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인문학 노트
- 스페인에서 인도까지,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이현석 (지은이) | 한티재 | 2013-12-09



브루노 베텔하임(Bruno Bettelheim)은 오스트리아 빈출신의 유대계 정신분석학자로 1938년 빈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다하우와 부헨발트에 있는 독일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 뒤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줄곧 장애어린이의 심리치료 분야에 종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옛이야기의 즐거움』 같은 책을 썼다. 그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원용해 서구의 어린이 이야기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심리를 분석하면서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어머니의 품을 떠나 낯선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어린이들의 두려움과 설렘을 담고 있다고 분석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여행기들도 기본적으로는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모어(母語)의 나라, 모국(母國)을 떠나 낯선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두려움과 설렘이 녹아있지 않은 여행기는 가이드북이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라 하는 '길가메시' 서사시도, '오딧세이'도, '서유기'도 결국 고향을 떠나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해 길을 나선 사람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들은 왜 길을 나선 것일까? 여행은 여행 그 자체로도 목적이 있지만 다른 한 가지는 추구(追求)다. 주인공은 어떤 계기로 집을 떠나 여러 낯선 장소를 이동하며 갖가지 사건과 인물들과 만난다. 길가메시는 엔키두를 만나 결투를 벌인 뒤 친구가 되고, 오딧세우스는 세이렌의 마녀들을 비롯해 갖가지 대상들을 만나 동료들을 잃지만 결국 이타카로 귀환한다. 손오공 역시 삼장법사를 만나고, 사오정을 만나고, 저팔계를 만난다.

이 책 『여행자의 인문학 노트』에는 모두 12명의 주된 인물들이 등장한다. 윌슨(마카레나 지구, 세비야, 스페인), 장 에밀리아(김병화박물관, 시온고 마을, 우즈베키스탄), 이브라힘(시와, 이집트), 하루코(치앙마이, 태국), 테리(침사추이, 홍콩), 까말(포카라, 안나푸르나, 네팔), 미스터 빈(구찌터널, 호찌민 시, 베트남), 타리크(페스, 모로코), 줄리안(시저우, 윈난, 중국), 애드리안(전몰자의 계곡, 엘에스코리알, 스페인), 꾼니(벵메알레아, 시엠레아프, 캄보디아), 초투(우타르프라데시, 인도)가 그들인데, 저자 이현석은 이들을 여행 중에 만나 그들의 삶 속에서 사회와 문화, 역사를 만나고 이것을 다시 자신의 사유 속에서 재구조화한다.

그 기억은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과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제게 '인문학'이란 그런 것이었습니다. …<중략>… 여행지에서 타자와 만나 관계를 맺는 것은 그 자체로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행하는 것이니까요. 때문에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행서의 외피를 하고 있지만 결국 이것은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마주했던 사회, 문화, 역사에 대한 재인식의 결과물입니다. <본문 8-9쪽>

이현석의 『여행자의 인문학 노트』는 그런 의미에서 낯선 곳을 찾아 떠나고,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는 여행기이지만 동시에 일반적인 여행기와 남다른 측면이 있다. 12명의 인물은 12개의 장소에서 12개의 에피소드가 있고, 최소한 12개 이상의 깨달음이 함께 있다. 그 깨달음의 곁에는 이 책의 말미에 소개되고 있는 책들이 있다. 12개의 이야기가 이와 비슷한 패턴으로 진행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에가와 타츠야(江川達也)의 만화 『골든보이』를 떠올렸다. 이 만화의 주인공 ‘오에 긴타로(大江錦太郎)’는 내가 꿈에 그리는 이상적인 인생의 롤 모델이다. 그는 도쿄대학을 수석으로 입학한 천재인데 책상에서만 하는 공부는 진정한 공부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대학을 자퇴한 뒤 ‘진정한 공부’를 하기 위해 자전거로 일본 전국을 여행하며 여행지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만난다. 그는 여러 장소에서 여러 사람들을(주로 미인들을) 만나, 업신여김을 당하지만 그는 언제나 이들을 배신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능력을 통해 이들을 돕고, 그 자신도 배움을 얻어 새로운 공부를 위해 떠난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배운 것들을 '공부노트'에 상세히 기록한다.

이현석의 그의 공부노트에 기록하고 있는 내용들은 만만치 않다. 예를 들어 우즈베키스탄에서 김병화박물관의 장 에밀리아 관장과의 만남 이후 과정을 보자.

모국에서 이방인이 되어, 태어난 땅을 뒤로 한 그들은 정착한 곳에서도 여전히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다. 민족이라는,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온 토지·언어·문화를 공유하는 공동체라는 견고한 ‘관념’ 안에서 살고 있는 다수자인 우리 한국인들이 그녀를 ‘한국인’으로 인식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말을 하거나, 그녀의 말투가 이북 사투리와 닮았다고 하여 ‘북한말’로 생각하는 것 모두 소수자로 살아온 그들에게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언어학자 다나카 가쓰히코(田中克彦)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모어’와 ‘모국어’로 나누어진다고 했다. ‘모어’란 ‘태어나서 처음 익혀 내부에서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말’이며 ‘한번 익히면 벗어날 수 없는 근원의 말’이다. 반면 ‘모국어’는 ‘자신이 국민으로서 속해 있는 국가, 즉 모국의 국어를 뜻하며 근대 국민국가가 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구성원들에게 가르쳐 그들을 국민으로 만드는 장치’이다. 다나카 가쓰히코의 정의를 대입시켜본다면 장 에밀리아의 모어는 우즈베키스탄이며, 모국어는 고려말인 셈이었다. 사실, 나를 포함해 한국 영토에서 나고 자란 다수의 한국인들에게 모어와 모국어의 차이를 인식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비로소 내 눈앞에 모국어의 풍경이 펼쳐진 것은 장 에밀리아 관장의 일성을 듣고 난 이후였다. <본문 57~58쪽>

저자의 걸음을 좇아 세상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살펴보노라면 1984년 1월 인천 출생의 이현석이란 한 젊은이(?)가 그간 쌓아온 내공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 저자의 첫 책을 읽는 일만큼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즐거움은 없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내가 누군가의 책을 읽을 때, 취하게 되는 몇몇 포지션들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의 책을 읽을 때 독자(讀者), 비평가(批評家), 편집자(編輯者), 저자(著者)의 자아를 갖는다. 앞서 두 가지 입장은 보통 일반적인 독자들이라면 누구나 취할 수 있는 입장이겠지만 후자의 두 가지 경우는 그리 일반적인 입장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누군가의 책을 읽을 때 이런 입장들 사이를 널뛰기하며 책을 읽는데 젊은 저자의 책을 읽을 때는 주로 편집자의 설렘을 안고 읽게 되어 가슴 설레는 두근거림을 품게 된다. ‘언젠간 써먹을 테다’라는 마음 말이다.

그런데 누군가의 저작을 저자의 입장에서 읽을 때는 증폭되는 열등감과 자만하는 안도감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읽게 된다. 특히 이 책의 「테리(침사추이, 홍콩)」 부분을 읽을 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밤 11시 12분쯤 그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훌륭합니다. 이 책…. 흡입력 있네요. 그런데 윌슨 선생 이야기를 앞에 배치한 건 본인의 의도인가요? 한티재 의도인가요?”라고 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들에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6월 30일 저녁, 선전을 통해서 들어오는 인민해방군의 행렬이었다. 탱크를 앞세운 인민해방군은 마치 점령군처럼 홍콩으로 진주했다. 다들 어린 나이였지만 그 장면에서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어떤 이의 부모는 나라를 잃은 것마냥 흐느꼈고, 어떤 친구의 아버지는 이미 반환이 되기 훨씬 전부터 뉴질랜드에 가서 취직을 했으며, 어떤 이의 가족은 반환식 일정이 주말과 겹쳐 연휴였던 까닭에 오스트레일리아 가족여행을 다녀왔다고도 했다.
다양한 반응이 있었지만 반환 당시에 장쩌민(江澤民)이 이야기한 “백 년간의 치욕을 씻었다”는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없는 듯했다. …<중략>… ”그때는 탱크로 점령했고, 지금은 본토의 대기업으로 점령하고 있어. 걔네들도 잘 알고 있는 거야. 오래전부터 무기는 바뀌었다는 걸.“ <보문 125~126쪽>

내가 갑자기 이걸 물어보게 된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저렇게 현장에서 그곳 사람들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지 않고는 쉽게 알 수 없는 현장의 느낌과 감정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 부럽기도 했고, 이야기 패턴이 조금씩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자 개인의 이야기는 언제쯤 등장할까 기다리다가 그만 참지 못하고 저자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나는 어린이 문학과 여행기의 패턴 사이에 공통된 요소들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이야기들의 공통적인 요소는 어떤 경우이든 처음의 사건은 주인공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사건들이 있고, 그 사건을 계기로 주인공이 집을 떠나 새로운 세계로 무언가를 찾아 나서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 이현석은 왜 길을 떠나게 되었을까? 나는 그의 책 『여행자의 인문학 노트』를 읽으면서 내내 그런 의문을 떨쳐내지 못했다. 책을 읽어본 이들은 알겠지만 이 책은 여행을 떠난 순서대로 되어 있지 않다. 이 책의 순서가 연대기적 배치가 아니라면 이 책의 이야기들은 어떤 기준으로 배치된 것일까? 나는 이 책의 중반쯤에서 그것이 궁금해졌다.

