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아 플라스는 내게는 조금, 혹은 아주 특별한 시인이다. 대학생은 아닌데 남들은 대학생인 줄 착각하던 시절에 나는 노가다 뛰는 젊은 막장 인생이었다. 그 무렵엔 왜 영화들도 하나 같이 그런 부류의 영화들이 많았던 건지 몰라도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의 영화들 중에는 방황하는 청춘이 등장하는 영화들이 참 많았다. 예를 들어 이문열 원작, 곽지균 감독, 정보석, 이혜숙, 배종옥, 옥소리 주인공의 영화 "젊은 날의 초상"이 그랬고, "걸어서 하늘까지", 박광수 감독, 문성근, 박중훈, 심혜진 주연의 영화 "그들도 우리처럼" 같은 영화들 말이다. 한 시대를 떠받들던 이념이 무너진 시대에 한국 영화는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던 셈이다. 어쨌든 내가 실비아 플라스를 알게 되었던 시대가 대략 이무렵이었다.

89년에서 90년 무렵 실비아 플라스를 처음 접했는데, 실비아 플라스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난 조금 충격을 받았다. 소설은 중고등학생 때 이미 김성동과 황석영을 뗐는데 시는 여전히 중학생 시절에서 별반 진도를 나가지 못한 상황이었던 터라 여류 시인과 여성 시인의 차이점조차 제대로 깨치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의 시 읽기가 중학생 수준이었다는 말은 김남조와 이해인 정도에서 별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말이다(물론 이 분들의 시를 무시하는 건 절대 아니고...다만 여류라는 표현이 주는 딱 그 수준의 감상이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 듯). 물론 그런 감수성이란 것이 그 무렵 제대로 시를 읽지 않았다면 여류 시인이란 그저 "오, 아름다워라! 세상은"이란 말투라는 식의 오해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만난 여성 시인이 '실비아 플라스'였다. 그러니까 나에겐 최승자나 김혜순 보다 실비아 플라스가 먼저였다. 처음 시집을 읽는 순간 내 반응은 요즘 아이들 식 표현을 빌자면 딱 이랬다. "헉, 이뇬 모야!" 실비아 플라스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놀라움에 시집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외국 시인의 시를 통해 모던한 여성주의의 시세계를 처음 접했던 거다. 그녀가 처음이었다. 나의 감성과 맞는 여성 시인을 찾아낸 것은... 그 후 나는 고정희, 김혜순, 최승자 등등의 한국 여성 시인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시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마녀들의 세계에 한 발 들어선 셈이었다.

실비아 플라스를 다시 만난 건 대학에 들어가서였다. 당시 유명한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였던 남진우 선생이 진행하는 강의였는데, 수업 내용은 꽤 훌륭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남진우 선생 특유의 시니컬한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물론 걔중에는 그를 핸섬한 시인으로, 샤프하고 시크한 문학평론가로 좋아하던 여학생들도 꽤 있었다만). 어쨌든 그의 수업 시간 중에 실비아 플라스의 <아버지>란 시를 낭송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꼭 여학생에게 이 시의 낭송을 시켰다. 다소 악취미란 생각도 들긴 했지만 아마 내가 선생이라도 이 시는 반드시 여학생에게 낭송을 시켰을 게다. 사전에 이 시를 접해본 학생이라면 별 문제 없겠지만 간혹 이 시를 처음 접하는 순진한(?) 여학생들은 이 시의 마지막 행에 이르러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짓곤 했다. 이 시의 마지막 행은 이랬다.

"아빠, 아빠, 이 개자식, 넌 끝장이야!"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약간의 과장은 어쩔 수 없고) 낭송하는 여학생이 이 대목을 얼마나 리얼하게 낭송해주느냐에 따라 이 시가 죽고 산다. 당신도 한 번 소리내서 읽어보라. 얼마나 리얼할 수 있는지...

실비아 플라스의 마지막 행에 필적할 수 있는 구절은 문학보다는 '도어즈'의 짐 모리슨이 <This is The End>에서 "아버지, 난 당신을 죽이고 싶어. 어머니 난 당신을 밤새도록 사랑하고 싶어. 그건 가슴시리도록 당신을 자유롭게 하지."정도나 되어야 하지 않을까?(나는 실비아 플라스의 이 시에서 파울 첼란의 '죽음의 푸가'를 엿보기도 했다만...)

