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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 - 구두 한 짝 구두 한 짝 - 김정환 찬 새벽 역전 광장에 홀로 남았으니 떠나온 것인지 도착한 것인지 분간이 없다 그렇게 구두 한 짝이 있다. 구겨진 구두 한 짝이 저토록 웅크린 사랑은 떠나고 그가 절름발이로 세월을 거슬러 오르지는 못 하지, 벗겨진 구두는 홀로 걷지 못한다 그렇게 구두 한 짝이 있다 그렇게 찬 새벽 역전 광장에, 발자국 하나로 얼어붙은 눈물은 보이지 않고 검다 그래. 어려운 게 문제가 아냐 기구한 삶만 반짝인다 * 마하트마 간디가 아직 인도의 정신적 스승이자, 독립운동가가 되기 이전의 일화다. 그는 식민모국인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고, 고향 인도로 돌아오기 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인도 교민들을 위해 변호사 활동을 했다. 한 번은 열차 출발시간에 늦는 바람에 급하게 출발하려는 기차를 타다 구두 .. 더보기
이성복 - 꽃피는 시절 꽃피는 시절 - 이성복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난 몸뚱이 갈가리 찢어지고 나는 울고 싶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켜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낼 일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 더보기
고영민 - 나에게 기대올 때 나에게 기대올 때 - 고영민 하루의 끝을 향해 가는 이 늦은 시간,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다 보면 옆에 앉은 한 고단한 사람 졸면서 나에게 기댈 듯 다가오다가 다시 몸을 추스르고, 몸을 추스르고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기대올 때 되돌아왔다가 다시 되돌아가는 얼마나 많은 망설임과 흔들림 수십 번 제 목이 꺾여야 하는 온몸이 와르르 무너져야 하는 잠든 네가 나에게 온전히 기대올 때 기대어 잠시 깊은 잠을 잘 때 끝을 향하는 오늘 이 하루의 시간, 내가 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한 나무가 한 나무에 기대어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기대어 나 아닌 것 거쳐 나인 것으로 가는, 이 덜컹거림 무너질 내가 너를 가만히 버텨줄 때, 순간, 옆구리가 담장처럼 결려올 때 : 고영민, "악어", 실천문학 * 고등학.. 더보기
수호 유령이 내게로 왔어 -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 김경연 옮김 | 풀빛(2005) 수호 유령이 내게로 왔어 -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 김경연 옮김 | 풀빛(2005) 우리 집에 굴러다니는 책 중에 헌책방에서 구한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 책 "그해 봄은 빨리 왔다"란 책이 있다. 원제는 "날아라 풍뎅이" 1988년에 출간된 동서문화사의 "에이스88" 아동문학전집 중 44번째 책이다. 그리고 엊그제 집에 굴러다니는 뇌스틀링거의 책 한 권을 새로 읽었다. "수호유령이 내게로 왔어"(원제는 "Rosa Riedl Schutzgespenst"로 "수호유령 로자 리들" 정도가 되겠다) 였다. "이거 무슨 책이야?" 하고 책을 집어드니 집사람이 "누가 좋아하는 누구 책이야"하며 놀린다. 흐흐... 웃어주고 낼름 책을 들고 나와 버렸다. 책을 읽는 동안 너댓 번 정도는 소리내서 웃고, 대여섯 번 정.. 더보기
신해철 발언과 ‘우리집에 왜 왔니’ 놀이 - <경향신문>(2009.5.11.) 신해철 발언과 ‘우리집에 왜 왔니’ 놀이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합당한 주권에 의거하여, 또한 적법한 국제절차에 따라 로케트(굳이 ICBM이라고 하진 않겠다)의 발사에 성공하였음을 민족의 일원으로서 경축한다. 핵의 보유는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항하는 약소국의 가장 효율적이며 거의 유일한 방법임을 인지할 때, 우리 배달족이 4,300년 만에 외세에 대항하는 자주적 태세를 갖추었음을 또한 기뻐하며, 대한민국의 핵 주권에 따른 핵보유와 장거리 미사일의 보유를 염원한다.” 가수 신해철이 새로운 앨범을 준비하던 중 자신의 홈페이지에 다섯줄의 글을 올렸다가 곤욕을 치르고 있다. 일각에서는 앨범 홍보를 위한 노이즈 마케팅의 일환이라 평가 절하하는 이도 있고, 그의 사회비판정신에 대해 나름 믿음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 더보기