순전히 재미만 놓고 따지자면 내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제일 앞부분에 놓인 「윌슨(마카레나 지구, 세비야, 스페인)」 편이 가장 재미있었다. 그 이유는 당시 일흔을 얼마 남기지 않고 있던 ‘윌슨’이 머나먼 이국에서 온 젊은이와 나누는 대화가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1장 「윌슨(마카레나 지구, 세비야, 스페인)」 편을 이 책의 백미(白眉)로 꼽고 싶다. 그런데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다음의 인용된 부분에도 있다.

일흔을 얼마 남기지 않고 있던 이에게, 당시 이십대 중반에 불과했던 나의 이야기가 과연 얼마나 흥미로웠을까? 그럼에도 그는 매일 밤마다 이렇게 옥상에 앉아 이국에서 온 젊은이가 어설픈 영어로 말하는 것을 인내심을 가지고 - 하지만 문법과 미국식 단어에 대한 지적은 멈추질 않으며 - 들어주었다.
그렇게 나는 마치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데가 된 것처럼, 세비야 구경을 마치고 돌아온 매일 밤마다 내 이야기를 시간 순서에 따라서 윌슨에게 들려주었다. 고등학교 때 이야기부터 시작했던 것 같다. 일반계 고등학교 2학년 때 230명 중 200등에 가까울 만큼 열등생이었던 이야기 - 씨름부만 40명이었으니 사실상 '전업 학생' 중에서는 꼴찌였던 이야기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언제나 인상적인 시작을 장식하기 때문이다. <본문 29쪽>

그가 책 속에 살짝 풀어놓은 자기 인생의 ‘인상적인 시작’은 상당히 흥미롭다. 인문계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전교 석차 바닥을 기던 인물이 대학에 갔고, 상경 이후 영화판과 시위 현장을 전전하다가 갑자기 귀향해서 공부를 시작해 의과대학에 들어갔고, 의외로 무탈하게 졸업까지 했다. 게다가 그가 이렇게 여행을 떠나게 한 계기는 분명 ‘실연(失戀)’ 때문이었다고 추측된다. 그런데 책을 아무리 읽어도 나머지 부분에는 더 이상 이렇게 재미난 저자의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여행은, 특히 배낭을 짊어지고 홀로 나서는 여행은, 스스로를 자발적인 국외자로, 자발적인 이산자로 만듭니다. 그러니까 여행은 내가 존재하지 않던 사회에 '나'라는 이질적인 존재가 투입되면서 그곳의 사람들과 만나고 충돌하도록 만들어줍니다. 만남을 통해 이해하고 이해를 구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공통적인 속성과 완벽하게 다른 습성을 체득하게 됩니다. 그렇게 그들과 나 사이에 충돌과 화해가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일상으로부터 탈주를 꿈꾸었던 우리는 스스로 쌓아올린 벽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본문 12쪽>

갑자기 벽(壁)과 마주선 기분이 들어 난감했다. 물론 이것이 브레히트의 소격효과(疏隔效果) 같이 작가가 독자에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신의 책을 중립적(?)으로 읽어주길 바란 결과일 수도 있긴 하겠지만, 난 그것이 그다지 성공적인 장치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여행기도 일종의 에세이라고 했을 때, 저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독서를 지속하게 만들어주는 한 가지 동력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책에 실린 거의 대부분의 여행(물론 아닌 것도 있지만)은 저자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도로 떠났는지, 왜 그곳이었는지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책은 매우 불친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고백한다. 한 편으로는 저자의 다채로운 여행지와 만남이 탐나고 부러웠기도 했지만, 다른 한 편에선 앞서 이야기했던 대로 저자의 이야기 엮어가는 솜씨와 글 솜씨가 시샘을 느낄 만큼 훌륭했기 때문이다. 다소 꼰대(?)스럽게 말하면 과거 어떤 시절의 젊은이들이 농활이니, 공활이니 하는 것으로 청춘의 한 시절 타인을 만나서 성장했다면(나는 지금도 이것이 ‘진정한 공부’ 중 일부였으리라 여기지만, 정작 나 자신은 먹고 살기 위해 노동해본 기억밖에 없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엄기호의 말을 빌리면 군대 또는 해외를 나가는 것이 하나의 통과의례, 진짜 사람을 만나는 과정이 된 듯싶다.


겉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롭고 여유 있어 보이지만, 양계장에서 키워진 닭처럼 부모가 대신 선택하고, 대신 살아주는 이 시대의 풍속이 청춘으로 하여금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최대의 장애가 되어버린 시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현석은 이 시기들을 매우 치열하게 보냈다. 이 책을 통해 내가 만난 이현석은 ‘꼴통’이다. 내가 이현석을 감히 ‘꼴통’이라고 부르는 건 아마도 권혁태 선생이 나보고 ‘또라이’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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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길이 학교다
- 산길, 강길, 바닷길에서 만나는 세상의 모든 역사

조지욱 (지은이) | 낮은산 | 2013-10-28

나는 '길'을 사랑한다.

그러나 인간에겐 문명과 소통을 상징하는 길이 생명에겐 죽음을 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길을 걸을 때마다 가끔이라도 그 길의 무게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부천의 한 고등학교에서 지리를 가르치고 있는 조지욱 선생의 책 "길이 학교다"를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펼쳤다.

그저그런 청소년 상식 증진용 도서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마감 뒤끝의 심심파적 읽을거리 정도로 시작했는데 "청소년들을 독자로 겨냥한 듯 난이도 자체는 높지 않지만, 깔끔한 문장과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내용에 담긴 수준 높은 통찰이 돋보이는 훌륭한 지리(地理) 입문서"였다고만 정의하고 넘기기엔 아쉬움이 남는 책이었다.

사실, 김두식 선생의 책 "다른 길이 있다"를 먼저 읽을지 이 책을 먼저 읽을지 하다가 "황해문화" 창간 20주년 기념호가 이 책처럼 인터뷰집은 아니어도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기에 지금의 내 심리상태로는 지금 읽기에 버겁게 여겨진 탓에 이 책을 먼저 들었다.

세상에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조지욱의 책 서문에 해당하는 "길이란 무엇일까?"는 세상에는 세 가지 길이 있다는 정의로부터 시작한다.

"어디 가는 길이니?"
"아프리카의 배고픈 어린이들을 구하는 길은 무엇일까?"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말이 아니면 하지를 마라."

하나는 이동통로로서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방법으로서의 길이오, 또다른 하나는 도리로서의 길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떤 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은 큰 맥락에서 이 세 가지 길을 하나로 아우르는 대단한 능력을 보여주는 책이었다. 저자의 속깊은 관점과 이것을 통합해낼 수 있는 탁월한 역량이 없었다면 이 작업은 아마도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게다가 이 책을 읽노라면 그 길(세 가지 길)을 함께 걷는 듯 하고, 함께 걷고 싶어지게 만든다.

"경상북도 문경에는 '토끼비리'라는 아슬아슬한 벼랑길이 있다. '비리'란 강가나 바닷가의 낭떠러지를 뜻하는 사투리이다. 지금도 토끼비리를 지날 땐 긴장하고 주의해야 한다. 까불면 절대 안 된다는 뜻이다. 토끼비리는 폭이 30cm가 채 되지 않는 곳도 있다. 이 길이 조선 시대에 서울과 부산을 이어주던 영남대로에서 가장 험했던 길이다." (24쪽)

그런데 이 길은 1,100년 전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에게 쫓겨 목숨을 빼앗길 뻔한 그곳에서 시작된다. 견훤에게 패해 쫓기던 왕건이 이곳까지 쫓겨왔으나 사방을 둘러보아도 길이 보이지 않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던 토끼가 벼랑을 타고 가는 것을 발견하여 뒤쫓아가서 살아난 길이다.

"초한지"에서 유방이 항우에게 쫒겨 척박하고 후미진 촉땅으로 들어갔다가 되돌아나와 천하를 쟁패하기 위해 벼랑 끝에 닦은 길을 '잔도(棧道)'라고 하는데, 국내 유일의 잔도가 바로 '토끼비리'란다.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길이다. 그는 이처럼 역사적인 길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연스럽게 동서양의 문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가하면 색다른 유래 이야기도 눈길을 끌었다. 예를 들어 나는 '노가다'란 말을 지금까지 일본어로 'dokata[土方]'이란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았는데, 이 책에선 경인선을 건설할 당시 일본인 반장이 구호를 부칠 때 일본말로 "노(좋다, 으뜸)"라고 구호를 부치면 조선인 일꾼들이 "가다(덩치, 모양)"라고 후렴을 붙이며 무거운 것을 들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물론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산을 넘는 길

우리 역사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지명 '철령'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새롭게 느끼고, 알게 된 것도 이 책을 통해서다.

"14세기 말은 고려가 문을 닫고 조선 시대가 열리는 시기였다. 힘 빠지는 고려를 지켜보고 있던 명나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철령 북쪽 땅(지금의 함경도)을 먹겠다'고 선전포고한다. ...<중략>... 이에 고려 우왕은 명나라의 요구를 거부하고, 이성계 장군에게 5만 군사와 함께 출전하여 고구려의 옛 땅인 요동지역까지 찾아오라고 명령한다. 여기서 잠깐, 왜 명나라는 철령 남쪽만을 고려로 인정하려 했을까?