솔직히 대학에서 이 시를 낭송해준 여학생과는 그리 친한 편이 아니었지만 이 시를 너무나 맛깔나게 읽어주었기 때문에 한동안 난 그 친구만 보면 이 시 이야기를 하며 '죽여줬다'고 칭찬을 했건 것 같다. 물론 졸업하고 이제는 그 친구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만...


아빠

- 실비아 플라스


이젠 안돼요, 더 이상은
안될 거예요. 검은 구두
전 그걸 삼십 년간이나 발처럼
신고 다녔어요. 초라하고 창백한 얼굴로,
감히 숨 한 번 쉬지도 재채기조차 못하며.

아빠, 전 아빠를 죽여야만 했었습니다.
그래볼 새도 없이 돌아가셨기 때문에요ㅡ
대리석처럼 무겁고, 神으로 가득찬 푸대자루.
샌프란시스코의 물개와
아름다운 노오쎄트 앞바다로

강남콩 같은 초록빛을 쏟아내는
변덕스러운 대서양의 岬처럼 커다란
잿빛 발가락을 하나 가진 무시무시한 彫像
전 아빠를 되찾으려고 기도드리곤 했답니다.
아, 아빠.

전쟁, 전쟁, 전쟁의
롤러로 납작하게 밀린
폴란드의 도시에서, 독일어로
하지만 그런 이름의 도시는 흔하더군요.
제 폴란드 친구는

그런 도시가 일이십 개는 있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전 아빠가 어디에 발을 디디고,
뿌리를 내렸는지 말할 수가 없었어요.
전 결코 아빠에게 말할 수가 없었어요.
혀가 턱에 붙어버렸거든요.

혀는 가시철조망의 덫에 달라붙어 버렸어요.
전, 전, 전, 전,
전 말할 수가 없었어요.
전 독일 사람은 죄다 아빤 줄 알았어요.
그리고 독일어를 음탕하다고 생각했어요.

저를 유태인처럼 칙칙폭폭 실어가는
기관차, 기관차.
유태인처럼 다카우, 아우슈비츠, 벨젠으로.
전 유태인처럼 말하기 시작했어요.
전 유태인인지도 모르겠어요.

티롤의 눈, 비엔나의 맑은 맥주는
아주 순수한 것도, 진짜도 아니에요.
제 집시系의 선조 할머니와 저의 섬뜩한 운명
그리고 저의 타로 가드 한 벌, 타로 가드 한 벌로 봐서
전 조금은 유태인일 거예요.

전 언제나 아빠를 두려워했어요.
아빠의 독일 空軍, 아빠의 딱딱한 말투.
그리고 아빠의 말쑥한 콧수염
또 아리안족의 밝은 하늘색 눈.
기갑부대원, 기갑부대원, 아, 아빠ㅡ

神이 아니라, 너무 검은색이어서
어떤 하늘도 삐걱거리며 뚫고 들어올 수 없는 十字章(卍)
어떤 여자든 파시스트를 숭배한답니다.
얼굴을 짓밟은 장화, 이 짐승
아빠 같은 짐승의 야수 같은 마음을.

아빠, 제가 가진 사진 속에선
黑板 앞에 서 계시는군요.
발 대신 턱이 갈라져 있지만
그렇다고 악마가 아닌 건 아니에요. 아니,
내 예쁜 빠알간 심장을 둘로 쪼개버린

새까만 남자가 아닌 건 아니에요.
그들이 아빠를 묻었을 때 전 열 살이었어요.
스무 살 땐 죽어서
아빠께 돌아가려고, 돌아가려고, 돌아가 보려고 했어요.
전 뼈라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저를 침낭에서 끌어내
떨어지지 않게 아교로 붙여버렸어요.
그리고 나니 전 제가 해야 할 일을 알게 되었어요.
전 아빠를 본받기 시작했어요.
고문대와 나사못을 사랑하고

'나의 투쟁'의 표정을 지닌 검은 옷의 남자를.
그리고 저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말했어요.
그래서, 아빠, 이제 겨우 끝났어요.
검은 전화기가 뿌리째 뽑혀져
목소리가 기어나오질 못하는군요.

만일 제가 한 남자를 죽였다면, 전 둘을 죽인 셈이에요.
자기가 아빠라고 하며, 내 피를
일년 동안 빨아마신 흡혈귀,
아니, 사실은 칠년이지만요.
아빠, 이젠 누우셔도 돼요.

