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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이성복 - 편지

편지


- 이성복


1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매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내 동생이 보고
구겨 버린다 이웃 사람이 모르고 밟아 버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길 가다 보면
남의 집 담벼락에 붙어 있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끼여 있다 아이들이 비행기를 접어
날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가져갈 때도 있다 한잔 먹다가
꺼내서 낭독한다 그리운 당신 …… 빌어먹을,
오늘 나는 결정적으로 편지를 쓴다


2

안녕
오늘 안으로 나는 기억을 버릴 거요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왜 그런지
알아요?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요
나는 선생이 될 거요 될 거라고 믿어요 사실, 나는
아무 것도 가르칠 게 없소 내가 가르치면 세상이
속아요 창피하오 그리고 건강하지 못하오 결혼할 수 없소
결혼할 거라고 믿어요

안녕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편지 전해 줄 방법이 없소

잘 있지 말아요
그리운……




이성복 시인의 이 시를 연애시로만 읽어선 안 될 일이겠지만,
연애 한 번 안 해본 사람은 이 시의 맛을 알 수 없다고 단언한다.
아니, 단언하고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지막 두 행의 맛이 절절하게 전해질 수 없다.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내가 억울하니까....

누군가에게 쥐어주지 못한 마지막 편지가 내게 아직 있으니까...

사랑의 끝은 언제나 전해주지 못한 마지막 한 마디를 품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