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주의 체제의 문제는 단지 정치권력의 집중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국민 개개인의 심성구조에 심대한 정신적 병리현상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종종 한국 남성들의 권위주의적 성격의 핵심은 그들의 인생이 파란만장한 현실 앞에서 물위에 동동 떠있는 일엽편주처럼 삶의 모든 것이 외부의 힘(역학관계)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기 때문인데, 그 때문에 인간으로서 자신의 내면적 가치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만족시키는 감정을 보람이라고 했을 때 한국 남성들의 보람이란 내면적인 것이 아니라 외재적 가치 다시 말해 늘 자신의 존재 바깥에 있는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한국인들이 체면을 중시하는 까닭을 유교적 봉건주의에서 찾는 분석에 대해 내가 동의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유교적 봉건주의는 체면을 중시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면의 염치도 따지는데 반해 우리나라의 현실에 나타나는 현상의 대부분은 본질적으로 염치는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대단히 강력한 듯 보이지만 권위주의적 성격이란 속성상 외부에서 몰아치는 격랑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보호본능이 본질이므로 외부의 변화에 대해 늘 민감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취약성을 지닌다. 겉으론 강해보이지만 허약하며 텅빈 것이 한국 남성들의 내면 세계 풍경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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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취업 포털 잡링크에 따르면 대학생을 대상으로 국적 포기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결과, 45.8%가 ‘필요하다면 국적을 포기할 수 있다’고 응답했다. 이화여대 학보사가 광복 60주년을 맞아 2005년 9월 이대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출생 전 자신의 의지로 조국을 선택할 수 있다면 우리나라를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62%의 학생이 선택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우파들은 이런 문제를 접하면 "해방전후사의 인식"처럼 좌파(?)들의 자학사관이 우리 청년 세대가 조국의 가치를 낮게 보는 원인이라고 지적(질)하겠지만, 현실로 돌아와 가만히 우리들 자신의 어린 시절을 한 번 돌아보면 그 원인을 금방 찾을 수 있다.


내 자식을 늘 남의 집 잘난 자식들과 비교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자식)는 늘 자기 부모가 남의 집 잘난 부모가 아닌 걸 한탄하며 성장하는 법이니까.



물론 이 잘 생긴 '조국(교)'이 그 '조국(mother country)'은 아니다. 조국을 상징할 만한 이미지 찾기가 어려워서 그냥...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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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역대 대통령들 중에는 이상한 사람, 별난 사람도 많이 있었지만 신념이나 정책이 서로 모순된 가운데에도 기묘한 조화를 이루어 결국 국민에게 사랑받는 대통령이 된 사람도 있었다. 20세기를 미국의 세기라고도 하는데 바로 그 20세기를 예비한 대통령이 바로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였다.

20세기가 막 시작될 무렵 미국은 오늘날의 중국이 그러하듯 이미 영국을 대신해 세계의 공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당시 생산되던 공산품 가운데 절반을 미국이 생산해낼 정도였다. 문제는 미국이 국가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었어야 할 많은 제도가 미비한 나라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시의 미국엔 소득세도 없고, 독점제한도 없고, 노동3권도 보장되지 않는 나라였다.

오늘날 자선과 복지의 대명사로 불리는 명사들, 카네기, 록펠러, J.P.모건, 밴더빌트, 굴드 등이지만 당시 이들을 가리키는 표현이 ‘강도귀족(Robber Barons)'이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듯 매우 좋지 못했다. 경제성장의 그늘 아래 경제력 집중과 빈부격차, 환경파괴 등은 미국이 신흥강대국으로 성장해가는 것을 위협할 수 있는 위험요소들이었다.

T.루스벨트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진보주의자라고 할 수 없는 대통령이었지만 그는 미국을 혁신하는데 성공한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먼로독트린’을 새롭게 해석하여 미국의 팽창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는데 이 때문에 그의 대외 정책을 가리켜 ‘곤봉외교’라 불렀다. 강대국이 되기 위해선 강력한 해군력을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는 미·서전쟁 당시엔 직접 의용군(Rough Riders)을 이끌고 참전하는 등 대외적으로 강력한 제국주의자였지만 국내 정치의 측면에선 ‘반재벌 독점 해체’라는 대단히 진보적인 정책들을 강력하게 추진해 나갔다.

재미있는 건 그가 매킨리 대통령의 암살로 부통령 신분이었다가 대통령이 된 인물이었다는 거다. 매킨리 대통령은 재벌들에게 특히 인기가 좋았는데 이것은 그가 친재벌 정책으로 일관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강도귀족들은 정치권력을 자신들의 시냐로 삼기 위해 정치인들에게 검은 돈을 제공했는데, T.루스벨트 역시 이들이 제공한 정치 자금 덕분에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당선에 성공한 뒤에는 입을 싹 씻고, 강력한 재벌 개혁을 추진했다.

이에 격분한 강도귀족 중 한 사람은 "우리가 저 개새끼에게 먹이를 주었는데, 저놈은 우리 손을 물었다"고 말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어쨌든 재벌들 입장에서 보면 은혜도 모르는 인간이었던 T. 루스벨트의 이런 노력 덕분에 오랫동안 유명무실화되어 있던 독점금지법이 되살아나고 록펠러가 이끄는 스탠더드 오일을 해체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루스벨트는 “법 위에 사람 없고, 법아래 사람 없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법에 복종하기를 요구할 때 우리는 그의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법에 대한 복종은 권리로서 요구되는 것이지 특혜로서 부탁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대외정책에서 팽창정책을 추구한 제국주의자였지만 1906년 러일전쟁을 중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우리 입장에서 보자면 입맛이 씁쓸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있었다)하였고, 엄청난 사냥광이었지만 세계 최초로 국립공원 제도를 만들어 환경보호에 앞장서기도 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테디 베어’의 원조가 테디(시오도어의 애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서 나온 것이다. 어느 날 대통령 수행원들을 이끌고 사냥에 나섰다가 어미 곰을 잃고 홀로 남겨진 어린 곰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주변에서 총으로 쏴서 잡으라고 했지만 총 쏘기를 거부한 일화가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이것이 이른바 '테디 베어'의 시초가 되었다.

20세기 초엽의 미국은 오늘날 대한민국 이상으로 강력한 재벌들과 금권정치가 버티고 있는 나라였지만 T.루스벨트는 여론과 언론의 도움을 받아 강력한 재벌개혁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T.루스벨트 역시 다른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었고, 그 또한 언론을 싫어해 언론을 향해 '거름더미나 뒤지는 자들'이라고 비난했지만 그는 바로 그 여론의 도움을 얻어 재벌개혁에 일정 부분 성공할 수 있었다. 낭만적인 기질이 넘쳤으나 또한 권력의지에 불타는 현실 정치인이었던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영화 중 하나가 1975년 존 밀리어스 감독이 만든 “바람과 라이온(The Wind And The Lion)”이다. 숀 코넬리, 캔디스 버겐 주연의 영화였는데 T.루스벨트 역에는 브라이언 키스(Brian Keith)가 맡아 연기했었다.

21세기에도 우리는 여전히 정부가 나서 국가의 성장 동력을 찾고, 정부가 정책으로 이를 뒷받침해 끌어나가는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데, 20세기 초엽 미국은 재벌해체와 재벌개혁을 통해 세계의 패권국가로 성장하는 기초를 닦았다. 만약 내가 대국굴기(大國屈起) 같은 시리즈를 만든다면 이런 이야기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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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은 관심과 잔소리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자신의 잔소리를 관심이라고 착각하는 일도 종종 있는데,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이들을 유심히 살피다보면 나는 그것이 혹시 상대가 늘어놓을지 모르는 잔소리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날리는 일종의 예방책, 아이들 말을 빌면 '선빵'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전적 의미로 잔소리란 "쓸데없이 자질구레한 말을 늘어놓음, 또는 그 말, 필요 이상으로 듣기 싫게 꾸짖거나 참견함, 또는 그런 말"이라고 한다. 한자어로는 자질구레할 '쇄', 말씀 '언'을 써서 '쇄언(瑣言)'이라고도 한다. 그에 비해 관심(關心)이란 "어떤 것에 마음이 끌려 주의를 기울임. 또는 그런 마음이나 주의"를 일컫는 말로 관계할 '관', 마음 '심'을 쓴다.

