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일상, 대중 : 문화에 관한 8개의 탐구 ㅣ 박명진 외 / 한나래 / 1996년 12월




1996년
대한민국 사회에서 새로운 키워드들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더이상 혁명도, 민중도 아닌 문화와 일상, 대중이었다. 현실사회주의라 명명된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몰락 이후 대한민국 사회는 단순히 맑스 원전의 번역만 뒤늦은 것이 아니라 세계화라는 새로운 트렌드에도 매우 뒤늦었다는 사실을 어느날 갑자기 충격적으로 깨닫는다. 마치 지구를 정복하러 온 외계 비행체에 지구의 컴퓨터 바이러스를 심어 일거에 무력화시킨다는 발상처럼 일순간에 대한민국 사회는 포스트모던이란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설명되고,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글쎄,
이 책은 내가 앞서 말하고 있는 서론 격의 이야기처럼 그리 거창한 이야기에 잘 어울리는 책은 아니다. 그보다는 대학에서 새로운 문화이론을 고민하고, 가르쳐야 하는 8명의 교수, 연구자들이 모여  세미나를 진행했고, 그들이 공부했던 서구의 문화이론가들, 학자들의 텍스트를 우리 말로 번역해 하나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처음부터 교과서라는 텍스트의 본래 의미에 가장 잘 부합하는 책이고, 나 역시도 그런 텍스트로 이 책을 접했다. 이 책에 수록된 논문들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피에르 부르디외, 레이먼드 윌리엄스를 비롯해 아는 이들에게는 그들 못지 않게 유명한 니콜라스 간햄, 존 피스크 그리고 미셀 드 세르토 등의 논문 8편이 번역,수록되었다.


미셀
드 세르토의 이름 앞에 '그리고'를 붙인 까닭은 내가 알기로 세르토의 논문 가운데 우리 말로 번역된 유일한 글이 이 책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최소한 현재까지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이 책은 제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크게 보아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문 격에 해당하는 박명진 선생의 글 "문화 연구 - 새로운 시각의 모색을 위하여"부터 "문화에서 탈문화로 - 스티븐 크루크, 장 파컬스키, 맬컴 워터스""부르디외: 문화 자본과 아비투스"는 문화 편에 해당하는 것이고, 부르디외의 "예술적 취향과 문화 자본", 니콜라스 간햄,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피에르 부르디외와 문화 사회학: 입문", 드 세르토의 "일상 생활의 실천", "도시 속에서 걷기" 등은 일상 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존 피스크의 "팬덤의 문화 경제학", 존 클라크, 스튜어트 홀, 토니 제퍼슨, 브라이언 로버츠의 "하위 문화, 문화, 그리고 계급", 토니 베넷의 "대중성과 대중 문화의 정치학"은 대중 편에 해당한다.


일반적인
정의는 아니고, 내 개인적인 정의 혹은 그래야 한다는 내 믿음일지는 모르겠으나 역사적 맥락으로 보았을 때, 문화연구는 맑스의 정치경제학으로 설명될 수 없는 사회 구조, 혹은 이미 한 차례 실패를 경험한 서유럽 좌파의 고민과 모색의 결과물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스스로 주장하는 바대로 문화인류학적인 방법론과 본인들은 때때로 부정하고 싶어하지만 프랑스 구조주의의 지대한 영향력 아래 놓여있다. 거기에 덧붙여 문화연구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영국의 독특한 문학문화(Literacy Culture)와 좌파 역사학의 영향이 합쳐져서 그들만의 독특한 연구 방법론 혹은 분위기를 창출해냈다. 사실 문화연구는, 문화라는 모든 것일 수도 있고,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그 연구대상의 폭넓음으로 인해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에겐 치명적인 악몽이며 기존의 아카데미 시스템 속에서 이미 충분한 기득권을 누리는 학자들에겐 사기꾼 집단처럼 보일 수 있다.


신문방송학,
비판커뮤니케이션학의 한 분파일 수도 있고, 인문학적으로는 문화인류학, 문화사학의, 또 사회학적으로는 문화사회학, 지식사회학의 한 지류처럼 보이기도 한다. (문화연구는 어쩌면 실제로도 흘러가는 유행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한동안 국내 소장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직종 가운데 하나가 다소 뜬금없이 출현한 '문화비평가'란 것이었다. 역사적 뿌리가 없는 비평 행위가 지속되기 어렵다는 점을 반증하기라고 하는 양 1997년 IMF 외환 대란이라는 된서리를 맞고 나서 문화비평가라는 직종은 더이상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이 책은 바로 그 직전에 나와서 현재까지 여러 대학에서 문화연구 혹은 문화이론의 제반 분야들을 공부하는 교재 중 하나로 이용되고 있다. 읽노라면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엄청난 문화환경의 변화라는 것이 다각도로 실감난다. 하나는 이 책의 저자들이 예시로 들고 있는 급변하는 문화환경들이 이미 오래전의 급변들이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책의 저자들이 고민하는 문화연구 자체의 필요성에 대한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책을 읽으면서
재미있었던 점은 피에르 부르디외와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사실 동시대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부터였다(우습게도 나는 윌리엄스가 부르디외 보다 훨씬 전 세대 사람으로, 느낌상으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 사람은 영국의 좌파이자 문화주의 문화연구가(문학비평가)로 다른 한 사람은  프랑스의 좌파이자 구조주의 문화연구가로 활동한 사람인데,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니콜라스 간햄과 함께 피에르 부르디외의 연구가 어떻게 정치경제학과 문화론적인 연구가 서로를 보완하면서 통합하는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지를 설명하고 있다. 다들 아는 이야기겠지만 맑스는 고전 경제학과 결별하는 방법으로 경제학에 정치학(혹은 사회학)을 도입한다. 당대 최고의 뛰어난 문화적 교양인이기도 했던 맑스는 그러나 사회의 구조를 밝히는 과정에서 문화에 대한 진술(다들 아시다시피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짓는다"를 제외하고는)을 거의 공백 상태로 남겨놓는다. 그런 점에서 맑스 이후 맑스를 계승하고자 했던 이들은 이 부분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어야만 했다.


