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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송경동 - 지나온 청춘에 보내는 송가4 지나온 청춘에 보내는 송가4 - 송경동 광양제철소 3기 공사장 배관공으로 쫒아 다니다 잠시 쉴 때였다 10년 된 고물 프레스토를 빼서 폼잡고 다닐 때였다 읍내 정다방에 미스 오가 왔다 메마른 시골 읍내에 촉촉한 기운이 돌고 볕이 갑자기 쨍쨍해질 정도로 예쁜 아이였다 뻔질나게 다방을 드나들고 아침저녁으로 커피를 시켜 먹었다 어느 비 오던 날 낙안읍성을 다녀오는 차 안에서 사랑고백을 했다 그날 저녁 담장을 넘어 내 품으로 한 마리 고양이처럼 달겨들던 그녀, 열 아홉이었다 처음으로 성을 배웠던 시간들 빚이 져서 떠나가던 그녀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어느 발전소 공사현장으로 떠나야 했던 나 아름다웠던 시간만을 기억하자고 깨끗이 돌아섰던 우리 돌아보면 아직도 거기 서 있는 그녀 * 황해문화, 2011년 겨울호(통권.. 더보기
이병률 - 스미다 스미다 - 이병률 새벽이 되어 지도를 들추다가 울진이라는 지명에 울컥하여 차를 몬다 울진에 도착하니 밥냄새와 나란히 해가 뜨고 나무가 울창하여 울진이 됐다는 어부의 말에 참 이름도 잘 지었구나 싶어 또 울컥 해변 식당에서 아침밥을 시켜 먹으며 찌개냄비에서 생선뼈를 건져내다 또다시 왈칵 눈물이 치솟는 것은 무슨 설움 때문일까 탕이 매워서 그래요? 식당 주인이 묻지만 눈가에 휴지를 대고 후룩후룩 국물을 떠먹다 대답 대신 소주 한 병을 시킨 건 다 설움이 매워서다 바닷가 여관에서 몇 시간을 자고 얼굴에 내려앉는 붉은 기운에 창을 여니 해 지는 여관 뒤편 누군가 끌어다 놓은 배 위에 올라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한 사내 해바라기 숲을 등지고 서럽게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한 사내 내 설움은 저만도 못해서 내.. 더보기
고정희 - 더 먼저 더 오래 더 먼저 더 오래 - 고정희 더 먼저 기다리고 더 오래 기다리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기다리는 고통 중에 사랑의 의미를 터득할 것이요 더 먼저 달려가고 더 나중까지 서 있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서 있는 아픔 중에 사랑의 길을 발견할 것이요 더 먼저 문을 두드리고 더 나중까지 문닫지 못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문닫지 못하는 슬픔 중에 사랑의 문을 열게 될 것이요 더 먼저 그리워하고 더 나중까지 그리워 애통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그리워 애통하는 눈물 중에 사랑의 삶을 차지할 것이요 더 먼저 외롭고 더 나중까지 외로움에 떠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외로움의 막막궁산 중에 사랑의 땅을 얻게 될 것이요 더 먼저 상처받고 더 나중까지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더보기
허수경 - 마치 꿈꾸는 것처럼 마치 꿈꾸는 것처럼 - 허수경 너의 마음 곁에 나의 마음이 눕는다 만일 병가를 낼 수 있다면 인생이 아무려나 병가를 낼 수 있으려고……, 그러나 바퀴마저 그러나 너에게 나를 그러나 어리숙함이여 햇살은 술이었는가 대마잎을 말아 피던 기억이 왠지 봄햇살 속엔 있어 내 마음 곁에 누운 너의 마음도 내게 묻는다 무엇 때문에 넌 내 곁에 누웠지? 네가 좋으니까, 믿겠니? 내 마음아 이제 갈 때가 되었다네 마음끼리 살 섞는 방법은 없을까 조사는 쌀 구하러 저자로 내려오고 루핑집 낮잠자는 여자여 마침 봄이라서 화월지풍에 여자는 아픈데 조사야 쌀 한줌 줄테니 내게 그 몸을 내줄라우 네 마음은 이미 떠났니? 내 마음아, 너도 진정 가는 거니? 돌아가 밥을 한솥 해놓고 솥을 허벅지에 끼고 먹고 싶다 마치 꿈처럼 잠드는 것.. 더보기
박재삼 - 울음이 타는 가을강 울음이 타는 가을강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겄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가는, 소리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겄네. * 내 마음은 깃발 바람 불면 바람 부는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사람들은 마음이 오색창연하다느니 사람들은 마음이 펄럭인다느니 사람들은 마음에 바람 들었다느니 사람들은 마음이 어디 있냐고 묻지만 마음은 깃발, 깃대에 사로잡힌 채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당신이 다.. 더보기