이때 재미있는 건 '관(關)'이란 한자의 뜻이다. 본래 이 말은 산해관(山海關), "삼국지"에서 관우가 다섯 개의 관문을 지키는 장수를 참하고, 돌파하였다는 뜻,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 등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국경(國境)이나 국내(國內) 요지(要地)의 통로(通路)에 두어서 외적을 경비(警備)하며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이나 화물(貨物) 등(等)을 조사(調査)하던 곳"을 의미했다. 우리는 관심이란 말을 잔소리에 비해 대체로 좋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만 그런 의미를 살펴가며 따져보면 관심이란 말 역시 무서운 말이기도 하다.

'관(關)'이란 한자에는 '관계하다'는 뜻 말고도 '닫다, 가두다, 감금하다, 빗장'의 뜻도 있다. 잔소리란 대체로 상대가 눈에 보일 때 보이는 것, 생각나는 것을 말하고 쏟아내는 것이기 마련이라 시야에서 상대가 사라지면 대개 잔소리도 함께 사라진다. 그러나 관심이란 상대가 보이지 않을 때도 생각하고,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 헤아리는 것이기에 이때의 마음은 그 마음을 품은 사람의 상태에 달려있게 된다. 관심이란 마음의 관계를 말하지만 때로 자신의 마음속에 상대를 가두는 일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잔소리도 피곤하지만 관심도 지나치면 상대를 피곤하게 만들 수 있다. 관심도 마음의 일이라 좋은 의미에서의 관심이라면 마음을 닫아두지 말고, 당신의 마음속에 상대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열어둘 일이며, 지금의 그가, 그 사람이 하는 일을 헤아려주되 계산하지 않고, 잘 살피되 비난하지 말고, 좋아해주되 넘어서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람과 관계 맺는 마음, 좋은 관심(關心)을 품는 법일 게다. 즉물(卽物)하되 대자(對自)할 수 있어야 좋은 관계도 맺을 수 있다. 



에두아르도 아로요(Eduardo Arroyo, 1937 ~)
Gilles Aillaud Looking at Reality through a Hole Next to an Indifferent Colleague

(무심한 동료 곁에서 구멍을 통해 현실을 관찰하는 질 아요,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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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오키나와 유랑 중인 우리 권혁태 교수님(황해문화 편집위원)이 그리워져 오래전에 즐겨찾기 해놓았던 권혁태 선생님의 블로그에 갔더니 블로그 제호가 "몽상가의 세상이야기"라 혼자 빙긋 웃었다. 선생님께 "Jeon Sungwon ^^ 오랜만에 예전의 선생님 홈피를 다시 방문해서 살펴봤어요. 블로그 이름에 들어있는 '몽상가'란 호명 방식을 보며 문득 여러 생각이 들더라구요."라고 했더니 "권혁태 Jeon Sungwon '몽상가'라는 호명에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블로그 다시 할까 생각 중입니다"라고 답을 하셔서 어제 퇴근 무렵에 잠깐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자문자답(自問自答)해 보았다.

'몽상가'와 '세상이야기'는 그냥 보면 그럭저럭 어울리는 듯 보이지만 사실 에리히 프롬의 견해를 빌리면 그다지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는 작명이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무의식적으로는 절망하면서도 낙관주의의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현명한 것은 아니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의 경우 모든 환상을 버리고 실제적인 현실주의자가 되어 어려움을 완전히 인식하였을 때 비로소 그는 성공할 수 있다. 이러한 침착성이 눈뜬 공상가와 꿈꾸는 몽상가를 구별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에리히 프롬의 이야기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아마도 몽상가와 공상가에 대한 이야기 중 우리에게는 가장 익숙한 이야기일 게다.

뒤이어 그는 "꿈꾸는 몽상가"는 자신의 행복을 바라면서도 어떠한 것도 실천에 옮기지 않는 인간들이나 실천 없이 마냥 행복을 바라는 무능한 인간들이고, "눈뜬 공상가"는 현실과 자신의 처한 상황을 직시하고 그 상황에 맞게 방법을 찾아 해결하려고 하는 적극적인 인간 그리하여 현실을 자신의 의지대로 바꾸는 합리적인 인간들이라고 말하면서 공상가를 긍정하고, 몽상가를 부정적으로 정의한다.

나는 에리히 프롬의 의견에 별로 동의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야기에서 내 나름의 이야기로 출발해 보면 이렇다.

(무)의식적으로는 현실에 대해 절망하면서도 겉으로는 낙관주의의 가면을 쓰고 현실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현실주의자'이고, 현실주의자와 마찬가지로 현실에 절망하고, 이것을 드러내지만 적응도, 실천도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 '냉소주의자', 현실에 대해 절망하면서도 자신이 일단 의식적으로 노력하면(낙관하여)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에리히 프롬은 '눈뜬 공상가'라고 했지만 나는 이들을 다른 말로 '혁명가' 혹은 '급진주의자'라 부른다.

에리히 프롬은 공상가와 몽상가의 차이를 환상의 극복 유무에 두었는데, 그에 따르면 눈뜬 공상가는 환상을 극복한 사람이고, 몽상가는 환상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몽상가란 현실에 절망하지만 루쉰(魯迅)의 말 "絶望之為虚妄、正与希望相同(절망은 허망하다. 희망이 그러한 것처럼)"처럼 손쉽게 희망(낙관)이나 절망(비관)하거나 현실에 적응하거나 이를 개선하려는 실천에 나서는 대신 바라보는 사람(조력자)이다. 몽상가들은 그들과 어느 면에선 흡사하지만 너무나 다른 존재인 '눈뜬 공상가'를 대하는 방식(온도차)을 통해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아마도 이것은 냉소주의자와 몽상가를 구분하는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차가운 몽상가라 할 수 있는 냉소주의자는 ‘눈뜬 공상가’들도 냉소의 대상으로 삼지만 몽상가들은 ‘눈뜬 공상가’들의 낙관이 그들의 속도와 가벼움으로 인해 아예 허공으로 날아가지 않도록 잡아준다. 에리히 프롬은 몽상가들의 환상을 부정적으로 묘사하지만, 나는 이 환상이야 말로 “위대한 환상(La Grande Illusion)”이 아닐까 싶다(혹시 선생님이 장 르누아르 감독의 이 영화를 아직 못 보셨다면 권하고 싶은 영화 중 하나입니다).


*이 영화에 대해 설명하면 그 순간 모든 함의도 사라져버릴 거다. 


비록 권혁태 선생님은 내게 한 번은 '또라이', 또 한 번은 '싸가지'라는 충격적인 정의를 내리고 ‘껄껄’ 웃었지만(앞의 말은 성공회대 미디어 특강 강사로 초대된 나를 학생들 앞에서 그렇게, 뒤의 말은 오키나와 가기 전에 가졌던 술자리에서... 저렇게 말해놓고 두 번 다 특유의 껄껄 웃음을... ㅋㅋ ), 나는 권혁태 선생을 떠올리면 68혁명 당시 거리의 민중들이 벽에 써놓았다는 낙서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Don't liberate me! I'll take care of that.
(나를 해방시키지마! 내가 알아서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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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과거의 기억보다 기록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 있을 때마다 그에 대한 기록들을 되짚어 보곤 한다(물론 그와 똑같은 이유에서 나에 대한 기록이 남지 않길 바라지만).
 