영국 좌파이자
문화주의 문화연구의 중요한 이론가였던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여러 차례 맑스와의 결별을 시도했으나 끝끝내 결별하지 못한다. 어째서일까? 그건 지금 우리가 그와 결별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와 흡사하다. 여전히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물적 토대가 존재하고 있으며, 변화된 자본주의 아래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주체성을 밝히는 도구로서도 여전히(낡기는 했으나)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문화연구가 영원히 정치경제학과 결별할 수 없다고 판단하며 문화연구의 본질은 결국 "문화+정치경제학"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맑스가 진술하지 못한 부분들을 찾을 때에야 비로소 문화연구라는 하나의 방법론이 존재하는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이 전지구적 피라미드의 하부구조가 어떻게 상부구조에 의해, 보이지 않는 검은 손에 의해 통제되는지, 문화와 자본주의의 결합은 얼마나 우리의 숨통을 옭죄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작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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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정치 문명 - 권용립 지음 / 삼인 / 2003년




문명(civilization)은 시민을 뜻하는 라틴어 '키비스(civis)' 와 도시를 뜻하는 '키빌리타스(civilitas)' 에서  유래한 말이다. 문화비평가 김창남은 "문화가 물질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개념으로 인간의 사고와 표현의 뛰어난 정수로 본다면, 여기에는 예술에 대한 지식과 실천을 통한 정신적 완성의 추구라는 열망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종종 문화(culture)와 문명은 서로 대치되는 개념으로 파악되거나 문화의 특수한 한 형태로 파악되어 서로 연결되거나 혼용되어 사용되는 등 실제 사용에 있어 매우 다양한 뜻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문화가 정신적인 발전 상태(가치)를 의미하는 말이라면, 문명은 물질의 발전 상태를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문화인류학의 영향으로 문화 가운데 도시적인 요소, 고도의 기술, 작업의 분화, 사회 계층 분화를 갖는 복합문화(문화의 복합체)를 큰 단위로 파악한 총체를 문명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권용립 선생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어서 마침 가지고 있던 이 책
"미국의 정치문명"에 저자의 사인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 사회와 미국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고 보니, 나의 서재에는 미국 관련 서적들이 책꽂이 두어 칸을 빼곡이 채울 정도가 되었다. 하워드 진, 리처드 O. 보이어, 노암 촘스키, 이냐시오 라모네, 리오 휴버만, 마이크 데이비스 같은 외국 학자들과 국내 학자들의 책들이 그것이다. 책 많다고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그 같은 책들과 권용립의 이 책은 상당히 다른 책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책들이 미국의 역사, 경제, 사회, 외교 정책 등등에 대한 책이라면 권용립의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미국의 정치 문명에 대해 규명하고, 분석하려 한 책이란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 1880년대 후반에 촬영된 서울의 미국 공사관 모습(출처. University of Arkansas Libraries)



권용립은 미국과 우리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이 미국과 수교한 것은 1882년이지만 미국이 한반도의 정치적 운명과 한국인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이후부터다. ...<중략>... 해방 이후의 한국에 엘리트를 공급하고 재생산하는 본거지였으며, 한국의 지배계층은 대부분 미국에서 공부하거나 살아본 사람들이었고 미국과 어떤 종류든 내연의 커넥션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인에게 미국은 적어도 1970년대까지는 '타인의 나라'이기 이전에 '대한민국의 피안'이었고 '세계'로 나가는 거의 유일한 출구였다. <본문 29쪽>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 사회 내연의 커넥션에
"이산 가족"이 존재했다면,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뒤인 1970년대 우리 사회 내연의 커넥션 안에는 "이민 가족"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민족 공동체인 북한보다 심정적으로 미국이 더 가깝게 여겨지는 이유는 단순히 정치경제적인 이유만이 아닌 내연의 깊은 속사정이 있었던 거다.  


▶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조선대표 신헌과 미국 해군의 로버트 윌슨 슈펠트 제독은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조인하였다. 1876년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김기수에게 고종이 미국의 위치를 묻자 김기수는
“서양의 서쪽, 동양의 동쪽에 있다고 합니다.”라고 두리뭉술하게 답해야할 정도로 잘 알지 못했던 먼 이역의 나라 미국은 그저 오랑캐 나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이 받아 온 『조선책략』을 통해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단박에 뒤집어진다. “예의로 나라를 세웠기에 남의 땅과 백성을 탐하지 않으며, 굳이 정치에 간여하지도 않는다.”는 미국에 대한 일방적 찬사가 가득 담긴 이 책은 러시아의 침략성을 과장되게 표현하면서 이를 막고자 한다면 미국과 손을 잡아야만 한다고 했다. 이때부터 약소국 편에 서는 정의롭고 공평하며 부강한 나라, 미국의 이미지가 우리 위정자들의 뇌리에 새겨진 건 아닐까?


