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휘(避諱)와 역린(逆鱗)



다소 뜬금 없는 이야기이긴 한데, 김종인이 새누리당을 탈당한다는 소식이 저간의 화제인데 - 다른 한 편으론 이야말로 뜬금 없다는 생각이 든다. 김종인의 존재감이 사라진지가 언젠데, 경제민주화가 사라진지 언젠데 새삼스레 이걸 가지고 뉴스가 되고 그래 - 그래서 약간 다른 의미에서 아젠다로서 그나마 유의미했던 '경제민주화'가 사라진 마당에 박근혜 정부에 남은 유일한 아젠다는 '창조경제'뿐이란 생각이다(물론, 대선개입이란 블랙홀이 이 모든 걸 삼킬 게다).

조선왕조 500년, '태정태세문단세'를 달달 외워도 우리는 조선 임금들의 시호는 알아도 그들의 이름은 잘 모른다. 기껏해야 아는 이름은 드라마 '이산' 덕분에 정조 임금의 이름이 '이산'이란 정도다. 나중에 "뿌리깊은 나무" 덕분에 세종의 이름이 '이도'였다는 정도를 추가할 수 있겠다. 그런데 조선 임금의 이름은 전부 외자일까.

그것은 조선왕조가 사대부와 분권 형태의 권력(봉건)이었다고는 하더라도 어쨌든 '전제왕조'였던 탓에 왕실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임금의 이름에 대해 엄격한 규율 - 임금의 이름은 아무도 부를 수 없으며 또한 일반 공문서나 사문서에서도 사용할 수 없었다 - '피휘(避諱)'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만약 조선왕실 임금의 이름이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의 형태였다면 당연히 일반 백성들은 그 이름이 들어간 글자를 건너뛰기 위해 피땀 흘리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 게다. 이런 형태의 피휘가 없었던 서양의 왕실 이름은 길다. 그것도 아주 길다. 그에 비해 조선왕실의 임금 이름이 짧고, 일반적으로 잘 사용되지 않는 이름을 택했던 까닭은 왕실의 존엄은 유지하되 일반 백성의 불편은 최소한으로 하기 위한 현명한 선택이었던 셈이다.

조선왕조는 500년을 유지했는데, 세계 역사상 이처럼 오래 유지된 왕조는 드물다. 오늘의 관점으로 보면 그것이 도리어 안타까울 지경이겠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만큼 당시 조선의 시스템이 잘 짜여져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권력의 속성상 어떤 권력이든 피휘와 역린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에는 이 피휘와 역린이 너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그래서 이 정부가 무엇이라고 말해도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추측이 아니라 단언할 수 있다. 창조란 경계에 도전하는 일이다. 경계는 아무나 넘어설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치 영화 "월드워 Z"의 좀비들이 이스라엘의 높은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 무수히 많은 좀비들이 몸을 던져 장벽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처럼 그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선 두려움 없이 장벽에 몸을 던질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많은 피휘(금지)와 역린(처벌)의 두려움에 몸서리치는 사회에서는 어떤 창조도 기대할 수 없으며 정권의 존립 자체도 위험해진다. 뜬금없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이 역사가 보여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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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황해문화" 창간 20주년 기념호를 화요일부터 발송작업합니다. 감개무량이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감개가 무량하지요. 특별한 기념행사 같은 거 못합니다. 잡지야 잡지 그 자체가 기념인 게죠.


어떤 한 시절, 어떤 한 잡지가 있었다고 말되어지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흔하고 넘치는 듯 시절인 듯 보이나 찾아보면 이만한 잡지, 요즘 참 드물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 김명인 선생의 글이 참 좋습니다. 꼭꼭 씹어서 읽어주시길....





<권두언>
길 없는 곳에서 시작되는 길


김명인


『황해문화』가 20주년을 맞는다. 1993년 겨울호를 창간호로 내고 이제 다시 2013년 겨울호를 내는 것이다. 계간지 20년이 그리 긴 시간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척박한 한국적 문화지형 속에서도 이보다 더 오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잡지들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랙홀 같은 서울 중심의 구심력이 기세등등한 현실에서 인천이라는 주변적 로컬리티에 굴하지 않고 20년 동안 꾸준히 시사문화지로서 위상을 유지해온 것에 대해 약간의 자화자찬 정도는 허락되어도 좋을 것 같다.

『황해문화』는 처음부터 상업적 수지타산을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진 잡지다. 계간지가 그 자체로서 수지균형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많은 계간지들이 명멸해왔지만 오래도록 속간하고 있는 다른 계간지들(물론 월간지도 마찬가지지만)의 경우 대개 해당 출판사들이 일정한 손해를 감내하면서도 그 잡지의 영향력에 힘입어 단행본 출판을 병행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함으로써 잡지 쪽으로부터의 손실을 보전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하지만 『황해문화』는 그러한 손실보전구조를 가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행을 계속한다. 그것은 『황해문화』의 발행주체인 새얼문화재단의 특수성에서 기인한다.

새얼문화재단은 인천시민의 손에 의해 40년 가까이 키워져온 풀뿌리 민간 문화재단이다.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풀뿌리 지역문화재단으로 성장한 새얼문화재단에 있어 지역을 넘어 전국적 어젠다를 형성하고 확산시키는 시사문화계간지 『황해문화』 발간 사업은 다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자부심이라고 할 수 있다. 새얼문화재단이 『황해문화』를 발간하는 일은, 재단의 다른 주요 사업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문화라는 것은 어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그 자체로 자율성을 가져야 하고 또 그 자율성은 의식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것이라는 확고한 의지의 소산이다. 이제 20년을 맞게 된 『황해문화』에 어떤 전통과 품격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잡지 자체의 기획과 내용들이 만들어온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다른 잡지들과는 다른 이러한 발행주체의 확고한 의지 자체에 스며있는 높은 품격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이 잡지를 만드는 우리의 숨길 수 없는, 그리고 굳이 숨기고 싶지 않은 자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황해문화』가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사랑받기를 원한다. 그것은 비단 『황해문화』만이 아니라 『황해문화』를 포함한 진지한 잡지저널리즘 전체에 관한 소망이기도 하다. 1990년대 이래 한국 잡지저널리즘의 위상은 점차 하락일로에 있다. 주간지 시장은 그래도 어지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월간, 계간, 특히 시사문제를 주로 다루는 정통 잡지저널리즘의 쇠퇴는 너무나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경박단소의 매체문화와 단행본 중심의 출판문화(물론 진지한 단행본들 역시 비슷한 운명이겠지만) 사이에서 시시각각 변화무쌍하게 등장하는 시사현상들을 보다 근본적인 맥락에서 차분히 짚어나가서 그 의미와 전망을 모색하는 진지한 논의의 장으로서의 잡지저널리즘이 설 자리를 잃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잡지저널리즘의 쇠퇴는 선정주의와 흑백논리로 가득한 파편적 억설들을 한편으로 하고, 지나치게 원론적인 아카데미즘적 논리를 다른 편으로 하는 여론장의 기형적 이원구조의 결과이면서 또 원인이 되고 있다. 그 결과 결국 남는 것은 전혀 합리적이지 못한 극단적 흑백논리 혹은 상호모순적인 대중적 억설들이거나 아니면 고답적인 원론들뿐, 그 사이를 잇는 여론의 합리적 변증과 조정의 과정은 생략되거나 실종되고 마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어느샌가 점차 '보수꼴통'의 논리와 '종북좌빨'의 논리만 남는 지적 야만의 상태로 빠져들게 되었다.

진실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설사 완전한 진실이 아니더라도 서로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설득이나 합의에 이르는 길조차도 늘 복잡하고 우회적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한국사회는 이러한 돌아가는 길, 복잡한 길을 누구도 차분히 모색하려고 하지 않고 있다. 설사 그러한 길을 누군가 모색하여 이 길로 가자고 해도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고 있다. 경쟁과 불안 속에서 그야말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심정으로 쫓기듯 살아가는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이러한 차분한 성찰적 모색을 요구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우회로를 기피하는 사회, 가던 걸음을 멈추고 다시 생각해 보는 일을 모두가 귀찮아하는 사회는 위험하다. 이성이 잠들면 요괴가 눈뜬다. 그 요괴가 지금 한국사회를 백주에 횡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게 필자만의 착시는 아닐 것이다.

한갓 일 년에 네 번 나오는 잡지를 읽는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계절마다 한 번 정도 자신만의 좁은 소견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세상과 이웃의 일들에 대해 생각하고 그 깊고 먼 맥락들을 짚어나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적어도 지금과 같이 무언가 성마른 광기가 지배하는 이 불길한 시대의 속도를 얼마간은 멈출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부터 어떤 의미있는 변화도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이 『황해문화』를 읽어주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렇게 읽히는 잡지를 만들기 위해 더 노력하리라. 20년의 길목을 돌아나서는 지금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 본다.