유시민이 정계 은퇴를 선언했고, 당분간일지 영원한 것일지 모르겠으나 이제 우리 곁에 정치인 유시민은 없다.


고백컨데 나는 정치인 유시민을 단 한 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였고, 그런 나의 선택에 대해서는 지금 일말의 후회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005년 내 홈피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에 퍼날랐던 그의 글을 다시 읽으며, '유시민'이란 한 자연인에게 다시 한 번 연민과 애착을 느낀다. 비록 당신을 같은 편이라 여긴 적은 없으나 종종 당신과 같은 편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왔으므로...



** 글이 좀 길어서 읽기에 지루하다면 맨 마지막 문단 "우리 모두는 구체제의 산물이다" 편만 꼼꼼이 읽어봐도 무방하리라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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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우린 모두 앙시앙 레짐의 자식들” 
정혜신-최장집 글에 정면 반박 나서

유시민 의원이 6일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글을 올려 정혜신 박사와 최장집 교수를 향해 날선 비판의 칼을 겨눴다. 두 사람은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연정론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개진해온 대표적 논객들이다.
유 의원은 지난 5일 보좌진에게 최장집 교수가 최근 펴낸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개정판을 급히 구해오도록 했다. <한겨레>에 보도된 최 교수의 연정론 비판을 읽고 책의 원문을 읽어보려는 것이었다. 점심 무렵 책이 도착했다. 그는 책 뒤쪽에 실린 35쪽 분량의 ‘개정판 후기’를 펼쳐들고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그리고는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저녁 무렵 ‘오마이뉴스’에 정 박사의 글이 떴다. 유 의원은 그 글을 읽고는 정 박사를 먼저 과녁에 올렸다. <한겨레> 정치부 임석규 기자

다음은 유 의원이 쓴 글 전문이다.

우리 모두가 앙시앙 레짐의 자식입니다
- 정혜신 박사와 최장집 교수께 드리는 글 -

싸가지 없는 유시민


“똑똑해. 시원시원하고. 그런데 싸가지는 없어.” 어떤 여론조사 전문가께서 내게 전해 준 정치인 유시민의 대중적 이미지다. 내 면전에 대놓고 “재승박덕”이라는 평을 해준 사람도 여럿 있다. 그렇다. 내게는 문제가 있다. 오죽하면 같은 당 국회의원이 “저렇게 옳은 말을 저렇게 싸가지 없이 하는 법을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다”며 한탄을 했겠는가.

나는 무엇인가? 직업이 국회의원이고 집권당 지도부의 일원이니 정치인임에 분명하다. 그런데도 나는 종종 시사평론가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내가 생각해 봐도 분명 그런 면이 있다. <오마이뉴스>에 뜬 정혜신 박사의 글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내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 정박사는 내가 평소 몹시 좋아하고 존경하는 전문가이다. 그가 나를 분석하고 비판한 글에는 당사자로서도 공감하고 인정할 대목이 아주 많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쓴 글이라 하더라도 나는 같은 평가를 할 것이다.

나는,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종종 냉소적인 사람이 된다. 특히, 도둑이 몽둥이를 들거나 똥 뀐 놈이 성을 내는 사태를 볼 때, 그렇지만 치밀어 오르는 분노의 감정을 표현하면 안 되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억눌러야만 할 때, 나는 특히 냉소적인 사람이 되곤 한다. 텔레비전에 나와 토론의 목적과 흐름은 완전히 무시하고 미리 준비한 대로 대통령 인신공격만 해대는 한나라당 국회의원, ‘생방송의 특성을 이용해 악의적인 선동을 한다고 내가 생각하게 된 방청객’ 등을 향해 차가운 독설을 내뱉을 때, 그런 때 나는 거의 언제나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누르느라 용을 쓰는 중이다. 이것, 고쳐야 할 나쁜 습관이라는 걸 안다. 그런데 잘 안 고쳐진다. 내가 우리당 안에서 욕을 먹는 것도 주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매번 뒤돌아서서 후회하지만, 그렇게 냉소적인 반응이라도 내보내지 않으면, 분노를 지나치게 억누른 나머지 그만 암세포를 총궐기시키게 될 것만 같다. 시간을 내서 심리상담을 받아보아야 하겠다.

나는 더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이것이 오로지 못된 성격 때문에 생기는 일은 아니다. 정혜신 박사가 아마도 잘 모를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나로 하여금 이런 못된 성질을 온전히 잠재우고 인격을 수양해야 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또 있다. 지난 3년 동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노무현 후보와 노무현 대통령을 옹호한 나를 두고 안타깝다고 하는 지식인들이 공히 알지 못하는 지점이다. 정혜신 박사의 고마운 지적을 들은 김에, 연정론이니 뭐니 하는 정치적 쟁점에 대한 나의 주장을 실사구시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방해하는 이 골치아픈 장애물을 우선 좀 치우고 보자.

논리적으로 격렬하고 야박하게 부딪치는 나의 소통방식에 대한 정혜신 박사의 비판적 분석과 충고는 “객관적으로 볼 때” 옳은 지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이런 지적을 받아들여 내 어법이나 행동방식을 교정할 의향이 없다. 지나쳐서는 안되겠지만, 스타일 자체를 바꿀 필요는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다. 몰라서 못 고치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또는 알기 때문에 고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런 충고를 하는 동기는 보통 두 가지인 것 같다. 첫째, 집권당 지도부에 속한 유명한 정치인은 언제나 책임성 있게 국민을 존중하고 따뜻이 감싸 안는 게 옳다고 생각해서. 둘째, 앞으로 ‘더 큰 일’을 하려면 의견이 다른 사람도 포용하는 넉넉한 품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아마도 인간 유시민을 아끼고, 정치인 유시민에게 무언가를 더 기대하기에 내놓는 주문일 것이다. 나는 첫 번째 동기에 따른 충고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두 번째 동기에 따른 주문에는 응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은근히 반발하고 싶다. 나는 정치를 바꾸려고 정치에 들어왔을 뿐이다. 정치인으로서 꼭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 정박사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을 아마 모르지 않나 싶다. 정박사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것이 정치를 바꾸는 바로 그 일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 정말 그런 것인지는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대통령의 선도투쟁

