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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 성년(成年)의 비밀 성년(成年)의 비밀 - 마종기 최후라고 속삭여다오 벌판에 버려진 부정한 나목은 알고 있어, 알고 있어, 초저녁부터 서로 붙잡고 부딪치며 다치며 우는 소리를. 목숨을 걸면 무엇이고 무섭고 아름답겠지. 나도 목숨 건 사랑의 연한 피부를 쓰다듬고 싶다. 날아도날아도 끝없는 성년의 날개를 접고 창을 닫는다. 빛의 모든 슬픔을 닫는다. 출처 :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사> * 이 시 은 에 실린 시이다. 성년, 어른이 된다는 것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걸까. 오늘날 우리가 '번지 점프'라고 일종의 레저 스포츠 삼아 하는 놀이의 유래가 남태평양 펜타코스트 섬의 원주민들의 성인식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성인의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그만한 체력과 담력을 부족민들에게 보증하기 위해 3.. 더보기
김지하 - 새벽 두시 새벽 두시 - 김지하 새벽 두시는 어중간한 시간 잠들 수도 얼굴에 찬 물질을 할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다 공상을 하기는 너무 지치고 일어나 서성거리기엔 너무 겸연쩍다 무엇을 먹기엔 이웃이 미안하고 무엇을 중얼거리기엔 내 스스로에게 너무 부끄럽다. 가만 있을 수도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새벽 두시다 어중간한 시간 이 시대다 * 나에게는 한 권의 오래된 시집이 있다. 조태일의 국토라는 시집이다. 1975년 5월 20일 인쇄, 1975년 5월 25일 발행이라는 판권에 적힌 세월만큼 낡고 시들해진 시집이다. 책값은 600원. 거기에 적힌 창작과 비평사의 전화번호는 국번이 두 자리다. 장난삼아 조태일이라는 시인의 고명한 이름을 "좆털"이라 불렀던...아, 이젠 고인이 된 시인의 시를 보면서...그의 시 후기.. 더보기
나희덕 - 길 위에서 길 위에서 - 나희덕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내었다 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 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질러버린 일이 있다. 돌아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 제 길 위에 놓아주려 했지만 그럴수록 개미는 발버둥치며 달아나버렸다. 길을 잃고 나서야 생각한다. 사람들에게도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냄새 같은 게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인연들의 길과 냄새를 흐려놓았던지, 나의 발길은 아직도 길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 때로 어떤 시인들의 깨달음은 흔하다. 시적인 성취나 문학적 성취에 앞서 소중한 깨달음이 있는 반면에 어떤 깨달음은 흔하디 흔하여 구태여 시인이 저런 깨달음에도 일일이 말 걸고, 정 주어.. 더보기
김수영 - 말 말 - 김수영 나무뿌리가 좀더 깊이 겨울을 향해 가라앉았다 이제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이 가슴의 동계(動悸)도 기침도 한기도 내것이 아니다 이 집도 아내도 아들도 어머니도 다시 내것이 아니다 오늘도 여전히 일을 하고 걱정하고 돈을 벌고 싸우고 오늘부터의 할일을 하지만 내 생명은 이미 맡기어진 생명 나의 질서는 죽음의 질서 온 세상이 죽음의 가치로 변해버렸다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거리가 단축되고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질문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에게 고해야 할 너무나 많은 말을 갖고 있지만 세상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 무언의 말 이때문에 아내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자식을 다루기 어려워지고 친구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이 너무나 큰 어려움에 나는 입을 봉하고 있는 셈이고 무서운 무성의를 자행하고 있다 .. 더보기
김수영 - 그 방을 생각하며 그 방을 생각하며 - 김수영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사지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 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 대신에 다시 쓰디쓴 냄새만 되살아났지.. 더보기
황지우 - 聖 찰리 채플린 聖 찰리 채플린 - 황지우 영화 끝 장면에서 우리의 ‘무죄한 희생자’, 찰리 채플린이 길가에서 신발끈을 다시 묶으면서, 그리고 특유의 슬픈 얼굴로 씩 웃으면서 애인에게 “그렇지만 죽는다고는 말하지마!”하고 말할 때 나는 또 소갈머리 없이 울었지 내 거지 근성 때문인지도 몰라; 나는 너의 그 말 한마디에 굶주려 있었단 말야: “너, 요즘 뭐 먹고 사냐?”고 물어 주는 거 * 누군가 작은 관심만 가져주어도 온 신경이 다 곤두서는 것은 알량한 자존심이 마음 속까지 치장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누군가를 속일 수는 있어도 나를 속이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너무 악한 까닭입니다. 눈이 맑고 순수한 사람을 보면 마음은 편해지지만 그 뒤켠에 두려움이 드는 까닭은 그대의 눈동자가 거울같아서 일겁니다. "너, 요즘 뭐 먹고 .. 더보기
김남주 - 시인은 모름지기 시인은 모름지기 - 김남주 공원이나 학교나 교회 도시의 네거리 같은 데서 흔해빠진 것이 동상이다 역사를 배우기 시작하고 나 이날이때까지 왕이라든가 순교자라든가 선비라든가 또 무슨무슨 장군이라든가 하는 것들의 수염 앞에서 칼 앞에서 책 앞에서 가던 길 멈추고 눈을 내리깐 적 없고 고개 들어 우러러본 적 없다 그들이 잘나고 못나고 해서가 아니다 내가 오만해서도 아니다 시인은 그 따위 권위 앞에서 머리를 수그린다거나 허리를 굽혀서는 안되는 것이다. 모름지기 시인이 다소곳해야 할 것은 삶인 것이다 파란만장한 삶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는 돌아와 마을 어귀 같은 데에 늙은 상수리나무로 서 있는 주름살과 상처자국투성이의 기구한 삶 앞에서 다소곳하게 서서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도둑놈의 삶일지라도 그것.. 더보기
김사인 - 지상의 방 한칸 지상의 방 한칸 - 김사인 세상은 또 한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 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 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비는 재주 뿐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어리 초라한 몸 가릴 방 한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 밖에는 바람소리 사정 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 지붕이 없는 곳에서 잠들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시의 절절함이 누구보다 더 가슴가득히 들어차리란 생각이 듭니다. 며칠 후면 남이 누울 .. 더보기
도종환 -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 도종환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몹시도 괴로웠다. 어깨 위에 별들이 뜨고 그 별이 다 질 때까지 마음이 아팠다 사랑하는 사람이 멀게만 느껴지는 날에는 내가 그에게 처음 했던 말들을 생각했다 내가 그와 끝까지 함께 하리라 마음 먹던 밤 돌아오면서 발걸음마다 심었던 맹세들을 떠올렸다 그날의 내 기도를 들어준 별들과 저녁하늘을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사랑도 다 모르면서 미움을 더 아는 듯이 쏟아버린 내 마음이 어리석어 괴로웠다. * 사랑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이해는 하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아픈 일일까? 곰곰이 생각해봐도 답이 없다. 더보기
권정생 - 애국자가 없는 세상 애국자가 없는 세상 - 권정생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테고 대포도 안 만들테고 탱크도 안 만들테고 핵무기도 안 만들테고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테고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테고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출처 : 《녹색평론》 55호, 2000.11-12호 * 예전 어느 팝 가수가 그랬다지요. 서른 넘은 사람의 말은 믿지 말라고요. 요즘 현실을 돌아보면 굳이 나이를 서른으로 올리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