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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

박경리 - 옛날의 그 집 옛날의 그 집 -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 더보기
허수경 - 혼자 가는 먼 집 혼자 가는 먼 집 - 허수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사,.. 더보기
이원규 - 겁나게와 잉 사이 겁나게와 잉 사이 - 이원규 전라도 구례 땅에는 비나 눈이 와도 꼭 겁나게와 잉 사이로 온다 가령 섬진강변의 마고실이나 용두리의 뒷집 할머니는 날씨가 조금만 추워도, 겁나게 추와불고마잉! 어쩌다 리어카를 살짝만 밀어줘도, 겁나게 욕봤소잉! 강아지가 짖어도, 고놈의 새끼 겁나게 싸납소잉! 조깐 씨알이 백힐 이야글 허씨요 지난 봄 잠시 다툰 일을 얘기하면서도 성님, 그라고봉께 겁나게 세월이 흘렀구마잉! 궂은 일 좋은 일도 겁나게와 잉 사이 여름 모기 잡는 잠자리 떼가 낮게 날아도 겁나게와 잉 사이로 날고 텔레비전 인간극장을 보다가도 금세 새끼들이 짜아내서 우짜까이잉! 눈물 훔치는 너무나 인간적인 과장의 어법 내 인생의 마지막 문장 허공에라도 비문을 쓴다면 꼭 이렇게 쓰고 싶다 그라제, 겁나게 좋았지라잉! 출.. 더보기
김해자 - 길을 잃다 길을 잃다 - 김해자 전태일기념사업회 가는 길 때로 길을 잃는다 헷갈린 듯 짐짓 길도 시간도 잊어버린 양 창신동 언덕배기 곱창 같은 미로를 헤매다 보면 나도 몰래 미싱소리 앞에 서 있다 마찌꼬바 봉제공장 중늙은이 다 된 전태일들이 키낮은 다락방에서 재단을 하고 운동 부족인 내 또래 아줌마들이 죽어라 발판 밟아대는데 내가 그 속에서 미싱을 탄다 신나게 신나게 말을 탄다 문득 정신 들고나면 그 속에 내가 없다 현실이 없다 봉인된 흑백의 시간은 가고 기념비 우뚝한 세상 거리와 사업에 골몰한 우리 속에 전태일이 없다 우리가 없다 회의도 다 끝난 한밤중 미싱은 아직도 돌고 도는데 김해자, 『황해문화』, 2005년 겨울호(통권49호) * 내가 아직 ‘바람구두’라 불리기 전에 나는 떠돌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 더보기
허연 -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 허연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너무나 처연하게 늘 한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더보기
최영미 - 서투른 배우 서투른 배우 - 최영미 술 마시고 내게 등을 보인 남자. 취기를 토해내는 연민에서 끝내야 했는데, 봄날이 길어지며 희망이 피어오르고 연인이었던 우리는 궤도를 이탈한 떠돌이별. 엉키고 풀어졌다, 예고된 폭풍이 지나가고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너와 나를 잇는 줄이 끊겼다 얼어붙은 원룸에서 햄버거와 입 맞추며 나는 무너졌다 아스라이 멀어지며 나는 너의 별자리에서 사라졌지 우리 영혼의 지도 위에 그려진 슬픈 궤적. 무모한 비행으로 스스로를 탕진하고 해발 2만 미터의 상공에서 눈을 가린 채 나는 폭발했다 흔들리는 가면 뒤에서만 우는 삐에로. 추억의 줄기에서 잘려나간 가지들이 부활해 야구경기를 보며, 글자판을 두드린다. 너는 이미 나의 별자리에서 사라졌지만 지금 너의 밤은 다른 별이 밝히겠지만… 최영미, 『문학사상』,.. 더보기