아빠의 살찐 검은 심장에 말뚝이 박혔어요.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조금도 아빠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들은 춤추면서 아빠를 짓밟고 있어요.
그들은 그것이 아빠라는 걸 언제나 알고 있었어요.
아빠, 아빠, 이 개자식, 이젠 끝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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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 안나 아흐마또바
(Anna Akhmatova, 1889-1966)


내 앞에는
저녁의 비스듬한 길이 놓여 있네
어제는 사랑에 빠진 채
"잊지 말아요" 속삭이던 사람
오늘은 다만 바람소리뿐
목동들의 외침과
맑은 샘가의
훤칠한 잣나무뿐


*

어제는 사랑에 빠져 행복했던 사람
그 사람이 사라진 뒤의 나에겐 저녁의 비스듬한 길이 있을 뿐이다.
사랑은 '침묵'이 아니라 '대화'로 이루어진 탓에 사랑은 말의 연금술사이자 말의 포로가 된다. 그러나 비스듬한 길을 걸어 나조차 사라진 뒤에도, 모든 말들이 허공으로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맑은 샘가의 훤칠한 잣나무는 남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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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Light)

   
- 프랜시스 W. 부르디옹(Francis W. Bourdillon, 1852-1921)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
     The day but one;
Yet the light of the bright world dies
     With the dying sun.

The mind has a thousand eyes,
     And the heart but one;
Yet the light of a whole life dies
     When its love is done.
 

밤엔 천 개의 눈이 있고
     낮엔 오직 하나가 있지
하지만 밝은 세상의 빛은 해가 지면
      사라지고 말아

정신엔 천 개의 눈이 있고
     가슴엔 오직 하나가 있지
하지만 온 생명의 빛은 사랑이 꺼질 때
     사라지고 말아
 

* 제목이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로도 알려져 있다.

** 가끔 영 어색하긴 하지만 외국시를 외국어로 낭송하는 것이 듣고 싶어질 때가 있다. 시가 본래 노래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인간의 목소리가 최고의 악기라는데 외국어로 된 시는 외국어로 낭송되는 것을 듣고 싶다는 욕망은 어쩌면 노래를 듣고 싶다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1년쯤 전에 평화박물관 연말 송년식 자리에서 일본인 친구들이 미야자와 겐지의 "바람에 지지 않고"를 한국어와 일본어로 번갈아 낭송하는 것을 들으면서 어쩐지 그 기대가 깨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 지나치게 개구진 친구들이었기에 낭송의 감동이 좀 덜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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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찾기

- 옥타비오 빠스(O
ctavio Paz)


나의 몸에서 너는 산을 찾는다
숲 속에 묻힌 산의 태양
너의 몸에서 나는 배를 찾는다
갈 곳을 잃은 밤의 한중간에서

*

나는 정신의 사랑보다 몸의 사랑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랑의 유물론'쯤이라고 해두자.

이 말은
지금 그대가 내 곁에 없어도 여전히 그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난 지금 그대가 내 곁에 없어 미칠 것 같이 괴롭다고 말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옥타비오 빠스의 "서로 찾기"가 말하는 사랑은 '에로스'다.

몸의 사랑.
여자는 남자에게서 산을, 남자는 여자에게서 배를 찾는다.
여자는 남자를 만나 머무를 곳을 찾고
남자는 여자를 만나 떠날 곳을 찾는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애타게 찾지만 만남은 잠시고 엇갈림은 영원히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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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童話)

- 글로리아 밴더빌트(1924~ )

옛날 한 아이는
날이면 날마다
내일은 오늘과 다르기를
바라면서 살았답니다


Fairy Tale
- Gloria Vanderbilt

There once was a child
living every day
expecting tomorrow
to be different from today





글로리아 밴더빌트는 1924년 철도왕 윌리엄 밴더빌트의 딸로 태어났다(아는 사람들은 밴더빌트 가문이 쌓아올린 이 엄청난 부가 노상강도귀족의 시대, 혹은 금빛도금의 시대라 불렸던 시대의 민중들이 흘린 유혈의 결과물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밴더빌트 가문은 미국 남부의 하버드라 불리는 밴더빌트 대학을 설립할 만큼 미국의 귀족 집안이었다. 글로리아가 두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사망하자 400만 달러의 유산을 남겼다. 그러나 어머니와 고모 사이의 재산상속 다툼 끝에 결국 고모들과 살게 되었다. 재판에서는 어머니의 품행이 문제가 되었다.