서유럽과 다른 정치 문명 - 미국


권용립은 책 머리에서 서구적 비전으로 바라볼 때, 대개의 학자들 슈펭글러, 소로킨, 토인비 등의 문명론에서 서유럽과 미국을 동일한 문명권으로 상정하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최근 우리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새무얼 헌팅턴의 '문명충돌' 역시 미국을 별도의 문명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선 토인비 등과 동일하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권용립은 미국과 서유럽의 정치 문명은 분명한 차이를 가진 별도의 문명이란 주장을 하고 있다. 그것이 이 책의 핵심 내용이다. 미국이 서유럽의 정치 문명과 다른 가장 큰 차이는 농축된 기억의 유무이다.


역사시대의 긴 세월을 수많은 굴절과 변화 속에서 보낸 서유럽 국가들과 달리 미국은 국가를 설계한지 불과 150여년 만에 세계 최강의 공화국 아메리카 제국을 건설해냈다. 서유럽 국가들이 상상의 공동체든, 아니든 간에 실제 피를 나눈 역사적 민족과 그 집단적 기억이 교직되면서 형성된 민족국가인데 반해 미국은 먼저 국가와 이념을 설계해놓고 그런 뒤에 받아들인 여러 인종의 이민을 통해 건설된
(기억을 제조해낸) 나라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미국의 국가 설계 과정을 담당한 담론이 미국의 건국 신화가 되고, 이것이 미국이란 국가의 정체성을 제공해준다. 즉, 이것이 미국의 이데올로기이고, 미국의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현재의 미국 속에서 정치적 응집력을 제공해주는 담론이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현재의 미국 자체가 이데올로기이므로, 이데올로기를 제거할 때 미국은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인류의 보편적 정치 체제를 가진 나라


저자는 미국의 역사와 역사학의 계보를 엮어내면서 19세기 미국 애국주의 역사학의 대부 뱅크로프트의 주장을 보여준다. 뱅크로프트는 미국을 전 세계 문명을 융합한 결정판으로 미화하며 미국의 건국 과정을
"이탈리아의 콜럼버스와 스페인 여왕 이사벨라가 합작한 신대륙 탐험과 발견, 프랑스가 지원한 독립전쟁, 인도에 기원을 둔 영어, 팔레스타인에 그 뿌리를 둔 기독교, 그리스 문명에서 기원한 문화, 로마에서 기원한 법, 영국으로부터 전수받은 대의 제도, 네덜란드 연방으로부터 받아들인 연방제 원리와 사상적 관용의 정신"을 하나로 녹여 인류의 보편적 정치 체제를 가진 나라로 묘사했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한
'상상의 공동체' 가 의미하는 상상이 만약 담론에 의해 구축된 고도의 상징 체계를 의미한다면, 정치적 담론과 정치적 자의식의 산물이란 점에서 미국 국민(American Nation)은 이 정의에 가장 정확하게 부합한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전세계의 인권과 자유를 노래한 측면에는 이런 미국인들의 자의식이 녹아들어 있다. 즉, 미국의 국가 정체는 인류의 정의를 담보한 가장 보편적인 정치 체제이기 때문에 타자(민족, 국가)들은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미국식 문명화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신념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현대 외교사를 살펴보면 비합리적일 정도로 도덕주의적이고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대외정책은 모두 '도덕주의적 외피'를 뒤집어 쓰고 나타난다. 실제로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힘의 정치(power politics)'를 추구하는 현실주의 외교를 수행하면서도 끊임없이 교의
(doctrine, 이 말은 정치학의 주의, 공식 외교 정책을 뜻하지만 그보다 먼저 종교의 교의(敎義), 교리를 의미한다)를 선포하면서 미국의 외교를 정당화하려 한다. 물론 역사 이래 모든 강대국들이 자국의 힘을 합리화하기 위해 애써왔고, 이런 선민 의식은 다른 나라와 민족을 계도할 소명을 타고났다는 확신 속에 극단적 개입주의의 함정에 빠져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구대륙의 타락으로부터 탈출하여 새로운 도덕적 국가로 태어난 미국이야말로 국제 정체 세계에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도덕을 솔선수범한다고 믿었다. 즉, 다른 국가들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차지할 자격과 능력을 지녔다고 확신한다는 점에서 미국의 이런 자의식은 제국주의 혹은 사회진화론적이다. 거기에 캘빈주의적 소명의식이 곁들여지면서 미국의 강자중심주의는 다시 도덕주의적 절대주의가 된다. 즉, 미국의 외교적 행위
(전쟁을 포함한)는 도덕적인 것이며, 신의 섭리에 부합하는 행위이지만, 미국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모든 국제 정치 행위는 반도덕적인 것이며, 신의 섭리에 어긋나는 것이 된다. 그런 까닭에 미국의 자유주의는 스스로를 "구세주의 나라(Redeemer Nation), 해방자로서의 힘, 세계의 십자군"으로 표현된다.


미국의 자유주의는 독립전쟁 직전의 잠시를 제외하곤 봉건성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미국은 태생부터 자유롭게 태어났기에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봉건 잔재와 투쟁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에 미국은 스스로가 일찌기 경험해보지 못한 역사 - 봉건성과 싸워야 하는 나라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풍요로운 자연환경과 바깥 세계의 소란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분리된 지리적 혜택 등으로 인해 마치 배부른 부자가 가난한 이들의 배고픔을 절실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미국이 자신들의 체제를 얼마만큼 모방하는지 그것을 척도로 해서 다른 나라들을 평가하는 경향으로도 알 수 있다.



