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청춘에 보내는 송가4



- 송경동


광양제철소 3기 공사장

배관공으로 쫒아 다니다
잠시 쉴 때였다
10년 된 고물 프레스토를 빼서
폼잡고 다닐 때였다


읍내 정다방에 미스 오가 왔다

메마른 시골 읍내에 촉촉한 기운이 돌고
볕이 갑자기 쨍쨍해질 정도로 예쁜 아이였다
뻔질나게 다방을 드나들고
아침저녁으로 커피를 시켜 먹었다


어느 비 오던 날

낙안읍성을 다녀오는 차 안에서
사랑고백을 했다
그날 저녁 담장을 넘어
내 품으로 한 마리 고양이처럼
달겨들던 그녀, 열 아홉이었다


처음으로 성을 배웠던 시간들

빚이 져서 떠나가던 그녀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어느 발전소 공사현장으로 떠나야 했던 나
아름다웠던 시간만을 기억하자고
깨끗이 돌아섰던 우리
돌아보면 아직도 거기 서 있는 그녀



* 황해문화, 2011년 겨울호(통권73호)



**

내게도 공사판 떠돌이로 살았던 시절이 있었지. 읍내 나가면 티켓 끊어주는 다방도 있었다. 여자를 사는 건 아주 쉽고 간편한 일이었을 텐데, 내가 돈을 주고 여자를 사지 않았던 건 어쩌면 내 신념이 강한 탓이 아니라 내 두려움이 너무 컸고, 너무 가난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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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다


- 이병률



새벽이 되어 지도를 들추다가

울진이라는 지명에 울컥하여 차를 몬다
울진에 도착하니 밥냄새와 나란히 해가 뜨고
나무가 울창하여 울진이 됐다는 어부의 말에
참 이름도 잘 지었구나 싶어 또 울컥
해변 식당에서 아침밥을 시켜 먹으며
찌개냄비에서 생선뼈를 건져내다 또다시
왈칵 눈물이 치솟는 것은 무슨 설움 때문일까
탕이 매워서 그래요? 식당 주인이 묻지만
눈가에 휴지를 대고 후룩후룩 국물을 떠먹다
대답 대신 소주 한 병을 시킨 건 다 설움이 매워서다
바닷가 여관에서 몇 시간을 자고
얼굴에 내려앉는 붉은 기운에 창을 여니
해 지는 여관 뒤편 누군가 끌어다 놓은 배 위에 올라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한 사내
해바라기 숲을 등지고 서럽게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한 사내
내 설움은 저만도 못해서
내 눈알은 저만한 솜씨도 못 되어서 늘 찔끔하고 마는데
그가 올라앉은 뱃전을 적시던 물기가
내가 올라와 있는 이층 방까지 스며들고 있다
한 몇 달쯤 흠뻑 앉아 있지 않고
자전거를 끌고 돌아가는 사내의 집채만한 그림자가
찬물처럼 내 가슴에 스미고 있다


*


시를 읽으니 갑자가 울진 바다 냄새가 코끝에 싸하게 스민다.
나도 울진 여자 한 명 알고 있다. 눈이 커서 눈물 많은, 입이 커서 말도 많고, 손이 커서 정도 많고, 발이 커서 가고 싶은 곳도 많은 여자인데 울진을 떠나지 못하는 건 왜 일까?


서러움 가득 출렁이는 허리,
산만한 내 덩치로도 모두 안을 수 없는데 그 큰 눈에 담긴 바다를 모두 퍼올리면 하얀 소금꽃이 뚝뚝 떨어질 울진 여자, 울진 누이. 손 한 번 덥석 잡아주지 못하고 돌아서 내가 우는 그 여자

울창한 푸른 눈물 그득 고여 바다가 되고 포구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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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먼저 더 오래

