자가 있다
또 그 교실에는
그 시절
대담한 낙서가 남아있다

김옥자의 유방이 제일 크다



출처 : 고은, 『순간의 꽃』, 문학동네(2007)


* 본래 이 시엔 제목이 없지만 전체 구성으로 보아 내 임의대로 '대담한 낙서'란 제목을 붙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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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한 줄도 길다”는 짧은 정형시의 대명사 ‘하이쿠'가 있다. 시(詩)도 유행을 타는 지 요즘 나오는 시들 가운데는 수사학적인 기교로 충만한 긴 시편들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런 시들은 문학적 성취와 별개로 일단 정이 가지 않는다. 말씀언(言)에 절사(寺)가 붙어 시(詩)라 부르는 데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이런 표현이 적당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복어 회 같은 시를 좋아한다. 얇게 회를 떠서 회가 놓인 접시의 문양이 보일 정도의 투명함과 복어 특유의 질깃한 식감(食感)으로 인해 오래 씹어 그 향과 맛이 입에 남는 시를 좋아하는 편이다. 복어 회를 즐기는 미식가들 중에는 얇게 포 뜬 복어 회에 맹독으로 가득한 복어 알 하나를 얹어 함께 맛을 보는 이도 있다고 하는데, 나는 이것이 시적(詩的)인 일, 시를 완상(玩賞)하는 법 중 하나라 생각한다(참고로 가장 맹독을 자랑하는 황복 한 마리엔 300명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을 품고 있다).


다작의 대명사인 고은 선생이 작품 활동을 시작한지 어느덧 50년을 맞이했다. 시작(詩作)의 먼 길 만큼이나 다양한 작품 세계를 보여 온 원로 시인이지만 나에겐 당신이 쓰고 발표한 시들 가운데 알알이 맛좋은 시들로 가득한 시집으로 첫 손에 꼽을 것은 단연 『순간의 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김옥자의 유방이 제일 크다”는 파격(破格)을 선보이는 이 시는 이 시집에서도 단연 백미에 속한다. 그러나 의뭉으로 뭉쳐져 그것이 더욱 사랑스러운 이 시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구절은 “한 교실에는/ 7음계 '파'음이/ 죽은 풍금이 있다”는 묘사다.


지난 추석 무렵 배달되어 온 <시사인>합병호(52.53호), 문정우 편집국장의 글에는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시인 이문재 선생의 시창작 수업 이야기가 나온다. 이문재 시인은 수업 중에 언제나 이런 이야기, “첫째, 오늘 난생처음 본 것은 무엇인가. 둘째, 늘 보아오던 것 중 오늘 새롭게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이다. 고은 선생의 시선에 걸려든 “7음계 ‘파’음이 죽은 풍금”이란 시인 이문재 선생이 시를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 가르치려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시인은 우리가 늘 보아오던 '죽은 풍금'을 마치 난생처음 본 것처럼 새롭게 보도록 섬세한 관찰력으로 이끈 뒤에 달려오는 파격 앞으로 우리들을 몰아세운다.


시에도 독(毒)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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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