유년 시절을 유럽에서 보내는 동안 시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녀를 양육했던 고모들은 글로리아 밴더빌트가 사랑에 빠질 때마다 밴더빌트라는 성(姓)을 버리고 하찮은 성씨가 되려하느냐며 조소하고 괴롭혔지만 그녀는 네 번 결혼했다. 두 번째 남편은 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세 번째 남편은 영화감독 시드니 루멧, 네 번째 남편은 작가 와이엇 쿠퍼 였다. 그녀는 이외에도 배우 말론 브란도, 가수 프랭크 시내트라, 억만장자 하워드 휴즈 등과도 염문을 뿌렸다.

미술을 공부한 뒤 유화와 파스텔화 등으로 첫 개인전을 열자 사람들은 그녀의 전시를 ‘호사 취미’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카드를 비롯한 팬시상품으로 유명한 홀마크사에서는 그녀의 디자인 감각을 높이 평가해 그녀의 디자인 콜렉션 ‘밴더빌트 디자인’을 사들여 팬시상품에 사용했고, 곧이어 직물디자인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79년에는 ‘글로리아 밴더빌트 디자이너 진’을 출시하여 성공을 거뒀다.

재벌가 상속녀로서의 안락하고 부유한 삶을 대신하여 그녀는 시를 썼고,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영화감독 시드니 루멧, 작가 와이엇 쿠퍼와 네 번 결혼했다. 와이엇 쿠퍼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하나가 CNN의 메인 앵커 앤더슨 쿠퍼다. 그녀의 삶을 다룬 TV시리즈 <글로리아 밴더빌트 이야기(Little Gloria… Happy at Last, 1982)>는 에미상을 타기도 했다. 그녀는 동화 속 주인공처럼 태어났고, 동화의 주인공처럼 고난을 겪었으며 매일 매일을 소망한 것처럼 다르게 살았다. 그래서 과연 소녀는 '행복했을까?'라고 묻는 건 어쩌면 바보 같은 질문일 게다. 인생이 추구해야 하는 미덕이나 목적이 모든 사람에게 같을 순 없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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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눈이 없다면 내 눈은(Mis ojos, din tus ojos)


- 미겔 에르난데스(Miguel Hernandez)


그대의 눈이 없다면 내 눈은 눈이 아니요
외로운 두 개의 개미집일 따름입니다.
그대의 손이 없다면 내 손은
고약한 가시 다발일 뿐입니다.

달콤한 종소리로 나를 채우는
그대의 붉은 입술 없이는 내 입술도 없습니다.
그대가 없다면 나의 마음은
엉겅퀴 우거지고 회향 시들어지는 십자가 길입니다.

그대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내 귀는 어찌 될까요?
그대의 별이 없다면 나는 어느 곳을 향해 떠돌까요?
그대의 대꾸 없는 내 목소리는 약해만 집니다.

그대 바람의 냄새,
그대 흔적의 잊혀진 모습을 쫓습니다.
사랑은 그대에게서 시작되어 나에게서 끝납니다.

*

종종 내가 시인이 되지 못하는 것은 참말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아마 내가 시인이었다면 어느 순간 내 심장은 폭발해서 산산이 부서졌을 테니까요. 한 인간이 동시에 두 개의 심장을 지녔다면 몰라도 어떤 상황들은 내 한 개뿐인 심장을 헐떡이게 만듭니다. 두 개의 심장은 두 개의 마음, 두 개의 사랑을 용납해줄 런지요. 저는 막 살아 버리고자 하는 욕망에 시달립니다. 그것이 내게 정직한 것이란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마치 두 개의 심장을 지닌 사내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종종 이 마음은 거대한 위선으로 달려갑니다. 두 개 혹은 세 개, 무한대의 심장을 지닌 사내처럼. 심장의 갯수와 무관하게 마음은 하나라는 사실. 비루먹은 개처럼 헐떡이는....