20주년 기념호를 낸다. 이번 호는 '20년,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이라는 제목 아래 하나의 단행본형 통기획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시도는 통권 50호째를 맞아 '대한민국의 상처와 희망'이라는 제목으로 발행했던 지난 2006년 봄호에서 이미 한 번 시도된 바 있다. 잡지라는 매체가 지식과 교양으로 무장한 전문가들만이 글을 실을 수 있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계간지의 성격상 전문필자들의 글이 주로 실리는 것 또한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대개 할 말이란 것은 가지지 못한 사람, 억울한 사람들이 더 많은 법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또한 대개 말할 줄을 모르고, 또 말할 기회도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의 말은 대부분 누군가에 의해 대신 말해지지만 그 과정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왜곡되거나 변형되게 된다. 그리고 '글'의 형태로 전해질 때는 더욱 그 왜곡과 변형의 정도는 심해진다.

지난 50호에 이어 우리는 이 20주년 기념호를 빌려 이처럼 그동안 말하고 싶었으나 말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말을 가급적 많이 실어 알리고자 한다. 이 기획 속에는 『황해문화』가 창간된 1993년부터 올해 2013년까지 20년 동안 이 땅에 사는 마흔 여섯 사람의 살아온 이야기가 들어있다. 거기엔 공장노동자, 해고자, 농어민, 장애인, 탈북자, 화교, 이주자, 자이니치, 이민자가 있고, 인권운동가, 병역거부자, 빈민운동가, 청소년운동가, 문화기획자, 노래운동가, 대안학교 교사, 페미니즘 운동가, 촛불소녀, 해직교사, 내부고발자, 지역운동가와 시인, 소설가, 평론가, 만화가, 사진가, 가수, 극작가, 서점주인, 출판인, 해직기자가 있으며 목사, 신부, 승려 심지어 전직 대법관, 현직 레슬러의 이야기까지도 있다. 일종의 집단적 민중자전인 셈이다. 가급적 사회 각층의 목소리를 듣고자 했으므로 개중에는 글 잘 쓰고 말 잘하는 지식인들도 들어 있지만 그들조차도 무슨 대단한 공적 발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지난 20년을 돌이켜 술회함으로써 이 집단적 민중자전의 흐름 속에 녹아들도록 하였다. 수많은 사연들이, 수많은 말들이 지난 20년이라는 한국현대사의 한 토막 속에서 얽혀있고 또 말해지고 있는 이 한 권의 서사기획 속에서 독자들 역시 자연스럽게 자신의 지난 20년 세월을 돌아보게 될 것이고 그것이 어떤 형상을 하든, 어떤 이미지로 다가오든 민중자전의 파노라마는 곧 우리 모두가 함께 겪어왔던 날것의 역사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황해문화』가 창간된 1993년은 한국사회가 1961년부터 시작된 무려 32년의 군정체제를 끝내고 어렵사리 문민정권을 탄생시킨 원년이기도 하다. 그 후 20년 동안 김영삼 정권 5년을 거쳐 김대중, 노무현의 '민주정권'이 이어졌고 이명박 정권을 거쳐 이제 박근혜 정권 원년을 맞은 것이다. 그 20년은 우리에게 어떤 것이었을까? 벌써 몇 해 전의 이야기가 되었지만 그 시절을 일컬어 '87년 체제'라거니 '97년 체제'라거니 하는 논의들이 있었다. '87년 체제'라는 명명에는 1987년의 6월항쟁과 그로부터 가능해진 직선제개헌을 비롯한 '민주(화)개혁'과 그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판단되는 현재까지의 한국사회의 질적 변화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의지가 깃들어 있었고, '97년 체제'라는 명명 속에는 1997년에 있었던 'IMF 쇼크'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적 '격변'으로 인한 부정적 구조변화야말로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대표 항수이며 '민주화'는 그에 비하면 일개 종속변수라는 입장이 들어 있었다.

쉽게 단순화할 수는 없겠지만 오늘의 시점에서 본다면 '97년 체제'라는 명명이 더 사태의 본질에 접근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987년의 민주항쟁은 직선제 개헌을 낳았고 노태우-김영삼 정권 10년 동안의 산통을 거쳐 마침내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이른바 '민주정권 10년'을 일구어냈지만, 그 민주화는 정권교체와 사회 전반의 민주적 환경 조성이라는 의미있는 결과로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 폐지의 실패에서 나타나듯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에는 크게 못 미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 뒤를 이은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통해 그나마 이루어졌던 민주화의 여러 성과들이 하나하나 무화되거나 격파되는 현실을 미루어볼 때 극단적으로 말하면 '87년 체제'는 일종의 환각이었다는 생각조차 드는 것이다.

더욱 비관적인 것은, 비록 신자유주의 체제가 멀게는 1980년대 초 전두환 정권 시절을 거쳐 노태우 정권 때부터 이미 세계화니 개혁 개방이니 하는 언술과 더불어 시작되기는 하였지만 김영삼 정권하의 노동법 개악, 김대중 정권하의 금융개혁, 구조조정과 대량 해고, 비정규직 양산, 노무현 정권하의 FTA 드라이브와 시장자유주의 고착 등에서 보듯 이른바 민주정부 아래서 한국사회에 확고하게 착근되었다는 사실이다. 지난 20년은 어떻게 보면 민주화의 환각 속에서 신자유주의의 고착이라는 엄혹한 현실을 방기했던 기간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고착된 '97년 체제' 기간이라고 보는 것만으로는 오늘의 한국사회를 다 설명할 수 없다. 신자유주의의 고착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권을 온전히 계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사이에 계승의 다리보다는 단절의 협곡을 더 뚜렷하게 실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여기서 다시 '민주화'의 문제가 대두된다. 노무현 정권기까지 위태롭기는 했지만 의연하게 작동했던 민주화의 환각은 2008년 이명박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하나하나 깨지기 시작한다. 엄밀히 말하면 '민주화'는 신자유주의 질서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국가의 경계 철폐와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시장자유의 획득을 전제로 하는 신자유주의 질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완성을 촉진하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이러한 신자유주의-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공생관계는 변질되기에 이른다.