우리당 의원 한 분이 노무현 대통령을 일컬어 ‘선도투쟁’을 하는 사람 같다고 평했다. 일리가 있다. 그런데 대통령이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데,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도 ‘전선’을 열어나가지도 않는다. 그래서 대통령이 나선 것일 뿐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1987년으로 날아가 보자. 사람들은 말을 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은 경찰력을 동원해 모든 집회를 봉쇄했다. 한 떼의 청년들이 화염병과 짱돌을 들고 진압경찰에 맞섰다. 그러는 동안 그 뒤편에 일시적으로 출현한 경찰력의 공백을 활용해 사람들은 연설회를 열었고 유인물을 돌렸다. 청년학생과 노동자와 각계각층 재야단체가 그렇게 죽고 다치고 감옥을 가면서 확보한 정치적 공간에서 무언가 전리품을 챙긴 것은 두 김씨를 필두로 한 보수 정치세력이었다. 두 정치 지도자가 종종 재야 운동단체와 청년학생들의 ‘폭력성’을 지적하고 우려를 표명했지만, 그들의 ‘폭력적 투쟁’이 없었다면 양김이 차례로 대통령이 되는 역사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현직 대통령이 그런 선도적인 사업을 해도 되는 것일까? 이건 상황인식과 가치판단기준에 따라 달리 평가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대통령이 해결하려는 문제가 정말로 국가적 중대성을 가진 것이라면, 그리고 대통령이 직접 나서지 않고서는 그 문제를 공론화하고 해결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한다면, 대통령이 그렇게 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과연 그런 것인지를 따져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기득권을 다 내놓겠다면서 의제를 던지는 대통령을 향해, 이런 저런 도덕적 비난과 훈계부터 해대는 것은 현명치 않은 일이다. 단죄하고 비난하고 훈계하기 전에 먼저 실사구시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를 충분히 토론해 보자는 것이 내 생각이다. 비난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나는 이런 나의 생각에 잘못이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정박사의 시선으로 보면 또 이렇게 논리적으로 부딪쳐 오는 내가 그리 탐탁지 않겠지만 말이다. 내가 ‘자기만족’이라는 용어를 들먹이며 도매금으로 언론인과 지식인들을 비난한 것은, 그들이 먼저 정박사가 말한 ‘지적 오만’의 오류를 저질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국민이 믿고 따를만한 정치적 지도자가 되려고 생각한다면 유시민처럼 말하고 행동해서는 안 된다. 정혜신 박사의 충고를 들어야 한다. 맞다. 그런데 나는 그런 존재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정박사가 들으면 또 그러지 말라고 충고하시겠지만, 나는 지금보다 더 중요한 정치인이 되고 싶지 않다. 내가 정치인으로서 하려고 하는 일은 아주 특별하고도 일시적인 과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는 17대 국회의원 임기가 끝나기 전에, 1노 3김이 합의해 만든 ‘1987년 체제’를 종식하고 한국정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데 필수적인 정치제도의 변경을 이루어내고 싶다. 이것이 나의 정치적 목표이다. 비난받고 상처받는다고 해도 나는 이 목표를 향해서 간다. 누군가와 싸우기는 싫지만, 우리 정치를 지배하는 ‘1987년 체제’와, 그 체제의 잔명을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 만들어낸, 또는 다른 동기에서 만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앙시앙 레짐을 유지하는 데 동원되는 사고방식과 논리적으로 싸우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내가 지금 이 순간 달리 선택할 여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최장집 교수의 ‘동떨어지지 않은’ 문제의식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대통령의 대연정론과 관련하여 나는 ‘나의 생각’을 말했다. 그 문제에 대해 정혜신 박사는 내 생각과는 ‘동떨어진 생각’을 지니고 있다. 노회찬 의원도, 최장집 교수도, 김동춘 박사도, 며칠 전 한겨레신문이 실은 ‘고언 시리즈’에 등장해 대통령을 걱정했던, 내가 무척 존경하는 지식인, 종교인, 문화예술인들도 모두 이 문제에 대해 나와는 ‘동떨어진 생각’을 지니고 있다. 좋다. 섭섭하지만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이제 그 문제를 이야기해 보자. 유시민이 말을 싸가지 없이 한다든가, 토론 상대방을 깔아뭉갠다든가, 오로지 논리로만 소통하려 한다든가 하는 것은 인간 유시민의 문제일 뿐 소위 대연정론이 내포한 문제는 아니니 잠깐 잊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지금부터는 순전히 논리적으로만 부딪칠 것이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개정판 ‘후기’에서 최장집 교수가 펼친 주장 가운데 정치적 지역구도 문제와 관련된 부분만을 추려보자. 최교수의 견해는 이른바 진보개혁 진영에서 나온 비판적 논리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크고 체계적인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으로 선택했다. 내가 잘못 요약하지 않았다면, 최장집 교수의 견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중심적 문제의식: 한국 민주주의가 어떻게 보통사람들의 이해와 관심에 바탕을 두면서 동시에 능력 있는 정부의 창출을 통해 사회구성원 전반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가?

2)민주주의 실패: 한국 민주주의는 이 점에서 실패했으며, 그 원인은 우리 정당체제가 보수 독점의 협애한 이념적 사회적 기반을 가진 탓으로 사회경제적 갈등과 균열을 제대로 반영하고 대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3)사회경제적 민주화 퇴보: 이로 인해 민주화 이후 정부들은 경제정책 및 사회정책에서 권위주의정부보다 더 신자유주의적이고 시장근본주의적인 경제독트린과 정책노선을 추구해 왔으며 노무현 정부는 더욱 공공연하고 적극적으로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추진함으로써 사회경제적 수준의 민주화를 퇴보시키고 있다.

4)정당정치: 민주정부를 강하고 능력 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중심 메커니즘인 정당과 정당체제를 바로 세우고 튼튼한 사회적 기반을 갖게 만들어야 한다. 민주정치는 정당을 통하여 사회의 갈등과 분열을 폭넓게 표출하고 대표하게 함으로써 다수의 힘을 동원하고 권력을 획득하며, 그 과정에서 형성한 정책적 대안을 실현하고, 그 실현을 위해 필요한 사회적 지지를 동원하는 집단적 행위이다.

5)지역주의: 한국정치가 가진 문제의 궁극적 원인을 지역주의라고 말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집권정부이기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태도는, 현실로 존재하는 사회갈등과 균열요인을 제대로 대면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한국의 지역주의는 권위주의 지배의 한 산물로서 반호남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바 민주화의 진전과 더불어, 특히 김대중 정부의 집권과 더불어 괄목할 만큼 완화되었다. 지역주의는 그 자체가 독자적이고 지배적인 균열이 아니라 권위주의의 잔여범주로서 정당체제의 이념적 협애성과 사회적 기반의 약함, 시민사회의 강한 보수 헤게모니 등으로 인해 작위적으로 동원될 수 있었고 영향력을 가졌던 일종의 종속변수였다. 문제는 지역주의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지역주의를 만들어내고 유지시키는 현재와 같은 정치적 대표체제를, 보다 민주화하고 갈등의 이념적 계층적 기반을 넓히는 데 실패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6)선거제도 변경: 지역갈등 극복을 정치개혁의 최우선 의제로 삼고 선거제도를 바꾸게 된다면, 기존 거대정당들은 규모의 이점을 나눠 갖게 되고, 보수 독점적 양당체제는 강화되며, 오히려 약회되고 있는 지역갈등구조를 다시 불러들일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사회의 이익계층들이 대표될 수 있는 보다 민주적 제도개혁의 가능성은 사전에 봉쇄될 것이다.

7)결론: 오늘의 시점에서 지역문제가 정권의 운명을 걸고 추구해야 할 최우선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뭔가 다른 의도를 가진 정치적 알리바이일 가능성이 크다.

최장집 교수에게 묻는다

잘못 요약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믿고 이야기를 계속하자. 최장집 교수의 견해 가운데 1)과 2)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3)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지만 보기에 따라서 그렇게 주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여기서는 반론하지 않는다. 4)는 내가 지닌 문제의식과 완전히 일치한다. 5)는 원인과 결과를 뒤바꿔 놓은 주장이라고 본다. 6)은 잘못된 사실 인식 또는 입증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7)의 결론은 5)가 내포한 도착적 인과관계와 6)에 나타난 사실오인에 의거한 주관적 추정에 불과하다. 이제 5)와 6)에 요약된 최장집 교수의 견해를 비판한다.

최장집 교수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실패했다고 했다. 정치판이 보수 일색이라 이념적 폭과 사회적 기반이 너무 좁아서 국민들의 욕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고, 정당들이 보통국민들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가지고 대립할 수 있는 정책비전과 이념, 정책프로그램을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정당들이 권위주의체제의 유산이자 종속변수인 지역주의에 함몰되어 정치가 엉망이 되었다는 견해다. 최교수는 지역주의 정치구도를 해소하는 다른 처방은 필요하지 않으며, 정책정당을 잘 발전시킴으로써 정당체제의 이념적 지평과 사회적 기반을 넓히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나는 이런 논리를 원인과 결과, 또는 제도적 환경과 그 환경의 산물을 혼동한 데서 나온 것으로 본다.

