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숀 코네리와 캔디스 버겐 주연의 영화 "바람과 라이언"은 제국주의 시대의 풍경을 낭만적인 이국주의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은 비판해야겠지만 영화 자체는 상당히 유쾌한 편이다. 고민을 배제한 스펙타클 영화이기 때문인데 아마도 실화일 거라고 오랫동안 추측만 하다가 찾아냈다.

종군기자였던 제임스 빈센트 시언은 1925년 프랑스군과 스페인군의 감시를 피해 모로코의 리프족 반군 진영의 지도자 압 델 크림과 압 델 라이슐리 형제를 인터뷰하는데 성공했다. 바로 압 델 라이슐리가 숀 코네리가 연기했던 그 실존 인물이었다. 그는 1904년 그리스 출신 미국인 갑뷰 이온 페다카리스를 납치한 것으로 유명해진 인물이었다. 이런 식으로 하나씩 배경을 뒤져보는 일은 참 흥미롭다.

숀 코네리, 캔디스 버겐 주연의 "바람과 라이언" 이야기를 했더니 뜬금없이(?)는 아니고 사실 비슷한 시대, 비슷한 배경을 가진, 제목마저 비슷한 안소니 퀸 주연의 "사막의 라이언"과 착각하는 분이 있어서(누구라고 말 못함) 말난 김에 이 영화 이야기도 조금 하자면....





2.
시대 배경상으로는 "바람과 라이언"이 1904년으로 20세기 초엽의 사건이었고, "사막의 라이언"은 대략 1910년대에 일어나 1931년 9월 16일에 종결된 하나의 사건에 대한 영화다. "바람과 라이언"이 이국적인 풍광과 문화를 배경으로 한 엑조틱한 액션 스펙터클이라면 "사막의 라이언"은 그보다 훨씬 진지한 영화란 차이가 있다.

존 밀리어스 감독의 영화 "바람과 라이언"을 연출한 존 밀리어스 감독은 원래 영화 대본을 쓰던 작가 출신인데,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영화 <더티 해리> 시리즈와 <지옥의 묵시록> 등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아마 1973년의 <딜린저>가 처음 영화감독 데뷔작인 듯 싶은데, 이후에도 영화 연출과 함께 각본, 제작 등 다양한 영역에서 경험을 쌓았다. 그가 연출한 영화들 중에서 잊을 수 없는 영화는 사실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에게도 가장 잘 어울렸던 영화 <코난-바바리안(1981)>이었다. <바람과 라이언>은 그의 두 번째 연출작이었다.

그에 비해 "사막의 라이언"을 연출한 무스타파 아카드 감독은 시리아 출신의 미국인 감독으로 이후 감독으로서보다는 <할로윈> 시리즈의 제작자로 더 많은 명성을 쌓긴 했지만 초기만 하더라도 감독으로서 그의 연출작들은 이슬람권에 대한 서구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진지한 작품들이었다. 1976년 "에언자 마호메트"에서 안소니 퀸과 인연을 맺고, 그가 연출한 두 번째 작품이 "사막의 라이언"이었다.

영화 연출에 능력이 있었던 그가 이후 영화 연출보다는 제작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이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영화를 제작하려고 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의 첫 번째 영화와 두 번째 영화 모두 할리우드에서 제작하는데 여러 장애와 방해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그는 더이상 영화 연출을 하기 어려웠고, 이후 제작에만 전념하다가 2005년 11월 요르단 암만에서의 이슬람 폭탄 테러에 희생당해 그의 딸 리마 아카드와 함께 사망했다.





3.
"사막의 라이언"은 20세기 초 이탈리아와 리비아 사이에 실제로 벌어졌던 리비아 국민들의 20년 항쟁이 실제 배경이 되었다. 이 영화의 내용은 대부분 실화이며 등장인물들 역시 실존 인물의 실명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서구 제국주의는 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당시 영국은 이집트를, 프랑스는 튀니지아를, 스페인은 모로코를 점령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부터 이탈리아는 북아프리카의 리비아와 에디오피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당시 리비아는 오스만제국의 식민지였다. 이탈리아는 터키의 발칸 전쟁 개입을 계기로 1911년 9월 29일 오스만제국에 선전포고를 한 뒤 10월 3일 함대를 리비아의 해안도시 트리폴리에 보냈다. 당시 이탈리아 함대 사령관 파라펠리는 리비아에 주둔하고 있는 오스만 제국 군대의 즉각적인 항복을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도시 전체가 파괴될 것이라고 협박했다. 터키군은 트리폴리에서 퇴각했지만 항복하지 않았고, 이탈리아 함대는 3일간 함포사격을 가해, 트리폴리를 함락시켰다. 이탈리아가 리비아를 정복하여 식민지화하는 일은 어린아이 팔목을 비트는 일만큼 손쉬운 일인 듯 보였다.