한국사회에서 민주화는 권위주의적인 군사독재체제에서 탈권위주의적 문민체제로의 자연스러운 이행이라는 의미를 넘어설 수밖에 없다. 만일 한국의 지난 권위주의 군사독재체제가 제3세계의 다른 나라들처럼 식민지 민족해방투쟁에서의 정통성이라는 기반 위에서 빠른 속도의 경제, 사회발전을 기하기 위한 어느 정도 불가피한 역할을 수행한 존재였고 민주화란 그것이 부르주아 지배체제의 성숙에 따라 자연스럽게 해소되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민주화 역시 불가역적으로 연착륙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한국의 민주화 과정은 단지 권위주의 군사독재체제의 유산을 극복하는 것을 넘어서 그 이전 분단과 전쟁과 냉전체제 고착 과정에서 형성된 한국적 지배체제의 근원적 문제들, 이른바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의 국가폭력과 그 피해의 문제, 그리고 그로부터 당연히 제기될 수밖에 없는 한국 주류 지배세력의 정통성/정당성 문제에까지 소급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길게 보면 1970년대 말 박정희 정권의 붕괴 이후 노무현 정권 시기까지의 30년의 시기는 권위주의의 장기적 약화와 민주화라는 추세가 주도하는 상황에서 이와 같은 '대한민국 주도세력'들이 대세에 밀려 수세에 처해 있던 기간이었다.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정권하에서의 대북 화해 협력 분위기가 점차 증진됨으로써 그들의 존립기반인 냉전적 분단체제가 흔들리게 되고 더 나아가 제주 4·3항쟁 등 과거사 관련 진상규명과 국가책임 인정 등 자신들의 원죄가 다시 호출되는 상황에 이르면서 이들의 대대적인 역공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목도하는 바와 같은 이명박-박근혜 정권하에서의 전방위적 우경화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한국사회에서의 민주화는 한국 자본주의의 양적 성장에 걸맞은 정치사회적 질적 수준의 확보라는 자연스러운 경로의 일환으로 불가역적으로 진행되는 대신 냉전적 분단체제의 기형적 형성이라는 한국현대사의 특수한 조건에 부딪쳐 더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오히려 정체 혹은 후퇴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단지 민주화의 표류 혹은 지체라는 문제를 넘어서 더 큰 문제들을 야기한다. 냉전질서에 기초를 둔 한국사회 정통 지배세력의 이러한 반역사적 귀환과 주도권의 회복은 그 자체로도 문제지만 그 서슬 아래서 사회 각계 각층의 정당한 생활상의 민주적 요구들조차 강압적으로 봉쇄되는 결과를 낳게 되며 그 뒤안에서 지난 20~30여 년 동안 점차적으로 제거되어왔다고 여겼던 온갖 부정, 비리, 탈법들이 다시 노골적으로 고개를 들고 자행되어도 무방한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도록 만든다는 더 큰 문제를 낳는다. 그리고 이에 정당하고 이성적인 문제제기조차 비합리적인 매카시즘적 탄압이나 단죄의 대상이 되는 현상을 낳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결국 현재의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체제가 만들어낸 생활상의 위기에 이러한 반역사적 보수회귀 현상이 만들어낸 정신적 위기까지 가세하여 미증유의 불안과 공포, 그리고 불확정성이 횡행하는 어두운 국면으로 한없이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더욱 상황을 어렵게 하는 것은 민중 일반의 이러한 삶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달리 넒은 의미의 이른바 '진보세력'에게 두텁게 드리워져 있는 패배주의와 무기력감이다. 민주화의 환각, 신자유주의적 무장해제와 개인화, 그리고 대안적 상상력의 빈곤 등에 의해 이러한 심각한 작금의 상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저항해야 할 주체적 역량은 현저하게 위축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이 땅의 민중들은 지금 미증유의 고립과 소외 속에서 각자도생의 처절한 몸부림을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황해문화』 20주년 기념호의 기획 '20년,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에는 지금 이처럼 어둡고 답답한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2013년을 맨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사람들의 모습이 날것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우리는 이 신산스러운 삶의 모습들을 '벌거벗겨진 삶', '추방당한 사람들', '이 땅에 살기 위하여',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등 네 개의 제목 아래 거칠게 묶어 보았다. 그러나 여기 글을 보내준 마흔 여섯 분의 삶을 이런 식의 다소간 상투적인 네 개의 제목 아래 묶어넣는 것은 어떻게 보면 폭력적이다. 이분들의 글을 읽는 동안 우리는 이들의 지난 20년의 삶이 비록 힘겹고 고통스러운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정신과 나날의 삶까지도 암울한 무채색은 아니라는 것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 현실은 늘 명명(命名)을 넘어선다. 현실을 관조하는 자는 결코 현실을 살아가는 자를 앞서지 못하는 법이고 황혼이 되어야 비로소 날개를 펼치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결코 한낮의 땀과 눈물의 의미를 알 수 없는 법이다. 이분들의 글을 읽는 동안 우리가 편의적으로 또 상투적으로 만든 네 개의 제목들 중에 이들의 삶의 실상에 부합하는 제목은 하나,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뿐이었다. 나머지 제목들은 모두 빈곤한 상상력과 현실에 대한 과잉규정, 혹은 엄살의 소치일 것이다. 삶은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주체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조건이고 소여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최소한의 틈이 있게 마련이고 그 틈이 있는 한 인간은 절망하지 않고 그 틈을 향해, 한 줄기 빛을 향해 나아가게 되어 있다. 그러다 보면 바로 그 틈에서 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분들의 삶으로부터, 삶에 대한 태도로부터 희망을 배운 것이다. 독자 여러분도 이 길 없는 곳에서 시작되는 길에, 이 희망 없는 곳에서 시작되는 희망에 감염되기를 기대해 본다.

<『황해문화』 편집주간, 인하대학교 교수>


<목차>

특집 20년,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01. 벌거벗겨진 삶
12 내가 살아온 삶, 그리고 꿈꾸는 미래│김소연
24 아버지의 문패│고동민
39 인간의 얼굴을 한 따뜻한 정의를 꿈꾸며│이지문
49 아른한 서른, 쉰에 보이는 설움│임병구
59 희망의 물리적 근거로 존재해온 장애인운동│박경석
75 노동자의 길, 노동자의 삶│방종운
92 길 위에서 길을 찾아│김동애

02. 추방당한 사람들
110 또 다른 꿈을 찾아 여기에│정영신
122 토건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강제윤
131 거기 마을 하나 있었다│신종원
144 북한에서 태어나 20년, 남한으로 이주하여 20년│김형덕
156 탈북자의 길│김성민
163 버마인이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법│조모아
171 한국의 재외국민, 일본의 외국인 주민│이성
183 길 위에 놓인 소설들│유채림
195 화교로서 걸어온 길│담도경
209 63년 전의 월미도 미군폭격, 아직도 피난 중인 원주민들│한인덕

03. 이 땅에 살기 위하여
222 고향 없는 개인이 활동가가 되기까지│공현
235 세상과 싸워 이기는 방법을 배우다│한지혜
244 마지막 페스티벌│김수박
257 난 왜 활동가로 사는가│신유아
268 가치와 의미를 둘러싼 문화운동에 주목하며│오김숙이
283 대안교육과 함께한 나의 청춘, 희망을 품다│손진근
296 노란색에 관한 네 개의 짧은 글│박경주
304 상상하는 대로 그대로│민정연
319 서울대 미대 졸업자의 배다리 '주민되기'│민운기
331 정의를 강물처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처럼│김일회
340 인권운동 20년의 반성│박래군
351 무엇이 나를 여기 있게 하는가│신현수
371 삶의 현장인 지역과 나의 의식변화│김정택
383 ‘나'의 지난 목회 20년 회고│박종렬

04.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398 어느 날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아버지를 위하여│오누리
407 20년, 무거운 리듬을 타고 흐르다│민재기
416 악당 레슬러의 탄생│김남훈
427 변화 없음의 변화│박새봄
437 시간은 아팠던 기억도 무디게 만든다│차형석
447 그때, 내가 본 것의 의미│노순택
462 상흔과 부채의식, 그 이후│이명원
471 또 겨울이다. 봄은 오려나?│홍순천
481 내 신체는 누구의 것인가│김남일
─'국가'에서 '국가 바깥'으로, 다시 '국가 너머'로
492 출판인으로 살아가기│한철희
503 사법개혁에 관한 회고│박시환
515 배다리 헌책방거리│곽현숙
528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영화스님
540 세상도 변하고 나도 변했지만 열정은 변하지 않았다│이충렬
550 처음처럼, 처음보다 더 큰 꿈을 꾸는 삶을 위하여│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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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이어 폭격기’로 본 '정보'에 대한 어떤 생각.





지난 냉전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기억할 만한 전략폭격기 중 하나가 구소련이 보유하고 있던 '백파이어폭격기'란 것이 있다. 핵무기를 개발하는 일은 솔직히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문제는 핵무기를 투사할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핵무기를 소형화하면 할수록 사용할 수 있는 용도가 다양다종해지기 때문에 누구라도 소형 핵무기를 개발하고 싶어 하지만 핵무기란 기본적으로 원자를 분열시키기 위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고온고압이 필요한 무기이므로 소형화하기 위해선 대단한 기술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간혹 우리 힘이든, 남의 힘이든 첨단 로켓을 개발하여 쏘아 올리면서 이번엔 위성의 무게가 몇 톤까지 가능하다거나 뭐라거나, 블라블라 하면서 로켓의 탑재 중량을 따지는 이유는 로켓이란 것이 언제라도 미사일로 전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발사하면 로켓이요, 저들이 발사하면 로켓도 미사일로 의심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어쨌거나 핵탄두를 가지고 있다한들 그걸 목표지점까지 안전하게 보내서 터지게 할 수 없다면, 다시 말해 그걸 가지고 있다가 우리나라에서 터지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래서 동서냉전이 시작되자 구소련과 미국은 서로 상대방 진영까지 어떻게 하면 핵탄두를 안전하게(?) 날려 보내서 요격당하지 않고, 무사히 폭발시킬 수 있을까 경쟁을 벌였다.

다시 말해 동서냉전 시대 무기개발의 역사를 한 마디로 축약하면 단순히 핵무기를 개발한 역사가 아니라 핵탄두를 소형화하고, 핵탄두를 상대방 진영에 무사히 투사할 수 있는 무기를 개발하는 역사이자, 반대로 상대의 핵탄두가 우리 진영까지 넘어오지 않도록 저지(요격)한다는 역사다. 그리고 이 역사는 동서냉전이 해체된 이후엔 그 중심이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건너와서 MD(미사일방어체계)란 말로 계속 진행되고 있다.

핵을 상대 진영에 투사하는 무기 체계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가 육지에서 발사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고, 둘째가 핵잠수함에서 발사되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이고, 셋째가 전투기나 폭격기 등에서 발사되는 공중발사 핵순항미사일(ALCM)이다.