최장집 교수에게, 그와 동일한 논지를 들어 대연정론을 비판하는 언론인, 지식인, 정치인들에게 다음 몇 가지를 묻는다.

1)과연 김대중 정부 이후 지역주의는 약화되어 왔는가? 소위 호남당의 영남 출신 대통령 후보, 그리고 비영남당의 영남 출신 대통령이 존재하기에 잠시 완화된 듯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2007년 대선에서 후보구도에 따라서는 2002년 대선 이전과 같은 극단적인 지역주의적 투표행태가 급속하게 복원될 가능성은 없는가. 내 생각을 말하자면, 정치의 현장에서 느끼는 지역구도는 여전히 철벽처럼 강고하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자민련은 지역주의에 전적으로 또는 크게 의존하는 정당이며, 열린우리당 내부에도 그와 같은 경향성은 뿌리 깊게 존재한다.

2)우리 정당체제의 이념적 협애성이 개선되지 않은 것은 최교수의 시각으로 보면 비슷한 보수정당인 열린우리당(2003년까지는 민주당)과 한나라당이라는 두 거대정당의 독과점이 유지되는 탓이며, 진보정당의 진출이 지체되고 약화된 것은 뚜렷한 지역주의적 정당구도로 인해 사람과 자원과 아이디어와 표가 모두 두 거대정당에 몰린 때문이고, 이렇게 된 데는 결선투표 없는 대통령선거와 비례대표 비율이 적은 국회의원 소선거구 제도가 엄천난 진입장벽으로 작용한다고 본다. 정당체제의 이념적 협애성이 지역주의의 위력을 키운 것이 아니라 지역주의적 정당구도와 거대정당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선거제도가 한국 정당체제를 보수일색의 협애한 공간에 묶어둔 원인이요 제도적 환경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지 않은가? 따라서 최교수의 주장은 원인을 그대로 둔 채, 어떤 알 수 없는 신묘한 방법으로 결과를 개선함으로써 원인을 없애라고 하는 도착된 논리가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3)국회의원 선거구제 개편론은 특정 지역에서 집중적인 지지를 받는 지역주의 정당과 중앙권력의 향배를 결정하는 거대정당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국회의원 선거구제를 정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와 그 정당의 국회 의석 점유비가 일치하는 선거구제로 바꾸자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38%의 정당지지표를 얻고 51%의 의석을 차지했고, 한나라당은 36%의 정당지지표를 얻어 40%가 넘는 의석을 차지했다. 반면 민주노동당과 민주당은 각각 13%와 7%가 넘는 지지를 받고도 3% 수준의 의석밖에 얻지 못했다. 중대선거구가 되든 독일식 제도를 도입하든 그런 방향으로 선거구제를 변경하면 보수 양당의 의석 독점 구조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객관적 전망이다. 만약 우리가 독일식 선거구제를 가졌다면 민주노동당은 지난 총선에서 40개가 넘는 의석을 얻었을 것이다. 따라서 선거구제 변경이 보수 독점적 양당 체제를 강화할 것이라는 최교수의 주장은 대통령이 제안한 ‘지역구도를 극복하는 선거구제 변경’의 내용을 모르고 한 말로밖에 볼 수 없지 않은가?

나는 <한겨레신문>이 이러한 논리적 도착과 사실관계의 오인에 의거한 최장집 교수의 주장을 그야말로 무비판적으로 인용 보도한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정하고 지적인 신문이라는 <한겨레신문>이 ‘사실’이 아닌 ‘주장’을 이처럼 무책임하게 중계방송하고 말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정치인이다. 대학교수의 학술적 저서에 대해서 반론하는 것이 국회의원이 해야 할 일은 아니라는 걸 잘 안다. 그러나 최장집 교수의 글은 언론에 의해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공격하는 예리한 칼처럼 활용되고 있다. 최장집 교수의 말 가운데서도 다음과 같은 것이 가장 아프다. “오늘의 시점에서 지역문제가 정권의 운명을 걸고 추구해야 할 최우선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뭔가 다른 의도를 가진 정치적 알리바이일 가능성이 크다.” 노무현 대통령이 무언가 판단을 잘못해서 연정론을 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떤 잘못을 은폐하거나 합리화하려는 나쁜 의도를 지니고 일을 벌였다고 비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구체제의 산물이다

본론보다 잡설이 길어지긴 했지만, 다시 개인적인 소회를 밝히면서 글을 맺는다. 정혜신 박사는 나를 시험성적이 나빠 매를 맞는 친구들 심정을 전혀 모르는 머리 좋은 학생으로 묘사했다. 물론 비유라는 걸 안다. 그래서 사실을 밝혀둔다.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맞기 싫어서 머리를 싸매고 공부했지만 시험성적은 4백 명 가운데 겨우 1백 등 근처를 오갔던 학생이다. 공부를 잘 하는 방법은 가르치지 않고 매타작을 일삼은 선생님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공분을 느낀다. 평생 교직에 계셨던 아버지에게는 단 한 번도 맞아보지 않았던 내가 학교에 가서 날마다 매를 맞으면서, 나는 ‘사랑의 매는 없다’는 확신을 얻었다.

나는 정치인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인 것 같다. 나는 인간으로서 내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한다. 그러나 정치인 유시민이 특별히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 주변에는 나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나보다 훨씬 더 열심히, 그리고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애국심을 지니고 일하는 국회의원들이 많이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자기 소신과 지향에 맞는 정당을 자유롭게 선택해서, 정말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끼리 정당을 함께 하면서 다른 정당과 경쟁하고 협력하는 그런 정치를 보고 싶다. 그런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환경을 만드는 데 내 힘을 쏟고 싶다.

나는 죽자고 한나라당을 미워했지만, 한나라당과 조중동만이 앙시앙 레짐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 열린우리당을 포함해 정치인 유시민도 예외 없이 1987년 탄생한 구체제의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우리당은 대통령 탄핵안 표결을 육탄저지했다. 한나라당은 국가보안법 폐지법안 처리를 육탄저지했다. 민주노동당은 쌀 관세화 유예협정이나 비정규직 관련 법안 처리를 육탄저지한다. 자기가 찬성하는 법안은 ‘국회법에 따른 표결처리’를 주장하지만, 자기가 정말로 반대하는 법안은 육탄저지를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국회의원들이다. 대한민국 정치인과 정당들은 입으로만 국민의 뜻을 존중할 뿐, 선거에서 국민의 선택을 받은 다수파가 다수파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피아를 구분해 죽기 살기로 맞붙는 대결적 정치의 표상이다.

