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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

박제영 - 늙은 거미 늙은 거미 - 박제영 늙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 당신, 늙은 거문개똥거미가 마른 항문으로 거미줄을 뽑아내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당신, 늙은 암컷 거문개똥거미가 제 마지막 거미줄 위에 맺힌 이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당신, 죽은 할머니가 그러셨지. 아가, 거미는 제 뱃속의 내장을 뽑아서 거미줄을 만드는 거란다. 그 거미줄로 새끼들 집도 짓고 새끼들 먹이도 잡는 거란다. 그렇게 새끼들 다 키우면 내장이란 내장은 다 빠져나가고 거죽만 남는 것이지. 새끼들 다 떠나보낸 늙은 거미가 마지막 남은 한 올 내장을 꺼내 거미줄을 치고 있다면 아가, 그건 늙은 거미가 제 수의를 짓고 있는 거란다. 그건 늙은 거미가 제 자신을 위해 만드는 처음이자 마지막 거미줄이란다. 거미는 그렇게 살다 가는 거야.. 더보기
허수경 -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 허수경 이름 없는 섬들에 살던 많은 짐승들이 죽어가는 세월이에요 이름 없는 것들이지요? 말을 못 알아들으니 죽여도 좋다고 말하던 어느 백인 장교의 명령 같지 않나요, 이름 없는 세월을 나는 이렇게 정의해요. 아님, 말 못 하는 것들이라 영혼이 없다고 말하던 근대 입구의 세월 속에 당신, 아직도 울고 있나요? 오늘도 콜레라가 창궐하는 도읍을 지나 신시(新市)를 짓는 장군들을 보았어요 나는 그 장군들이 이 지상에 올 때 신시의 해안에 살던 도룡뇽 새끼가 저문 눈을 껌벅거리며 달의 운석처럼 낯선 시간처럼 날 바라보는 것을 보았어요 그때면 나는 당신이 바라보던 달걀 프라이였어요 내가 태어나 당신이 죽고 죽은 당신의 단백질과 기름으로 말하는 짐승인 내가 자라는 거지요 이거 긴 세기의 이.. 더보기
진은영 - 70년대산(産) 70년대산(産) - 진은영 우리는 목숨을 걸고 쓴다지만 우리에게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다 그것이 비극이다 세상을 허리 위 분홍 훌라후프처럼 돌리면서 밥 먹고 술 마시고 내내 기다리다 결국 서로 쏘았다 출처 : 진은영, 『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 2008년 * ▶ 영화 중에서 주변에 복서를 했던 친구가 있던 덕에 잠깐이었지만 권투를 배웠다. 프로선수로 한두 번 링에 오른 뒤 권투하고는 영영 이별하고 뱃사람이 되겠다고 해대에 진학했다가 그것도 싫다고 그만두고 치기공사가 되어 이제는 이름조차 잊혀졌다. 나는 그에게 권투를 배우며 약간이나마 인생을 알 것 같았다. 상대에게 가장 빠르게 가 닿을 수 있는 주먹질은 스트레이트, 곧게 내뻗는 주먹이다. 어퍼컷이 멋있어 보이지만, 훅이 그럴듯해 보이지만 권투에.. 더보기
정호승 -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 -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 정호승의 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처음 읽을 때 만해도 나는 이 시를 받아들이기가 참 곤란했다. 그만큼 내가 날이 서 .. 더보기
고은 - 어느 소년 소녀의 사계가(四季歌) 어느 소년 소녀의 사계가(四季歌) - 고은 봄 네 작은 무덤가에 가서 보았네 가장 가까운 아지랑이에 낯선 내 살의 아지랑이가 떨었네 겨우내내 보이지 않던 것들이 새로 보이는 그 마을의 슬픔 버들옷 뿌리 기르는 시내가 흐르네 어느 날의 봄 비오는 괴롬을 마감하려고 내 봄은 어린 풀밭가에 돌아왔는지 봄에는 네 무덤조차도 새로 있었네 그렇지만 나는 무언가 좀 기다리다 가네 여름 네 어릴 때 가서 살아도 아직 그대로인 한 달의 서해 선유도(仙遊島)에 건너가고 싶으나 네가 밟은 바닷가의 단조한 고동소리 네 소라껍질 모아 담으면 얼마나 기나긴 세월이 그 안에서 나올까 나는 누구의 권유에도 지지 않고 섬을 그리워하네 언제나 여름은 어제보다 오늘이고 첫사랑과 슬픔에게 바다는 더 푸르네 옛날의 옷 입은 천사의 외로움을 .. 더보기
