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

스티븐 아노트 - 섹스 : 사용설명서 1 / 뿌리와이파리 / 2005년 섹스 - 사용설명서 1 스티븐 아노트 지음, 이민아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5년 7월 큭큭... 책을 받아들고 나는 두 번 웃었다. 한 번은 책 보내준 이의 꾸밈없이 순수한 감정이 읽혔기 때문이고, 다음 한 번은 책을 읽는 과정에서였다. 잠깐 출판사 이야기를 좀 해보고 싶다. 직업상의 이유로 그리고 책 읽는 경험이 축적되다보면 알게모르게 그 책을 만들어내는 곳과 사람들에 대해 '감정(feeling)'이란 것이 생긴다. 최근에 칼 G. 융에 대한 간략한 개설서를 읽었으니 그를 잠시 호명하여 이야기해보자. 융에 의하면 감정이란 '사고(thinking)'와 마찬가지로 내부의 정신적 과정에 의존하기 때문에 감각이나 직관과 달리 이성적인 기능으로 분류된다. 내가 융을 프로이트보다 좋아하는 이유다. 그는 감.. 더보기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 아민 말루프 | 김미선 옮김 | 아침이슬(2002)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 아민 말루프 | 김미선 옮김 | 아침이슬(2002)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은 한동안 "내 침상의 책"이었다. 어떤 책들은 책상머리에 정좌하고 앉아서 읽어야 하는 것들이 있고, 어떤 책들은 화장실에서 힘줘가며 읽어야 하는 것들이 있는데, 화장실에서 책상 사이의 틈새 공간이 내겐 침상이다. 예를 들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 같은 책들은 책상에 정좌하고 앉아서 읽어야 하는 책이고, "공상비과학대전" 같은 책은 화장실에서 읽으면 좋다. 물론 이런 구분이 책에 대한 가치 평가를 내리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 순전히 실용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거다. "계몽의 변증법"의 경우엔 중도에 멈추기도 어렵고, 이것저것 메모도 필요한데 비해서 "공상비과학대전"의.. 더보기
한국 대표 시인 초간본 총서 | 열린책들(2004) 한국 대표 시인 초간본 총서 - 전20권 김광균 | 김기림 | 김소월 | 김영랑 | 박남수 | 박목월 | 백석 | 오장환 | 유치환 | 윤동주 | 이육사 | 임화 | 정지용 | 조지훈 | 한용운 | 박두진 | 이용악 | 김상용 | 김억 | 김창술 (지은이) | 열린책들(2004) 위에서 언급하고 있는 시인 18인은 우리 문학사를 다루고 있는 책이라면 어느 책이든 빼놓지 않는 이들의 이름이다. 그러나 정작 이들의 시집을 찾아 읽는 일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낯익음이 주는 게으름이 이들의 시집을 읽지도 않은 체 이미 다 아는 양하게 만들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이들의 시집은 주로 선집 혹은 전집 그도 아니면 여러 시인들을 한데 묶은 편집판본들이 허다하게 널린 탓이다. 모두 20.. 더보기
정현종 - 가객(歌客) 가객(歌客) - 정현종 세월은 가고 세상은 더 헐벗으니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새들이 아직 하늘을 날 때 아이들이 자라고 어른들은 늙어가니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동안 무슨 터질 듯한 立場이 있겠느냐 항상 빗나가는 구실 무슨 거창한 목표가 있겠느냐 나는 그냥 노래를 부를 뿐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는 동안 나그네 흐를 길은 이런 거지 저런 거지 같이 가는 길 어느 길목이나 나무들은 서서 바람의 길잡이가 되고 있는데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사람들이 乞神을 섬기는 동안 하늘의 눈동자도 늘 보이고 땅의 눈동자도 보이니 나는 내 노래를 불러야지 우리가 여기 살고 있는 동안 * 아내가 물었다. '당신은 아이가 태어나면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나는 답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자신이 하고.. 더보기
함민복 - 자본주의의 약속 자본주의의 약속 - 함민복 혜화동 대학로로 나와요 장미빛 인생 알아요 왜 학림다방 쪽 몰라요 그럼 어디 알아요 파랑새 극장 거기 말고 바탕골소극장 거기는 길바닥에서 기다려야 하니까 들어가서 기다릴 수 있는 곳 아 바로 그 앞 알파포스타칼라나 그 옆 버드하우스 몰라 그럼 대체 어딜 아는 거요 거 간판좀 보고 다니쇼 할 수 없지 그렇다면 오감도 위 옥스퍼드와 슈만과 클라라 사이 골목에 있는 소금창고 겨울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라는 카페 생긴 골목 그러니까 소리창고 쪽으로 샹베르샤유 스카이파크 밑 파리 크라상과 호프 시티 건너편요 또 모른다고 어떻게 다 몰라요 반체제인산가 그럼 지난번 만났던 성대 앞 포트폴리오 어디요 비어 시티 거긴 또 어떻게 알아 좋아요 그럼 비어 시티 OK 비어시티... * 생텍쥐페리의 에.. 더보기
