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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

이면우 - 그 나무, 울다 그 나무, 울다 - 이면우 비오는 숲 속 젖은나무를 맨손으로 쓰다듬다 사람이 소리없이 우는 걸 생각해봤다 나무가 빗물로 목욕하듯 사람은 눈물로 목욕한다! 그 다음 해 쨍하니 뜨면 나무는 하늘 속으로 성큼 걸어 들어가고 사람은 가뿐해져서 눈물 밖으로 걸어나오겠지 출처 : 이면우, 『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 - 물길시선 1 | 북갤럽 * 가끔 ‘슬픔’은 식물성이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 사람들은 곧잘 식물에 정성을 기울인다. 말없이 고요하게 화분에 담겨있는 식물의 잎사귀에 물을 대주고, 마른 걸레로 젖은 물기를 닦아내며 내 안에 가득한 슬픔으로 축축한 습기들도 함께 닦아내면서 우리도 그와 함께 말을 잊는다. 식물은 말을 하지 않으며 몸을 피하지도 않지만 벼가 부지런한.. 더보기
이문재 - 물의 결가부좌 물의 결가부좌 - 이문재 거기 연못 있느냐 천 개의 달이 빠져도 꿈쩍 않는, 천 개의 달이 빠져 나와도 끄떡 않는 고요하고 깊고 오랜 고임이 거기 아직 있느냐 오늘도 거기 있어서 연의 씨앗을 연꽃이게 하고, 밤새 능수버들 늘어지게 하고, 올여름에도 말간 소년 하나 끌어들일 참이냐 거기 오늘도 연못이 있어서 구름은 높은 만큼 깊이 비치고, 바람은 부는 만큼 잔물결 일으키고, 넘치는 만큼만 흘러넘치는, 고요하고 깊고 오래된 물의 결가부좌가 오늘 같은 열엿샛날 신새벽에도 눈뜨고 있느냐 눈뜨고 있어서, 보름달 이유는 이 신새벽 누가 소리 없이 뗏목을 밀지 않느냐, 뗏목에 엎드려 연꽃 사이로 나아가지 않느냐, 연못의 중심으로 스며들지 않느냐, 수천수만의 연꽃들이 몸 여는 소리 들으려, 제 온몸을 넓은 귀로 만드는.. 더보기
황지우 -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고향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고향 - 황지우 고향이 망명지가 된 사람은 폐인이다. 출항했던 곳에서 녹슬고 있는 폐선처럼 옛집은 제자리에서 나이와 함께 커져가는 흉터; 아직도 딱지가 떨어지는 그 집 뒤편에 1950년대 후미끼리 목재소 나무 켜는 소리 들리고, 혹은 눈 내리는 날,차단기가 내려오는 건널목 타종 소리 들린다. 김 나는 국밥집 옆을 지금도 기차가 지나가고. 나중에는 지겨워져서 빨리 죽어주길 바랐던 아버지가 파자마 바람으로 누워 계신 그 옛집, 기침을 콜록콜록, 참으면서 기울어져 있다. 병들어 집으로 돌아온 자도 폐인이지만 배를 움켜쥐고 쾡한 눈으로 나를 쏘아보신 아버지, 삶이 이토록 쓰구나, 너무 일찍 알게 한 1950년대; 새벽 汽笛에 말똥말똥한 눈으로 깨어 공복감을 키우던 그 축축한 옛집에서 영원한 .. 더보기
오세영 - 연(鳶) 연(鳶) - 오세영 위로 위로 오르고자 하는 것은 그 무엇이든 바람을 타야 한다. 그러나 새처럼, 벌처럼, 나비처럼 지상으로 돌아오길 원치 않는다면 항상 끈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 것, 양력(揚力)과 인력(引力)이 주는 긴장과 화해 그 끈을 끊고 위로 위로 바람을 타고 오른 것들의 행방을 나는 모른다. 다만 볼 수 있었던 것, 갈기갈기 찢겨져 마른 나뭇가지에 걸린 연, 혹은 지상에 나뒹구는 풍선의 파편들, 확실한 정체는 모르지만 이름들은 많았다 마파람, 샛바람, 하늬 바람, 된 바람, 회오리, 용오름…… 이름이 많은 것들을 믿지 마라. 바람난 남자와 바람난 여자가 바람을 타고 아슬아슬 허공에 짓던 집의 실체를 나 오늘 추락한 연에서 본다 출처 : 『학산문학』, 2008년 가을호(통권 61호) * 오세영 선.. 더보기
아리엘 도르프만 - 둘 곱하기 둘 둘 곱하기 둘 - 아리엘 도르프만(Ariel Dorfman) 동지여, 감방에서 그 방까지 몇 걸음 걸리는지 우리 모두 알고 있다오. 스무 걸음이라면 화장실로 그대를 데려가는 게 아니라오. 마흔다섯 걸음이라면 운동하라고 그대를 데리고 나가는 건 절대 아니라오. 여든 걸음을 세고 나서 장님처럼 고꾸라지듯이 층계를 오르기 시작하면 오, 여든 걸음이 넘는다면 오직 한 군데가 있을 뿐이오 그들이 그대를 끌고 갈 수 있는 곳은. 오직 한 군데가 있을 뿐이오 오직 한 군데가 있을 뿐이오 그들이 그대를 끌고 갈 수 있는 곳은 이제는 오직 한 군데밖에 없다오 출처 : 아리엘 도르프만, 이종숙 옮김, 『싼띠아고에서의 마지막 왈츠』, 창작과비평사, 1998. * 내 주변엔 감옥에 다녀온 사람들이 꽤 많다. 그러다보니 주변 .. 더보기