철령은 태백산맥이 시작되는 곳에 있는 산의 길목에 해당하는 고대다. 철령은 우리 땅의 척추이자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인 백두대간의 등허리에 있다. 북쪽 백두산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내려오면 남쪽 태백산맥 능선으로 들어서는 길목이다, 철령은 이토록 중요했기에 그곳에 '철령관'이란 관문이 있었고, 이 관문은 지역 간 경계가 되어 철령관 동쪽 강원도 땅을 관동, 서쪽의 평안도 일대를 관서, 북쪽의 함경도 땅을 관북 지방이라고 한다."(67-68쪽)

해마다 한두 차례씩 우리나라의 역사유적을 찾아가 공부를 하는데, 살아있는 역사기행이 되기 위해선 단지 현장의 문화유적을 살펴보고 '아! 좋구나. 아름답구나'하고 돌아오는 정도론 부족하다. 살아있는 역사기행이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마음이 되어 보는 일이다. 그런 마음 공부 없이 그저 가서 아름다운 경치와 맛난 향토 음식에 젖었다가 돌아오는 건 그냥 관광이다.

철령은 천혜의 요충지로 우리 군대가 함경도 땅을 지나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관문이자 반대로 중국이 한반도로 내려올 때 반드시 지나야 하는 요충이기도 했다. 삼국시대 당나라가, 고려시대 명나라가, 조선시대 이여송이, 한국전쟁 당시 팽덕회의 중국인민해방군이 어디쯤에서 멈추고자 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이 부분에 대해선 소설가 유하령 선생이 전에 말씀하신 부분도 있으니 참고하면 좋겠다).

이처럼 역사적인 길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하면 생태적인 길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진화론의 섬, 생태의 보고 갈라파고스 제도가 인간의 발걸음에 의해 망가지고 있는 현실, 그곳을 찾은 관광객들을 실어나르는 비행기와 자동차 행렬에 치어죽어가고 있는 생명체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가 하면 수에즈, 파나마 운하에서 시작해 운하사업으로 진행되었던 4대강과 경인아라뱃길의 허상에 대해 조목조목 질타하고 있다.

댐이란 말이 네덜란드에서 유래된 말이란 것도 이 책을 통해서 알았다. 로테르담, 암스테르담 같이 수면보다 낮은 네덜란드의 도시들 지명에 유난히 담이 많은 이유가 그것이었던 거다. 그런데 이 댐은 여러 가지 유용한 면도 있지만 자연생태와 인간의 삶에 끼치는 폐해도 만만치 않다. 그렇기에 미국이나 프랑스는 댐이 이익보다 생태계를 교란하는 문제가 더 크가며 지을 때보다 더 많은 돈을 들여 댐들을 해체하고 있다.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는 길이 진리다

그는 미국 키시미 강의 사례를 든다. 1928년 미국 플로리다의 대홍수로 2,000명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미국은 그 원인을 분석했다. 문제는 운하 때문이었다. 자연적인 강의 흐름을 무리하게 직선화하고, 강바닥을 파내고 갑문을 설치하면서 문을 열어야만 물이 흐르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또 높은 둑으로 수중 생물이 육지와 하천을 오갈 수 없게 된 것은 물론이요. 육상 생물들이 물을 찾아오는 길도 끊겨버렸다. 그런데도 미국은 1971년까지 23년간 3천만 달러를 들여 키시미 강 운하를 만들었다.

이곳을 찾던 철새들의 95%가 발길을 끊었고, 결국 하천 주변에 살던 주민들도 이곳을 떠났다. 자연히 지역 간 왕래가 줄었고, 운하는 불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결국 미국 정부는 이곳을 자연 상태로 복원하는데 3억 달러를 들이고도 아직까지도 완전히 복원하지 못했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되묻고 있다.

걷기 좋은 올레길이 좋은 길일까?
속도가 무제한인 아우토반 고속도로가 좋은 길일까?

아마도 좋은 길이란, 좋은 생각으로 만드는 길과
좋은 생각을 하고 있으면 마음으로 보이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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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일본의 불안을 읽는다 - 일본 트라우마의 비밀을 푸는 사회심리 코드
권혁태 (지은이) | 교양인 | 2010-08-20


권혁태의 『일본의 불안을 읽는다』는 지난 2010년에 나오긴 했지만, 그 해에 나온(다시 말해 그해 나온 책들 중에 내가 접해본) 책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책일 뿐만 아니라 내가 읽어본 일본 관련 서적 중 가장 빼어난 책으로 손꼽는 책이다.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일본의 최근 행보들을 일본의 근현대사를 고찰함으로써 그 이면에 감춰진 일본이란 국가의 욕망과 의도에 대해 사회과학적 분석을 가하고 있다. 분석의 내용과 형식이 매우 정치(精緻)한 책인데, 어떤 까닭에서인지(교양인은 심리학 저서들도 많이 내고 있다) 이 책의 출판사인 교양인은 책제목은 물론 헤드카피까지 '일본 트라우마의 비밀을 푸는 사회심리코드'라고 심리학 서적 냄새가 물씬 나는 느낌으로 밀어서(그 결과 한 마디로 책을 베려버렸다) 이 책이 지닌 여러 미덕을 훼손시켜버린 느낌이다.

그런 탓에 이 책은 마치 일본에 대한 그저 그런 인상비평 책들 ‘느그들이 일본을 알어?’ 같아 보인다. 게다가 머리를 풀어헤친 표지 이미지 속 여인은 정말 ‘안습’이다. 표4의 카피 역시 '일본의 집단 심리를 읽는 네 가지 코드 불안, 분열, 트라우마, 그리고 자기기만'이다. 이래서야 이 책은 그저 그런 심리학자의 일본탐방기 같아 보일 수밖에. 저 네 개의 단어가 물론 이 책의 열쇠말일 수도 있지만,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 단어들이 사용된 까닭은 역사적 기반을 가지고 도출된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표4에 이용된 느낌은 마치 선험적으로 주제를 정해놓고, 일본에 대해 접근한 것처럼 오인하도록 만든다. 게다가 노란 색 표지라니….

개인적으로 나는 우리가 일본에 대해 가지고 있는 한 편의 우월감과 다른 한 편의 열등감을 떠나 일본과 우리의 근대는 일본이란 어머니(아버지)이자 자매를 미국이 근친교배시킨(이건 내 입장에선 굉장히 순화시킨 단어 선택이다)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과 일본이 일정한 시차를 두고, 서로 다르면서도 비슷한 경로를 걷고 있는 까닭은 '한국과 일본의 근대'가 미국이란 공통의 DNA를 강제로 물려받은 까닭이 크다. 그런 까닭에서라도 우리는 일본을 좀더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있다(하기사 내게 안 그런 분야가 하나라도 있겠냐만).

그것이 이 책을 단지 일본 우경화에 대한 고민으로만 읽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실정치의 맥락에서 일본은 역사적으로, 전통적으로 중국과는 등거리 외교를 해왔지만 한국은 대륙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까닭에 대륙(중국)의 역사에 더 깊은 영향을 받아왔다. 아마도 한국과 일본의 정치적 입장이 좀더 명확하게 갈리는 부분은 이 대목이 될 것이다. 『일본의 불안을 읽는다』는 건 일본의 불안을 읽는 것이지만 동시에 한국의 불안과 미래를 읽어내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한 예를 들어 이 책에는 일본 내의 좌파 정당과 정치세력의 몰락 과정에 대해 섬세하게 묘파하면서도 중요한 맥들을 짚어주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일본 좌파의 ‘분열’ 과정이다. ‘우치게바’를 우리말로 옮기면 ‘내부 폭력’쯤 될 터인데, 잘 알려진 대로 일본의 경우엔 적군파를 통해 극단적으로 표출된 사례이지만 1980년대 운동을 경험한 이들이라면 형태는 다소 완화되어 있지만 우리 역시 이와 비슷한 형태의 여러 내부폭력들이 존재했고, 경험했다. 일본과 비교해 조직 내 위계, 성역할 분담을 가장한 차별과 성폭력 등등의 문제란 점에서 좀 더 봉건적이고 가부장적 형태의 폭력이었다.

난 한국사회에서 진보적 노동 운동이 도덕적으로도 파탄났음을 드러낸 장면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97년 IMF를 앓고 이 땅은 '구조조정-정리해고'라는 강요를 순리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미쳐도 곱게 미치란 말이 있고, 프로야구에서도 비록 오늘 경기에서는 패하더라도 내일의 경기를 위해선 오늘 어떤 모습으로 패할 것인지가 중요한데 1998년 여름의 현대자동차노조는 ‘구조조정-정리해고’에 맞서 30여일이 넘는 투쟁을 하면서 추하게 미쳤고, 추하게 패했다.

약간의 살점을 얻는 대신, 척추가 부러진 것이다. 당시 노조는 많은 수의 사람들을 정리해고 시키지 않고, 가장 적은 사람들을 정리해고의 대상에 올리는 것에 합의함으로써 투쟁을 일단락지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대상이 사업장에서 열심히 밥 짓고, 파업현장에서도 역시 열심히 밥 짓던 식당노조 아주머니들이었다는 것이다. 30여일이 넘는 시간을 함께 싸워왔지만, 사태가 일단락되고 나서는 누구도 아주머니들과 함께하는 이들이 없었고, 그들의 고통을 아는 체 하는 이들도 없었다. 사측이 노조에게 그랬던 것처럼, 노조 또한 아주머니들의 분노와 절규를 외면했던 것이다. 1998년 현대자동차노조는 함께 연대 투쟁하던 이 아주머니들을 한때 ‘운동의 꽃'이라고 추켜올렸다. 그런데 운동의 꽃을 꺾어 바친 것은 누구였을까?