'핵폭탄'하면 사람들은 과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핵폭탄을 떠올리지만 현대 핵전쟁에서 핵폭탄이란 곧 '핵미사일'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목표상공까지 비행기가 직접 날아가서 공중 투하하는 핵무기는 없다는 말이다.

인천문화재단이 발간하는 문화잡지 이름이 "플랫폼"인데, 무기 체계에서 플랫폼이란 대부분 이렇게 미사일을 운용할 수 있는 체계를 말한다. 육상에서 발사되는 미사일을 이동시키는 차량, 잠수함, 전폭기 등이 바로 미사일을 발사하기 위한 플랫폼들로 개발된 무기시스템이다.

동서냉전 초창기 미국은 엄청난 강대국이었다. 지금이야 군사력만으로 강대국이라 할 수 있지만, 당시엔 모든 방면에서 미국이 초강대국의 지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제트 전투기들이 개발될 만큼의 국력이 있었고, 실제로 새로운 전차와 전함과 무기 체계들이 개발되었다. 이 무렵 자고나면 새롭게 개발되는 전투기 시리즈들의 코드 넘버가 '100'자리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 시대 제트 전투기들을 이른바 '센추리 시리즈'라고 불렀다. 그런데 베트남전 이후 미국 경제가 몰락하면서 국방비가 삭감되자 미국 국방부는 구소련이 가지고 있는 무기 체계를 엄청나게 부풀리기 시작했다.

모순(矛盾)의 싸움에선 가상의 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군대의 힘을 부풀려야 상대적으로 예산을 따내기가 쉬울 수밖에 없다. 놓친 월척이든 이미 잡은 월척이든 시간이 지날수록 강태공들에겐 점점 더 커지는 법이듯이 말이다. 결과적으로 미 국방부의 대표적인 '뻥' 사례 중 하나로 밝혀진 폭격기(물론 그렇다고 이 폭격기를 가볍게 무시할 정도란 뜻은 아니지만)가 바로 Tu-22M 백파이어 초음속전략폭격기였다(현대전쟁에서 어떤 무기 체계에 '전략'이란 말이 붙는다면 거의 무조건 핵무기 체계와 연관되어 있다고 보시면 된다).

Tu-22M 백파이어는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까지 소련 위협론의 유력한 증거로 떠들썩했던 초음속 폭격기였다. 당시 미국 국방부는 이 폭격기가 소련에서 발진해 대서양을 횡단해 미국까지 와서 핵 폭격이 가능한 기종이라고 주장했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이 기종은 대륙간의 대양 횡단비행 능력이 부족했고, 유라시아 대륙의 주변 작전시 전역 폭격기로 사용되는 기종이라고 보아야 마땅한 정도였다. 또 당시 소련의 폭격기 기종들은 가속 및 속도에 중심을 두어서 항속거리 등에서 문제가 있었다.

어쨌든 이처럼 떠들썩하게 부풀려 두긴 했지만 이후 소련이 붕괴되면서 실체가 판명되었으나 논란이 될 만큼의 고성능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았다고 판명되었다. 여기까지가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지만, 사실 미국 CIA(중앙정보부)는 이 기종이 개발되고 얼마 안 된 냉전 당시에 이미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알았을까?

당시 미 중앙정보부는 위성 촬영 등을 통해 이 기종의 전체 제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지만, 이 기종의 무게는 알 수 없었다. 무게를 알아야 엔진의 추력 등을 계산해 상승한도, 항속거리, 최대 속도, 순항 속도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결국 가장 중요한 정보는 기체 제작에 사용된 금속의 재질을 파악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건 일급 기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길이 42.46 m
폭 34.2 m(후퇴시 23.3m)
높이 11.05 m
자체중량 54,000 kg
총중량 124,000 kg
상승한도 13,300 m
최대속도 마하 1.88
엔진 사마라/쿠즈네초프 NK-25(A/B) x 2
행동반경 2,400 km
승무원 4
제작(개발) Tupolev

미 중앙정보부는 항공기 제작 공장에서 기체를 제작하고 남은 금속을 이용해 소련의 국영항공사인 아에로플로트의 기내 옷걸이를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소련을 여행하는 여행객으로 가장한 요원이 아에로플로트의 기내 옷걸이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린 뒤 청소부를 매수해 쓰레기 더미에서 옷걸이를 빼내는데 성공했다. 미 중앙정보부는 이 옷걸이를 비밀리에 미국의 연구소로 보내 금속의 합금 비율과 밀도 등을 분석햇고, 결국 백파이어 폭격기의 무게를 산출해내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이 폭격기의 항속거리가 그들이 염려했던 만큼 대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미 중앙정보부(랭글리)와 국방부(펜타곤) 그리고 보수우파 강경세력인 레이건 행정부는 굳이 이런 사실을 대중에게 공개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SDI(Strategic Defense Initiative) - 이른바 '스타워즈(Star Wars)' 계획이라 불리는 전략방위계획 - 을 발표하고 추진하여 오늘날의 미사일방어계획(MD)로 발전시켰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나는 어떻게 알았을까?

지하철로 출퇴근할 때 지하철 앞에는 좌판을 벌여놓고 한 권에 500원 하는 싸구려 책들을 판매하는 노점상들이 있었다. 거기에서 파는 책들 중엔 이름 없는 출판사가 일본의 탐사전문(?) 저널리스트들의 책을 대충 번역해서 대충 만든 책들이 있는데 간혹 그런 책들 중에도 건질 만한 것들이 있다.

예전에 내게 처음 일을 가르쳐주었던 선배는 극작가로 데뷔한 작가였는데, 이 선배는 내가 읽는 책들을 보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그런 충고를 해준 적이 있다.

"너 글쟁이가 되려면 그렇게 좋다는 고전이나 명저만 읽으면 안된다. 그런 책들이 좋은 책이긴 하지만 정작 그런 책에선 뽑아먹을 게 별로 없거든. 진짜는 <선데이서울>이나 <아리랑> 같은 책에 실린 수기 같은 거야. 그런데 실린 형수를 사랑하게 된 시동생 이야기 같은 거..."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사실, 세상에 유통되는 모든 유용한 정보 혹은 이야기란 모두 어떤 이들 눈에는 쓰레기더미로 보일지 몰라도 그것을 읽고 분석하고 조합해내는 시선의 필터를 통해 건져낸 것이다. 유능한 이야깃꾼 혹은 정보분석관은 그 필터(시선과 저변)가 특별한 사람인 것이지 언제나 특별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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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였을 거다.
그 세계는 사람들이 밥이나 빵을 먹지 않고,
공기만 마셔도 충분히 살 수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되는 천국(?)이었다.
그 동화를 읽고 정말 한동안 상상이 그쪽으로 뻗친 적이 있다.
정말 내 모든 것이 아직 순진하고 순수하던 무렵이었다.

그러던 내가 굳이 인간이 공기만 마시고 살지 않아도
미래세계의 언젠가 풀타임섹스머신이 저렴하게 등장한다면
최소한 남자들 중 상당수는
그냥 잉여로 존재하는 방식을 택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 영화 <A.I.>에서 주드 로는 '지골로 조' 로봇으로 등장한다. 그는 여성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섹스머신으로 프로그램되었다. 그런 이유로 뭇남성들은 이 로봇만 보면 파괴하고픈 욕망을 불러 일으키는 혐오의 대상이 된다.


내가 이런 상상을 하게 된 것은 우리 건물 화장실에 이런 광고 문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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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광고문구를 읽고, 나는 황인숙의 시 "후회는 없을 거예요"를 떠올렸다.

후회는 없을 거예요

- 황인숙


후회 가득한 목소리로
오, 오, 오오, 여가수가 노래한다
남겨진 여자가 노래한다
마음을 두고 떠난 여자도 노래한다
후회로 파르르 떠는 노래를 들으며
나는 인터넷 벼룩시장에서
마사이 워킹화를 산다
판매글 마지막에 적힌
‘후회는 없을 거예요’
그 한 구절에
일전엔 돌체앤가바나 손목시계를 샀다
작년 여름엔 소니 디지털 카메라를 샀다
나를 무장해제시키는,
후회는 없을 거예요
벌써 후회하는 듯한,
후회는 없을 거예요
서글픈 목소리로 나직이,
후회는 없을 거예요
그 시계와 카메라는 상자째
서랍 안에 있다
후회는 없다
오, 오, 오오~

<출처> 황인숙, 문학과사회, 2008년 겨울호(통권 84호)

“킥킥”, 황인숙의 신작시를 읽으며 나는 “킥킥” 웃었다. 오다가다 서너 번 스쳐갔던 것이 황인숙 선배와 내 인연의 전부였다. 구태여 스쳐가는 만남을 부여잡기 위해 학연을 내세운 바도 없지만, 언제나 허공 어디쯤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선후배 같은 세속의 인연쯤 안중에 없을 듯이 보인 탓도 크다. 무엇보다 나는 선후배로 만나기 전에 그녀의 애독자 중 한 명이었으므로, 나중의 인연을 시인과 독자의 관계보다 앞세우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의 스침은 시인이 풀어놓은 일상의 공간을 충분히 상상하게 만든다. 실은 우리 모두 비일비재(非一非再) - 한 번도 아닌, 두 번도 아닌 - 한 경험 속에 익숙한 일들을 그녀는 시(詩)로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마사이 워킹화, 돌체앤가바나 손목시계, 소니 디지털 카메라”같은 브랜드 제품들은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시대의 풍속도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들일 뿐이다.