- 고정희


더 먼저 기다리고 더 오래 기다리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기다리는 고통 중에 사랑의 의미를 터득할 것이요
더 먼저 달려가고 더 나중까지 서 있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서 있는 아픔 중에 사랑의 길을 발견할 것이요
더 먼저 문을 두드리고 더 나중까지 문닫지 못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문닫지 못하는 슬픔 중에 사랑의 문을 열게 될 것이요
더 먼저 그리워하고 더 나중까지 그리워 애통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그리워 애통하는 눈물 중에 사랑의 삶을 차지할 것이요
더 먼저 외롭고 더 나중까지 외로움에 떠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외로움의 막막궁산 중에 사랑의 땅을 얻게 될 것이요
더 먼저 상처받고 더 나중까지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상처로 얼싸안은 절망 중에 사랑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요
더 먼저 목마르고 더 나중까지 목말라 주린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주리고 목마른 무덤 중에서라도 사랑의 궁전을 짓게 되리라
그러므로 사랑으로 씨 부리고 열매 맺는 사람들아 사랑의 삼보-상처와 눈물과 외로움 가운데서 솟은 사랑의 일곱가지 무지개
이 세상 끝날까지 그대 이마에 찬란하리라

*

고정희 시인의 무덤엔 가본 적 없으나 대둔산 가는 길가 쓸쓸하고 외롭게 서 있는 시인의 생가에는 다녀와 본 적이 있다. 늦은 오후 길고긴 해바라기 늦은 태양이 저물던 무렵, 차를 돌려 되돌아 나올 수 없어 가던 길로 곧장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그 길 한 가운데 고정희 시인의 생가가 있었다. 고작 이것이었나? 할 만큼 허전함을 넘어 허탈하기까지 한 그녀의 생가엔 빛 바랜 양철 입간판이 지리산의 시인 고정희를 알리는 유일한 흔적이었다. 잊고 지나면 다시 만나지 못할 해남 길, 논두렁 사이 고즈넉하게 서 있던 그녀의 집 앞에서 나는 문득 그녀의 "더 먼저 더 오래"가 떠올랐다.

시인이여, 당신의 마음에 누굴 품었기에, 아니 무엇을 품었기에 고통의 불도장(火印)마저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찬란할 것이라 노래하였을까요? 그것은 혹여 사랑의 세 가지 보물(三寶) - 상처와 눈물, 외로움이었던지요. 그래서 당신이 가신 뒤 당신 집 앞으로 그토록 샛노랗게 물들인 벼이삭과 햇살과 대둔산을 보여준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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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꿈꾸는 것처럼



- 허수경


너의 마음 곁에 나의 마음이 눕는다

만일 병가를 낼 수 있다면
인생이 아무려나 병가를 낼 수 있으려고……,


그러나 바퀴마저 그러나 너에게 나를

그러나 어리숙함이여


햇살은 술이었는가

대마잎을 말아 피던 기억이 왠지 봄햇살 속엔 있어


내 마음 곁에 누운 너의 마음도 내게 묻는다

무엇 때문에 넌 내 곁에 누웠지? 네가 좋으니까, 믿겠니?


내 마음아 이제 갈 때가 되었다네

마음끼리 살 섞는 방법은 없을까


조사는 쌀 구하러 저자로 내려오고 루핑집 낮잠자는 여자여 마침 봄이라서 화월지풍에 여자는 아픈데

조사야 쌀 한줌 줄테니 내게 그 몸을 내줄라우


네 마음은 이미 떠났니?

내 마음아, 너도 진정 가는 거니?


돌아가 밥을 한솥 해놓고 솥을 허벅지에 끼고 먹고 싶다 마치 꿈처럼

잠드는 것처럼
죽는다는 것처럼


*


허수경의 시 중에 가장 좋은 것들은 어떻게 쓰인 것인지 도통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귀신에 홀린 것처럼, 꿈결에 쓰인 것처럼, 혹은 취한 것처럼 그렇게 도통 말을 붙일 수가 없다. 시를 읽노라니 같이 귀신에 씌인 것처럼 허우적대며 시만을 따라가다보면 나도 모르게 도통한 사람처럼 웃거나 울거나 멍해져서 앉아있게 된다. 물론 허수경의 모든 시가 그렇지는 않지만 이 시는 그렇다.


잠드는 것처럼

죽는다는 것처럼
 

마음을 놓으면

마음을 놓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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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이 타는 가을강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겄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가는,
소리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겄네.