이 사건은 비록 적군파의 ‘우치게바’와 형태는 다르지만, 이후 벌어진 일련의 일들은 살인 못지않은 파괴적 효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그 폭력성과 위선이란 측면에서 사실 훗날 나타나게 될 용산참사나 쌍용차노조에 대한 살인적인 진압의 징후였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쌩얼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이후 노동운동은 현재까지 회생의 기미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이때의 각인효과는 일베의 출현에 이르기까지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잠이 안와서 뒹굴거리다 문득 눈에 띄어 다시 펼쳐 읽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들이다. 내가 책을 쥔 채 다시 잠들지 않은 것만 봐도 이 책이 얼마나 재미있고 유익한 책인지 다들 알겠지? ㅋㅋ

*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전교조가 해직노동자를 버리지 않으면 법외노조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말도 안되는 정부의 요구에 맞서 투쟁하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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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이, 유희, 축제, 카니발, 연희"는 각기 다른 개념이지만 비슷한 개념이며 따로 떼어놓기 어려운 개념들이기도 하다. 장 뒤비뇨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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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주 '놀이와 '축제'를 혼동한다. 놀이는 규칙의 수용을 이야기하며 과격한 근육행위에 기호를 부여하고 자연적인 행위로부터 분리되어 스펙타클(spectacle: 연행적인 방법을 통해서 어떠한 행위를 펼쳐보이며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 지각 가능하도록 하는 것)로 통합되는 것이다. 반면에 축제는 규칙을 위반하는 것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모든 규칙을 파괴하는 것이다. 위반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축제 때 일반적으로 보이는 '규칙 없음'이나 '방탕'을 의미하는 것과는 다르다.

축제는 기호나 규칙을 파괴하는데, 이것은 축제가 그것들을 인식하면서 침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탈문화된 세계, 즉 규범이 없는 트레멘덤(tremendum)과 같은 공포의 공간을 생성시키는 세계와 대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중략>... 축제는 문명들이 변화하는 순간에 그 문명들의 틈새에 살며시 끼여든다.
<장 뒤비뇨, 류정아 옮김, "축제와 문명", 한길사, 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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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주 놀이와 축제를 혼동한다. 뒤비뇨의 말을 부정하진 않지만 '놀이와 축제, 놀이와 예술, 놀이와 창조, 놀이와 상상력, 놀이와 사회, 놀이와 인간'은 구분되지 않는 가운데 수만 년을 함께 해왔을 것이다. 그래서 축제와 놀이는 종종 문화인류학의 범주 안에서 연구되며, 문화인류학과 사회학은 종종 혼동된다.

다음의 책들은 축제와 놀이 또는 그밖에 혼동되는 것들에 대한 책이다. 만약 누군가 놀이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다고 내게 조언을 구한다면(아마도 그건 내 나름 특별한 인연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지만) 다음의 책들을 추천한다.






 
축제 이론 : 류정아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3년 2월
- 류정아 선생은 우리나라에서 '축제 연구의 대가'라고 할 만하다. 이 책은 커뮤니케이션북스에서 펴내는 커뮤니케이션 관련 총서 중 하나로 매우 실용적인 문고본이다. 이 방면에 관심이 있고, 이제 막 입문하려는 분들이라면 참고할 만한 시리즈로 가치가 높다.

1.아널드 반 제넵: 통과의례
2.마르셀 모스: 증여론
3.에드먼드 리치: 시간의 패러독스
4.빅터 터너: 리미날리티와 코뮤니타스의 창조성
5.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6.로저 카유아: 놀이와 인간의 정체성
7.바흐친: 반(反) 구조적 카니발과 소통시스템
8.마리안느 메스닐: 민속학에서 민족기호론으로
9.장 뒤비뇨: 문명과 판타지 그리고 자유로움
10.리처드 셰크너: 퍼포먼스와 스펙터클

이중에서 마르셀 모스, 빅터 터너, 하위징아, 로저 카유아, 바흐친, 장 뒤비뇨 등은 국내에 저서가 한두 권 정도는 소개된 적이 있지만 사실 노동중독사회, 과로사회 등으로 호명되는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많이 알려져 있다고 할 수는 없으리라. 나머지는 거의 잘 알려져 있지 못하다. 기초 이론을 다진다는 측면에서 먼저 읽을 만하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6808867)

놀이의 반란 - EBS 다큐프라임 화제작! : EBS <놀이의 반란> 제작팀 (지은이) | 지식너머 | 2013년 6월
- 이 책은 EBS에서 방영해서 화제가 되었던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옮긴 것이다. 교육적인 의미에서 '놀이'에 대해 반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실제 교육현장(물론 영유아가 중심에 있긴 하지만)에서 벌어지는 현장의 상황을 바라볼 수 있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2769392)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 유쾌한 미학자 진중권의 7가지 상상력 프로젝트 : 진중권 (지은이) | 휴머니스트 | 2005년 3
- 이 책이 나온지도 벌써 꽤 되었다. 읽은 사람들도 많고 여전히 잘 팔리는 책이라 별도의 소개가 필요할까 싶기도 한다만 굳이 말하자면 예술 작품 속에 등장하는 20가지 놀이를 7가지 범주로 나눠 미학적으로 사유해본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620331)

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 - 생각하는 인간에서 놀이하는 인간으로 창조와 상상력의 원천으로서의 놀이 탐구 : 스티븐 나흐마노비치 (지은이), 이상원 (옮긴이) | 에코의서재 | 2008년 7월
- 이 책은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 시인, 교사 그리고 컴퓨터 아티스트이며 심리학과 문학을 공부한 저자가 상상력과 창조의 원천으로 '놀이'를 바라본 것이다. 어찌보면 놀이의 기능과 의미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재확인한 것이지만 현장에서의 여러 예시들을 통해 놀이가 가지고 있는 창조력의 원천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717113&start=slayer)


플레이, 즐거움의 발견
- 우울한 현대인이 되찾아야 할 행복의 조건

스튜어트 브라운 | 크리스토퍼 본 (지은이) | 윤미나 (옮긴이) | 황상민 (감수) | 흐름출판 | 2010-05-18 | 원제 play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872901)

앞서의 책들 중 첫 번째 책을 제외하고는 이론서라고 하기엔 다소 소프트한 편인데 비해, 지금 소개하는 네 권의 책은 '놀이'와 '축제'에 대한 본격 이론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놀이에 관한 책이 이론서라고 딱딱하기만 하다면 모순일 수 있겠다. 아래의 책들이 쉽냐고 묻는다면 나로선 그렇다고 대답하겠다만, 분명 어렵다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게다. 그래도 어떻게 하겠냐. 필요하면 봐야지. ㅋㅋ

놀이와 인간 - 가면과 현기증 (Le masque et vertige) : 로제 카이와 (지은이), 이상률 (옮긴이) | 문예출판사 | 1994년 4월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1002335)

호모 루덴스 - 놀이하는 인간 : 요한 하위징아 (지은이), 이종인 (옮긴이) | 연암서가 | 2010년 3월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4054057)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 미하일 바흐찐(철학자) 저 | 이덕형 역 | 아카넷 | 2001.05.30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9103401)

축제와 문명l 한길컬처북스 21 : 장 뒤비뇨 (지은이) | 한길사 | 1998-05-25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5601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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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믿어라"
- 윌리엄 E.B. 듀보이스


지금 내 책상에는 삼천리 출판사에서 나온 한 권의 책 "니그로:아프리카 흑인에 관한 짧은 이야기"가 있다. 책을 받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삼천리가 미쳤구나'란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물론 이 말은 나쁜 의미에서 한 말은 아니었다. 이 책의 저자가 '윌리엄 E.B. 듀보이스(William Edward Burghardt Du Bois, 1868~1963)'이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삼천리가 미쳤구나'란 말 속엔 '과연 이 책이 몇 권이나 팔릴까…. 그런데 왜 이 책을 냈을까…. 참 좋은 출판사구나.' 등등의 여러 가지 생각들이 함축되어 있다.  

듀보이스란 이름은 미국의 근현대사, 그중에서도 인종차별 문제에 대한 글을 읽다 보면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이름이자, 별 관심 없는 사람들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이름이다.

그는 1868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그레이트배링턴에서 태어난 흑인(아프로 아메리칸)이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을 발표한 것이 1863년 1월 1일의 일이었다. 노예해방이 있은 지 5년 후에 태어나 1895년 하버드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고, 이어 피스크대학과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한 뒤 흑인 최초로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애틀랜타 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역사학과 사회학, 경제학 등을 가르쳤는데, 1905년 사실상 최초의 흑인민권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이아가라 운동(Niagara Movement)'을 제창했다. 그는 1903년 "흑인의 영혼(The souls of Black Folk)"을 발표하며, 이전까지 교육을 통한 지위향상을 주장해온 '부커 T. 워싱턴(Booker T. Washington, 1856~1915)'의 온건 노선에 반대했다.