내 심장은 마주하고 있는 동안엔 절대 포개지지 않습니다. 등 뒤에 섰을 때만 심장이 포개진다는 건 언제나 잊혀진 뒤에 오는 진실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이 두려운 까닭 아시겠는지요. 돌아선 사람이 더 그리운 까닭은 그를 향한 나의 심장이 같은 쪽에 놓인 까닭이겠지요. 두 개의 심장, 세 개의 심장, 열 개의 심장을 모두 한데 모은다고 하더라도...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은 운명이 바람처럼 내 곁을 스쳐간 어느 겨울 밤 이미 내 심장이 멎은 탓이려니 합니다.

* 미겔 에르난데스는 스페인 사람, 스페인 시인, 스페인시민전쟁 당시 프랑코의 파시스트 군에 저항하다 결국 사랑하는 이들을 남겨두고 알라칸테의 옥중에서 죽어간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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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시인1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슬픈 밤을 단 한 번이라도
잠자리에서 울며 지새워본 적이 없는 사람은
천상의 힘이여, 당신은 알 수 없습니다

당신들은 우리를 삶으로 인도하셨고
당신들은 불행한 자로 죄짓게 하셨으며
슬픔 속에 내 맡기셨나니
이 세상의 죄란 죄는 모두 제 값을 치르게 마련입니다


Harfenspieler 1

Johann Wolfgang von Goethe


Wer nie sein Brot mit Tränen aß,
Wer nie die kummervollen Nächte
Auf seinem Bette weinend saß,
Der kennt euch nicht, ihr himmlischen Mächte.

Ihr führt ins Leben uns hinein,
Ihr laßt den Armen schuldig werden,
Dann überlaßt ihr ihn der Pein:
Denn alle Schuld rächt sich auf Erden.


*

너무 유명해서 누가 한 말인지조차 불명확해지는 말들이 있는데,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자와는 말하지 말라"는 표현은 괴테의 성장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 수록된 시에서 나온 말이다. 물론 좀더 명언스럽게 탈바꿈되긴 했지만, 소설을 읽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대다수일테니 이 시(소설)에 등장하는 늙은 탄금 시인은 누이동생과 근친상간의 죄를 범해 여주인공 미뇽을 낳아 오이디푸스처럼 방랑의 길을 떠난 인물이다.


그런 내용을 알고 시를 보면 시의 내용이 좀더 절절하게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시인의 시만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어쩐지 괴테 자신의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시, 소설, 희곡뿐만 아니라 정치가로서도 탁월했던 천재 괴테. 그는 사랑에도 탁월했으므로 연인들에게도 시를 선사하곤 했다. 만년에 이르러 더이상 사랑할 힘도, 사랑받을 희망도 사라졌을 때 그는 "이 세상의 죄란 죄는 모두 제 값을 치르게 마련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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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여자        


- 마리 로랑생


권태로운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자는
슬픈 여자

슬픈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자는
불행한 여자

불행한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자는
버려진 여자

버려진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자는
떠도는 여자

떠도는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자는
쫓겨난 여자

쫓겨난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자는
죽은 여자

죽은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자는
잊혀진 여자

잊혀진다는건          
가장 슬픈 일

*

최승자의 <외로운 여자들은>을 읽고 생각난 김에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여성 화가, 프랑스)의 <잊혀진 여자>를 읽는다. 마리 로랑생은 잊혀진 여자가 가장 슬프다고 말했는데, 사람들의 기억 속에 많이 남아있는 구절이지만 마리 로랑생, 스스로가 염려했던 것처럼 정작 이 말을 했던 것이 그녀였다는 사실은 제대로 기억되지 못하는 편이다. '권태-> 슬픔-> 불행-> 버려짐-> 떠돔-> 쫓겨남-> 죽음-> 잊혀짐' 마리 로랑생이 이야기하는 불쌍한 여자의 순서다. 그녀는 잊혀진다는 것이 가장 슬픈 일이라고 했다. 어째서 일까? 남자와 여자의 차이일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화가로서의 마리 로랑생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그냥 일반인의 개념으로는 지금도 저 맥락이 가슴에 와 닿지는 않는다.

얼마 전 모 결혼정보회사에서 미혼남녀 593명을 대상으로 통계를 내어보니 10명 중 8명이 연인과 헤어질 때 거짓말한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연인과 헤어질 때 남성의 92%, 여성의 77%가 거짓말을 한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연인과 헤어지는 이유 중 가장 말하기 곤란한 것은 남녀 33.5%가 '다른 사람이 생겼기 때문에'이고, 뒤를 이어 26%가 '질려서', 16%가 '사랑한 적이 없다', 14.5%가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다', 불과 7%만이 '서로가 맞지 않는다'로 답했다.