구상 - 유치찬란 유치찬란 - 구상 올해 그 애는 2학년이 되어서 교과서에 실린 내 시를 배우게 됐는데 자기가 그 작가를 잘 안다고 그랬단다. - 그래서 뭐라고 그랬지? 하고 물었더니 - 그저 보통 할아버진데 어찌보면 그 모습이 혼자 노는 소년 같아! 라고 했단다. * '촌철살인'이라 했던가? 나는 시의 본령은 긴 시가 아니라 짧은 시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촌철살인하는 시에 진정한 묘미가 숨어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 모습이 혼자 노는 소년 같아!"라는 한 마디에 구상 선생의 생전 모습이 맑고 고운 화선지에 툭하고 떨어진 먹물 한 방울처럼 '화악'하고 번져온다. 정말 그러셨을 것 같다는 생각과 더불어 나의 노년도 그러했으면 하는 부러움이 함께 번진다. 더보기
박재삼 - 천년의 바람 천년의 바람 - 박재삼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 은 박재삼 시인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다. 일본 동경에서 태어나 1955년 으로 등단해 1997년 세상을 등질 때까지 박재삼 시인은 40여 년간의 시작 생활을 통해 '한국의 전통 서정 탐구와 허무의 시학'을 집중적으로 형상화해왔다고 평가받는다. 아마 시인 자신은 이런 평가를 들으면 혼자 조용히 웃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인을 한국의 전통서정과 허무의 시학이라고 하지만 내가 볼 때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한국의 전통서정은 사실 허무.. 더보기
김선우 - 시체놀이 시체놀이 - 김선우 배롱나무 아래 나무 벤치 내 발 소리 들었는지 딱정벌레 한 마리 죽은 척한다 나도 가만 죽은 척한다 바람 한 소끔 지나가자 딱정벌레가 살살 더듬이를 움직인다 눈꺼풀에 덮인 허물을 떼어내듯 어설픈 움직임 어라, 얘 좀 봐. 잠깐 죽은 척했던 게 분명한데 정말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것 같다 딱정벌레 앞에서 죽은 척 했던 나는 어떡한담? 햇빛이 부서지며 그림자가 일렁인다 아이참, 체면 구기는 일이긴 하지만 나도 새로 태어나는 척한다 햇빛 처음 본 아기처럼 초승달 눈을 만들어 하늘을 본다 바람 한소끔 물 한 종지 햇빛 한 바구니 흙 한 줌 고요 한 서랍..... 아, 문득 누가 날 치고 간다 언젠가 내가 죽는 날, 실은 내가 죽은 척하게 되는 거란 걸! 나의 부음 후 얼마 지나 새로 돋는 올.. 더보기
신기섭 - 추억 추억 - 신기섭 봄날의 마당, 할머니의 화분 속 꽃을 본다 꽃은 산소호흡기 거두고 헐떡이던 할머니와 닮았다 마른 강바닥의 물고기처럼 파닥파닥 헐떡이는 몸의 소리 점점 크게 들려오더니 활짝 입이 벌어지더니 목숨을 터뜨린 꽃, 향기를 내지른다. 할머니의 입 속같아 하얀 꽃, 숨쉬지 않고 향기만으로 살아 있다 내 콧속으로 밀려오는 향기, 귀신처럼 몸속으로 들어온다 추억이란 이런 것, 내 몸 속을 떠도는 향기, 피가 돌고 뼈와 살이 붙는 향기, 할머니의 몸이 내 몸속에서 천천히 숨쉰다 빨랫줄 잡고 변소에 갈 때처럼 절뚝절뚝 할머니의 몸이 움직인다 내 가슴속을 밟으며 환하게 웃는다 지금은 따뜻한 봄날이므로 아프지 않다고, 다 나았다고, 힘을 쓰다 그만 할머니는 또 똥을 싼다 지금 내 가슴 속 가득 흘러넘치더니 구.. 더보기
대한민국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경향신문>(2009.02.09.) 대한민국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아카데미 영화제 13개 부문 후보에 오른 브래드 피트 주연의 영화 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스코트 피츠제럴드의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인데 젊어지고 싶다는 부질없는 욕망에 사로잡히기보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짧은 시간을 소중히 여기라는 충고가 담겨 있다고 한다. 80세의 노인으로 태어나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젊어지는 주인공 벤자민 버튼처럼 지난해 건국 60주년을 맞이했던 대한민국의 시간도 거꾸로 흐르는 것 같다. 이제 며칠 후면 이명박 대통령 취임 1주년인데 그 사이 참으로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대통령 취임 보름 전에 국보 1호 숭례문이 불탔다. 대통령인수위는 고소영 강부자 내각이란 비판 속에 영어몰입교육과 ‘어륀지’라는 유행어를 남겼다. 취임 직..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