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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 월식 월식 - 강연호 오랜 세월 헤매 다녔지요 세상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그대 찾아 부르튼 생애가 그믐인 듯 저물었지요 누가 그대 가려 놓았는지 야속해서 허구한 날 투정만 늘었답니다 상처는 늘 혼자 처매어야 했기에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흐느낌 내가 우는 울음인 줄 알았구요 어찌 짐작이나 했겠어요 그대 가린 건 바로 내 그림자였다니요 그대 언제나 내 뒤에서 울고 있었다니요 * '사랑'을 어찌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 사랑한다면서 나는 당신이 행복하길 바란다. 진심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랑하면 할수록, 나는 사랑이란 말이 '평화'란 말이 다른 의미에선 '전쟁'과 동의어가 되는 것처럼 '인권'이란 말이 다른 의미에선 '억압'이 되는 것처럼 사랑이란 말과 감정이 절대적으로 상위 개념이 되어 갈수록 그것이.. 더보기
정춘근 - 라면 여덟 상자 라면 여덟 상자 - 정춘근 경로당에 모여 기억 속에 똬리 틀은 고향 자랑을 국수 타래처럼 풀어내던 노인들 점심으로 라면을 끓였는데. 만물 박사 평양 김씨 라면 한 개 풀면 오십 미터라 한 것뿐인데 셈이 빠른 황해도 최씨 노인 휴전선 이십 리는 라면 여덟 상자라 속없이 이야기한 것뿐인데 오늘 라면은 매웠나 보네요 노인들 눈자위가 붉은 것을 보면 라면을 그대로 남긴 것을 보면 경로당 구석에서는 라면 끓는 검은 솥만 덜컹덜컹 기차 소리를 냅니다. * 정춘근의 는 시에서 사실적인 국면이 심리적인 국면으로 전환되는 과정과 이것이 시적으로 승화될 때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극적으로 잘 보여주는 시다. 시의 전체 과정은 경로당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어르신들이 간식 참삼아 라면 몇 개를 끓이며 나누는 이야기를 .. 더보기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 - 바람에 지지 않고 바람에 지지 않고 -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 - 번역 : 권정생 비에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와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욕심도 없고 절대 화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미소지으며 하루 현미 네 홉과 된장과 나물을 조금 먹으며 모든 일에 제 이익을 생각지 말고 잘 보고 들어 깨달아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속 그늘에 조그만 초가지붕 오두막에 살며 동에 병든 어린이가 있으면 찾아가서 간호해 주고 서에 고달픈 어머니가 있으면 가서 그의 볏단을 대신 져 주고 남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무서워 말라고 위로하고 북에 싸움과 소송이 있으면 쓸데없는 짓이니 그만두라 하고 가뭄이 들면 눈물을 흘리고 추운 여름엔 허둥대며 걷고 누구한테나 바보라 불려지고 칭찬도 듣지 말고 괴로.. 더보기
함순례 - 벽 안에 사람이 산다 벽 안에 사람이 산다 - 함순례 도배 새로 하면서 감쪽같이 그를 봉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고요를 흔들고 가는 그가 슬쩍 귀찮았던 것인데 옥상 난간엘 두 번씩이나 오르내린 사춘기 아들 쓸어안고 먹장처럼 깜깜한 날 벽지 한 장의 긴장을 뚫고 또 그가 왔다 꽃무늬 가면을 쓰고 저리 또렷한 소릴 내다니! 굵고 지긋하신 목소리가 내 안의 둥그런 물관 같은 피붙이, 어린 슬픔을 파고들어서 얼굴 없는 그를 아득히 올려본다 매번 차임벨로 노크를 하고 헛기침 두어 번으로 가다듬지만 밤잠 설친 듯 목소리 탁할 때 있는 걸 보면 그에게도 거둬야 할 식솔들이 있으리라 그러고 보면 나는 딴살림 휘파람 불며 스쳐가도 그만인 내 눅진한 살림의 안쪽으로 줄기차게 말을 건네는 저 지극함은 무언가 딴살림 챙기며 늙어가는 그의 본색.. 더보기
신경림 - 파장 파장(罷場) - 신경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깍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약장수 기타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 얼마 전 고등학교 후배이자 대학 동기 녀석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간만에 대학 동기들과 술자리를 함께 했다. 어떤 시는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가슴으로부터 느끼기 전엔 참으로 멀게만 느껴지는 작품들이 있는데 신경림 선생의 시 이 내게 그러했다.. 더보기