결어 - 우리 대미 인식의 이중성을 버려라!


권용립은 정치 문명으로서 미국의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은 결국 하나의 지적 구조물(intellectual construction) 즉, 가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이 미국 국민 개개인의 개별 정신 영역에 일일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대다수 미국인들이 믿는 그 무엇, 미국 국민이나 아메리카 합중국의 자의식에 편승한다고 본다. 그러나 먼저 미국과 같은 방식으로 건국된(설계된 국가)의 정신을 해독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설계의 이념을 밝혀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석의 얼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미국의 독자적 정치문명을 이해하고 그 집단 정신의 내면을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저자는 그래야만 브레진스키나 헌팅턴
(혹은 조지 W. 부시, 라이스와 같은 네오콘)이 보여주는 너무나 미국적인 사고, 즉 한국을 미국의 파트너가 아닌 외교적 액세서리로 보는 브레진스키의 태도나 미국의 어떤 정책도 한국의 자유를 무조건 신장시킬 것이라는 헌팅턴의 아전인수격 메시지에 충격을 받거나 분노하는 새삼스러운 일도 없어질 것이라 말한다. 미국을 비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은근히 기대하다가는 다시 배신감을 토로하는 우리 대미 인식의 이중성이 사라져야만, 우리는 미국에 대해 정신적으로 대등한 관계가 될 수 있다. 미국에 대한 환멸조차도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거울, 기대에 따른 미국의 모습이지 실재하는 미국의 모습이 아니란 것이다.


▶ "자, 소망의 거울이 우리 모두에게 무얼 보여준다고 생각하니?"
해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내가 설명해주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소망의 거울을 보통 거울처럼 사용할 수 있단다. 즉, 그것을 들여다보면 정확히 자신의 현재 모습을 보니까 말이다. 도움이 됐니?"
해리는 생각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그건 우리가 원하는 걸 보여줘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구나." 덤블도어가 조용히 말했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소망, 바로 그것을 보여준단다. 넌 네 가족을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네 주위에 그들이 서 있는 걸 보았고, 론 위즐리는 항상 형들에게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형들보다 더 잘되어 혼자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본 거지. 그러나 이 거울은 우리에게 지식이나 진실은 보여주지 않는단다. 사람들은 이 거울이 보여주는 게 진짜인지 혹은 심지어 가능한지조차도 알지 못한 채, 자신들이 본 것에 넋을 잃거나 미쳐서, 이 거울 앞에서 헛되이 시간을 보냈지.
이 거울은 내일 다른 장소로 옮겨질 예정이란다, 해리. 그러니 이것을 다시는 찾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구나. 그리고 만일 이 거울을 다시 보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게다. 꿈에 집착해서 현실을 잃어버리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라는 걸 기억하기 바란다."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에는 "소망의 거울"이 등장한다. 주인공 해리 포터는 마법의 학교에서 소망의 거울을 발견하고 그 앞에 선다. 해리가 찾아낸 거울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소망하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자신이 소망하는 행복한 기억들만을 보여주는 거울에 빠져 인생을 허비해버린다. 해리가 거울 앞에서 선지 삼일 째 되는 날 덤블도어 교수가 나타나 말한다. "너도, 앞서 다녀갔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소망의 거울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발견한 게로구나. 꿈에 집착해서 현실의 삶을 잊어버리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라는 걸 기억하기 바란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소망의 거울을 보통 거울처럼 이용할 수 있단다. 즉 그것을 들여다 보면 정확히 자신의 현재 모습을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것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소망 바로 그것을 보여준단다." 지금 우리들에게 비춰지는 미국의 모습, 혹은 그 거울에 비춰보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혹시 그와 같은 것은 아닐런지....


* 권용립 교수의 "미국의 정치문명"과 이삼성 교수의 "세계와 미국"은 지금껏 내가 읽은 한도 내에서 우리나라 학자의 미국학 저서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 중 하나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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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보는 세계문화상징사전 ㅣ 까치글방 87
진 쿠퍼 지음, 이윤기 옮김 / 까치글방 / 1994년 5월





이 책은 직접 구입한 것은 아니고, 누군가 선물해주어서 갖게 되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방법이고, 학교 다닐 때부터 충분히 권유받아온 방법인지라 새삼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는 방법이겠지만 쉽게 실천에 옮기기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사전을 찾아 그 정확한 뜻을 아는 것이다. 이 책의 옮긴이인 이윤기 선생은 "역자후기"에서 실례로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 독실한 크리스천 의사 친구의 결혼 축하연에서의 일이었다고 하는데, 축하예배를 이끌던 목사가 군의관의 군복 깃에 달린, 지팡이를 감고 오르는 뱀의 형상이 수놓인 기장을 가리키면서 '여러분, 이 군의관의 기장을 보세요. 지팡이와 뱀을 보세요. 구약성경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와 아론의 지팡이랍니다.'라고 했다.


목사는 군의관 기장을 성서적인 것으로 해석하여 이를 축하예배의 설교용 소재로 이용한 것인데, 이윤기 선생은 사실 이것이 그리스 신화에서 의료의 신으로 등장하는 아폴론의 아들 아스클레피오스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당시의 용한 의사이자 현인이었던 케이론의 가르침을 받아 대단한 의사가 되었고, 그가 설립한 의과대학은 수많은 명의들을 배출해냈는데, 오늘날 서양 의학에서 의학의 성인으로 받들어지는 히포크라테스도 이곳 출신이었다. 당시 의과대학은 아스클레피오스의 사당도 겸했고, 당시 의사들은 의사인 동시에 제관이기도 했다. 그 제관들이 사용한 엠블렘이 바로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를 휘감고 있는 아스클레피오스의 뱀(전령이자 사자인 흑빛 무독사)였다는 것이다.