남성들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절반에 가까운 46%가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라 답했고, 여성의 33%가 '상대방에게 상처주기 싫어서'라고 했는데, 남성이 거짓말하는 이유의 2번째(22%)에 해당하기도 한다. 여성이 거짓말하는 두 번째 이유는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어서(31%)'인데 비해 이 같은 응답비율에 비해 남성은 12%이다. 남녀의 통계수치가 매우 다른 듯 보이면서도 사실 꼼꼼이 따져보고 생각해보면 응답의 형식이나 내용은 달라도 이유는 사실 흡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굳이 별로 신용이 가지도 않는 이 통계를 인용한 까닭은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차이를 보이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남성이 거짓말하는 이유 중 상당 부분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상대방의 평가에 연연한다는 것이고, 그에 비해 여성은 상대의 마음이나 처지에 집중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들이 인격적으로 좀더 훌륭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어차피 헤어지려고 꾸며낸 거짓말에 대한 이야기인 데다 여성이 거짓말하는 이유 중 두 번째인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어서(31%)'란 말이나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남성들의 이유나 어찌보면 거기서 거기이긴 하니까. 미묘한 차이이긴 하지만 남성은 여성을 통해 자신을 비춰보고 평가하는 존재란 것이고, 여성은 가치 평가보다 존재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차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마리 로랑생의 시가 이해될 수 있다. 그녀의 시를 역순으로 살펴보면 '존재(存在, being), 그 자체'에게 있어 죽음보다 무서운 일은 '망각'이니까. 사랑했던 사람을 잊겠다고 발버둥쳐 본 사람은 '망각(존재의 죽음)'이 주는 달콤함을 알 것이다. 그래서 '망각'은 에로스가 아니라 타나토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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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The Paradoxical Commandments)


- 켄트 M. 키스
(Kent M. Keith, 1949~  )


사람들은 때로 분별이 없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라.


당신이 선을 행할 때도 사람들은

이기적인 의도가 숨겨져 있을 거라고 비난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라.


당신이 좋은 결과를 얻었을 때

거짓 친구와 진정한 적을 얻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하라.


당신이 오늘 행한 좋은 일은

내일이면 잊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을 하라.


당신의 솔직함과 정직으로 인해

상처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고 정직하라.


가장 위대한 이상을 품은 가장 위대한 사람도

가장 악랄한 소인배에 의해 쓰러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꿈을 품어라.


사람들은 약자에게 동정을 베풀면서도

강자만을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약자를 위해 싸워라.


당신이 몇 년에 걸쳐 공들여 이룩한 것을

누군가 하루밤새 무너뜨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이룩하라.


사람들은 진정으로 도움을 원하지만

막상 도움을 주어도 고마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도와라.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을 내주어도

세상의 비난을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라.




The Paradoxical Commandments


by Dr. Kent M. Keith


People are illogical, unreasonable, and self-centered.

Love them anyway.


If you do good, people will accuse you of selfish ulterior motives.

Do good anyway.


If you are successful, you will win false friends and true enemies.

Succeed anyway.


The good you do today will be forgotten tomorrow.

Do good anyway.


Honesty and frankness make you vulnerable.

Be honest and frank anyway.


The biggest men and women with the biggest ideas can be shot down by the smallest men and women with the smallest minds.

Think big anyway.


People favor underdogs but follow only top dogs.

Fight for a few underdogs anyway.


What you spend years building may be destroyed overnight.

Build anyway.


People really need help but may attack you if you do help them.

Help people anyway.


Give the world the best you have and you'll get kicked in the teeth.

Give the world the best you have anyway.


*

인도 캘커타의 마더 테레사 본부에는 미국의 켄트 M. 키스의 이 시(詩)가 붙어 있다고 한다. 국내에 이 시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류시화 시인을 비롯한 인도에 대해 친근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적극적인 소개에 힘입은 바가 크다. 간혹 테레사 수녀의 시로 잘못 알고 있는 이들도 있지만 이 시는 미국 정부의 관료 출신이었던 시인 켄트 M. 키스가 나름대로 리더십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한 바를 압축해둔 일종의 계명이다.