‘후회는 없을 거예요’란 구절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에디트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을 먼저 떠올렸는데 막상 ‘후회는 없을 거예요’를 놓고 인터넷 검색기를 돌려보니 “딱!! 5분만 읽어봐 주세요! 후회 없을 겁니다. 저 두 첨엔 안 믿었는데 밑 져야 본전이구 해서 시작 했답니다~”부터 시작해서 “돈따는 재미 ...높은승률....님도느껴보세요...후회는없을겁니다.”까지 죄다 돈 쓰는 얘기 아니면 돈 벌 기회를 제공해주겠단 글들이었다.

얼마 전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경제대통령 미네르바’ 현상에 은폐된 대중의 욕망도 들춰보면 사실 그런 것이다. 개인은 더 이상 삶의 향배를 ‘사회적 기획’ - 그것이 거시적인 경제정책이든 아니면 근대 개인의 해방을 기획했던 계몽적 기획이든 - 을 통해 개선해나갈 수 있다고 믿지 않으며, 비판적 지성이 사라진 시대, 더 이상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부재하게 된 대중의 관심이 이제는 ‘사회적 기획’에서 ‘개인적 기획’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대릴 한나는 군위안부용 안드로이드 프리스(Pris) 역으로 등장했다.


월간 『신동아』 12월호(2008)에 실린 미네르바의 글에는 그가 어째서 대중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지에 대한 이유가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독자들 개개인에게 보내는 당부의 글로 <스태그플레이션에서 살아남기>란 내용을 적고 있다. 그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시대에 친절하게도 개개인이 어떻게 해야 이 험난한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지 해설해주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준다. “더 이상 사회를 믿지 말고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는 길을 찾아봐!”라고 말한다. 그런데
월간 『신동아』 12월호(2008)에 글을 쓴 미네르바는 진짜였을까? 그는 진짜 미네르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사실이 더 진실같은 시대다.

그런데 내가 “킥킥”대며 웃은 까닭은 황인숙 시인의 시적인 삶의 풍경을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거나 경제대통령 미네르바 현상에 은폐된 대중의 욕망을 읽어냈기 때문이 아니라 아침나절 공중화장실에서 발견한 광고문구가 황인숙의 시 속에 나오는 ‘후회는 없을 거예요’보다 더 극적이고, 또한 매우 시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문구는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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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광고에 에디트 피아프의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의 마지막 부분을 연결했더라면 훨씬 더 와 닿을 뻔 했다.

왜냐하면 나의 삶, 나의 기쁨이
오늘, 그대와 함께 시작되거든요!

실제 애인보다 "훨" 편한 애인은 전화기 저 끝(tele)에 있고, 뒤끝도 없다. 이런 시대에 “제발, 후회 좀 하고 살아!”라고 하면 욕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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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지사지(易地思之)'란 처지(處地)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말로 신영복 선생이 말씀하신 입장의 동일화가 가장 큰 연대의 정신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교육의 기본 테제라고 생각한다.





"삼국지연의"에는 위나라를 세운 조조가 죽자 그 뒤를 잇기 위해 형제들끼리 치열한 권력쟁탈전이 벌어지는 대목이 있다. 양수와 순욱의 조력을 받는 조식과 가후의 조력을 받는 조비의 권력싸움은 권력 앞에 부모자식도, 형제도 없다는 걸 새삼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결국 형제간의 권력쟁탈전에서 승리한 조비는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조식을 죽이라는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이되(그것이 동생을 살리려고 한 것인지, 죽이려는데 명분이 부족하여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형제'라는 주제를 가지고 시를 짓되, 형제라는 단어가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는 숙제를 내어 동생 조식을 생사를 건 시험에 들게 한다.

그때 쓰인 것이 조식의 유명한 '칠보시'이다.

煮豆燃豆箕(자두연두기)
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
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
上煎何太急(상전하태급)

콩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
콩이 솥 안에서 눈물을 흘리네.
본래 한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서로 들볶는 것이 어찌 그리 심한가

지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와 사용자의 입장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사용자이자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노동자인 것이다. 그런 생각이라면 마치 조식의 칠보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자식들인 셈이다. 그런데 "서로 들볶는 것이 어찌 그리 심한가" 아마 그 밑바탕엔 나만은 손해보고 싶지 않다는 의식이 있을 게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듯 사회 전체적으로 고객감동서비스에 대한 강박이 강해질수록 우리는 어딘가에 화풀이를 하고 싶어지고, 이것이 악순환이 되어 '서로 들볶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도 그렇고,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 내의 다른 체제에서도 자원의 분배와 소비의 문제에 있어 '시장'의 가치를 절대로 낮게 보지 않는다. 시장은 자본주의 이전에도 존재해왔던 매우 합리적인 분배의 도구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시장에서의 합리주의로만 존재할 때 인간의 관계에서 '염치'는 사라지고 '얌체'만 남는 건 아닐까.


나와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야 말로 사회성의 기본 중 기본이다. 언젠가 나는 마음속에 '남(타인)'을 품지 못하면 결국에 '나'도 품을 수 없게 된다고 말한 적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자연(영성)으로부터 너무 멀어진 탓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 또는 어떤 생명체의 희생을 통해 살 수밖에 없다. 그것이 모든 생명체의 원죄이며 업보다.

어머니의 난자와 아버지의 정자가 어미의 자궁에서 만나는 순간부터 생명체는 모체의 영양분을 탈취하는 존재이고, 이후 자궁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다른 생명체를 취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언제나 배가 고팠던 원시의 인류는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가깝게 느꼈던 존재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생명을 취한 뒤에는 동굴이나 바위 벽면에 자신들이 취한 생명을 그려넣어 이들의 목숨이 다른 어딘가에서는 지속되길 기원했다.

이것을 악어의 눈물이나 위선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으나 어찌되었든 지금도 우리 주변에선 농부가 이런 생명의 존엄에 대해 가장 가깝게 느끼는 이들이다. 현대의 문명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음식이란 공장에서 나오는 산물에 가깝다. 그렇기에 음식을 적나라한 다른 생명체의 목숨으로 느끼는 이들은 아기들뿐이다.

아이들이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생선을 보고도 종종 먹기를 거부하는 이유는 생선이 눈을 뜨고 있으며 온전히 생선 모양새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때가 많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인간은 그 스스로도 비인간화의 길을 걷게 되고, 결국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빚게 되는 것이다.

마음속에 생명에 대한 두려움, 타인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인간일 수 있다. 그것을 가르치지 못하는 교육은 인간을 인간으로 키우지 못하는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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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모어 레너드(Elmore Leonard) - 글쓰기의 10가지 규칙






지금까지 50편에 가까운 소설을 펴낸 엘모어 레너드(Elmore Leonard)가 87세의 나이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범죄소설의 대가, 디트로이트의 찰스 디킨스라는 별명을 가졌던 그는 어니스트 헤밍웨이로부터 비롯된 '하드보일드'한 문체를 더욱 끌어올린 것이 아닌가 싶다.

그는 생전에 "작가는 투명인간이 될 필요가 있다"고 말한 바 있는데, "작가는 쓸데없는 말이나 생각을 최대한으로 줄여 독자가 이야기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게 해야 한다"는 독특한 문체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저 세상 사람이 되었지만, 이런 대가(?) 아니 베테랑 작가의 충고를 무시할 필요는 없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몇 해 전 뉴욕타임스에 '레너드의 10가지 작문규칙(Elmore Leonard's Ten Rules of Writing)'이란 것을 공개한 적이 있는데, 그의 글은 김연수가 옮긴 책 "스누피의 글쓰기 완전정복"에도 실려 있다(책을 소장하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애써 찾아볼 필요는 없다. 시중에서 이 책을 파는 곳은 한 군데도 없으니까).