김형영 - 별 하나 별 하나 - 김형영 별 하나 아름다움은 별 둘의 아름다움, 별 둘 아름다움은 별 셋의 아름다움, 별 셋 아름다움은 별 여럿의 아름다움, 별 여럿 아름다움은 별 하나의 아름다움, 별 하나 별 둘 어우러지고 별 둘 별 셋 어우러지고 별 셋 별 여럿 어우러지고 별 여럿 별 하나 어우러지고 아름다운 하늘의 별 어느 별 하나 혼자서 아름다운 별 없구나. 혼자서 아름다우려 하는 별 없구나. 출처 : 김형영, 다른 하늘이 열릴 때, 문학과지성사, 1987 * 세시(歲時)에 받은 일지(日誌) 중 세모(歲暮)가 되어 들춰보면 아무런 메모나 기록 한 줄 없이 말끔한 날들이 있다. 중도에 찢겨나간 일지도 있고, 낙서로 가득한, 지금은 누구에게 무슨 일로 받았는지 기억나지 않는 전화번호가 적힌 일지도 있다. 살다보면 의미로 .. 더보기
김선우 - 이건 누구의 구두 한짝이지? 이건 누구의 구두 한 짝이지? - 김선우 내 구두는 애초에 한 짝, 한 켤레란 말은 내겐 폭력이지 이건 작년의 구두 한 짝 이건 재작년에 내다 버렸던 구두 한 짝 이건 재활용 바구니에서 꽃씨나 심을까 하고 살짝 주워온 구두 한 짝, 구두가 원래 두 짝이라고 생각하는 마음氏 빗장을 푸시옵고 두 짝이 실은 네 짝 여섯 짝의 전생을 가졌을 수도 있으니 또한 마음 푸시옵고 마음氏 잃어버린 애인의 구두 한 짝을 들고 밤새 광장을 쓸고 다닌 휘파람 애처로이 여기시고 서로 닮고 싶어 안간힘 쓴 오른발과 왼발의 역사도 긍휼히 여기시고 날아라 구두 두 짝아 네가 누군가의 발을 단단하게 덮어줄 때 한 쪽 발이 없는 나는 길모퉁이 쓰레기통 앞에서 울었지 울고 있는 다른 발을 상상하며 울었지 내 구두는 애초에 한 짝, 한 켤.. 더보기
이백(李白) - 산중문답(山中問答) 산중문답(山中問答) - 이백(李白, 701 ~ 762) 問余何事棲碧山 笑而不答心自閒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 왜 산에 사느냐 묻기에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아니했네 복사꽃잎 아득히 물 위로 떠 가는 곳 여기는 별천지라 인간 세상 아니라네. * 가끔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 당신은 왜 회사 이야기를 집에 와서 하지 않느냐는 아내의 말부터, 친구들에게 당신은 남의 인생상담은 잘 해주면서 자기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다는 말, 혹은 그래도 당신은 당신 하고 싶은 대로 다하면서 살고 있지 않느냐는 부러움 아닌 부러움을 듣곤 한다. 그럴 때 나는 그냥 웃기만 한다. 내가 이백이라면 별천지, 인간 세상 아닌 곳에 살아서 그렇다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사람 사는 세상이 왜 아니 힘들고, 어려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 더보기
미겔 에르난데스(Miguel Hernandez) - 투우(鬪牛)처럼 투우(鬪牛)처럼 Como el toro - 미겔 에르난데스(Miguel Hernandez) 투우(鬪牛)처럼 죽음과 고통을 위해 나는 태어났습니다. 투우처럼 옆구리에는 지옥의 칼자국이 찍혀 있고 서혜부에는 열매로 남성(男性)이 찍혀 있습니다. 형용할 수 없는 이내 가슴 전부는 투우처럼 보잘 것 없어지고 입맞춤의 얼굴에 반해서 그대 사랑 얻기 위해 싸우겠습니다. 투우처럼 나는 징벌 안에서 자라나고, 혀를 가슴에 적시고 소리 나는 바람을 목에 걸고 있습니다. 투우처럼 나는 그대를 쫓고 또 쫓습니다. 그대는 내 바램을 한 자루 칼에 맡깁니다. 조롱당한 투우처럼, 투우처럼. 출처 : 미겔 에르난데스, 양파의 자장가, 솔 * "라틴" 하면 어째서 먼저 '태양'이 떠오르는 걸까. 그 뜨거움이 먼저 내 몸을 달아오르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