*


내 마음은 깃발
바람 불면 바람 부는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사람들은 마음이 오색창연하다느니
사람들은 마음이 펄럭인다느니
사람들은 마음에 바람 들었다느니
사람들은 마음이 어디 있냐고 묻지만

마음은 깃발, 깃대에 사로잡힌 채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당신이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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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의 목록


- 천양희



골목이 사라졌다 골목 앞 라디오

수리점 사라지고 방범대원 딱딱이
소리 사라졌다 가로등 옆 육교
사라지고 파출소 뒷길 구멍가게
사라졌다 목화솜 타던 이불집 사라지고
서울 와서 늙은 수선소집
목포댁 재봉틀소리 사라졌다 마당
깊은 집 사라지고 가파른 언덕길도 사라졌다
돌아가는 삼각지 로터리가 사라졌다 고전
음악실 르네상스 사라지고 술집 석굴암이
사라졌다 귀거래다방 사라지고 동시상영관
아카데미하우스 사라졌다 문화책방
사라지고 굴레방다리 사라졌다 대한늬우스
사라지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광고도 사라졌다
세상에는 사라진 것들이 왜 이리 많은가
나도 나를 버리는데 반생이 걸렸다
걸려 있는 연(緣)줄 무슨
연보처럼 얽혀 있다 저 줄이…… 내 업을
끌고 왔을 것이다 만남은 짧고 자국은
깊다 누구나 구멍 하나쯤 파고 산다는 것일까
사라진 것처럼 큰 구멍은 없다


*


누구 노래였더라. '총 맞은 것처럼' 총을 맞아본 적이 없으니 솔직히 감각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총 맞은 것처럼'이란 직설적인 표현엔 힘이 있다. 천양희 시인과 나는 연배 차가 제법 있다. 그래서 시인이 말한 것 중 절반쯤은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이지 실제 경험해본 것은 아니다. 나는 '총 맞은 것처럼' 시인이 하는 말을 고스란히 감각할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다.


내 주변에도 사라진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내 곁에서 사라진 것들의 목록을 만들어 본다. 정말 큰 구멍은 없을까? 알고 보니 내가 구멍이다. 내가 이 모든 것들을 집어삼켰다.

 
**

사라진것들의 목록.

- 천양희


골목이 사라졌다 골목 앞 라디오 수리점
사라지고 방범대원 딱딱이 소리
사라졌다 가로등 옆 육교 사라지고 파출소
뒷길 구멍가게 사라졌다 목화솜 타던
이불집 사라지고 서울 와서 늙은 목포댁 재봉틀소리
사라졌다 마당깊은 집 사라지고 가파른 언덕길도
사라졌다

돌아가는 삼각지 로터리가 사라지고 고전음악실
르네상스 사라지고 술집 석굴암이사라졌다 귀거래다방
사라지고 동시상영관아카데미하우스 사라졌다 문화책방
사라지고 굴레방다리 사라졌다 대한늬우스
사라지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광고도
사라졌다


사라진 것들이 왜 이리 많은지 오늘의
뒷켠으로 사라진 것들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런데 왜 옛날은
사라지는게 아니라 스며드는것일까 어느
끈이 그렇게 길까 우린 언제를 위해 지금을
살고 있는지 잠시 백기를 드는 기분으로
사라진것들을 생각하네 내가 나에게서
사라진다는 것 누구나 구멍 하나쯤 파고 산다는
것일까. 사라진 것처럼 큰 구멍은 없을것이네

#
몰랐는데... 몇달 전에 나온 시집에서는 또 처음 발표 때와 다르게 3연을 시집내면서 대폭 손 봤나 봅니다.
(1연에 '수선집'이라는 단어도 빠지고)
아래 어떤분의 질문이 있어서 참고될까 싶어서 다시 올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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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반찬


- 공광규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 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출처 : 공광규, "말똥 한 덩이", 실천문학(2008)

*

오랫동안 혼자서 밥 먹던 세월이 있었습니다. 밥을 먹을 때면 좁은 방 정면으로 전신 거울이 보였습니다. 무심결에 혼자 밥먹고 있는 나를 바라보니 정내미가 떨어졌습니다. 좁은 방 안에 거울을 치워둘 마땅한 곳도 없어 거울을 등지고 옷장을 바라보며 밥을 먹습니다. 이제 거울은 홀로 밥 먹고 있는 사내의 등을 비추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등지느러미가 시큰하게 저려옵니다. 오랫동안 혼자서 밥 먹어 버릇하다가 처음으로 누군가와 마주보며 밥을 먹으니 마주한 이가 밥을 어찌 먹나 물끄러미 바라보게 됩니다. 젓가락 가는 곳마다 눈동자가 저절로 따라나섭니다. 밥 먹는 사람을 보니 신기합니다. 오물조물거리는 입술을 오래도록 쳐다봅니다. 오른쪽 발가락으로 왼쪽 발등을 꼬집어 봅니다. 살아있는 시간입니다. 살아있다는 걸 느끼는 시간입니다. 생시(生時)입니다. 밥 먹는 사람을 바라봅니다. 흐뭇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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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부도