김영승 - 아방가르드 아방가르드 - 김영승 아무도 없는 곳 그게 유토피아고 아방가르드다 오늘은 청명(淸明)이고 내일은 한식(寒食) 공주횟집 진열장엔 산낙지 15,000원이라고 써 있다 나는 나의 심야(深夜)산책을 재개(再開)하고 걷고 또 걸어서 연수성당 뒷길 여성회관 옆 조일사 건물을 훤히 쓰윽 한 번 올라갔다가 내려온다 그 2층 짜리 낡은 건물 옥상엔 역시 아무도 없다 불량(不良) 청소년들도 오지 않는 적막강산(寂寞江山) ― 그렇다고 산낙지가 어떻게 한 접시에 15,000원이냐? 낙지 한 마리 없는 옥상(屋上)은 칠흑의 심해(深海) 멀리 아파트가 인공어초(人工魚礁) 같고 여자(女子)들은 다 아전인수(我田引水) 발버둥을 치고 있다 출처 : 문학들, 2008년 가을호(통권 13호) * 김영승 시인의 는 첫 구절만으로 이미 시가.. 더보기
로버트 블라이 - 사랑의 시 사랑의 시 로버트 블라이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풀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헛간도, 가로등도 그리고 밤새 황량한 작은 중앙로도 Love Poem Robert Bly When we are in love, we love the grass, And the barns, and the lightpoles, And the small mainstreets abandoned all night. * 어릴 적 사랑에 빠졌을 땐 그것이 가능하리라 믿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사랑에 빠지면 더이상 외롭지 않을 것이라거나 혼자라는 느낌 같은 거 갖지 않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외롭거나 혼자라는 느낌이 지독하면 지독할수록 사랑은 더욱더 강력한 구원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이 깨어졌을 때, 그리고 다음의 사랑이.. 더보기
D.H.로렌스 - 제대로 된 혁명 제대로 된 혁명 - D.H.로렌스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 소름끼치도록 심각하게는 하지 마라 너무 진지하게도 하지 마라 그저 재미로 하라 사람들을 미워하기 때문에는 혁명에 가담하지 마라 그저 원수들의 눈에 침이라도 한번 뱉기 위해서 하라 돈을 쫓는 혁명은 하지 말고 돈을 깡그리 비웃는 혁명을 하라 획일을 추구하는 혁명은 하지 마라 혁명은 우리의 산술적 평균을 깨는 결단이어야 한다 사과 실린 수레를 뒤집고 사과가 어느 방향으로 굴러가는가를 보는 짓이란 얼마나 가소로운가? 노동자 계급을 위한 혁명도 하지 마라 우리 모두가 자력으로 괜찮은 귀족이 되는 그런 혁명을 하라 즐겁게 도망치는 당나귀들처럼 뒷발질이나 한번 하라 어쨌든 세계 노동자를 위한 혁명은 하지 마라 노동은 이제껏 우리가 너무 많이 해온 것.. 더보기
고은 - 대담한 낙서 대담한 낙서* - 고은 여름방학 초등학교 교실들 조용하다 한 교실에는 7음계 '파'음이 죽은 풍금이 있다 그 교실에는 42년 전에 걸어놓은 태극기 액자가 있다 또 그 교실에는 그 시절 대담한 낙서가 남아있다 김옥자의 유방이 제일 크다 출처 : 고은, 『순간의 꽃』, 문학동네(2007) * 본래 이 시엔 제목이 없지만 전체 구성으로 보아 내 임의대로 '대담한 낙서'란 제목을 붙여 보았다. ** 일본에는 “한 줄도 길다”는 짧은 정형시의 대명사 ‘하이쿠'가 있다. 시(詩)도 유행을 타는 지 요즘 나오는 시들 가운데는 수사학적인 기교로 충만한 긴 시편들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런 시들은 문학적 성취와 별개로 일단 정이 가지 않는다. 말씀언(言)에 절사(寺)가 붙어 시(詩)라 부르는 데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 더보기
연왕모 - 연애편지:주인님께 연애편지 - 주인님께 연왕모 어젯밤 내내 비가 왔어요 빗소리와 숨소리가 뒤섞여 귀가 자꾸만 먹먹해졌고요 빗줄기에 부딪히는 날숨들이 허둥대며 가슴으로 돌아 들어왔어요 울컥 쏟아진 붉은 잉크에 편지지는 붉다가 이내 검게 변해갔고요 어둠 속에 묻혀갔어요 아침이 오니 햇빛만 마냥 밝아요 놓여 있던 것들은 모두 하얗다가 이내 떠나버렸고요 책상 위엔 먼지만 들떠 있네요 출처 : 문학과사회, 2008년 가을호(통권83호) * 연왕모 시인의 신작시 3편이 『문학과사회』 가을호에 실렸다. 시 제목이 인데 제목보다 “주인님께”라는 부제가 더 마음에 든다. 사랑에 대해서야 다종다양한 정의가 있겠지만 난 가끔 연애란 건 누군가를 잠시 동안이든, 영원이든 주인으로 모시는 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제목은 이지만 내용은 실연(失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