결국 오스만투르크는 리비아에서 철수했지만, 이때부터 전쟁은 새로운 식민지배자인 이탈리아 점령군과 오마르 알 무크타르가 이끄는 저항군 간의 전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영화에도 잘 드러나지만 오마르 무크타르는 본래 시골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꾸란을 가르치는 교사(이맘)였다. 다른 아랍 국가들이 그러하듯 리이바의 저항군들 역시 부족 중심이었고, 이들은 사분오열되어 각자 자신의 왕국을 추구하거나 이해관계에 따라 이탈리아군에 협력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오마르 무크타르는 비타협적이었고, 다른 부족의 게릴라들에 비해 근대민족 지도자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저항 세력은 점차 그를 중심으로 뭉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전쟁을 치른 롬멜이나 몽고메리 장군의 회고나 증언을 살펴보면 사막에서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육군의 전략보다 해군의 전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사막이 곧 바다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광활한 사막에서는 땅을 차지하는 것보다 먼저 적을 찾아 먼저 공격하고, 궤멸시킨다는 해군의 전략이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탈리아군은 전형적인 육군의 전략을 구사했으므로 사막의 유목전술을 구사하는 무크타르의 게릴라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리비아의 저항전쟁은 어느 일방도 확실한 우세를 점하지 못한 채 1929년까지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1921년 뭇솔리니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이탈리아는 리비아를 과거 로마의 영광을 재현할 성지로 보았고, 새로운 지휘관으로 에티오피아 전선에서 명성을 쌓은 그라치아니 장군을 파견한다.

4.
그라치아니 장군은 초반만 하더라도 오마르 무크타르를 시골 촌부 정도로 생각하여 가볍게 여겼으나 점차 그의 탁월한 지도력과 게릴라 전술에 휘말려 치욕적인 패배를 경험한다. 그 뒤 그라치아니와 이탈리아군은 새로운 전술을 동원하는데, 한 편으론 무크타르에게 평화협상을 제안하고, 다른 한 편으론 이른바 청야(淸野)작전을 펼쳤다. 게릴라들의 바다가 될 수 있는 민중들을 제거하는 청야전술은 무자비했지만,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탈리아군의 무자비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는 동안 무크타르는 사막과 산악 지대에서 현대병기로 무장한 이탈리아군을 계속 패퇴시켰지만, 그 사이 이탈리아군은 리비아 사막에 수천 명의 인부를 강제로 동원해 수천 톤의 가시철조망을 설치했다.

12만 5천여 명의 민간인들이 살인적인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고, 사막을 통행하려는 이들은 사살당했다. 결국 '리비아의 태양'이라 불렸던 오마르 무크타르는 이탈리아군에게 부상당한 채 생포되었는데, 이탈리아 정부는 그가 탈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70세를 넘긴(사막 유목민의 정확한 나이는 알기 어렵지만) 오마르 무크타르의 손과 발에 족쇄를 채워 전리품처럼 전시했다. 그들은 늙은 반군 지도자를 재판했지만, 그의 입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말은 한 마디도 얻어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도대체 누가 누구를 재판하는 거냐"는 반문만 들어야 했다.

도리어 이 늙은 죄수의 높은 인격은 이탈리아 간수들에게도 커다란 감명을 주었고, 그의 굳은 의지에 압도당했다. 이탈리아는 오마르 무크타르를 공개적으로 교수형에 처했는데, 형장에서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느냐는 질문에 꾸란의 한 구절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신에게서부터 왔고, 언젠가는 다시 신에게로 돌아간다."

20여년을 끌어오던 항쟁은 1931년 9월 16일 그의 사형과 함께 사실상 종결되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적의 손에 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특별히 영화 이야기를 별도로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영화는 사실을 충실하게 재현하려고 하고 있는데,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이 영화에 대한 리뷰는 별도로 해볼 생각이다(음, 여태한 건 뭐야?). 그의 초상은 리비아의 10디나르 화폐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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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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