- 이재무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 말인가?

대부도와 제부도 사이
그 거리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손 뻗으면 닿을 듯, 그러나

닿지는 않고, 눈에 삼삼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깊이 말인가?

제부도와 대부도 사이
가득 채운 바다의 깊이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그리움 만조로 가득 출렁거리는,

간조 뒤에 오는 상봉의 길 개화처럼 열리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말인가? 이별 말인가?

하루에 두 번이면 되지 않겠나
아주 섭섭지는 않게 아주 물리지는 않게
자주 서럽고 자주 기쁜 것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자랑스러운 변덕이라네


*


사랑하는 이에게 작별을 고하면 채 10분도 안 되어 후회가 시작된다. 가득찬 달은 이지러지게 마련이고, 가득찬 사랑은 달과 함께 시든다. 조석의 변화처럼 사랑도 어김없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 사랑하는 이여! 그대와 나의 이별도 당연한 거야. 사랑했으니까 헤어짐이 있는 거야. 헤어졌으니까, 다시 만나야 하는 거고...그거 알아? 시든 달도 다시 가득 차고, 다음에 또 그렇게 제부도 바닷물은 뒤로 물러날 거라고... 사랑은 영원하지 않아. 그러니 이별도 영원하지 않다고... 변덕이 그러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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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살

- 이문재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 있다
눈부시다
소금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 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
수은처럼 굴러다닌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 떼를 세어 보는데
젖은 눈에서 눈물 떨어진다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

나이를 먹으면 옛날일은 바로 어제 일 같이 생생한데
어제 일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더라.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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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 정해종



그냥 지나가야 한다
말 걸지 말고
뒤돌아 보지 말고
모든 필연을
우연으로 가장 해야 한다
누군가 지나간 것 같지만
누구였던가 관심두지 않도록
슬쩍 지나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죽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선
몇 번을 죽을 수 있지만
처절하거나 장엄하지 않게
삶에 미련 두지 말고
되도록 짧게 죽어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죽음으로
살아남은 자의 생이 더욱
빛나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이란 배당받는 것이다
주어진 생에 대한 열정과 저주,
모든 의심과 질문들을 반납하고
익명의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듯
세상을 한번, 휙..
사소하게 지나가야 한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끝끝내
우리는 배경으로 남아야 한다.


출처 : 정해종, <내 안의 열대우림>, 생각의나무(2002)

*


어제 영화 <캐쉬백(Cashback)>을 보다가 실연 당한 젊은이가 남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말하며 여분의 시간(extra hour)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갑자기 정해종 시인의 <엑스트라>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늘 자신이 주인공인줄 여기며 살지만 실은 '여분'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힌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우리 자신이 더 잘 안다.  

기억해줄 사람 하나 없이 배경으로 살아간다는 걸... 그대 떠난 뒤 홀로 남겨진 블로그에 몰래 도둑처럼 스며들어 갈 때마다 느끼곤 한다.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주인을 기억하며 사람들은 가끔씩 와서 그대의 안부를 묻고, 안부보다 더 많은 스팸들이 쌓여간다. 그렇게 서서히 세월의 더께가 쌓여가겠지만, 그대의 흔적이 화석이 되는 일은 없을 거다.  

언젠가 더 많은 시간이 지나면 서버의 부하량을 핑계로 포털사이트가 그대의 블로그를 영영 허공으로 날려보낼 테니까. 그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조차 모두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아마 우주의 반짝이는 별들을 위한 배경이 될 것이다. 영원한 암흑 속에서 널 만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우주 속에 여전히 암흑으로 칠해지지 않은 여백이 될까.

절대 잉여들의 시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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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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