부커 T. 워싱턴은 흑인 민권운동의 '안창호'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이었는데, 그는 노예로 태어난 흑인민권운동 지도자 중 거의 마지막 세대라고 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투쟁할 때가 아니다'며 미국 남부 지역의 공공연한 흑백분리 정책 등과 대결을 회피하며 타협했기 때문에 '항복주의 노선'이란 비판을 받았다.  

B.T. 워싱턴의 온건노선에 반대한 듀보이스의 노선은 흑인지식층의 지지를 받았고, 1905년 나이아가라 운동은 1909년 '전국유색인종협회(NAACP)'의 창설로 이어졌다. 그는 1910∼1932년 NAACP의 기관지인 《크라이시스 Crisis》를 편집하면서 흑인민권운동의 기초를 다지는 한편 '범아프리카주의'를 제창했다.

범아프리카주의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인물이 가나의 초대 대통령인 '콰메 은크루마(Kwame Nkurmah, 1909 ~ 1972)'이다. 그는 이른바 '검은 황금(흑인 노예)' 무역의 집산지였던 아프리카 서남부 해안(골드코스트) 출신으로 가나의 독립운동을 지휘하여 1947년 통일골드코스트회의(UGCC)의 서기장이 되었고, 1957년 골드코스트가 가나로 독립하면서 1960년 가나의 초대대통령에 취임한다. 그는 듀보이스로부터 영감을 얻은 '범아프리카주의'를 표방하였는데, 1966년 쿠데타로 실각하여 기니로 망명한다.


콰메 은크루마(Kwame Nkurmah, 1909 ~ 1972)


범아프리카주의(Pan- Africanism)란 백인의 지배에서 탈피해 아프리카의 정치·경제적 연합을 결성하자는 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데, 시몬 볼리바르의 '범라틴아메리카주의'도 이와 비슷한 개념을 추구했다. 사실 범아프리카주의의 기원은 19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그 실질적인 출발은 1919년 윌리엄 듀보이스를 중심으로 파리에서 개최된 제1회 범아프리카회의를 통해서라고 할 수 있었다.

듀보이스는 뉴욕, 파리, 런던, 브뤼셀 등을 중심으로 흑인들과 연대하여 백인과 같은 수준의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운동을 개최했는데, 1930년대 들어 경제적 제약으로 인해 진척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1935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아프리카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국가이자 흑인 왕국) 침략은 범아프리카주의 운동가들의 공분을 불러 일으켰고, 전 세계 흑인들에게 범아프리카주의의 필요성을 새삼 부각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개최된 제5차 범아프리카대회에서 듀보이스는 은크루마와 함께 의장직을 맡았다. 범아프리카주의는 서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독립과 민족자결을 위한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범아프리카주의는 조지 패드모어(George Padmore, 1903~1959) 등에 의해 일정하게 공산주의로 경도되는데 그런 일련의 흐름 속에서 듀보이스는 인권과 평화, 사회변혁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다른 한편으론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소련의 이익에도 부합하여) 1958년 레닌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듀보이스는 1961년 공산당에 입당했다. 며칠 전(2013년 8월 24일) 마틴 루터 킹 목사 워싱턴 대행진 50주년 기념행사가 NAACP 주도 아래 성대하게 치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사후 50주년을 맞이한 듀보이스에 대해서는 부각되지 못한 까닭도 아마 거기에 있으리라.

미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흑인민권운동의 역사를 기술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마틴 루터 킹 목사나 말콤 엑스에 비해 거의 알려지지 않은 까닭(헬렌 켈러의 생애사가설리번 선생과의 관계라는 초기 역사 기술에 머무르는 까닭도 그녀가 생애 후반기를 사회주의자로 살았기 때문이다)도 거기에 있다. 윌리엄 듀보이스는 1961년 가나의 은크루마 대통령의 초청에 따라 가나에 갔고, 그곳에서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가나 국적을 취득했다. 그는 가나 아크라에서 정부 후원 아래 백과사전 편찬사업에 몰두하다가 1963년 세상을 떠났다.

이 책 "니그로:아프리카와 흑인에 관한 짧은 이야기"는 단지 미국 내 흑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아프리카의 역사, 백인들에 의해 날조되거나 왜곡된 아프리카와 흑인의 역사, 인종주의가 정치, 윤리적으로는 물론 학문적으로도 결코 올바른 것이 아니란 사실을 조목조목 반박하기 위해 쓰인 책이기도 하다. 그는 이 책을 1915년에 펴냈는데, 이 책이 나오던 해 미국에서는 D.W.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이 개봉되었다.

* '윌리엄 듀보이스'에 대해 언젠가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에서 다루고 싶었는데 공부는 부족하고, 그와 관련해 읽을 만한 책 한 권이 없어 언젠가는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그의 저작을 직접 만나게 되다니 꿈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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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공유하는 모든 것
- 세상을 바꾸는 새로운 패러다임
제이 월재스퍼 (엮은이) | 박현주 (옮긴이) | 검둥소 | 2013-02-28 | 원제 All That We Share (2010년)




미국의 발명가이자 철학자인 벅민스커 풀러는 "존재하는 현실과 싸우는 것으로는, 결코 변화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뭔가를 변화시키기 위햐서는, 현존 모델을 쓸모 없게 만드는 새로운 모델을 세워라"라고 말했다. 정확히 요즘 한국의 현실을 말하는 듯 하다.

"우리교육"에서 서평을 부탁해서 읽고 있는데, 제목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개럿 하딘의 '공유지의 비극'이란 오래되었으나 현재까지 보수주의, 신자유주의 논자들의 강력한 근거가 되는 사회과학 논문이었다.

1968년 12월 13일자 『사이언스』에 실렸던 하딘(G. J. Hardin)의 논문은 개인주의적 사리사욕 추구는 결국 공동체 전체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는 주장을 모두에게 공유되고 개방되어 있는 목초지의 사례를 들어 이야기한다. 일종의 게임이론인 셈인데...

소치는 사람들은 거기에서 저마다 가능한 한 많은 소를 키우려고 할 것이다. 공유지에 내재된 논리는 비극을 낳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소치는 사람들이 합리적인 사람들이라면, 최대한의 이익을 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암암리에 혹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들 각자는 “나의 소를 한 마리씩 더 늘려 가면 나에게 얼마나 효용이 생길까?”라는 질문을 던질 것이다.

이처럼 개인주의적 사리사욕의 추구가 결국 공동체 전체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고 주장하였다. 예를 들어 주인이 없는 한 목초지가 있을 경우(외부효과) 비용을 들이지 않기 위해 마을 사람들 모두 이곳에 소를 방목하여 풀을 먹이게 되고, 결과적으로 이 목초지는 황폐화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소유권 구분 없이 자원을 공유할 경우 나타나는 사회적 비효율의 결과를 '공유지의 비극'이라고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국가가 경제활동에 개입해 통제하거나 개인에게 소유권을 줘 개인이 관리하도록(사유화)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유지의 비극은 우리에게 남을 희생시켜서라도 끊임없이 자기 이익과 권리의 극대화를 추구할 경우, 결과적으로 자신을 포함한 공동체 전부가 피해를 입게 된다는 교훈을 준다. 하딘이 처음 이런 논지를 펼칠 때의 본 뜻은 '사유화(우리나라의 경우엔 '민영화'라는 언어 유희로 포장되고 있으나)' 보다 공동체의 효율적 관리에 방점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신자유주의자들의 사유화 정책의 강력한 이론적 논거가 되었다.

이 책 "우리가 공유하는 모든 것 - 세상을 바꾸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그것에 대한 약간은 때늦은 백신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책을 읽으며 내가 느끼는 문제점 중 하나는 싸이의 말춤, 시건방춤 처럼 이런 논리를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게 좀더 쉬운 말로 딱 집어주는 그럴 듯한 슬로건이 필요하다는 거다. 지난 선거에서도 그렇고, 번번이 한국의 진보는 이 부분을 잘 하지 못한다. '저녁이 있는 삶'이 주었던 인간미와 매력, 그리고 손쉬운 이해 같은 ....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040364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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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를 모두 읽는 사람이 있긴 있을까? 드물긴 하지만 간혹 있긴 하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읽어둔 "사기"에 대한 책들을 또 구입한다. 가끔 이런 부류의 열전들을 폄훼하거나 깊이 있는 책이 아니란 식으로서 서평을 써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부류의 독자들은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부류에 속하는지 미처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어렵게 글을 쓰면 대중적이지 못한 저작이라고 비난하고, 대중적인 수준으로 글을 쓰면 이번엔 깊이가 없다고 비난한다. 예전에 나도 그런 독자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추천하는 책은 "처음 만나는 우리 인문학"이란 책이다. 나는 이 책을 매우 좋게 읽었고, 저자의 박식함과 깊이에 감탄했다. 그런데 A서점의 리뷰들(그리고 별점을 보니, 내가 그 서점에서 리뷰어로 활동할 당시에도 이런 식의 별점 시스템을 비판한 적이 있는데, 비판했던 이유는 이 시스템이 그만큼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것에 비해 간혹 말도 안 되는 우스운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을 읽어보니 앞서 이야기했던 잘못을 범한 리뷰들이 상당수였다고 생각한다.