솔직히 나는 작가 엘모어 레너드의 작품을 하나도 읽어본 적이 없으므로 그가 얼마나 대단한 작가인지 모른다. 요즘 나의 가장 큰 문제는 모르는데 별로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는 것이겠지만 세간의 평을 옮겨오면 "그의 문장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문장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위해 가끔은 문법을 무시할 때도 있다. 독자는 글의 주인공들과 함께 호흡하며, 레너드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작가로서 '투명인간'이 되는 데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 다음은 그가 말한 "글쓰기의 10가지 규칙"이다. 위키피디아를 인용했다.

이것들은 내가 책을 쓸 때 (독자들에게) 내가 안보이게 만들어주고, 뭔가를 말해주는 게 아니라, 뭐가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여주도록 도와주는 몇 가지 원칙들이다. 만일 당신이 특별한 언어나 상상력을 갖고 있다든가, 당신이 남이 듣기에 좋은 목소리를 갖고 있다면 자신을 '안보이도록' 하는 것에 대해 별 관심이 없을 것이고, 그럼 안 읽어도 좋다...........10가지를 모두 합쳐서 한 가지로 만든다면, 만일 쓴 것처럼 보일 때는, 다시 쓴다는 것이다.

1. 날씨얘기로 시작하지 말 것.Never open a book with weather.
2. 사건의 발단을 쓰지 말 것. Avoid prologues.
3. '말했다'외에 다른 동사를 쓰지 말 것. Never use a verb other than “said” to carry dialogue.
4. '말했다'는 말을 수식하는 부사를 쓰지 말 것.Never use an adverb to modify the verb “said”
5. 감탄 부호를 절제할 것. Keep your exclamation points under control.
6. '갑자기' 따위의 말을 쓰지 말 것. Never use the words “suddenly” or “all hell broke loose.”
7. 특유의 방언을 쓰되 아낄 것. Use regional dialect, patois, sparingly.
8. 자세한 인물묘사를 피할 것. Avoid detailed descriptions of characters.
9. 장소나 사물에 대한 지나치게 세밀한 묘사를 피할 것. Don’t go into great detail describing places and things.
10. 독자가 건너뛸 부분이라면 아예 쓰지 말 것. Try to leave out the part that readers tend to skip.

* 그리고 이건 "바람구두가 말하는 글쓰기에 대한 단 한 가지 충고"다.

"글쓰기에 있어 유일하게 유효한 충고는, 지금까지 들어왔던 글쓰기에 대한 모든 충고를 잊어라. 그럴 시간에 입 닥치고, 지금부터 당장 써라! 남들이 네 이야기를 모두 써먹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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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보니 "‘헌정질서 파괴 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은 내란죄의 경우 공소시효를 두고 있지 않다. 내란음모죄가 인정되면 3년 이상의 유기징역형에 처해진다"고 되어 있더라.

그러므로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공소시효가 없는 범죄에 대한 고백으로서 처벌을 감수(?)하고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5~6년 전인 1987년 4~5월의 어느 따뜻한 봄날,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D고교의 교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운동장에선 이제 막 점심 도시락을 까먹은 학우들이 공을 차고, 놀거나 운동장 구석에서 산보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 친하게 지내던 친구 LSY군과 함께 점심 시간을 기해 학교 운동장을 바라보며 시국에 대한 한탄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 녀석이 '그날이 오면' 무엇을 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다짜고짜 그날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누구나 그날이 어떤 날인지 알고 있으면서 동시에 모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뮤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나오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다미르'처럼 아직 오지 않은 그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녀석은 갑자기 목소리를 나직하게 깔더니, 자기는 '그날이 오면 예비군 무기고를 털겠다'고 말했다. 나는 웃으며 '정말? 미친 놈!'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날'이 오면 정말 그래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내 은사 중 한 분은 나를 가리켜 '광주가 키운 마지막 아이'라고 하셨는데, 어찌보면 맞는 말씀이었다.

1980년 광주의 경험으로부터 채 10년도 경과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자라던 우리에게 '광주'란 지명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었다. 그 지명은 한 편에선 학살의 이름이었고, 다른 한 편에선 반란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에겐 '민주주의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당시 우리에게 민주주의란 '그날'만큼 멀고, 언제올지 알 수도 없는 대상이었다.

광주에 대한 기억은 한편에선 국민이 국가(더 정확하게 말하면 국가권력을 장악한 독재자)에게 자위권을 발동해 무기를 들고 항거한 기억이자 국가가 국민을 학살한 기억이기도 했다. '아, 그날이 그날이라면...' 이란 생각이 들자. 당시 17살이었던 나는 그에게 섣부른 약속을 하고 말았다.

"그날이 오면 나도 함께 할께."

이렇게 해서 나와 그 친구는 내란음모죄라는 공소시효도 없는 중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1987년의 찬란한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 우리는 그런 중대한 범죄음모를 꾸몄다. 어차피 시위나 데모는 고등학생인 우리에겐 이방인처럼 먼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해 6월이 지나고, 6.29선언이 있었다. 도저히 올 것 같지 않았던 '그날'이 도둑처럼 와버렸고, 우리의 무기고 탈취계획은 대신 그해 연말에 있을 대통령선거에 비록 선거권은 없지만 '공정한 대통령선거와 교육민주화를 주장하는 농성시위'를 통해 참여하자는 계획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해서 한 무리의 고등학생들이 그해 연말 명동성당의 콘크리트 바닥에서 서울지역고등학생운동협의회(나중에 연합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란 이름으로 농성시위를 치렀다. 결과는 허무했다. 그날은 올듯말듯 하다가 문턱에서 물러갔고, 우리는 그날이 오긴 온 건지, 아예 오지 않은 건지, 아예 올 수 없는 건지, 오지 않을 건지를 기다리며 10년, 다시 20년을 지나보냈고, 어느덧 불혹의 나이가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나는 공장, 공사판을 전전하다가 대학에 들어갔고, 나랑 함께 내란을 음모했던 친구는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 어쩌면 내가 일부러 찾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이듬해였던 1988년의 어느날 성당에서 신부님이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여기 모인 모든 이에게 강복하소서"란 말씀으로 미사를 끝마쳤고, 나는 성당 문을 막 나서던 찰나였다. 덩치가 곰만한 사내 두 사람이 문 앞에 서 있다가 아무 생각 없이 걸어나오는 내 배를 주먹으로 힘차게 쳤다. 아픈 건 둘째고 숨이 막혀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나동그라졌는데, 앞에 서 있던 형사가 말했다. "네가 전성원이지?" 나는 말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 LSY라고 알지?"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너! 걔가 월북한 거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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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놀라 눈을 떴을 때는 아직도 한밤중이었다. 하지만, 꿈이 너무 실감나고 무서워서 그 뒤로 아침이 될 때까지 뜬눈으로 지새웠다. 이건 괜히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자고 꾸민 것이 아니라 실화다. 나는 정말 그런 꿈을 꿨다. 다음날 학교에 나가 LSY에게 가봤더니 멀쩡하게 학교에 나와있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기억이 있다.

내란을 음모했던 탓인지 몰라도 학교 교련수업 시간 중 실시되었던 M1소총 분해결합시험에서 1등을 했다. 언젠가 쓸모가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그렇게 열심히 했던 것인지, 특전사 대위 출신으로 우리 학교 교련 선생으로 있던 이른바 '람보' 선생의 훈육 탓인지는 모르겠다. 들리는 풍문으로는 교련 과목이 폐지된 뒤로 그 선생님은 다른 과목을 가르치고 계시다고 한다. 어쨌든 체 게바라, 보구엔지압의 게릴라 전술 같은 책들을 한동안 열심히 탐독하거나 '스페인내전사연구' 같은 책들도 꽤 열심히 읽었다. 물론 이것이 내란을 음모하기 위해 그랬던 것인지 그때부터 이미 밀덕후의 자질이 싹튼 탓인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이 글이 이석기나 통합진보당 때문에 쓰는 글이란 오해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이 글은 그날이 오길 바랐으나 오지 않은 그날을 회상하며 쓰는 나의 자술서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해소되지 않을, 공소시효도 없는 범죄에 대한 나의 자술서니까...

* 만약 그때 내가 잘못되었더라면 이런 사진으로 나를 기억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구나.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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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로봇 - 01. 천공의 성, 라퓨타(로봇병사)

"리테 라토바리타 우르스 아리아로스 바르 네로리이르(우리를 구하라, 빛이여 소생하라!)"

이 주문이 기억나는 사람이라면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天空の城ラピュタ, 1986)"를 매우 인상깊게 본 사람일 게다. 물론 저 주문을 몰라도 인상적으로 보았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천공의 성 라퓨타"는 내가 좋아하는 아일랜드 작가 중 한 명인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여행기" 중 3부에 공중에 떠 있는 섬 '라퓨타'의 에피소드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조나단 스위프트를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당시 스위프트의 정치적 입장은 '보수주의'였다.