정치적으로 볼 때 우리는 모두 병들어 있다. 우리 모두는 앙시앙 레짐의 자식이다. 대통령도 여당도 야당도 보수정당도 진보정당도 기업인도 노동조합도 국민도 모두 역사적 분열의 상처를 안은 채 정치적 분열의 열병을 앓고 있다. 양극화로 인한 사회적 분열마저도 서로를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할 뿐, 함께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마치 대통령한테서 펜과 마이크를 빼앗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대통령을 조롱하고 훈계하고 비방하는 ‘일부’(이 말을 꼭 써야 한다는 것도 비극이다.) 언론인과 지식인과 정치인들에게 말씀드린다. 당신들의 말이 옳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더 희망적이겠는가. 그러나 잊지 마시라. 당신도 나도 앙시앙 레짐의 자식이라는 것을. 당신의 확고부동해 보이는 그 논리도 알고 보면 분열이라는 질병의 한 증상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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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근친강간(가족 내 성폭력)’이라고 써서 원고를 보내면 편집자가 오타인 줄 알고 ‘근친상간’으로 바꾸어, 나도 모르게 활자화되는 경우를 수없이 겪었다. 내가 장애인의 ‘상대어’를 비장애인이라고 쓰면 ‘정상인’이나 ‘일반인’으로 고친 후, “이 표현이 더 자연스럽다”고 오히려 나를 설득한다. 성 판매 여성 혹은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을 가리켜 불가피하게 ‘창녀’라고 표현할 때가 있는데, 작은따옴표를 삭제해 버린다. 사소한 문제 같지만 섹슈얼리티에 대해 논의할 기회 자체를 차단하는 행위다. 여성과 성에 대한 기존의 의미가 고수되는 것이다. - "[정희진의 낯선사이]쉬운 글이 불편한 이유" 중에서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2142125025&code=990100


1. 게이트키핑과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사이에서
정희진 선생이 이 칼럼에서 이야기하려는 부분이 단지 어떤 편집자의 무능을 지적하려는 바가 아닌 줄 알면서도 막상 읽는 입장에선 편집자로서 가장 아프고 예민하게 느끼는 부분을 뼈아프게 지적받는 기분이 든다.

편집자의 역할과 기능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능으로 평가하는 것이 이른바 ‘게이트 키퍼’의 역할을 말하는데 그냥 우리말로 옮기면 ‘문지기’ 구실이다. 편집자는 필자와 독자 사이의 가교 구실을 하지만 기본적으론 독자의 입장을 대변하게 되어있다. 상업적인 의미에서 독자는 곧 소비자이기 때문에 출판사에 속한 편집자는 필자와 협력하여 좋은 상품(글 혹은 책)을 만드는 동업자라 할 수 있지만 대개의 경우 동업자치곤 대등할 수 없는 조건이며, 필자와의 관계에서 갑을 관계이므로 속으론 까칠하더라도 겉으론 상냥할 수밖에 없다.

만약 필자가 편집자의 이런 겉모습만 본다면 편집자의 진짜 기능에 대해선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독자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고, 독자에게 필자의 글이 어떻게 전해질지 그 출판사 혹은 그 잡지가 스스로 독자라고 상정하는 평균적인 독자의 수준을 대변하는 입장에 서는 것이 편집자의 진짜 기능이자 역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자신의 담당 편집자를 업무 대리인 정도로 생각하기보다 가상의 독자로 생각하고 대하는 것이 스스로를 위해서도 좋다. 그러므로 필자와 편집자 사이엔 언제나 묘한 긴장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때때로 우리 사회에서 글이란 교수라는 자격증을 획득해야 쓸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간혹 학력 자본은 있을지라도 인격이나 필력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 어쩌면 고학력이 학문에 대한 열정이나 자신의 능력보다 부모의 경제력에 의존하는 현상이 심화되면 심화될수록 학력이란 그저 그 사람의 스펙(specification)일 뿐이지 그 사람의 캐파(capacity)와는 무관하며 인격과는 더욱더 무관한 일이다 - 필자도 있기 마련이고, 그와 반대로 한 문장 한 문장 글쓴이의 피땀이 녹아있는 사유의 산물을 다루면서 그에 대한 고민이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편집자들도 종종 있다. 필자 마다 자신의 스타일이 있고, 문장에 어떤 버릇이 있는 것처럼 편집자들도 나름의 원칙이나 고치기 힘든 버릇이 있는데, 다른 말로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문장에 대한 이데아가 있는 법이다.

간혹 어떤 편집자는 다소 거칠긴 하더라도 글쓴이의 개성이 살아있는 비범한 문장을 자신의 기준에 맞춰 평범하고 매력 없는 문장으로 바꿔버리는 경우도 많이 봤다. 이럴 때 편집자는 붉은 펜을 든 강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일지 모른다. 원고를 전체 틀에서 보지 못하고 단편적인 부분에만 집중해서 보면 나오는 현상이기도 하고, 글쓴이가 어떤 의도와 생각으로 이 글을 썼는지 전체 문맥을 파악하지 못하고 일면적인 부분만 살펴 기계적으로 수정하다 보면 발생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가끔 저자의 문체를 이해 못해서 아무 문제가 없는 문장도 단지 길다는 이유만으로 멋대로 토막쳐버리는 편집자들도 많이 봐왔는데, 최근 편집자들 가운데에는 단문 선호 경향이 많아서(또는 실수가 두려워서) 중문이나 복문을 무슨 오문이나 비문처럼 대하는 경향도 있다.

2.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부자이자 편집의 실무 책임을 맡고 있는 입장에서 자화자찬의 우를 범하는 일이 될 수도 있겠으나 “황해문화”는 한국 잡지사에서 제법 특이한 사례에 속한다. 우선 서울에서 발간되는 잡지가 아니란 점이 그렇고, 계간지라는 매체가 학술전문지의 성격을 갖기 쉬운데 학술전문지라기 보다는 저널의 성격이 좀더 강하다는 점이 그렇다. 엄밀하게 말하면 논문과 저널의 중간자적 성격을 표방하고 있으며 내부의 편집방향이나 지향점 또한 그렇다. 약간 논외의 이야기로 잡지, 특히 계간지의 경우에 고정필자 혹은 회전문 필자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일정한 필자군이 형성되어 이들을 일종의 에꼴(학파)이라고 지칭할 만한 그룹이 형성되기도 하는데, “황해문화”의 경우엔 그런 에꼴이 존재하지 않는다.

“황해문화”가 서울(중심)이 아닌 인천(지역, 주변부)에서 발간되는 특성도 있고, 애초부터 그런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비주류 지향을 가진 편집주간, 편집위원회 선생들 덕분이기도 할 것이지만 기본적으론 “황해문화”가 그럴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 못하(않)기 때문이다. 에꼴을 형성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단행본 출판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황해문화”는 단행본 출판을 하지 않기에 에꼴의 지식인들에게 나눠줄 떡고물이 생길 일이 없으며, 빵을 배분할 능력이 없으니 설령 우리가 원하더라도 그런 권력은 생길 수 없는 구조다.

간혹 주변에서 “황해문화”도 단행본 출판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슬쩍 웃곤 한다.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그런데 하나는 “황해문화”란 잡지는 애초부터 상업적인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지는 잡지가 아니며, 두 번째는 편집노동자로서 이 열악한 환경(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1년에 “황해문화” 딱 4권만 뽑아내는 줄 안다)에 단행본 출간까지 감당할 능력이 없다. “황해문화”는 ‘새얼문화재단’이라는 인천 시민들이 기금을 만들어 준 지역의 시민문화재단의 지원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에 구조적으로 상업출판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 매체 자체가 침몰하는 타이타닉의 운명을 벗어날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러 인터넷 공간을 통해 늘 정기구독자를 애타게 찾는다. “황해문화”에는 창간 이래 지금까지 영업담당자가 없기 때문에 편집자인 내가 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정기구독자를 만들기 위해 애쓸 수밖에 없다. 그런 덕분인지 몰라도 “황해문화”는 시중에서 판매되는 계간지 중에서 모 계간지를 제외하곤 발행 부수 2위의 잡지가 되었다. 이제 올연말이면 “황해문화”도 창간 20주년을 맞이한다. “황해문화”가 걸어온 20년의 역사는 권력의 길, 성공의 길을 멀리 우회하는 노선이었다.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 길이었다고 감히 평가해 본다.