고정희 -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 고정희 내가 화나고 성나는 날은 누군가 내 발등을 질겅질겅 밟습니다. 내가 위로받고 싶고 등을 기대고 싶은 날은 누군가 내 오른뺨과 왼뺨을 딱딱 때립니다. 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날 분별 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힙니다. 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나이를 제대로 꽃피우기란 외로움을 제대로 바로 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가요. 나는 내 마음에 포르말린을 뿌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따뜻한 피에 옥시풀을 섞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오관에 유한 락스를 풀어 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헹굴 수는 더욱 없으므로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덧난 상처들로 슬픔.. 더보기
도종환 - 늑대 늑대 - 도종환 너는 왜 길들여지지 않는 것일까 편안한 먹이를 찾아 먹이를 주는 사람들 찾아 많은 늑대가 개의 무리 속으로 떠나가는데 너는 왜 아직 산골짝 바위틈을 떠나지 않는 것일까 너는 왜 불타는 눈빛을 버리지 않는 것일까 번개가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며 달려가던 날카로운 빛으로 맹수들을 쏘아보며 들짐승의 살 물어뜯으며 너는 왜 아직도 그 눈빛 버리지 않는 것일까 너는 왜 바람을 피하지 않는 것일까 여름날의 천둥과 비바람 한겨울 설한풍 피할 안식처가 사람의 마을에는 집집마다 마련되어 있는데 왜 바람 부는 들판을 떠나지 않는 것일까 오늘은 사람들 사이에서 늑대를 본다 인사동 지나다 충무로 지나다 늑대를 본다 늑대의 눈빛을 하고 바람부는 도시의 변두리를 홀로 어슬렁거리는 늑대를 본다 그 무엇에도 길들여지지.. 더보기
베르톨트 브레히트 - 악한 자의 가면 악한 자의 가면 - 베르톨트 브레히트 내 방 벽에는 일본제 목제품인 황금색 칠을 한 악마의 가면이 걸려 있다. 그 불거져 나온 이마의 핏줄을 보고 있노라면 악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출전 : 악한 자의 가면/ 브레히트/ 김길웅 옮김/ 청담사/ 1991 * 새해 벽두에 마음을 잡아끄는 시가 있어 옮겨 보았다. 비록 매우 짧은 시이지만 브레히트적인 위트와 풍자가 녹아있어 읽는 재미가 제법 삼삼하다. 늘 착하고 선하게 살라는 가르침들을 받아왔고, 무의식적으로라도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막상 그리 산다는 일은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고통이 필요한가. 그런데 브레히트는 정색을 하고 "악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라고 되묻는다. 황금가면을 뒤집어 쓴 악의 번.. 더보기
이생진 - 사람 사람 - 이생진 어떤 사람은 인형으로 끝난다 어떤 사람은 목마로 끝나고 어떤 사람은 생식으로 끝난다 어떤 사람은 무정란으로 끝나고 어떤 사람은 참 우습게 끝난다 * 율곡 이이는 에서 배움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요즘 사람들은 학문이 일상생활에 있는 줄도 모르고 허황되게 뜻을 높고 멀리하여 행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긴다. 특별한 사람에게 미루고 자기 자신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안일하게 생활한다면 어찌 불쌍하지 않으랴." 이생진의 시 은 진술로만 이루어진 시다. 진술로 이루어진 시는 교훈적인 느낌이 강한데, 이 시는 서글프다. 그 어떤 사람이 '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기 어려운 문제이긴 하지만 시(詩)의 기본은 '묘사'다. 묘사만으로도 시는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시를 처음 써보는 이.. 더보기
손택수 - 꽃단추 꽃단추 - 손택수 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좀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 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처럼 달아줄 줄 안다는 것 무덤가에 찬바람 든다고, 꽃이 핀다 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 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 손택수, 『창작과비평』, 2009년 봄호(통권 143호) * 시(詩)는 어째서 행과 연을 구분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리듬(律) 때문이다. 그럼, 시에서 리듬이 왜 중요한가? 그건 시가 본래 노래였기 때문이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