천양희 - 사라진 것들의 목록 사라진 것들의 목록 - 천양희 골목이 사라졌다 골목 앞 라디오 수리점 사라지고 방범대원 딱딱이 소리 사라졌다 가로등 옆 육교 사라지고 파출소 뒷길 구멍가게 사라졌다 목화솜 타던 이불집 사라지고 서울 와서 늙은 수선소집 목포댁 재봉틀소리 사라졌다 마당 깊은 집 사라지고 가파른 언덕길도 사라졌다 돌아가는 삼각지 로터리가 사라졌다 고전 음악실 르네상스 사라지고 술집 석굴암이 사라졌다 귀거래다방 사라지고 동시상영관 아카데미하우스 사라졌다 문화책방 사라지고 굴레방다리 사라졌다 대한늬우스 사라지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광고도 사라졌다 세상에는 사라진 것들이 왜 이리 많은가 나도 나를 버리는데 반생이 걸렸다 걸려 있는 연(緣)줄 무슨 연보처럼 얽혀 있다 저 줄이…… 내 업을 끌고 왔을 것이다 만남은 짧고 자국은 깊다.. 더보기
공광규 - 얼굴 반찬 얼굴 반찬 - 공광규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 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출처 : 공광규, "말똥 한 덩이", 실천문학(2008) * 오랫동안 혼자서 밥 먹던 세월이 있었습니다. 밥을 먹을 때면 좁은 방 정면으로 .. 더보기
이재무 - 제부도 제부도 - 이재무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 말인가? 대부도와 제부도 사이 그 거리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손 뻗으면 닿을 듯, 그러나 닿지는 않고, 눈에 삼삼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깊이 말인가? 제부도와 대부도 사이 가득 채운 바다의 깊이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그리움 만조로 가득 출렁거리는, 간조 뒤에 오는 상봉의 길 개화처럼 열리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말인가? 이별 말인가? 하루에 두 번이면 되지 않겠나 아주 섭섭지는 않게 아주 물리지는 않게 자주 서럽고 자주 기쁜 것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자랑스러운 변덕이라네 * 사랑하는 이에게 작별을 고하면 채 10분도 안 되어 후회가 시작된다. 가득찬 달은 이지러지게 마련이고, 가득찬 사랑은 달과 함께 시든다. 조석의 변화처럼 사랑도 어김없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 더보기
이문재 - 마흔 살 마흔 살 - 이문재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 있다 눈부시다 소금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 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 수은처럼 굴러다닌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 떼를 세어 보는데 젖은 눈에서 눈물 떨어진다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 나이를 먹으면 옛날일은 바로 어제 일 같이 생생한데 어제 일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더라.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더보기
정해종 - 엑스트라 엑스트라 - 정해종 그냥 지나가야 한다 말 걸지 말고 뒤돌아 보지 말고 모든 필연을 우연으로 가장 해야 한다 누군가 지나간 것 같지만 누구였던가 관심두지 않도록 슬쩍 지나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죽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선 몇 번을 죽을 수 있지만 처절하거나 장엄하지 않게 삶에 미련 두지 말고 되도록 짧게 죽어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죽음으로 살아남은 자의 생이 더욱 빛나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이란 배당받는 것이다 주어진 생에 대한 열정과 저주, 모든 의심과 질문들을 반납하고 익명의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듯 세상을 한번, 휙.. 사소하게 지나가야 한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끝끝내 우리는 배경으로 남아야 한다. 출처 : 정해종, ,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