언젠가 진중권 선생이 보수주의자의 풍자에 대해 이야기하며 "스위프트는 모던의 과학과 모던의 정치를 신랄하게 풍자했으나, 역사의 흐름은 외려 그의 풍자를 우습게 만들어버렸다.이는 기독교의 목사이자 보수당의 당원으로서 스위프트가 가진 한계일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스스로 우스워지는 게 보수적 풍자의 운명이다. 하지만 오늘날 비판의 힘을 잃은 스위프트의 풍자는 당대를 넘어 문학의 고전으로 남았다. 나 역시 스위프트처럼 정치적 풍자를 한다. 사실 진보적 태도를 취하기만 하면 널린 게 풍자할 거리다. 하지만 그 풍자가 당대를 넘어서려면 정치적 올바름만으로는 부족하다. 문학의 본질은 정작 그 부족한 부분에 있다."고 말한 바 있는데, 나는 진중권이 오늘날 스위프트의 풍자는 비판의 힘을 잃었다는 지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풍자가 당대를 넘어서려면 정치적 올바름만으로는 부족하다. 문학의 본질은 정작 그 부족한 부분에 있다"는 지적에는 동의한다.





스위프트는 "걸리버 여행기"를 통해 실용에는 둔감한 채 공리공론(空理空論)에만 집중하는 라퓨타인들을 통해 당대의 과학 풍토를 풍자하고 있는데, 어떤 풍자들은 이후 실제 과학으로 입증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스위프트는 라퓨타 사람들이 화성 주위를 돌고 있는 두개의 위성을 발견하기도 했다고 썼는데, 실제로 이 위성들은 책이 씌여진지 150년 후에야 발견되었다.

어쨌든 라퓨타 사람들은 제대로 된 건물이나 옷은 만들어 입지 못했는데, 그 이유가 옷 치수를 재는데 줄자대신 천체고도 측정기인 사분의나 나침반 같은 것들을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거다. 이곳의 과학자들은 허황된 공상에 빠지는 것을 즐겨하기 때문에 이처럼 공상에 빠진 사람들을 전문적으로 깨워주는 직업이 있을 정도라고 기술하고 있다.

스위프트가 현실정치적 입장에서는 보수주의자였을지 몰라도 그의 문학이 그렇게 협소한 지점에만 머물렀다면 "걸리버 여행기"는 잠시 읽혀지다가 사라졌거나 그저 그런 판타지쯤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스위프트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걸리버 여행기"의 풍자는 성공했고, 고전의 지위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라퓨타는 남성위주의 가부장적 사회로, 권력의 정점에는 매우 포악한 왕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섬 아래 위치한 발니바르비를 식민지배하듯 하고 있는데, 왕은 때때로 거대한 섬(라퓨타)의 그림자를 이용해 발니바르비의 반란 지역에 해를 가리거나 비를 막거나 돌을 아래로 굴러떨어뜨리겠다는 협박으로 이 지역을 통치해왔다. 이것은 영국에 대한 아일랜드의 지배를 풍자한 것이지만 오늘날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지배 방식과 비견해봐도 풍자가 빛을 바래지 않는단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통치질서에 있기 때문에 이곳의 여성들은 라퓨타를 떠나고 싶어한다. 하지만 아내들이 아무리 섬을 떠나 육지를 방문하고 싶다고 요청해도 대개는 승인되지 않는다. 이유는 한 번 떠난 여성들이 단 한 번도 자발적으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 아, 오늘 쓰려고 했던 내용은 원래 이게 아니었지. ㅋㅋ 그냥 오늘은 스위프트와 걸리버여행기 그리고 천공의 성 라퓨타의 로봇병에 대한 이야기 맛보기 정도로 해두자. 벌써 에너지 달린다. ㅋㅋ 후속 이야기는 생각나면 또 언젠가...

http://youtu.be/5Hmn5ruzp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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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김창남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공부란 콩나물을 기르는 일과 같아서 구멍난 시루에 매일같이 물을 주면 물이 다 빠져나가지만 그래도 콩나물은 자란다고 하셨었지. 공부란 '스며듬'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1.
춘추시대 거문고의 명수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의 일화를 사람들은 지음이란 두 글자로 기억한다. 백아가 거문고를 들고 높은 산에 오르고 싶은 마음으로 이것을 타면 종자기는 옆에서, "참으로 근사하다. 하늘을 찌를 듯한 산이 눈앞에 나타나 있구나"라 하였고, 백아가 흐르는 강물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기가 막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눈앞을 지나는 것 같구나"라며 감탄해 마지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를 부수고 줄을 끊은 다음 다시는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세상에 다시는 자기 거문고 소리를 알아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2.
거북이와 토끼의 달리기 우화(寓話)를 놓고 거북이가 어떻게 토끼를 이길 수 있느냐고 따지는 사람은 제 얕은 앎에 빠져 정작 핵심이 되는 우화의 중요한 교훈을 얻을 생각은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우화’라는 담화체제(談話體制)가 가진 고유한 구조를 먼저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과의 대화는 맥이 빠질 뿐만 아니라 상대의 소갈머리에 갑갑해진다. 하지만 잘못 들어선 길이 지도를 만든다는 말도 있듯 잘못된 해석, 오독(誤讀)이 없었다면 문학과 예술은 빛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3.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의 일화에서 일품의 거문고 솜씨를 지닌 백아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예술가는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동양적인 의미에서의 예술, 자기완성의 길만을 외롭게 고집해 나아가는 가는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예술관이 아니었을까. 혼자 쓰고, 혼자 읽는 글이 아닌 다음에야 오독의 위험은 피할 수 없는 것이겠다.

클래식 음악에서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파 등 고전 시대 이전의 옛 음악을 그 시대의 악기와 연주법으로 연주하는 것을 가리켜 일명 원전연주, 정격음악(authentic music)이라 부른다. 현대적인 피아노가 아닌 하프시코드, 바이올린이 아닌 비올로 연주하여 옛 소리를 재현해내는 것이다.

과연 이것은 재현일까? 우리는 예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재간이 없다. 작곡가 자신도 자신의 음악을 그대로 재현할 수 없으며, 화가의 작품도 결국 빛에 의해 반사되는 색감에 따라 매순간 다른 색으로 빛나게 되며 바라보는 이의 시선이나 감정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끔 타인의 글 읽기에 대해 그것이 설령 내 글에 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의미를 명확히 규정지으려 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게 읽었다면 그것이 그에겐 진실일 수 있기 때문이다.

4.
백아의 연주를 홀로 알아들었기에 종자기를 지음이라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백아의 연주는 듣는 이에 대한 배려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던 연주였으리라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예술에서 창작을 일 삼는 사람이란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타인의 시선 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집중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이 문제는 쉽게 정리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대중에게 인정받기 위한 예술의 추구란 한 마리 여왕벌을 향해 구애의 몸짓으로 날아오르는 무수한 수벌들의 허무한 비행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여왕벌의 사랑을 얻는 것은 가장 높이 날아오른 단 한 마리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떨어져 일생을 마치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예술의 세계에서 명성을 얻는다는 건 정자(精子)가 사람 되는 것처럼 힘든 일이겠지요. 더군다나 그 명성이 당대가 아닌 백 년 뒤나 오백년쯤 뒤에도 여전히 그 이름을 남긴다는 건). 그렇다고 이 수벌들의 비행이 허무할지는 몰라도 꿀벌사회의 체제를 생각했을 때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게다.