저자인 김경윤 선생에 대한 소개를 보니 아마도 내또래가 아닐까 싶었다.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가 사 주신 한국전래동화선집과 어린이 세계문학전집을 재미있게 읽었어요. 하지만 그보다 더 재미나게 읽은 책은《소년중앙》, 《새소년》, 《어깨동무》 같은 어린이 잡지였지요. 청소년기에는 친구들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 주며 간식도 많이 얻어먹었어요. 그때 막연하게‘나는 커서 작가가 될 거야’라고 생각했지요. 대학 시절에는 문학을 전공하며 시나 소설도 읽고 동서양의 고전을 많이 읽었어요.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나는 이제부터 결코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했거든요. 덕분에 글도 쓰고, 책도 여러 권 내게 되었어요. 그리고 도서관이나 학교, 지역 단체에서 인문학 강의도 하고 있지요. 지금은 그동안 읽은 책들을 모아 일산에서 자유청소년도서관을 운영하고 있어요."

상재해둔 저서가 9권에 이르는 것을 보면 그간 저술활동도 활발히 해온 편인데 그의 다른 책들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아마도 이 책은 저자 자신이 상당히 아낄 만한 책에 들어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의 저술들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것인데 반해 이 책은 성인들을 위한 본격적인 교양서의 부류에 들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교양'을 쌓는 일은 매우 어렵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교양이 세계의 교양이 되지 못했고,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교양이란 고전 시대에는 중국의 교양을 의미했고, 현대에 와서는 영미를 중심으로 한 서구의 교양을 의미한다. 다소 거칠게 말해 영국인들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읽고, 그것만 달달달 외워서 무슨 이야기할 때마다 한 구절씩 말해도 교양 있는 척 할 수 있다. 중국인들은 논어나 중용 정도만 제대로 공부해도 그 비슷한 시늉을 낼 수 있지만 한국 사회에서 교양이란 가랑이가 찢어지도록 멀리 달려야만 하고, 그래봐야 이탈리아 유학갔다 돌아와 같은 한국인들 앞에서 노래 자랑 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많다. 폄훼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그래봐야 어차피 우리 것이 아니란 뜻이다.

그렇다고 내가 국수주의자라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야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교양이 서구나 중국의 그것보다 더 많이, 더 넓게 헤아릴 수 있는 것이 될 가능성은 열려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와 흡사한 측면에서 여성성을 남성성에 비해 높이 평가하는데 그 이유는 여성성이란 것이 결국 사회적 약자의 위치를 오랫동안 경험하면서 체득된 것이기에 좀더 개방적이고, 온순하며 화합의 정신을 담아낸다고 보기 때문이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보아도 즐겁다고 영어권 아이들 만나면 쏼라대는 소리를 한 마디도 제대로 못알아듣겠지만 아시안잉글리쉬 내지는 비영어권 서구인들과의 대화는 영어로도 충분히 가능하더라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겠다.

어쨌든 이 책은 상당히 매력적인데 그 이유는 이미 우리 인문학을 연구한 여러 학자들, 저자들의 저서를 김경윤이 상당히 폭넓게 꼼꼼하게 씹고 발효시켜 보통 사람들도 읽고 소화하기 쉽게 풀어내고 있으며 거기에 저자 자신의 사유도 함께 녹여냈기 때문이다. 내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좋은 책이고, 아까운 책인데 그에 비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 안타까운 책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권한다.


* 다만, 편집자로서 이 책의 표지 디자인은 잘못되었단 생각이 든다. "처음 만나는 우리 인문학"이란 책 제목 답게 표지에 문고리를 하나 그려놓고 거기에 저자의 이름을 문패처럼 달아놓았던데 문고리 이미지가 아파트 실내 문고리처럼 서양식 문고리였다. 디자이너와 편집자가 이 책의 의미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정, 문고리 디자인을 이용하고 싶었다면 중국식도, 서양식도 아닌 한국식 미닫이 문고리를 했어야 의미가 정확하게 살 것이기 때문이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513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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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보는 세계문화상징사전 ㅣ 까치글방 87
진 쿠퍼 지음, 이윤기 옮김 / 까치글방 / 1994년 5월





이 책은 직접 구입한 것은 아니고, 누군가 선물해주어서 갖게 되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방법이고, 학교 다닐 때부터 충분히 권유받아온 방법인지라 새삼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는 방법이겠지만 쉽게 실천에 옮기기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사전을 찾아 그 정확한 뜻을 아는 것이다. 이 책의 옮긴이인 이윤기 선생은 "역자후기"에서 실례로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 독실한 크리스천 의사 친구의 결혼 축하연에서의 일이었다고 하는데, 축하예배를 이끌던 목사가 군의관의 군복 깃에 달린, 지팡이를 감고 오르는 뱀의 형상이 수놓인 기장을 가리키면서 '여러분, 이 군의관의 기장을 보세요. 지팡이와 뱀을 보세요. 구약성경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와 아론의 지팡이랍니다.'라고 했다.


목사는 군의관 기장을 성서적인 것으로 해석하여 이를 축하예배의 설교용 소재로 이용한 것인데, 이윤기 선생은 사실 이것이 그리스 신화에서 의료의 신으로 등장하는 아폴론의 아들 아스클레피오스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당시의 용한 의사이자 현인이었던 케이론의 가르침을 받아 대단한 의사가 되었고, 그가 설립한 의과대학은 수많은 명의들을 배출해냈는데, 오늘날 서양 의학에서 의학의 성인으로 받들어지는 히포크라테스도 이곳 출신이었다. 당시 의과대학은 아스클레피오스의 사당도 겸했고, 당시 의사들은 의사인 동시에 제관이기도 했다. 그 제관들이 사용한 엠블렘이 바로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를 휘감고 있는 아스클레피오스의 뱀(전령이자 사자인 흑빛 무독사)였다는 것이다.


이윤기 선생은 끝까지 참지 못하고 사실은 이런 뜻이라고 말해서 그 자리에서 무안을 당했다는 경험을 토로한다. 불행히도 이런 자리에서 지적인 민주주의는 종종 중우정치로 변해버리곤 한다. 지식인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이라도 이런 경험은 한 두 차례 가질 법한 일이기도 한데, 그럴 때 좋은 지침서가 되는 것이 이런 류의 책이다. 이 책이 국내에 처음 출간된 것이 지난 1994년의 일이고 보니 점차 고급화되어가는 최근 유행을 감안해본다면 비록 양장본이라고는 하나 지질이나 인쇄의 질 등 모든 점에서 많이 뒤처진 감도 있다. "그림으로 보는"이라고 해서 1,500여 개에 이르는 표제어에 일일이 도판이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또 사전이라고는 하지만 사전에 흔히 있는 반달색인(thumb index)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의 가격이나 기타 여러가지를 생각해볼 때 그 정도 사치는 바라기 어려운 일일 테고, 정 필요하다면 반달색인을 대신할 만한 포스트잇도 있으므로 그런 방법을 사용해보는 것도 좋다.


주변에서 이제 더이상 책으로 된 사전보다는 전자사전을, 백과사전도 간편하고 손쉬운 인터넷 백과 사전을 즐겨 찾는 경우가 많은데 물론 시대의 대세이니 무어라 말할 것은 없다. 그런데 가끔 사무실로 전화해서 핸드폰 분실했다고, 내 전화번호를 다시 묻는 친구들이 있다. 핸드폰에만 입력해놓고, 손으로 적는 수첩에 정리한 적은 없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다 자란 한국인 성인 남성의 대뇌 무게는 1,300~1,400g정도라 한다. 평생 살면서 몇 % 활용도 못한다고 하는데, 너무 놀려두면 나중에 써먹고 싶어도 써먹을 데가 없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런 친구들에게 아직 전자사전은 커녕 전자수첩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나란 사람은 영 구닥다리일지도 모르겠지만, 공부든 기억이든, 자기 책에 밑줄 긋고, 입으로 소리내 읽어보고, 손으로 직접 옮겨 적는 방법을 능가하는 것은 아직 발견되지 못했다는 걸 일깨워주고 싶다. 결국 책을 읽고 기억하는 건 사람이니까...




한 가지 더 현재 대한의사협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휘장에 사용되고 있는 지팡이는 사실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가 아니라 헤르메스의 지팡이로 이 둘은 지팡이를 뱀이 휘감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는 원래 뱀이 한 마리이고, 헤르메스의 지팡이는 뱀 두 마리가 서로 몸을 얽힌 채 기어오르는 형상이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앞서의 유래에 따라 의학을 상징하는 인물이고, 그와 같은 유래에 따라 의학 분야의 휘장으로 사용되는 것은 역사적인 연원이 있는 것이지만 죽은 이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부여받고 있는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가 사용하는 지팡이 '카두세우스'가 대한의사협회의 휘장으로 사용되는 것은 생각만 해도 으스스한 잘못된 사례이다. 그럼에도 이 휘장이 아무런 고민 없이 대한의사협회의 휘장으로 사용되었던 것은 미군 의무대가 처음 잘못 채택한 휘장을 우리가 아무 고민 없이 차용해 사용해 왔던 결과다. 이제라도 바로 잡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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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연구 - 알프레드 알바레즈 지음, 최승자 옮김 / 청하(1995년)



알프레드 알바레즈의 "자살의 연구"가 국내에 처음 번역소개된 것은 1982년의 일이었다. 우리 사회 전체에 죽음의 분위기가  넘쳐나던 바로 그런 시기에 이 책이 옮겨졌다는 것은 다소 의미심장하다. 이 책의 원제는 "The Savage God: A Study of Suicide"이다. 말그대로 "잔혹한 신: 자살의 연구"인 셈이다. 얼마 전 나는 게르트 미슐레의 "자살의 문화사"란 책에 대한 리뷰를 올린 바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자살 보다는 죽음(Thanatos) 에 대해 좀더 관심이 있고, 공자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삶도 모르거늘 어찌 죽음을 논할 수 있으리요"만 에로스와 타나토스(Eros et Thanatos)는 사실상 한 몸이기에 나는 에로스의 영역에도 관심이 많은 셈이 된다. 에로스와 타나토스(Eros et Thanatos)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생애에 대한 탐구이며 동시에 예술의 기본 재료들에 대한 탐구이다.