“The Paradoxical Commandments”란 말을 고스란히 옮겨보면 "역설적 명령"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관료 출신의 미국인이란 점을 생각해보면 그가 이 시로 인기를 얻은 뒤 자기계발을 위한 인기강연자가 되어 같은 제명의 책을 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앞선 시의 번역은 내 것으로 당연히 류시화 시인의 번역이 더 유려하고, 감동적이긴 하지만 본래의 시에는 없는 구절도 들어 있고 조금씩 의역하는 과정에서 뉘앙스가 달라진 부분들이 있어 원문을 구해 다시 옮겨보았다. 참고로 류시화 시인의 번역에 의한 시를 옮겨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류시화


사람들은 때로 믿을 수 없고, 앞뒤가 맞지 않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서하라.


당신이 친절을 베풀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을 베풀라.


당신이 어떤 일에 성공하면

몇 명의 가짜 친구와 몇 명의 진짜 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하라.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기 쉬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고 솔직하라.


오늘 당신이 하는 좋은 일이

내일이면 잊혀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을 하라.


가장 위대한 생각을 갖고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가장 작은 생각을 가진 작은 사람들의 총에 쓰러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생각을 하라.


사람들은 약자에게 동정을 베풀면서도 강자만을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약자를 위해 싸우라.


당신이 몇 년을 걸려 세운 것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라.


당신이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발견하면

사람들은 질투를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롭고 행복하라.


당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세상과 나누라.

언제나 부족해 보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것을 세상에 주라



사실, 켄트 M. 키스의 저 글귀는 감리교파를 창시한 요한 웨슬리의 선언적 글귀와 통하는 바가 있다. 개인적으론 키스의 장황한 말(어찌보면 시라고 하기엔 좀 그런)보다 더 압축적이라 좀더 시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행하라.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가능한 모든 장소에서,
가능한 모든 때에,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순간까지


Do all the good you can,

By all the means you can,
In all the ways you can,
In all the places you can,
At all the times you can,
To all the people you can,
As long as ever you can.

- 요한 웨슬리(1703-1791)



켄트 M. 키스와 요한 웨슬리의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것은 무엇보다 강한 실천에 대한 주장이다. 웨슬리에 비해 켄트 M. 키스의 주장이 더 졸렬해 보이는 까닭은 물론 그가 웨슬리와 달리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켄트 M. 키스의 시 "The Paradoxical Commandments"에 나오는 "사람들" 즉 "People"은 그의 시에도 등장하듯 "분별이 없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들로, 다시 말해 우리가 흔히 '고급과 저급', '리더(엘리트)와 대중'으로 구분할 때의 그 '사람들(mass)'이다. 켄트 M. 키스가 하고 있는 말들은 구구절절 옳은 말들이지만 그의 시가 어딘가 모르게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까닭은 그가 교훈을 전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내가 아니라 다시 말해 '사람들'이 아니라 '리더(엘리트)'이거나 '리더'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해당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켄트 M. 키스는 이 시의 청자들이 옳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불편하다.


그가 말하는 그 사람은 '선을 행할 때도 사람들에게 이기적인 의도가 있을지 모른다고 오해받는 존재', '좋은 결과를 얻으면 시기받는 존재', '과거에 좋은 일을 한 적이 있지만 그 공적은 잊혀진 존재', '솔직하고 정직하지만 그로 인해 상처받을 수 있는 존재', '위대한 이상을 품었음에도 악랄한 소인배에 의해 공격받는 존재', '자신이 소수의 약자를 위해 싸운다고 믿는 존재', '도움을 바라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지만 고마워하지 않는 이들에게 둘러싸인 존재', '최선을 다해도 비난 받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켄트 M. 키스가 미국인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든다기 보다 가장 좋은 예라고 생각이 들어 굳이 이야기하자면 시인의 주장에 가장 근접한 대상은 어쩌면 '미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미국인들 스스로 생각하는 '세계 속의 미국'에 대한 이미지로서 말이다.


켄트 M. 키스와 웨슬리의 선언적인 경구에는 모두 ‘선하다’,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정언명령이 뒤따른다.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정언명령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해야 할 당연한 과제이지만 문제는 우리가 그 '선함(Good)'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Good)”이 과연 무언지 알아야만 한다는 전제가 있다. 선언의 매력은 단순함과 추상성에 있지만 현실은 언제나 디테일하기 때문이다. 국제관계와 사회에서 '평화'와 '인권'이 그러하듯 개인간의 관계에서도 '사랑'과 '자비'가 언제나 선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나 '인권', '자유'와 '평등'이 세상 모든 분쟁과 전쟁의 표면적인 원인이듯 세상의 모든 악은 언제나 선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세상살이가 선과 악의 단순이분법으로 구분되기도 어렵지만 무엇보다 우리의 판단이 항상 옳을 수도 없다.


