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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

황지우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설레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 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 더보기
함민복 - 만찬(晩餐) 만찬(晩餐) - 함민복 혼자 사는 게 안쓰럽다고 반찬이 강을 건너왔네 당신 마음이 그릇이 되어 햇살처럼 강을 건너왔네 김치보다 먼저 익은 당신 마음 한 상 마음이 마음을 먹는 저녁 * 누가 요즘 쓸쓸하냐고 묻길래 아니라고 답했다. 하지만 고독하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겠노라 했다. 환과고독(鰥寡孤獨)이란 말이 있다. '늙어서 아내가 없는 사람, 젊어서 남편 없는 사람, 어려서 어버이 없는 사람, 늙어서 자식 없는 사람'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맹자가 했던 말인데 그는 주(周)나라 문왕의 사례를 들어 어진 정치를 베풀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 더이상 나는 어리지 않기 때문에 고독하지 않다. 어쩌면 지금 나의 고독은 그런 외부적 환경에 의한 고독이라기 .. 더보기
유종원(柳宗元) - 강설(江雪) 江雪 - 유종원(柳宗元, 773~819) 온산에 새 한마리 날지 않고 모든 길에는 이미 인적마저 끊겼는데 외로운 배 위엔 도롱이 걸치고 삿갓 쓴 늙은이 홀로 낚시질, 차운 강에는 펄펄 눈만 내리고 千山鳥飛絶 萬徑人踪滅 孤舟蓑笠翁 獨釣寒江雪 * 낚시엔 취미가 없었다. 생명을 걸고 생명을 낚는 일이 낚시라서 나는 낚시가 싫었다. 아마 삿갓 쓴 저 노인이 낚고자 한 건 세월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눈 내리는 강가에서 물고기 낚일리 없으니... 더보기
오세영 - 그릇 1 그릇1 - 오세영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한다. 맹목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 '君子不器'라 했다. 나는 이 오세영 시인의 시론을 보여주는 시라 평할 만 하다고 생각했다. 절제와 균형은 그의 시세계를 이루는 대위법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는 언제나 중심이 도사리고 있다. 표현은 중심에서 어긋나지 않으므로 파격적인 표현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엔 언제나 힘이 있다. 까닭은 오세영의 시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중심이 아니라 '부드럽고 유연.. 더보기
나희덕 - 상현(上弦) 상현(上弦) - 나희덕 차오르는 몸이 무거웠던지 새벽녘 능선 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다 神도 이렇게 들키는 때가 있으니! 때로 그녀도 발에 흙을 묻힌다는 것을 외딴 산모퉁이를 돌며 나는 훔쳐보았던 것인데 어느새 눈치를 챘는지 조금 붉어진 얼굴로 구름 사이 사라졌다가 다시 저만치 가고 있다 그녀가 앉았던 궁둥이 흔적이 저 능선 위에는 아직 남아 있을 것이어서 능선 근처 나무들은 환한 상처를 지녔을 것이다 뜨거운 숯불에 입술을 씻었던 이사야처럼 * 상현(上弦)달을 영어로는 'first quarter'라 부른다. 과학적인 표현일진 몰라도 매가리 없고, 풀 죽는 느낌이다. 신화의 세계에서 달은 언제나 여신의 얼굴을 하고 있다. 원시시대 인류가 사냥과 채집에서 돌아와 동굴 속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서로의 온기로 휴식.. 더보기