이윤기 선생은 끝까지 참지 못하고 사실은 이런 뜻이라고 말해서 그 자리에서 무안을 당했다는 경험을 토로한다. 불행히도 이런 자리에서 지적인 민주주의는 종종 중우정치로 변해버리곤 한다. 지식인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이라도 이런 경험은 한 두 차례 가질 법한 일이기도 한데, 그럴 때 좋은 지침서가 되는 것이 이런 류의 책이다. 이 책이 국내에 처음 출간된 것이 지난 1994년의 일이고 보니 점차 고급화되어가는 최근 유행을 감안해본다면 비록 양장본이라고는 하나 지질이나 인쇄의 질 등 모든 점에서 많이 뒤처진 감도 있다. "그림으로 보는"이라고 해서 1,500여 개에 이르는 표제어에 일일이 도판이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또 사전이라고는 하지만 사전에 흔히 있는 반달색인(thumb index)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의 가격이나 기타 여러가지를 생각해볼 때 그 정도 사치는 바라기 어려운 일일 테고, 정 필요하다면 반달색인을 대신할 만한 포스트잇도 있으므로 그런 방법을 사용해보는 것도 좋다.


주변에서 이제 더이상 책으로 된 사전보다는 전자사전을, 백과사전도 간편하고 손쉬운 인터넷 백과 사전을 즐겨 찾는 경우가 많은데 물론 시대의 대세이니 무어라 말할 것은 없다. 그런데 가끔 사무실로 전화해서 핸드폰 분실했다고, 내 전화번호를 다시 묻는 친구들이 있다. 핸드폰에만 입력해놓고, 손으로 적는 수첩에 정리한 적은 없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다 자란 한국인 성인 남성의 대뇌 무게는 1,300~1,400g정도라 한다. 평생 살면서 몇 % 활용도 못한다고 하는데, 너무 놀려두면 나중에 써먹고 싶어도 써먹을 데가 없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런 친구들에게 아직 전자사전은 커녕 전자수첩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나란 사람은 영 구닥다리일지도 모르겠지만, 공부든 기억이든, 자기 책에 밑줄 긋고, 입으로 소리내 읽어보고, 손으로 직접 옮겨 적는 방법을 능가하는 것은 아직 발견되지 못했다는 걸 일깨워주고 싶다. 결국 책을 읽고 기억하는 건 사람이니까...




한 가지 더 현재 대한의사협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휘장에 사용되고 있는 지팡이는 사실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가 아니라 헤르메스의 지팡이로 이 둘은 지팡이를 뱀이 휘감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는 원래 뱀이 한 마리이고, 헤르메스의 지팡이는 뱀 두 마리가 서로 몸을 얽힌 채 기어오르는 형상이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앞서의 유래에 따라 의학을 상징하는 인물이고, 그와 같은 유래에 따라 의학 분야의 휘장으로 사용되는 것은 역사적인 연원이 있는 것이지만 죽은 이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부여받고 있는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가 사용하는 지팡이 '카두세우스'가 대한의사협회의 휘장으로 사용되는 것은 생각만 해도 으스스한 잘못된 사례이다. 그럼에도 이 휘장이 아무런 고민 없이 대한의사협회의 휘장으로 사용되었던 것은 미군 의무대가 처음 잘못 채택한 휘장을 우리가 아무 고민 없이 차용해 사용해 왔던 결과다. 이제라도 바로 잡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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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장지대에서의 사색 - 이시우 사진 / 인간사랑 / 2007년 6월


얼마 전 국정원에서는 과거사진상규명활동보고서를 냈는데, 지난 7~80년대부터의 공안사건들 가운데 상당수가 정부공안기관들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강화도에서도 배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가야만 하는 작고 외진 섬, 미법도에 한동안 국가공무원들이 자주 들락거렸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그들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이곳을 찾아 미법도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간첩으로 몰았다.

납북 사건이 잊혀질 무렵인 1976년 오형근씨 사건을 시작으로 미법도에 공안사건의 칼바람이 불어닥쳤다. 1977년 안장영, 안희천씨, 1981년 황용윤씨가 차례로 ‘간첩’이란 꼬리표를 달고 법정에 섰다. 오형근씨 수사 과정에서 안장영씨에 대한 첩보가, 안장영씨 수사 과정에서 안희천씨와 황용윤씨에 대한 첩보가 고구마 줄기처럼 따라나왔다. 황용윤씨의 수사 과정에서 나온 ‘첩보’가 발단이 돼 간첩으로 몰린 정영(67)씨 사건까지 서해의 작은 섬 미법도에서만 모두 5건의 간첩사건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미법도 납북 어부들은 군사독재의 하수인들에게 ‘황금어장’으로 비쳤던 게다. - <한겨레21>(2007년11월01일 제683호) 특집

