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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

구상 - 유치찬란 유치찬란 - 구상 올해 그 애는 2학년이 되어서 교과서에 실린 내 시를 배우게 됐는데 자기가 그 작가를 잘 안다고 그랬단다. - 그래서 뭐라고 그랬지? 하고 물었더니 - 그저 보통 할아버진데 어찌보면 그 모습이 혼자 노는 소년 같아! 라고 했단다. * '촌철살인'이라 했던가? 나는 시의 본령은 긴 시가 아니라 짧은 시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촌철살인하는 시에 진정한 묘미가 숨어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 모습이 혼자 노는 소년 같아!"라는 한 마디에 구상 선생의 생전 모습이 맑고 고운 화선지에 툭하고 떨어진 먹물 한 방울처럼 '화악'하고 번져온다. 정말 그러셨을 것 같다는 생각과 더불어 나의 노년도 그러했으면 하는 부러움이 함께 번진다. 더보기
박재삼 - 천년의 바람 천년의 바람 - 박재삼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 은 박재삼 시인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다. 일본 동경에서 태어나 1955년 으로 등단해 1997년 세상을 등질 때까지 박재삼 시인은 40여 년간의 시작 생활을 통해 '한국의 전통 서정 탐구와 허무의 시학'을 집중적으로 형상화해왔다고 평가받는다. 아마 시인 자신은 이런 평가를 들으면 혼자 조용히 웃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인을 한국의 전통서정과 허무의 시학이라고 하지만 내가 볼 때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한국의 전통서정은 사실 허무.. 더보기
김선우 - 시체놀이 시체놀이 - 김선우 배롱나무 아래 나무 벤치 내 발 소리 들었는지 딱정벌레 한 마리 죽은 척한다 나도 가만 죽은 척한다 바람 한 소끔 지나가자 딱정벌레가 살살 더듬이를 움직인다 눈꺼풀에 덮인 허물을 떼어내듯 어설픈 움직임 어라, 얘 좀 봐. 잠깐 죽은 척했던 게 분명한데 정말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것 같다 딱정벌레 앞에서 죽은 척 했던 나는 어떡한담? 햇빛이 부서지며 그림자가 일렁인다 아이참, 체면 구기는 일이긴 하지만 나도 새로 태어나는 척한다 햇빛 처음 본 아기처럼 초승달 눈을 만들어 하늘을 본다 바람 한소끔 물 한 종지 햇빛 한 바구니 흙 한 줌 고요 한 서랍..... 아, 문득 누가 날 치고 간다 언젠가 내가 죽는 날, 실은 내가 죽은 척하게 되는 거란 걸! 나의 부음 후 얼마 지나 새로 돋는 올.. 더보기
신기섭 - 추억 추억 - 신기섭 봄날의 마당, 할머니의 화분 속 꽃을 본다 꽃은 산소호흡기 거두고 헐떡이던 할머니와 닮았다 마른 강바닥의 물고기처럼 파닥파닥 헐떡이는 몸의 소리 점점 크게 들려오더니 활짝 입이 벌어지더니 목숨을 터뜨린 꽃, 향기를 내지른다. 할머니의 입 속같아 하얀 꽃, 숨쉬지 않고 향기만으로 살아 있다 내 콧속으로 밀려오는 향기, 귀신처럼 몸속으로 들어온다 추억이란 이런 것, 내 몸 속을 떠도는 향기, 피가 돌고 뼈와 살이 붙는 향기, 할머니의 몸이 내 몸속에서 천천히 숨쉰다 빨랫줄 잡고 변소에 갈 때처럼 절뚝절뚝 할머니의 몸이 움직인다 내 가슴속을 밟으며 환하게 웃는다 지금은 따뜻한 봄날이므로 아프지 않다고, 다 나았다고, 힘을 쓰다 그만 할머니는 또 똥을 싼다 지금 내 가슴 속 가득 흘러넘치더니 구.. 더보기
강연호 - 월식 월식 - 강연호 오랜 세월 헤매 다녔지요 세상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그대 찾아 부르튼 생애가 그믐인 듯 저물었지요 누가 그대 가려 놓았는지 야속해서 허구한 날 투정만 늘었답니다 상처는 늘 혼자 처매어야 했기에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흐느낌 내가 우는 울음인 줄 알았구요 어찌 짐작이나 했겠어요 그대 가린 건 바로 내 그림자였다니요 그대 언제나 내 뒤에서 울고 있었다니요 * '사랑'을 어찌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 사랑한다면서 나는 당신이 행복하길 바란다. 진심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랑하면 할수록, 나는 사랑이란 말이 '평화'란 말이 다른 의미에선 '전쟁'과 동의어가 되는 것처럼 '인권'이란 말이 다른 의미에선 '억압'이 되는 것처럼 사랑이란 말과 감정이 절대적으로 상위 개념이 되어 갈수록 그것이.. 더보기