옥타비오 파스 - 서로 찾기 서로 찾기 -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 Lozano) 나의 몸에서 너는 산을 찾는다 숲 속에 묻힌 산의 태양 너의 몸에서 나는 배를 찾는다 갈 곳을 잃은 밤의 한중간에서 * ◀ 1937년 무렵의 옥타비오 파스(1914~1998) 나는 정신의 사랑보다 몸의 사랑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랑의 유물론'쯤이라고 해두자. 이 말은 지금 그대가 내 곁에 없어도 여전히 그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난 지금 그대가 내 곁에 없어 미칠 것 같고, 죽을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세상의 모든 사랑이 의심받고 엄살로 치부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사랑Eros의 완성체, 진정한 종결자는 결혼, 생식 - 이건 과정일 뿐 - 이 아니라 죽음Thanatos이다. 같은 의미에서 옥타비오.. 더보기
송종찬 - 별을 보며 별을 보며 - 송종찬 한여름 제자 앞에서 빤스 바람에 스스럼없이 담배를 무는 스승의 시론은 曲卽全이다 우주의 고향 고흥반도에 와서 불어오는 갯바람에 막무가내로 떠 있는 별을 본다 별 촘촘히 박혀 있는 하늘의 길은 곡선인가 직선인가 살아간다는 건 변산반도의 구불구불한 해안선이 아니고 김제평야의 바둑판 같은 면도 아닌데 강을 향해 돌을 던지듯 먼 마음에 점 하나를 찍어놓고 징검다리를 건너가듯 내 사랑하는 여인들을 이어보아도 선이 되지 않는다 내 지나왔던 길들을 이어보아도 면이 되지 않는다 별들 사이로 보이는 길 없는 길 내 사랑도 먼 우주를 돌고 돌아 대숲처럼 흔들리고 있는 것인가? 송종찬, 쿨투라, 2009년 봄호(통권13호) * 선도, 면도 되지 못하는 것인데 시인은 어찌 대숲처럼 흔들리는 사랑을 보았을.. 더보기
송기영 - 토마토 하나의 이유 토마토 하나의 이유 - 송기영 엄마는 기어코 토마토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 불렀습니다. 못마땅했지만 엄마와 장에 나가 기수, 선규, 홍구, 계영, 소연, 재정, 춘희, 현구, 보경이, 영식이를 팔았습니다. 덤으로 만수와 은이를 넣어주자, 만수가 싱싱하지 않다며 엄마가 아끼는 정이를 집어 들었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막무가내여서, 만수에다 천수까지 얹어주고 삼천 원을 받았습니다. 잔돈을 거슬러주다가, 아주머니 이 사이에 낀 정이를 보고 화가 났습니다. 반 토막 난 정이를 찾으려고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비닐 봉지가 터지며 홍구, 계영, 보경이가 흙바닥을 떼구루루 굴렀습니다. 홍구, 계영, 보경이를 안고 얼굴을 씻기던 엄마가 마침내 싸움을 말렸습니다. 왜들 싸우구 그래? 그깟 토마토 하나 가지구. 송기영, 『.. 더보기
고트프리트 벤 - 혼자 있는 사람은 혼자 있는 사람은 - 고트프리트 벤 혼자 있는 사람은 또한 신비 속에 있는 사람, 그는 언제나 이미지의 밀물 속에 젖어 있다. 그 이미지들의 생성, 그 이미지들의 맹아, 그림자조차도 불꽃을 달고 있다. 그는 모든 층을 품고 있고 사색에 충만하며 그것을 비축해 두고 있다. 그는 파멸에 강하며 남을 부양하고 짝을 맺어주는 모든 인간적인 것에 강하다. 대지가 처음과는 다른 것으로 바뀌는 것을 그는 아무 감동 없이 바라본다. 더는 죽을 것도, 더는 이루어질 것도 없이 조용한 형식의 완성이 그를 지켜 보고 있을 뿐. * 종종 혼자 있을 수 있다면 하는 상상을 해보지만, 혼자 머무는 시간 동안엔 절대 그걸 꿈꾸지 않는다. "혼자 있는 것이 조용한 형식의 완성이 될 수 있다." 고 시인은 말한다. "더는 죽을 것도,.. 더보기
강희안 - 탈중심주의(脫中心注意) 脫中心注意 - 강희안 캠릿브지 대학의 연결구과에 따르면, 한 단어 안에서 글자가 어떤 순서로 배되열어 있는가 하것는은 중하요지 않고, 첫째번와 마지막 글자가 올바른 위치에 있것는이 중하요다고 한다. 나머지 글들자은 완전히 엉진창망의 순서로 되어 있지을라도 당신은 아무 문없제이 이것을 읽을 수 있다. 왜하냐면 인간의 두뇌는 모든 글자를 하나하나 읽것는이 아니라 단어 하나를 전체로 인하식기 때이문다. 너는 전후에 존재한다. 고로 나는 가운데토막이다. 출처 : 강희안, 『나탈리 망세의 첼로』, 천년의시작 * 언젠가 TV의 과학상식 프로그램에서 우리의 감각능력이 얼마나 쉽게 혼돈당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실험을 본 적이 있다. 그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실험은 피실험자에게 입만 벙긋벙긋하여 소리내지 않으면서 '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