불과 70여 가구가 거주하는 어촌에 불과한 미법도에 그렇게 많은 간첩들이 거주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들은 간첩이 아니었다. 이 사건들은 모두 정부공안기관들에 의해 조작된 사건들이었고, 국가기밀은커녕 검찰에서 자신이 하는 진술이 법정증거로 채택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설령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안기부 직원들이 바로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고문과 협박에 못이겨 했던 진술이라고 자신의 진술을 번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어부들을 법정으로 불러내 처벌한 것은 국가보안법이었다. 어떤 이들은 국가안보를 위해 국가보안법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민주화된 시대이기에 과거에 비해 국가보안법이 남용될 위험도 적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제2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비록 보석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지난 4월 19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된 뒤 5개월여 동안 이시우는 감옥에서, 그리고 법정에서 끊임없이 기밀과 창작, 검열과 창작의 자유를 놓고 투쟁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장장 60여일에 걸친 단식 투쟁도 불사했다. 그는 구치소에 수감된 뒤 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그의 부인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65kg이었던 체중이 20kg 정도 빠져 “뼈에 얇게 살을 발라놓은 몰골”이 되었다고 한다. 지난 5월 1일 그가 아직 감옥에 갇혀있을 때, 옥중에서 발표한 한 장의 편지가 있다.

기밀과 창작의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사례가 있습니다.

‘얀’이란 세계적 사진가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본 지구’란 사진집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한국의 비무장지대를 하늘에서 찍고 싶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전협정 상으로도 어려운 일이지만 군사기밀 보호법 때문에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일반적 예측이었습니다. 그러나, 유엔사군정위 비서장인 ‘캐빈 매튼’ 대령은 그를 헬기에 태워 한국의 사진가들에겐 한번도 그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비무장지대와 민통선지역에 대한 고공촬영을 했고 사진을 발표했습니다. 아마 그는 한국의 DMZ를 대표하는 사진작가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에 비해 비무장지대를 대상으로 10년 넘게 사진작업을 해온 저의 사진은 군사기밀보호법의 혐의가 씌워진 채 어쩌면 ‘모내기’그림으로 국가보안법의 피해를 당하셨던 ‘신학철화백’의 그림처럼 철창에 갇혀 영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될 운명에 있습니다. FTA를 반대하는 예술가들에게 대통령은 ‘자신감을 가지라’고 하는데 소수 공안세력들은 창작의 자유 대신 기밀의 족쇄를 채워 손발을 묶고 있습니다. 실로 안타깝습니다.

이시우가 말하는 사진가는 우리에게도 『하늘에서 본 지구』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이다. 한 사람은 군 헬기를 얻어타고 공중에서 DMZ를 촬영하고, 다른 한 사람은 풍경 사진 속에 강화 고려산 미군 통신시설의 일몰을 촬영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다. 이시우는 간첩일까?

먼저 간단하게나마 그의 약력을 살펴본다. 1967년 충남 예산 출생, 1988년 신구전문대 사진과 제적, 1989년 노동자민족문화운동연합 창작단장, 1990년 전국노동자문화단체협의화 풍물분과장, 1991년 전국노동자문화운동협의회 창작단장, 1993년 서울중구문화회관에서 <사람과 사진>전, 1995년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구성혐의로 구속되었다. 풀려난 뒤 그는 강화도에 거주하면서 주로 비무장지대 DMZ의 풍경을 촬영하면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전개해왔다. 사실 이 책 『비무장지대에서의 사색』은 그의 이런 작업 내용을 담아 지난 1999년 처음 출간되었고, 올해 재판 1쇄가 새롭게 나왔다. 이미 본 사람들은 다 본 책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올해를 상징하는 책 10권 가운데 하나로 재선정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잊을 만하면 다시 떠올리게 되는 ‘국가보안법’ 때문이다.

2007년, 올해 10월 2일 노무현 대통령이 다시 평양에 갔다. NLL(북방한계선)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였던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갈라진 민족의 양 정상은 현재의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자는 데 합의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자신의 발로 직접 넘어서던 그 날, 사진작가 이시우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5개월 째 수감 중이었고, 목숨을 건 40여일의 단식 투쟁 중이었다. 지난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은 국보법에 대해 “한국의 부끄러운 역사의 일부분이고 독재 시대에 있던 낡은 유물”이라며 “국민이 주인이 되는 국민주권시대, 인권존중의 시대로 간다면 그 낡은 유물은 폐기하는 게 좋지 않겠냐,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했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지 않았고, 민통선을 촬영하던 사진작가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감옥에 갇혔다. 대통령의 말이 진실이라면 국민이 주인 되는 시대, 인권존중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지난 2003년 말 1,000여 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국보법 철폐’ 단식을 하면서도 끝끝내 수구보수세력의 저항을 넘어서지 못했다.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겠다던 대통령은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저들과 보수연정을 제의하기도 했다. 그런 역사의 반동들이 모여 오늘의 위기를 자초했다. 2007년 올해 10년 만에 사회과학서점들이 경찰에 의해 압수수색을 당했다. 인터넷 헌책방 미르북 대표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으나 구속적부심에서 증거인멸 및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일단 석방되었다.