에꼴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기왕 시작한 이야기이니 “황해문화” 편집회의 분위기를 조금 옮겨보면 이렇다. 나는 불경스럽게도 가끔 우리 편집위원들을 ‘꼴통들’이라고 칭하는데 - 그건 애초에 나부터 그런 꼴통에 속하는 편이니 - 그건 편집위원들이 성향 탓일 수도 있겠다. “황해문화”의 편집위원회는 이념적 스펙트럼은 물론 각자의 개성도 상당히 다채로운 편이라 차마 남들에게 공개할 수 없을 만큼 편집회의 분위기는 난장(亂場)에 가깝다. 처음부터 끝까지 농담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안에 뭔가 진검 승부가 이루어지는 기분도 드는 터라 화기애매하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좌충우돌, 우충좌돌하는 묘한 긴장감 속에 때때로 불꽃이 튄다. 같은 잡지를 만들고 있는 편집위원들 사이에서도 우리는 벗도 없으며 동지도 없다는 식으로 나가다보니 살짝 위험해지는 순간도 있지만 어쨌든 아직까지는 큰 충돌 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 어쨌든 그런 분위기 덕분에 “황해문화”는 구성이나 필자 선정에 대해 상당히 개방적인 편이다.


잡지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특집의 지향점은 현실이고, 이론과 현실이 적절하게 교차하길 바라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낯익고 익숙한 필자가 선정되는 경우가 다른 매체에 비하면 적은 편이고, 이른바 교수만으로 필진이 구성되는 경우도 적은 편이다. 또 편집위원들 역시 낯익은 필자보다 새로운 필자를 발굴하는 것을 잡지의 미덕으로 여기고 있다. 연구소의 연구를 위한 연구원 보다는 현장 활동가를 좀더 선호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그것이 편집자로서는 더 힘든 일이기도 한데 때로 글쓰기 훈련이 덜된 필자의 원고를 받아 고생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필력보다는 그 바닥에서 쌓은 경험이 더 중요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또 나 자신이 편집자 마인드 못지않게 활동가 마인드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내 가슴을 덥히지 못하는 원고를 받아 교정보는 것보다는 거칠어도 결기 있는 문장을 읽고 고치는 편을 선호한다.

정희진 선생의 "쉬운 글이 불편한 이유"를 읽다가 또다시 먼 길로 와버렸지만 세상은 자신의 말(뜻)을 타인에게 잘 전달하는 사람들에 의해 변화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정희진 선생의 지적을 가슴에 잘 새기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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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밥상은 이미 전쟁터다


얼마전 낮은산에서 "풍성한 먹거리 비정한 식탁"을 출간했다. 어릴 적 초등학교 다닐 때 내가 무척 좋아하던 책은 이른바 '사회과부도'라는 책이었다. 지금이야 교과서 품질도, 참고서 품질도 좋아져서 컬러도판이 수록된 교과서들이 대부분이지만 과거에는 대부분 흑백 인쇄물이었다. 아마도 그 중에서 컬러가 많이 들어간 책은 미술책과 이 사회과부도가 아닐까 싶다. 만드는 과정에서도 품이 가장 많이 들어간 교과서가 사회과부도였으리라 생각하는데 지금도 이런 류의 책이 교과서로 이용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시엔 이렇게 좋은 교과서 참고용 책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이 실제 수업에는 거의 활용하지 않아서 쓸 일이 별로 없었다.

풍성한 먹거리 비정한 식탁
팀 랭 | 에릭 밀스톤 (지은이) | 박준식 (옮긴이) | 낮은산 | 2013-01-25 | 원제 The Atlas of Food (2008년)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9646898&start=slayer

하지만 나는 무척 좋아해서 이 책을 마르고 닳도록 보면서 모리타니가 어디에 있는지, 스리랑카에선 무엇이 주로 생산되는지 등을 보는 재미가 솔솔했다. 사회과부도인 만큼 세계지도를 인구 밀도나 역사, 이념, 종교 등 테마별로 구분하여 수록했기 때문에 세계에 대해 입체적인 인식을 도와주었다. 만약 지금도 이런 책이 나오고 있다면 웬만한 단행본보다 훨씬 유익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낮은산의 "풍성한 먹거리 비정한 식탁"이 그런 류의 책이다. 이 책의 테마는 부제 '지도와 그림으로 한눈에 보는 세계의 먹거리 이슈'이다. 한눈에 본다는 것이 이런 책의 최대 장점이지만 한눈에 보도록 만드는 품은 생각 외로 많이 든다.

황해문화 10주년 기념으로 한 장짜리 세계 지도를 만든 적이 있는데 앞뒤로 한 장인 지도를 만드느라 거의 한 달을 고생했었던 기억이 새롭다. 반응이 상당히 좋아서 실천문학사 편집자들에게 지도를 주고 체 게바라 포스터를 한 묶음 받았던 기억이... ㅋㅋ

먹을거리 문제보다 중요한 문제가 인류에게 있으랴. 아마 그런 이유에서 "풍성한 먹거리 비정한 식탁"처럼 한눈에 보는 책 이외에도 상당히 다양하고 재미있는 책들이 많다. 오늘은 그런 책들을 한 번 소개해볼까 한다.

헝그리 플래닛
- 세계는 지금 무엇을 먹는가
피터 멘젤 | 페이스 달뤼시오 (지은이) | 홍은택 | 김승진 (옮긴이) | 윌북 | 2008-03-05 | 원제 Hungry Planet: What the World Eats (2005년)


* 국내에 이런 류의 책으로는 거의 최초로 소개된 책이었다고 생각하는데, 피터 멘젤은 마치 박물학자처럼 세계 각지를 다니며 그들이 무얼 먹고 사는지를 일일이 기록하여 담아내고 있다. 말 그대로 박물지(두루 살폈으나 내용의 깊이는 얄팍한 책)인데 그것이 또한 이런 류의 책이 지닌 한계이기도 하다. 이후 피터 멘젤은 "칼로리 플래닛"이란 또 한 권의 책을 냈는데 이것 역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음식에 대한 책이다. 피터 멘절의 작업들은 이외에도 상당히 많은데 "우리집을 소개합니다" 같은 책은 정연두의 사진을 이용한 예술작품(상록타워)이 연상되는 책이기도 하다. 정연두의 예술세계는 이번호 황해문화에 서경식 선생을 통해 소개될 예정이니 참고하시고...

칼로리 플래닛
- 당신은 오늘 얼마나 먹었나요
피터 멘젤 | 페이스 달뤼시오 (지은이) | 홍은택 | 김승진 (옮긴이) | 윌북 | 2011-08-10 | 원제 What I Eat: Around The World In 80 Diets (2010년)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141714



죽음의 밥상
- 농장에서 식탁까지, 그 길고 잔인한 여정에 대한 논쟁적 탐험
피터 싱어 | 짐 메이슨 (지은이) | 함규진 (옮긴이) | 산책자 | 2008-04-17 | 원제 The Ethics of What We Eat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01080028


* 며칠전 유럽에서 말고기 햄버거 파동이 일어났는데 아마 누구도 어떻게 해서 말고기가 햄버거 패티가 되었는지 알아낼 수 없을 거라고 예상한다. 그만큼 식품 유통 아니 공장에서 찍어내는 식품 재료의 출처나 위생을 담보해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식품의 세계화로 인해 우리들도 이런 문제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내 책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의 자매품이라고 해야하나? ㅋㅋ
인터넷으로 "누가 우리의~"를 검색하면 연관검색어로 늘 함께 뜨는 책이 "누가 우리의 밥상을 지배하는가"이다. '일과 밥' 딱 한 글자 차이인데 말이다.