에로스는 궁극적으로 타나토스에 매혹되어 있으며 타나토스는 파괴의 신이자 동시에 생명의 신이란 점에서 언제나 에로스를 꿈꾼다. 모든 예술가들, 사람들에겐 근본적으로 생의 충동 즉 자기보존의 성적 충동을 표현하는 에로스와 이에 대립되는 타나토스(Thanatos, 그리스어로 죽음을 의미한다)라는 죽음 충동이 있다. 타나토스란 결국 "삶을 자연으로 되돌리는 것“이고, 에로스는 “자연에서 삶을 퍼 올리는 생식”을 의미한다. 예술이란 인간의 삶과 죽음을 그 내용으로 삼고 있으므로 당연히 섹스와 죽음은 모든 예술과 밀접한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으며, 그 내용을 표현하는 방식은 여러가지로 변주되더라도 결국 이 둘 사이로 귀결된다.


 

A. 알바레즈에겐 또 개인적으로 이런 극한의 경험을 한 사람을 직접 경험해 볼 기회가 있었다. 그것이 이 책의 서장에서 소개되고 있는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1932~1963)"이다. "아빠의 살찐 검은 심장에 말뚝이 박혔어요./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조금도 아빠를 좋아하지 않았어요./그들은 춤추면서 아빠를 짓밟고 있어요./그들은 그것이 아빠라는 걸 언제나 알고 있었어요./아빠, 아빠, 이 개자식. 이제 끝났어."라는 언제나 나를 감동시키는 시를 지은 미국의 대표적인 여성 시인이며, 동시에 현대를 대표할 만한 시인의 자살을 그는 가까이에서 목도하는 개인적인 경험을 한다. 실비아 플라스는 미국 보스톤대학교의 생물학 교수이자 땅벌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였던 아버지 오토 플라스의 딸로 태어났다. 실비아 플라스의 시 세계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은 그녀의 나이 8살 때 목격한 아버지의 죽음에 의한 충격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비아 플라스는 아버지가 죽은 이듬해인 아홉 살 때 첫 번째 자살 시도를 벌인다. 대학시절 다방면으로 뛰어난 재능을 보인 플라스는 장학금을 받고,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 대학 재학 중에 알게 된 시인 테드 휴즈와 결혼한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실비아 플라스는 1962년 자신의 집 가스 오븐에 머리를 박고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녀의 세 번째 자살 시도가 유일한 성공이자 실패였다고 A. 알바레즈는 말한다.


대개 책의 원제에 "Study"란 말이 붙는 책은 읽기 쉽지 않다. A. 알바레즈의 이 책은 자살의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시작해 - 자살이 생을 종결짓는 한 방법으로 비교적 쉽게 용인되었던 고대 희랍 세계와 문학, 자살이 죄악시되던 기독교 사회에 이르는 - 여러 사례들을 다룬다. 그러므로 나머지 장들을 모두 읽었다면(이건 분명히 약간의 엄살이긴 하지만) 당신은 자살에 대해 나름의 식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앞의 1장 부분 실비아 플라스가 죽음에 이르기 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만하며, 그것으로도 제 몫을 다 해냈다고 말할 수 있다. 옮긴 이인 시인 최승자는 우리에게 "개같은 가을"을 선사한 시인이기도 하다. 그녀의 번역은 대개 언제나 믿을 만하며, 읽는 재미를 만끽하게 해준다. 비록 이 말이 그녀에게 찬사가 될 수 없음을 나 자신은 충분히 알고 있지만...


그렇다면 왜 예술가들은 그토록 죽음에 대해 예민한 걸까. 그것은 이미 앞에서도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존재 자체가, 그리고 그들에 대한 사회적 의미 부여가 그들을 "잠수함의 토끼" 같은 존재로 규정하고 있는 때문인지도 모른다. 생물학적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지표 생물이라 할 수도 있겠다. 즉, 어느 지역의 생태계에서 특정한 생물이 살 수 없다면 그 지역의 생태계가 어느 정도 파괴되고, 오염된 것인지 알 수 있다는 그 생물 말이다. 이것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하자면 한 명의 괴짜, 혹은 바보, 혹은 괴물이, (종종 예술가들을 지칭하는 말들이다) 견딜 수 없고, 살아남을 수 없다면 그 사회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더라도 병든 사회란 것을 의미한다. 한 명의 지식인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한 것이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죽음에 맞먹을 치욕을 사회적 징벌로서 받게 된다면 그 사회는 병들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A. 알바레즈는 "자살의 연구"를 통해 문학과 죽음, 예술의 창조자이자 동시에 사회의 파괴자로 기능하는 예술가들의 상상세계에 죽음(타나토스)의 그림자를 연구했다.(내 딴엔 짧게 쓰느라 고생했다. 그리고 혹시 자살-행동으로 취할 자살 말고-에 대해 좀더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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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낯설게 읽기
기호학연대 엮음 / 문경(문학과경계) / 2003년 10월


"대중문화 낯설게 읽기"는 일정한 의도를 가지고 쓰인 책이다. 이 책의 저자들이 모두 꼭같은 의도를 지녔다고 할 수는 없으나 대체로 합의하고 있는 것들은 첫째. "대중문화는 지배 블록과 피지배 블록의 헤게모니가 투쟁하는 장"이란 점이고, 둘째. "대중은 무지하고 야만적이고 대중매체에 쉽게 조작당하는 우중이자 자기 나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자기 앞의 세계에 대응하고 문화와 예술 텍스트를 주체적으로 읽는 수용자"란 것이다. 그리고 셋째. "문화는 억압인 동시에 해방"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넷째. "기호학은 읽고 쓰는 능력을 일컬었던 기존의 ‘리터러시(literacy)’라는 개념을 대체하여 문화에 대한 이해와 판단 능력을 포함한 새로운 읽고 쓰는 능력"이다. 대체로 이상과 같은 부분에서 필자들은 대체로 동의하고 있으며 기호학,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기 보다는 기호학을 해방의 수단(방법론)으로 쓰고자 하는 이들이라 할 수 있다.


"대중문화 낯설게 읽기"는 모두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도흠의 "왜, 어떻게 대중문화를 낯설게 읽을 것인가?"와 강인규의 "기호학 : 의미를 둘러싼 투쟁"은 두 가지 점에서 이 책의 전체 핵심을 관통하는 글들이다. 먼저 이도흠의 글은 어째서 대중문화가 어째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를 놓고 투쟁하는 장이 되었는지 밝히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도흠의 글은 이 책의 목적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강인규의 글은 문화연구의 방법론이 어째서 기호학이 되는가? 기호학이란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다. 김기국은 "신창원 사건 보도 뒤집어 보기"를 통해 매스 미디어의 보도 논법을 기호학적으로 어떻게 낯설게 읽을 것인가를, 백승국은 우리가 쉽게 마주치는 식료품점의 진열장이 어떻게 우리들을 조작하는가에 대해, 박여성은 청소년 베스트셀러였던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가 만화의 기호학적 속성을 통해 우리들의 의식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밝힌다. 이렇듯 앞의 두 장이 전체를 통괄하고 있다면 뒤의 8개 장은 각각의 개별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 실생황에서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어떻게 조작과정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를 기호학적으로 해체하고 재구성할 때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지 실제 사례를 통해 접근하고 있다.


대중은 엘리트에 의해 조작되는 동시에 나름대로 대중문화 텍스트를 해석하고 실천하는 주체들로서 그들 나름의 미학적 판단에 따라 취사선택하고 있다. 지금까지 예술을 바라보는 미학은 전통예술에 기초해 엘리트들이 만들어놓은 기준일 뿐이며, 이는 서구의 비평가들이 낯선 동양의 예술을 야만으로 간주한 오리엔탈리즘과 유사한 편견일 뿐이다. 대중문화 텍스트는 맥락과 층위(context)에 따라 다르게 수용된다. 모든 문화는 의미소통이며 의미작용이자 이것을 조직화하는 체계다. 한 문화 안에서 인간이 의미를 만들고 소통을 하고 조직화하는 것은 세계관의 구조 안에서 이루어지므로 세계관에 대한 이해 없이는 한 문화의 헤게모니나 이데올로기에 대해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게 이들은 그동안 우리가 낯익은 것들이므로 당연하고, 올바른 것으로 받아들여 왔던 모든 것들을 새롭게, 그리하여 낯설게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낯설게 읽기란 기존의 읽기 방식 또 이에 의존한 이데올로기와 제도를 해체한다는 점에서 부정의 읽기이며, 이런 작업들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낯설게 읽기는 부정의 읽기이고, 동시에 창조적 해석이므로 기존의 의미(지배 이데올로기)와 투쟁을 벌인다는 점에서는 진보적 실천의 행위가 된다.