이승하 -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리며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리며 - 이승하 작은 발을 쥐고 발톱 깎아드린다 일흔다섯 해 전에 불었던 된바람은 내 어머니의 첫 울음소리 기억하리라 이웃집에서도 들었다는 뜨거운 울음소리 이 발로 아장아장 걸음마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이 발로 폴짝폴짝 고무줄놀이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뼈마디를 덮은 살가죽 쪼글쪼글하기가 가뭄못자리 같다 굳은살이 덮인 발바닥 딱딱하기가 거북이 등 같다 발톱 깎을 힘이 없는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린다 가만히 계셔요 어머니 잘못하면 다쳐요 어느 날부터 말을 잃어버린 어머니 고개를 끄덕이다 내 머리카락을 만진다 나 역시 말을 잃고 가만히 있으니 한쪽 팔로 내 머리를 감싸 안는다 맞닿은 창문이 온몸 흔들며 몸부림치는 날 어머니에게 안기어 일흔다섯 해 동안의 된바람 소리 듣는.. 더보기
강연호 - 감옥 감옥 - 강연호 그는 오늘도 아내를 가두고 집을 나선다 문단속 잘 해, 아내는 건성 듣는다 갇힌 줄도 모르고 노상 즐겁다 라랄랄라 그릇을 씻고 청소를 하고 걸레를 빨며 정오의 희망곡을 들으며 하루가 지나간다 나이 들수록 해가 짧아지네 아내는 제법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상추를 씻고 된장을 풀고 쌀을 안치는데 고장난 가로등이나 공원 의자 근처 그는 집으로 가는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맨다 그는 혼자 술을 마신다 그는 오늘도 집 밖의 세상에 갇혀 운다 * 나는 강연호의 이 시를 읽고 처음엔 키득키득 웃었다. 이제 집에서 살림만 하고 있는 아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아내의 날개옷을 빼앗고 그녀를 집에 가둬두는데 성공했다. 그녀는 집에 갇힌 줄도 모르고 노상 즐겁다. 하루종일 그녀의 일상복 겸 잠옷겸 하는 츄리닝.. 더보기
조용미 - 바람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바람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 조용미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 나의 내면이 고요할 때 바람은 어디에 있었나 생나무 가지가 허옇게 부러진다 버즘나무 널따란 잎사귀들이 마구 떨어져 날린다 개태사 앞 향나무는 뿌리째 뽑혀 쓰러졌다 마당에 기왓장이 나뒹군다 바람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키 큰 소나무들이 마구 쏟아져 들어온다 바람의 방향을 알 수 없는 나무들조차 내게로 몰려오고 있다 이때 폭풍은 나무의 편이다 나무들은 폭풍의 힘을 빌려 내게로 침입하려 하고 있다 속이 울렁인다 저 나무들의 혼이 들어오면 나는 무엇이 되는 걸까 머리칼에 바람이 갈가리 찢긴다 바람은 내 머리카락 사이에서 나와 약한 나무들의 혼을 찾아 멀리 달려가고 있다 숲이 심장처럼 펄떡이고 있다 * "나의 내면이 고요할 때 바람은 어디에 있었나.. 더보기
좀 더 작고, 좀 더 직접적이며, 좀 더 일상적인 공공미술 프로젝트 - 계간 <리뷰인천> 좀 더 작고, 좀 더 직접적이며, 좀 더 일상적인 공공미술 프로젝트 문화정책을 비롯해 문화의 다양한 의미체계를 연구하는 문화연구자이지만 공공미술 영역은 미술 전문가들이 논해야 할 분야인 것 같아 공연히 주눅부터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공공미술이란 말 자체가 ‘Public(공공의)’과 ‘Art(미술)’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말이란 점에서 미술이 아닌 공공성에 강조점을 두고 살펴본다면 논의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미술에 대해 논의하기 어렵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은 공공미술에 대한 명확한 개념 설정 없이 대형건축물이나 공공장소에 으레 놓이기 마련인 환경조형물이나 거대한 미술장식품으로 혼동되어 버린 현실에 있다.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전시장과 미술관에 갇혀있던 예술작품들이 거리.. 더보기
강윤후 - 쓸쓸한 날에 쓸쓸한 날에 - 강윤후 가끔씩 그대에게 내 안부를 전하고 싶다. 그대 떠난 뒤에도 멀쩡하게 살아서 부지런히 세상의 식량을 축내고 더없이 즐겁다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뻔뻔하게 들키지 않을 거짓말을 꾸미고 어쩌다 술에 취하면 당당하게 허풍떠는 그 허풍만큼 시시껄렁한 내 나날을 가끔씩 그래, 아주 가끔씩은 그대에게 알리고 싶다. 여전히 의심이 많아서 안녕하고 잠 들어야 겨우 솔직해지는 더러운 치사함 바보같이 넝마같이 구질구질한 내 기다림 그대에게 들려주어 그대의 행복을 치장하고 싶다. 철새만 약속을 지키는 어수선한 세월 조금도 슬프지 않게 살면서 한 치의 미안함 없이 아무 여자에게나 헛된 다짐을 늘어놓지만 힘주어 쓴 글씨가 연필심을 부러뜨리듯 아직도 아편쟁이처럼 그대 기억 모으다 나는 불쑥 헛발을 디디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