정춘근 - 라면 여덟 상자 라면 여덟 상자 - 정춘근 경로당에 모여 기억 속에 똬리 틀은 고향 자랑을 국수 타래처럼 풀어내던 노인들 점심으로 라면을 끓였는데. 만물 박사 평양 김씨 라면 한 개 풀면 오십 미터라 한 것뿐인데 셈이 빠른 황해도 최씨 노인 휴전선 이십 리는 라면 여덟 상자라 속없이 이야기한 것뿐인데 오늘 라면은 매웠나 보네요 노인들 눈자위가 붉은 것을 보면 라면을 그대로 남긴 것을 보면 경로당 구석에서는 라면 끓는 검은 솥만 덜컹덜컹 기차 소리를 냅니다. * 정춘근의 는 시에서 사실적인 국면이 심리적인 국면으로 전환되는 과정과 이것이 시적으로 승화될 때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극적으로 잘 보여주는 시다. 시의 전체 과정은 경로당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어르신들이 간식 참삼아 라면 몇 개를 끓이며 나누는 이야기를 .. 더보기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 - 바람에 지지 않고 바람에 지지 않고 -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 - 번역 : 권정생 비에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와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욕심도 없고 절대 화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미소지으며 하루 현미 네 홉과 된장과 나물을 조금 먹으며 모든 일에 제 이익을 생각지 말고 잘 보고 들어 깨달아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속 그늘에 조그만 초가지붕 오두막에 살며 동에 병든 어린이가 있으면 찾아가서 간호해 주고 서에 고달픈 어머니가 있으면 가서 그의 볏단을 대신 져 주고 남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무서워 말라고 위로하고 북에 싸움과 소송이 있으면 쓸데없는 짓이니 그만두라 하고 가뭄이 들면 눈물을 흘리고 추운 여름엔 허둥대며 걷고 누구한테나 바보라 불려지고 칭찬도 듣지 말고 괴로.. 더보기
함순례 - 벽 안에 사람이 산다 벽 안에 사람이 산다 - 함순례 도배 새로 하면서 감쪽같이 그를 봉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고요를 흔들고 가는 그가 슬쩍 귀찮았던 것인데 옥상 난간엘 두 번씩이나 오르내린 사춘기 아들 쓸어안고 먹장처럼 깜깜한 날 벽지 한 장의 긴장을 뚫고 또 그가 왔다 꽃무늬 가면을 쓰고 저리 또렷한 소릴 내다니! 굵고 지긋하신 목소리가 내 안의 둥그런 물관 같은 피붙이, 어린 슬픔을 파고들어서 얼굴 없는 그를 아득히 올려본다 매번 차임벨로 노크를 하고 헛기침 두어 번으로 가다듬지만 밤잠 설친 듯 목소리 탁할 때 있는 걸 보면 그에게도 거둬야 할 식솔들이 있으리라 그러고 보면 나는 딴살림 휘파람 불며 스쳐가도 그만인 내 눅진한 살림의 안쪽으로 줄기차게 말을 건네는 저 지극함은 무언가 딴살림 챙기며 늙어가는 그의 본색.. 더보기
신경림 - 파장 파장(罷場) - 신경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깍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약장수 기타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 얼마 전 고등학교 후배이자 대학 동기 녀석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간만에 대학 동기들과 술자리를 함께 했다. 어떤 시는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가슴으로부터 느끼기 전엔 참으로 멀게만 느껴지는 작품들이 있는데 신경림 선생의 시 이 내게 그러했다.. 더보기
문정희 - 남편 남편 -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 누군가의 남편으로 살아가는 일 중 제일 견딜 수 없는 건, 아내 이외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게 죄가 된다는 거다. 그리고 더 견딜 수 없는 건 그건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는 감기 같은 거라는 사실이다. 알아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