대중은 원자화하고 부품화하며 이질적, 고립적, 비조직적 개체이자 타자와의 강한 유대 속에서 삶을 구현하고 조직을 형성하며 공동체를 추구하는 구성원이다. 대중은 지배이데올로기에 휘둘리는 대상이자 지배층에 맞서 저항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실천 집단이다. 대중문화가 저질이고 야만이란 것도 이분법적 편견이다. 중생과 부처, 주체와 대상 사이가 서열도 대립도 없이 평등한 것처럼 대중과 엘리트, 작가와 독자, 나와 타자라는 것도 둘이 아니며 하나도 아니다. 대중이 교양을 통해 자기를 계발하면 엘리트요, 엘리트라 할지라도 대중을 계몽시키지 못하면 진정한 엘리트가 아니다. 문화는 억압인 동시에 해방이며 문화는 길들임과 동시에 부정의 행위다. 대중예술은 욕망을 추구하면서 욕망을 억압하려는 체제로부터 일탈한다. 예술이란 것이 현실을 넘어서 꿈을 꾸는 것이듯 대중예술 또한 현실의 굴레를 넘어서서 꿈을 꾸고 비전을 제시한다. 문화가 양가성을 갖듯 대중문화 역시 양가성을 갖는다. 대중문화에서 억압과 길들임, 해방과 일탈의 양면을 볼 때 대중문화는 올바른 위상을 가지게 될 것이다.


텍스트를 바꾸면 현실은 전혀 다르게 변한다. 정직한 텍스트일수록 진정한 현실에 가까운 것은 사실이지만 텍스트와 현실 사이엔 ‘좁혀지기는 하지만 만날 수 없는 거리’가 있다. 이처럼 텍스트는 현실을 투명하게 재현하지 않는다. 쓰는 주체는 자신이 가진 이데올로기, 세계관 등의 프리즘을 통해 현실을 바라보고 현실을 선택한다. 그는 말 그대로 현실을 다시 존재(re-presense)하게 한다. 재현은 단순히 의미생산에 그치지 않고 당대 권력과 유착해 지식을 생산하고 그 지식은 당대 진실로서 이데올로기적 속성을 띤다. 재현은 본질적으로 정치성을 지닌다. 텍스트는 의미를 드러내는 만큼 감춘다. 신화는 사물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정화시켜 순결하게 만들고 그것에 자연적이고 영구적인 정당화(justification)를 부여하기에 심층적인 분석을 통해 신화를 읽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기만하는 신화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대중문화의 영역에서는 광고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독자는 주체의 의도대로 텍스트를 해석하고, 현실을 표상할 것이 아니라 이를 뒤집어 읽고, 자기 나름으로 해독하여야 한다. 그리고 텍스트를 다시 써야 한다. 텍스트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수신자를 향하면서 담론으로 변하고 담론은 이데올로기를 품는다. 언어도 그렇지만 텍스트는 억압하는 습성을 가진다. 텍스트의 분석은 신화를 캐는 작업을 동반해야 하며 가장 적극적인 신화 캐기는 그 신화와 대항신화를 형성하는 것으로 텍스트를 다시 쓰는 것이다. 때문에 진정으로 자유롭고자 하는 이들은 텍스트를 뒤집는다. 뒤집어서 그 속에 숨어 있는 이데올로기를 낱낱이 파헤치고 텍스트를 다시 쓴다. 텍스트를 다시 쓴다는 것은 세계를 다시 창조함을 의미한다. 이처럼 다시 쓰기는 텍스트를 단순히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신화에 조작되던 대상이 주체로 서서서 세계를 다시 구성하는 것이다.


기호학은 바로 이 부분을 문제 삼는다. 기호학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의미를 찾아 나선다. 기호학은 모더니즘 예술 못지않게 화장실의 낙서에도, 그리고 누벨바그 영화 못지않게 싸구려 에로비디오에도 큰 의미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기호학이 사회의 모든 현상을 기호(sign)로 보고 그 의미를 파악해 내는 ‘기호의 과학(science of sign)’이라면, 기호학의 관심은 어떤 문화가 더 ‘우아’하고 ‘고상’한가가 아니라 어떤 문화현상이 ‘더 의미 있는가’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저급문화’와 ‘고급문화’의 위계화된 구분을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대중문화를 연구하기 시작한 문화연구(Cultural Studies)가 기호학을 방법론의 하나로 채택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권력은 그들의 지배를 합리화하고 영속화하는 데 기여하는 의미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물론 그들의 이익에 역행하는 의미와 즐거움은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것으로 제시된다. 예컨대 남성지배사회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자연적으로’ 육아와 가사에 관련된 일을 맡기에 적합한 것으로 의미화된다. 기호학은 이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문제 삼음으로써 현실을 낯설게 보여주는 장치다.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기호학을 ‘거짓말의 이론(theory of the lie)'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주장의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기호학은 기호로 간주되는 모든 것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대상과 의미 있게 대체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기호가 될 수 있다. 기호가 특정 대상을 지시할 때 그 대상은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기호학은 원칙적으로 거짓말에 사용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만일 어떤 것이 거짓말에 사용될 수 없다면, 역으로 이것은 진실을 말하는 데에도 사용될 수 없을 것이다.


미국 언론이 즐겨 사용하는 ‘이라크와의 전쟁(War with Iraq)’라는 기호는 얼핏 중립적으로 보이지만, 중동의 언론이 사용하는 ‘이라크 침략’이나 ‘이라크 학살’등의 기호와는 달리 ‘전쟁(war)’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고 감정이입을 차단하는 이데올로기적 기호다. 그리고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와의(with)’는 ‘~에 대한(against/on)’과는 달리 두 세력의 충돌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처럼 제시한다. 실제로 미국이 “이라크‘와의’ 전쟁”이란 기호를 사용한 반면 알자지라 등 아랍계 언론은 “이라크에 ‘대한’ 전쟁”이라는 계열체를 사용했다. 하나의 대상이 동시에 ‘민중해방’과 ‘민중학살’이 될 수 없는 일이라면, 누구 하나는 에코의 지적대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사진은 말없이도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거짓말’을 할 수 있다. 대중매체의 보도 사진에는 언제나 ‘자상한’ 설명이 따라다닌다. 미디어는 자신들이 사용하는 사진의 의미를 특정한 방향으로 한정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라크전쟁을 보도하면서 민간인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는 미군의 사진을 사용했을 때, 그 신문은 독자들로 하여금 미군에 대한 특정한 의미와 느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독자들이 사진을 보면서 “미군들이 이라크 민간인들을 거지 취급하고 있다”거나 “미국이 경제제재로 이라크 민간인들을 굶겨 놓고 이제는 사탕으로 환심을 사려 한다”는 창의적인 해석을 원치 않는다. 따라서 신문은 사진의 의미를 차단하기 위해 밑에 글을 달아 그 사진이 가진 본래의 의미를 친절히 설명해 주려 한다.


기호의 둔갑술로 인해 이라크를 공격하는 미국의 대통령이 ‘평화의 사도’가 되기도 하고, ‘국제 테러리스트’가 되기도 한다. 이 둘이 동시에 옳을 수 없다면, 어느 하나는 ‘대상을 갖지 않은 기호’, 즉 ‘거짓말’일 것이다. 기호를 통한 의미의 구성은 언제나 특정 입장의 이익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기호는 그리 허술하게 자신의 허구성을 폭로하지 않는다. 이렇게 의미체계가 특정 개인 및 집단의 현실적 이해관계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기호는 단순한 언어유희가 아닌 물리적 실체이며 권력 관계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기호는 누구의 이익에 봉사하는가?”


우리는 이야기의 세계에 살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다루는 뉴스도 예외가 아니다. 뉴스 역시 항상 정해진 순서대로 정해진 이야기의 틀을 따라간다는 점에서는 소설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현실은 결코 그 자체로 이야기의 요소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뉴스가 사건을 이야기 형식으로 재구성하는 것뿐이다. 결국 뉴스란 사건을 이야기체로 내러티브화하는 작업이며, 이 과정에 특정한 시각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내러티브(narrative)란 항상 특정한 기술자의 입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건이 이미 예측할 수 있는 이약의 형식으로 재구성된다면, 뉴스는 사건보다 앞서 쓰이는 이야기인 셈이다. 뉴스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파업이 ‘불법’이고 ‘과격’하다는 사실을 벌써 알고 있으며, 이것이 한국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울 것이라는 사실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익숙한 이야기’란 모든 사람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지배이데올로기의 다른 표현이다.


다시 말해 ‘현실’이란 객관적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한 사회에서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만들어진 ‘지배적 현실감(dominant sense of realism)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남자의 보살핌을 받아야 ‘여자다운 여자’가 되고, 지방색을 벗고 표준어를 써야만 멋진 인텔리가 될 수 있으며 ‘과격한’ 지하철 파업을 근엄하게 꾸짖어야만 ‘온건한’ 시민이 되는 것이다. 이게 ‘현실’이라면 우리는 ‘비현실’을 지향해야 한다. ‘현실’이란 지배체제의 자화상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당연한 현실’을 거부할 때, 사회의 변혁을 가능케 하는 가장 근원적인 문제제기, 즉 ‘의미를 둘러싼 투쟁’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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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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