여기 거의 7년여 만에 재출간된 사진집 한 권이 있다. ‘슬픈 조국의 대지’를 만남과 강, 사색이란 주제로 촬영한 사진집이다. 강화도에서 정동진에 이르는 155마일 휴전선 아니 비무장지대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사색할 수 있을까? 남과 북, 좌와 우의 꽉 막힌 철옹성들 사이에서 과연 우리는 다른 것을 사유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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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의 역사 1 : 작전편 - 20세기를 배후 조종한 세기의 첩보전들
어니스트 볼크먼 지음, 이창신 옮김 / 이마고 / 2003년 10월



어쩌다보니 별로 좋아하는 저자도 아닌 "어니스트 볼크먼Ernest Volkman"이 저술해 국내에서 출판된 3종의 책을 모두 읽고, 그 세 권의 책에 대해 모두 서평을 올리게 되었다. 저자 소개에는 그가 첩보기관 및 스파이 분야의 대단한(하긴 대단하다) 전문가인양 소개되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가 전문가인 영역은 이런 자료들을 쫓아가서 공부하고, 종합해내서 글로 써내는 저널리스트란 점에서 전문가라는 것이지, 이 분야에 종사한 경험을 지닌 전문가는 아니다. 어니스트 볼크먼의 저서  세 권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스파이의 역사 1 : 작전편", "20세기 첩보전의 역사 : 인물편"은 국내에선 모두 "이마고" 출판사에서 나왔다. 내가 읽은 그의 저서 세 권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것은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였고, 그 뒤로 읽은 책 "스파이의 역사"가 제법 재미있었다. 가장 근간인 :20세기 첩보전의 역사"는 생각외로 재미가 적었다.


어니스트 볼크먼은 몇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그의 독특한 안목이 잘 발휘되는 것으로 대중이 흥미를 느끼는 분야이지만 전문가들이 잘 손 대지 않거나, 대체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분야를 잘 파고 든다는 점, 둘째는 그가 풍부한 사료들을 통해 분석하고 있다는 것, 셋째는 어려운 이야기를 대중적인 눈높이에서 잘 풀어낸다는 것이다. 이 책 "스파이의 역사"에서는 그의 이런 장점들이 특히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가장 훌륭하게 성공한 첩보작전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작전"이라거나 "권력은 총구가 아닌 정보에서 나온다"와 같은 구절들은 스파이들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전제가 된다. 즉, 저자가 다루고 있는 사건들은 이제 비밀 제한 기간이 완전히 지나서, 비밀이 해제되었거나 너무나 끔찍한 피해를 겪어서 더이상 숨길 수 없게 된 사건들로 국한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건들이거나 아직도 그 의미가 남아 있는 것들은 여전히 비공개로 남는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이 책의 제2부 "암호와 감청 전쟁: 보이지 않는 스파이들"에서 독일이 자랑스럽게 내세운 비밀암호작성기인 "에니그마"의 암호 코드를 영국은 "배틀 오브 브리튼" 이전에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이 에니그마 암호를 해독할 수 있고, 그것도 아주 오래전에 해독해냈다는 사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비밀로 남아 있었다. 007을 감독한 가이 해밀튼이 1969년 감독한 영화 "배틀 오브 브리튼"은 독일의 영국 침공과 이에 맞서는 영국 공군의 대혈투를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이 영화 어디에서도 에니그마 암호를 풀어냈기에 독일 공군이 어딜 목표로 날아오는지 미리 알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대목은 단 하나도 없다. 역시 이 영화의 DVD서플먼트에는 당시 공군 참모총장이었던 다우딩이 출연해 당시를 회고하는 대목이 있지만, 그 어디에도 에니그마 암호를 풀었다고 말하는 대목은 없다. 왜냐하면 영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이를 인정한 것은 1970년대 초반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당시 전쟁의 최전방에서 이를 지휘했던 다우딩 중장조차 이를 영화든, 회고록이든 어디에도 언급할 수 없었고, 영화에도 그런 극적인 부분을 삽입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근대적 개념에서 첩보전을 최초로 실시한 나라는 영국이었고, 특공대를 만들어 운용한 나라 역시 영국이었다. 오늘날 대테러부대의 전세계적 모델이 된 SAS를 만들어낸 나라 역시 영국이었다. 그런 영국도 바보같은 실수를 한 적이 많았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제1차 세계대전 무렵의 비교적 낭만적인 첩보전이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더 한층 냉혹해지고, 이후 동서냉전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첩보전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혹시 캐빈 코스트너의 출세작이기도 했던 영화 "노웨이 아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캐빈 코스트너가 미 해군 장교로 등장하는 영화인데, 대통령이 케빈 코스트너의 애인과 밀통하다 우연히 그녀를 살해하고, 그 죄를 덮어 씌우려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엮은 영화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음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CIA내부에 소련이 침투시킨 스파이가 존재한다는 설정이 겹치면서 벌어지는 우여곡절을 다룬 것이다. 이 영화는 실화는 아니지만, 첩보전의 역사에는 실제로 이와 비슷한 맥락의 사건이 있었다.


이 책의 "제3부 반역작전: 내부의 적을 색출하라"는 첩보조직 내부에 침투한 첩보원, 이중첩보원에 대한 이야기와 이들을 추적해 색출하기 위한 첩보작전을 다루고 있다. 영화에서 거듭되는 반전을 경험하며 골머리를 앓았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구태여 이 장을 펼쳐 읽으며 다시 골머리를 앓을 필요는 없다. 손자병법에서는 간첩의 종류를 향간, 내간, 반간, 사간, 생간이라 하여 다섯 가지로 구분하는데, 이들 다섯 종류의 간첩을 사용하여도 적이 그 방법을 알지 못하니 이를 신기, 즉 귀신 같은 경륜가 재능이라 일컫는다고 말한다. 우선 향간은 적국의 사람을 포섭하여 이를 활용함이고, 내간은 적국의 관리를 포섭하여 이를 활 용함이며, 반간은 적의 간첩을 포섭하여 이를 활용함이고, 사간은 허위 사실을 유포하여, 아군 간첩이 이를 알리고 적에게 전달케 함이며, 생간은 돌아와 보고함을 말한다.