5.
가끔 세상살이가 무척 허무해지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곤충의 세계를 상상해보곤 한다. 일개미들의 행진, 수벌의 비행은 허무하지만 무의미하진 않다고... 콩나물 시루가 밑 빠진 독이라 그 위로 쏟아 붓는 물줄기들은 죄다 밑구멍으로 빠져나가지만 습기를 머금은 콩들은 어느새 자라나서 시루를 덮어 둔 묵직한 백과사전을 밀어 올리듯이... 이 허무를 반복할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 누구라도 콩나물쯤은 키울 수 있다고....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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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밤하늘에서 펼쳐진 프롭전투기들의 사투


나는 항공기 매니아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내가 뭐는 매니아가 아니냐는 반문이 스스로 들어서 좀 웃었다. 얼마 전 백일장을 치른 뒤 백일장 심사가 있었는데 김영승 시인이 오더니 반갑게 웃으며 당신도 항공기 매니아인데 내 블로그를 즐겨 보고 있다고 말씀하셔서 약간 겸연쩍은 적이 있었다. 만약 기회가 닿는다면 김영승 선생과 항공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봐도 재미있을 듯 싶다. 어쨌든 난 여러 방면의 매니아이지만 그 중에서 '항공기도 매니아'인데, 항공기 중에서도 특히 프롭(프로펠러)기 매니아다. 프롭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현재는 전쟁 무기로서의 효용 가치가 없는 종류라 정말 순수하게 좋아한다고 말해도 내 양심에 그렇게 걸리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혹 여전히 현역 군사 무기로 이용되는 무기가 있으니 이제부터 소개하려고 하는 "AN-2"기이다.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 그러니까 정확히는 국민학교 다닐 때 학교 정문 게시판에 민방위 사이렌 안내판과 더불어 적기의 실루엣을 그려놓고 이런 항공기가 날아오면 가까운 군부대에 신고하거나 방공호로 대피하라는 적기 식별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80년대까지는 학교마다 붙어있었던 것 같은데 최근엔 어떤지 잘 모르겠다. 이곳에도 AN-2기에 대한 제법 상세한 안내가 있었는데, 사실 이런 종류의 비행기들은 대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특수 임무용(적진 정찰 및 탄착 관측, 구조 및 물자 투하 임무)으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영국 웨스트랜드 라이산더(Westland Lysander)같은 기종인데 유고슬라비아 지역의 빨치산을 지원하거나 특수요원들을 적 후방으로 실어나르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라이산더의 경우 동체는 금속골조에 캔버스 천으로 외피를 둘러싸고 있어 레이더에 잘 포착되지 않으며 고도15m까지 이르는 이륙거리가 불과 250m(축구장 두개 반 정도의 길이)에 불과했다. 아마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레지스탕스가 등장하는 영화 중 야간에 몰래 내리는 비행기를 본 적이 있다면 바로 이 비행기라고 보면 된다.





소련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중 매우 뛰어난 항공기들을 많이 개발했는데, AN-2기는 ANTONOV BYREV 설계국에서 1940년 초부터 설계를 시작하여 1947년 8월 최초의 시험비행을 실시하였고, 1948년부터 양산 체제를 갖추고 대량 생산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같이 크지 않은 나라에서도 군 내부 수요로 연락기 등 프롭 항공기의 필요성이 요구될 때가 있는데(물론 최근엔 헬리콥터가 일반적이긴 하다) 러시아 같이 땅덩이가 큰 나라에서 수송기 혹은 연락기 용도로 개발되었었다. 어쨌든 당시는 동서냉전 시대였으므로 소련이 개발한 무기체계는 곧 이웃한 사회주의 블록의 여러 국가들로 이전되었는데, AN-2의 경우 중국은 1957년부터 Y-5(YUN SHUJI-5)란 이름으로 생산되기 시작했고, 1960년엔 폴란드 역시 생산면허권을 획득해서 현재까지 생산하고 있다.

"안토노프 AN-2는 단발엔진을 갖춘 복엽 수송기로, 시속 160km의 저속·저공비행이 가능한 경수송기이다. AN-2는 실내 공간을 넓게 하기 위해 세미-모노코크 구조이며, 기골과 표피는 가벼운 합금의 금속으로 제작되었고, 상하날개는 레이더 파를 흡수하는 도료로 피복된 특수천(?)으로 제작되었다. 200m의 짧은 활주로에서도 이착륙이 가능하며 기상 관측 사진 촬영, 낙하산 훈련 및 소규모의 병력 투입 등에 운용된다"고, 대체로 이렇게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 이 비행기의 외피 역시 캔버스천이고, 도료를 특수도료를 발랐을지는 모르겠지만, 특수 도료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이처럼 저속의 비금속제 항공기들은 레이더에 잡히더라도 큰 새 정도의 크기 정도로 밖에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이른바 북한이 가지고 있는 '스텔스' 항공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이 역시 비대칭무기인 셈이다. 북한의 재래식 소형 잠수함을 놓고 그렇게 평가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동안 우리나라에서는 AN-2의 공포를 과대평가(?)하여 당장이라도 AN-2에 탑승한 북한군 특수부대가 서울 한복판을 아수라장으로 만들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일부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정도 이상으로 과대평가된 측면도 없지 않다. 영화를 많이 본 분들은 알겠지만 상대가 무시무시해야 그들과 싸워 이기는 우리 편이 더 위대해보이는 것처럼, 국방안보 분야에 있어서도 자칭타칭 이 분야 전문가들이 상대방의 무기체계를 과도하게 높이 평가하는 경향은 언제나 있어왔다. 그 이유는 국방안보 분야는 언제나 새롭고 비싼 무기체계를 도입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AN-2의 위협에 대적한다는 이유로 휴즈사로부터 500MD헬기를 도입했고, 최근 아파치 헬기 도입 근거 중 하나로도 이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맥락이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올해로 한국전쟁 휴전 60주년이지만 한국전쟁은 항공전사에 있어 제트기 간의 공중전이 벌어졌던 최초의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은 소련의 항공기 개발 능력을 비롯해 여러 방면에서 근거 없는 자신감에 넘쳐 있다가 몇 차례 커다란 충격에 휩싸이는 데,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소련이 개발한 미그(Mig)15와 미그21기의 놀라운 성능 때문에 놀랐고(미그 쇼크), 소련이 독자적인 핵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로젠버그 부부 사형), 소련의 우주기술(스푸트니크 쇼크)에 놀랐다. 그러나 실제 전사를 살펴보면 한국전쟁 당시 이루어졌던 제트기 간의 공중전은 물론 베트남전에서도 미국은 사실상 압도적인 우세였다. 그런데 이처럼 압도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미국 공군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일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은 야간 폭격을 주장했고, 미군은 주간 폭격을 고집했는데 한국전쟁 당시에도 제공권은 거의 완전히 UN(미)군 측에 있었고, 미군의 대규모 폭격능력은 마오쩌둥의 아들을 참전 일주일만에 전사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처럼 대낮의 하늘은 미공군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야간의 하늘은 북한이 압도적 우세라고 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미군을 골치아프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제공권을 빼앗겨 주간에 작전을 펼칠 수 없었던 북한 공군은 주로 야간을 이용해 동해안의 강릉비행장을 비롯해 백령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야간 폭격 작전을 펼쳤다. 물론 주요 목표는 미군의 공군기지가 밀집해 있던 김포와 평택 등 서부전선 지역이었다.

북한의 남한 야간 공습은 1950년 11월 18일 춘천 소양강 근처의 미군 부대를 공습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1953년 7월 16일 까지 계속되었는데, 가장 활발할 때인 1952년 5월에는 한 달 동안 50여기가 남한 상공에 잇따라 출현하기도했다. 북한 야간폭격기들은 미군 기지를 목표로 했지만, 1952년 6월 15일에는 당시 대통령 이승만이 머물고 있던 경무대를 폭격한 적도 있었다. 당시에는 다행히 별다른 피해는 없었지만 이후 옛 청와대 건물에는 그물 모양의 위장망이 설치되었는데, 박정희 시절에 가서야 제거되었다. 하마터면 전쟁 중에 대통령 유고라는 큰 일을 치를 뻔 했지만 이것은 실제 전과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실제로 커다란 피해를 입기도 했는데, 1953년 6월 15,16일 밤에는 북한 공군기 17기가 야간에 침투해 인천의 니군 유류 저장 시설을 전소시켜 버렸다(당시 오백만 갤런에 이르는 엄청난 연료가 손실). 또 당시 미국의 최신예 주력전투기였던 F-86 세이버의 기지로 이용되던 수원 비행장을 야간 기습해 세이버 전투기 9대를 파괴하기도 했다.





야심한 밤이면 덜덜거리는 엔진 소리를 내며 날아오다가 기지 상공에서 엔진을 끄고 슬그머니 침투해 폭격을 하고 사라졌기 때문에 기지 방공을 책임진 미군들은 이들을 ‘야간 점호 적기(Bed time check charlie)'라고 불렀다. 간혹 제트기를 가진 미 공군이 저속의 프롭기들을 격추하지 못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할 수도 있겠으나 제트기는 기본적으로 고공, 고속 성능을 위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목표물을 지나칠 수 있었는데, 당시 북한의 전투기들은 저속으로 저공을 비행하기 때문에 이들을 격추시키기엔 미 공군 제트 전투기들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문제였다. 결국 미 공군은 더이상 전쟁에 쓰일 일이 없을 거라고 여겼던 과거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야간 전투기들을 다시 불러들였고, 북한 공군과 심야의 하늘에서 물고 물리는 치열한 공중전을 벌여야 했다. 이것이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의 밤하늘에서 펼쳐진 프롭전투기들 간의 사투였다.

사진1) 웨스트랜드 라이산더, 2)AN-2, 3)라보치킨 La-9, 4)Yak-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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