누가 우리의 밥상을 지배하는가
- 식량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카길’의 음모를 파헤친다!, 한국판 보론 증보 개정판
브루스터 닌 (지은이) | 안진환 (옮긴이) | 시대의창 | 2008-05-23 | 원제 Invisible giant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9401064


* 이 책은 식량을 통한 세계 지배,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종자(씨앗)전쟁이자 유전과학을 이용한 식품산업을 이끌고 있는 다국적기업 카길을 중심으로 세계 식량산업, 아니 인류 생존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무겁고 무서운 책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 메커니즘을 살피기 좋은 책이 있는데 매리언 네슬의 '식품정치'란 책이다. 이 책 서평을 청탁 받아서 써주었는데 거의 반년이 다 되어가도록 원고료를 받지 못한 책이기도 하다. ㅠ..ㅠ

식품정치
- 미국에서 식품산업은 영양과 건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매리언 네슬 (지은이) | 김정희 (옮긴이)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11-09-15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6417445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수록 좀더 묵직하고 학술적인 책이란 점을 참고하시고 천천히 일독해보시면 당신의 밥상이야말로 전쟁터란 사실을 깨우치게 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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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들은 델포이를 세계의 중심, 배꼽(Ompharos)이라고 했는데 아시아 그리고 진정한 세계의 관점에서 중앙아시아 지역이야말로 '세계의 배꼽'이라는 칭호에 참으로 어울릴 만한 곳이라 생각한다. 배꼽이란 결국 모체와 태아 사이의 영양분을 전해주던 탯줄의 흔적이란 의미에서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대중앙유라시아연구소가 교양총서시리즈로 사계절에서 펴낸 "신장의 역사-유라시아의 교차로"를 설연휴 기간동안 살짝 맛만 봤는데 역사의 교차로에 묻혀있는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매우 의미있고 좋은 책이었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시간을 아우르는 중앙아시아(신장)의 통사로서 전문가들을 위한 저술이 아니라 일반인을 위한 저술로 이 분야의 초심자들은 물론 준전문가들 역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만한 수준의 입문서이자 본격서의 수준을 끝까지 유지하고 있는 점이 놀랍다.

이에 앞서 펴낸 교양총서 시리즈 1번으로 펴낸 "오스만제국사"와 함께 읽어본다면 오랫동안 모체(아시아)와 태아(서구)의 결과물(? 물론 이런 관점으로만 볼 수는 없지만 비유를 위해서)만 놓고 보아 그만큼 공백 상태로 놓여있던 중앙아시아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리즈라고 생각한다.  





오스만 제국사
- 적응과 변화의 긴 여정, 1700~1922
도널드 쿼터트 (지은이) | 이은정 (옮긴이) | 사계절출판사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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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의 역사
- 유라시아의 교차로
l 서울대학교 중국유라시아연구소 교양 총서 2
제임스 A. 밀워드 (지은이) | 김찬영 | 이광태 (옮긴이) | 사계절출판사 | 2013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286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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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흉측한 벌레로 변해있음을 발견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The Metamorphosis)"의 첫 문장은 이처럼 충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른바 현대소설의 탄생을 알리는 위대한 신호탄이었다고 할 만큼 이 문장은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이처럼 충격적인 사실을 무척 담담하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어느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흉측한 벌레로 변해있음을...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아니 자신이 흉측한 벌레가 되어 버린 팔다리를 바라다보면서도 그는 굳어버린 몸으로 자버린 바람에 일어나보니 몸이 약간 결린다는 사실을 제외하곤 기차시간을 놓쳐 갈 수 없게 된 출장을, 이나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자신의 현실을 걱정한다.

그의 가족들은 그보다 더 빨리 이 모든 것에 적응한다. 그가 더이상 외판원 일을 나갈 수 없을 테니 사장에게 해고될 테고, 그나마의 일자리를 잃고 되면 더욱 가혹해질 빚독촉이 걱정이다. 그레고르와 가장 가까웠던 여동생 마저 그레고르를 냉대한다.

"내쫓아야 해요! 저 짐승은 우리를 못살게 굴고, 하숙인들을 쫒아내고... 나중엔 틀림없이 이 집 전체를 독차지하고서 결국 우리를 길거리에서 잠을 자는 신세가 되도록 만들 거예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생계에 대한 걱정에 사로잡힌 가족의 냉대 속에 그레고르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등에 박힌 채 먼지에 뒤덮혀 결국 차갑고 어두운 방구석에서 굶어죽는다. 그의 죽음, 주검을 발견한 가족은 그의 주검 앞에서 신에게 감사드리고 오랜만에 교외로 나간다.





1912년 카프카가 "변신"을 집필하기 시작한지 35년 뒤 미국의 대표적인 현대 극작가인 아서 밀러는 "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a Salesman)"이란 희곡을 발표한다. 예순 셋의 세일즈맨 윌리 로먼은 평생동안 세일즈맨으로 살며 회사와 가족을 책임져 왔지만 나이먹고 병약해진 몸 때문에 어느날 본사근무를 신청했다가 자신이 이름까지 지어준 전임 사장의 아들에게 해고당한다. 그는 자신이 속살만 파먹고 버리는 오렌지가 아니라며 항변해보지만 젊은 신임 사장은 그의 항변을 묵살해버린다.

늙은 윌리에게도 가족이 있지만 그를 이해해주는 것은 그나마 늙은 아내 린다뿐이다.

"아버지가 훌륭한 분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윌리 로먼은 엄청나게 돈을 번 적도 없어. 신문에 이름이 실린 적도 없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인품을 가진 것도 아니야. 하지만 그이는 한 인간이야. 그리고 무언가 무서운 일이 그에게 일어나고 있어. 그러니 관심을 기울여주어야 해. 늙은 개처럼 무덤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돼. 이런 사람에게도 관심이, 관심이 필요하다고."

그가 큰 기대를 걸었던 아들 형제는 아버지를 가부장적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늙은 속물 취급할 뿐이다. 늙은 윌리는 자기 앞으로 들어논 보험금으로 자식의 사업자금을 대주기 위해 자동차를 과속으로 몰고 나간다. 그의 장례식날 가족들은 비로소 행복했던 과거를 떠올린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왜 자살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보, 난 울 수가 없어. 당신이 그냥 출장 간 것 같기만 해요. 계속 기다리겠죠. 여보, 눈물이 나오지 않아요. 왜 그랬어요? 여보, 오늘 주택 할부금을 다 갚았어요. 오늘 말이에요. 그런데 집에는 아무도 없어요. 이제 우리는 빚진 것도 없이 자유로운데, 자유롭다고요."

나는 "변신"과 "세일즈맨의 죽음" 사이에 공통점들이 제법 많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을 굳이 미학적이거나 문학적으로 비평할 마음은 없다. 다만 오늘날 거리에 수많은 벌레들과 속살 파먹힌 오렌지 껍데기, 늙은 개처럼 무덤 속으로 굴러떨어질 날만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기억났을 뿐이다.


벌레와 오렌지 껍데기와 늙은 개.... 우리들의 자화상!


* 작가 황석영은 "여럿의 윤리적인 무관심으로 정의가 밟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거야, 걸인 한 사람이 이 겨울에 얼어 죽어도 그것은 우리의 탓이어야 한다"라고 했는데, 우리 사회가 그 정도의 엄밀한 윤리의식을 가질 수는 없더라도 나와 남의 목숨을 모두 소중히 여겼으면 좋겠다. 서초구청장이 엄동설한에 구청장이 탑승한 관용차가 들어설 때 청원경찰이 늦게 나왔다며 난방기가 설치된 초소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문을 잠그는 징벌을 내려 이것이 결국 청원경찰의 사망으로 이어졌다는 뉴스가 나와 인터넷이 떠들썩한데 구청 측에서는 이것이 사실과 다르다며 적극 해명하고 있다.   .....  정말 엄청나게 적극적으로 해명해야만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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