유한계급론 - 토르스타인 베블런 | 김성균 옮김 | 우물이있는집(2005) 유한계급론 - 토르스타인 베블런 | 김성균 옮김 | 우물이있는집(2005) 베블런의 『유한계급론』 2005년 초판을 손에 쥐고 있는 감흥은 약간 남다르다. 이 책이 국내에 처음 나온 것은 지난 1978년 “정수용”이 옮기고, “광민사”에서 펴낸 것이었다. 출간되고 얼마 뒤 이 책은 금서(禁書)가 되었고, 1987년 해금되기까지 법적으로는 읽는 것이 금지 당했다. 오늘날엔 경제학 전공자들보다는 인문 ․ 사회학 전공자들에게 더 많이 읽히는 고전이 금서가 될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마음 한 구석을 찜찜하게 했던 것은 그런 부분이었다. 내가 너무 둔하여 혹시 이 책에서 금지될 만한 어떤 사유(思惟)들을 읽어내지 못한 것은 아닌가? 존 K. 갤브레이스는 『갤브레이스가 들려 주는 경제학의 역사』(2.. 더보기
폭력과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 - 김진석 | 나남출판(2003) 폭력과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 - 김진석 | 나남출판(2003) 지식인은 무엇인가? 지식인은 누구인가?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인가?를 묻는 수없이 많은 질문들이 있다. 이때 우리가 잊고 있는 한 가지 맹점이 있다. 사람들은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물을 뿐 어째서 이런 질문들을 하게 되었는지 물어보지 않는다. 제갈량과 정약용이 살던 시대의 지식인들에게도 '현실 참여'와 '안빈낙도' 사이의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대의 지식인들과 달리 이 시절의 지식인들이 말하는 현실과 이상 사이엔 마르크스가 말하는 그런 류의 "소외 현상"은 없었다. 1880년대 말부터 1920년대 사이 서구 사회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사상 유례없는 대변동의 시대를 경험했.. 더보기
장욱진의 색깔있는 종이그림 - 김형국 |열화당(1999) 장욱진의 색깔있는 종이그림 - 김형국 |열화당(1999) ▶ 진진묘(캔버스에 유채, 33.0×24.0㎝, 1970) "장욱진의 색깔있는 종이그림"의 저자를 굳이 따지자면 세 사람의 공동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선 이 책이 장욱진의 화집이란 점에서 당연히 대표 저자는 장욱진이 되어야 할 것이고, 또한 화가 장욱진의 면모를 두루 살펴볼 수 있도록 김형국 선생이 나서 돕고 있다는 점에서 김형국 선생 역시 이 책의 중요 저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화가 장욱진을 가장 지근거리에서 살펴보고 그의 영혼의 반려로 이 책의 한 부분을 감당하고 있는 저자는 장욱진의 아내 이순경이 또한 중요 저자다. 장욱진 작품 가운데 "진진묘(캔버스에 유채, 33.0×24.0㎝, 1970)"란 것이 있는데, 이 작품은 1970년.. 더보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정체 - <경향신문>(2009.01.08.)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정체 신문을 펼쳐보니 새해 벽두부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순으로 살벌한 기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대중문화의 복고열풍이 거센 탓인지 신문마다 198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기사들이 줄지어 실려 있다. 그중 하나가 90년대만 하더라도 자신의 소신대로 수사하는 강직한 검사 이미지로 존경받아왔던 임채진 검찰총장의 발언이다. 얼마 전 그는 검찰의 ‘신년 다짐회’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부인하는 세력을 발본색원하여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고히 하는 것이 경제난 타개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라고 말했다. 요즘 들어 자주 보게 되고, 볼 때마다 불쾌해지는 것이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 운운하며 국민들을 윽박지르는 광경이다. 언제부터인가 ‘반공’을 대신하여 대한민국의 새.. 더보기
문정희 - 남편 남편 -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 누군가의 남편으로 살아가는 일 중 제일 견딜 수 없는 건, 아내 이외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게 죄가 된다는 거다. 그리고 더 견딜 수 없는 건 그건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는 감기 같은 거라는 사실이다. 알아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