그래서 '꾸란'의 선지자는 그 어떤 자비보다 더 중한 것은 겸손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공자, 역시 가장 중요한 미덕은 '겸양'이라 했는데, 누군가 공자에게 만약 평생 동안 한 마디만을 새겨야 한다면 어떤 말이냐는 물음에 그는 "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 했다. 풀어보면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 속에 내포된 뜻이야 여러 가지이지만 요약해보면 '자기 반성과 타인에 대한 배려'란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 미덕이 인간 관계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공자는 '자아'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타아'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했다. 불교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여 '자아'중심적인 '주관'주의라면 공자는 '객관'을 추구한다. 공자가 이야기한 겸양이란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켄트 M. 키스의 시를 읽으며 문득 '바르게 산다는 것'과 '겸손' 사이에 발생하는 '긴장(tension)'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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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 푸쉬킨


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사랑은 아직, 아마도 그럴겁니다,
나의 영혼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것이 더이상 당신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겠어요.
나는 무엇으로도 당신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말없이, 희망도 없이,
때로는 두려움으로, 때로는 질투로 괴로와하며.
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토록 진실되게, 그토록 부드럽게,
다른 이들에 의해 사랑받도록 신이 당신에게 부여하신대로.

Я вас любил: любовь еще, быть может
В душе моей угасла не совсем;
Но пусть она вас больше не тревожит;
Я не хочу печалить вас ничем.
Я вас любил безмолвно, безнадежно,
То робостью, то ревностью томим;
Я вас любил так искренно, так нежно,
Как дай вам бог любимой быть другим
<1829년>

*



푸쉬킨의 <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를 읽고 난 뒤
나는 샤를르 뒤몽(Charles Dumont)의 샹송 중
<사랑이 끝난 뒤 담배 한 모금(Ta Cigarette Apres L'amour)>이란 구절이 떠올랐다.

사랑이 끝난 뒤 네가 피우는 담배 한 모금
나는 그윽히 바라보노라
새벽의 역광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언제나 처럼 다른 상념에 젖는구나.
사랑은 아침 햇살 속에 죽어 가리라.

시인의 사랑은 두려움으로, 질투로 괴롭지만
진실되게 그토록 부드러운 것이지만
나의 사랑은 야만적이고, 이기적이며, 현실적이고 계산적이다.
현실은 언제나 위대한 리얼리스트 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의 삶처럼 속물이다.

그래서 나는 시인의 시만 믿고, 시인의 삶을 믿지 않는다.
시인의 손끝을 보지 않고, 시인의 발 밑을 본다.

시인은 사실 '당신' 앞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싶지 않다.
내 영혼 속에서 '당신'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는 절대로 나는 당신을 놓아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갈 수 없다.
갈 수 없으므로 말을 건넬 수 없고, 말을 건넬 수 없으므로 시인의 유일한 희망도 없다.

오, 코가 커서 불행한 시라노 드 베르쥬락(Cyrano de Bergerac)이었다면
차라리 그 외모라도 탓해 볼 터인데...
나는 '당신'을 사랑했으나 이제 당신에게 갈 수도, 말을 건넬 수도 없다.
'당신' 곁엔 이미 다른 사람이 있으므로, 아니 날 받아주지 않으므로
어쩌면 다른 상념에 젖은 탓에 나는 그대에게 갈 수 없다.
아니, 가지 않는다. 

너는 언제나 처럼 다른 상념에 젖는구나.
사랑은 아침 햇살 속에 죽어 가리라.

깨어났을 때 사랑은 죽을 운명이거늘...
어째서 좀더 긴 꿈에 취하지 않는지...
어째서 좀더 오래도록 잠들어주지 않는 겐지...
어째서 그댄 이토록 일찍 깨어나는지...
왜, 나의 마법에 취하지 않는 겐지...

푸쉬킨(1799. 6. 6~1837. 2. 10.), 위대한...
그대가 조금만 속물이었다면 발자크(1799.5.20~1850.8.18.)만큼은 살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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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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