동서냉전 시기에 CIA와 KGB는 서로의 조직에 간첩을 침투시키기 위해 눈에 불을 켰다. 더군다나 영국 최고의 첩보기관인 MI6의 최고 책임자 지위에 오를 뻔한 킴 필비가 KGB의 간첩이었단 사실이 드러나면서 미국 첩보 기관의 스트레스는 하늘을 찔렀다. 이런 와중에 KGB로부터 탈출한 전직 KGB요원 하나가 말하길, CIA 내부엔 이미 KGB스파이들이 잠입해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CIA의 방첩담당자는 CIA내부의 요원들을 감시하기 시작했고, 이후 KGB에서 망명한 요원을 CIA를 교란시키기 위해 침투한 간첩으로 오인해 수년간 스파이 혐의로 반인권적 처우를 가했다. 결국 이런 방첩 행위는 CIA내부의 반발을 불러왔고, 방첩담당자는 해직당한다. 그 이후 재조사한 결과 가장 많은 의심을 받은 이가 바로 방첩행위를 주도했던 그 담당자였다는 이야기는 웃어 넘기기엔 너무 슬픈 이야기이다.


우리 사회 역시 분단 이후 아직 풀지 못한 숱한 사건들을 가지고 있다. 위장 간첩 사건부터 시작해서, 권력의 안위를 위해 조작된 간첩 사건, 휴전선을 넘나드며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고투를 거듭했던 이들이 아직까지 생존해 있다. 종종 스파이들을 용도가 폐기됨으로 잊혀지거나 좀더 심할 경우 그들을 부렸던 조직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 책 "스파이의 역사"는 물론 그런 부분에 대해 소상한 언급을 하고 있거나 독자들에게 어떤 흥미 이상을 갖도록 이끌어주는 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노라면 저절로 우리 역사의 가장 어두운 부분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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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를 웃긴 꽃 ㅣ 문학동네 시집 90
윤희상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6월




지난 언젠가 화요일에 나는 선배 박형준 시인과 함께 국밥을 먹었다. 지금 한국의 시인들이 처해있는 다소 비극적인 상황에 대해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는 꾸역꾸역 국밥을 밀어 넣었다. 밥알을 씹으며 한 편으론 한국의 시인들이 현대미술이 처한 난관과 흡사한 난관에 처했다는 생각을 했다. '형, 문학이 문학 그 자체의 힘을 잃고, 자꾸만 철학이 되고, 정치가 되어 가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아직 시 문학은 살아있다. 비록 커다란 변화의 조짐들이 불길한 징조가 되어 연이어 출현하고 있지만. 오늘 아침 출근을 하니 또 한 명의 선배 시인이 새로 시집을 냈다고 시집을 보내주었다. 간만에 읽는 신간 시집이다.


첫 시집 『고인돌과 함께 놀았다』에서 그의 정돈된 시세계가 깔끔하게 읽히긴 했지만 나에겐 어딘지 사람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이랄까, 매력이란 측면에서 다소 약하단 생각을 했다. 다시 말해 마치 미인의 얼굴은 보통 사람의 얼굴에 비해 좌우대칭의 균형을 이루지만 이것을 CG(컴퓨터 그래픽)를 통해 완벽한 좌우대칭으로 만들어내었을 때, 미인의 자연적인 얼굴이 CG로 만들어낸 얼굴보다 더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과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윤희상 첫 시집이 완벽하다는 말은 아니다. 크게 흠잡을 데 없이 무난하지만 그 무난함이 덜 매력적이었단 뜻이다.) 

시인 서정주는 <국화 옆에서>를 통해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고 노래했는데, 이때 거울 앞에 섰다는 것은 자신과 대면하는 것을 말한다. 시인이 바라본 것은 누님이자 동시에 자신과 대면하는 누이의 자아이자 곧 자신(독자)이기도 하다. 윤희상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소를 웃긴 꽃』은 근래 보기 드물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시집이었다. 문학이 철학과 다른 것은 로고스가 아닌 파토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일반 독자들 역시 시를 잘 읽어내기 위해 적절한 훈련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철학자가 될 필요까지는 없다. 나는 윤희상의 두 번째 시집이 시와 독자, 시인과 독자, 시인과 사회 사이에서 적당한 지점 - 어쩌면 그것이 ‘대면의 소실점’일지도 모르겠지만 - 에 서 있다고 느꼈다.

나와 너의 사이는
멀고도 가깝다
그럴 때, 나는 멀미하고
너는 풍경이고,
여자이고,
나무이고, 사랑이다

내가 너의 밖으로 몰래 걸어나와서
너를 바라보고 있을 즈음,

나는 꿈꾼다

나와 너의 사이가
농담할 수 있는 거리가 되는 것을
(<농담할 수 있는 거리> 중에서)


‘나와 너’는 세상의 전부다. 한겨울의 고슴도치처럼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서로의 체온을 나눠야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론 가시에 찔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세상의 중력에 끌려들지 않기 위해서 거리를 두면 세상은 곧 풍경이 되어 멀어진다. 불교 『유마경』의 가르침은 “나는 곧 너다”인데, 이 말은 진정한 보리심의 발현은 나와 너를 나누고 구분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대자대비(大慈大悲)는 사랑하되 동정하거나 구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너의 밖으로 몰래 걸어나와서”는 너를 바라본다. “나와 너의 사이가 / 농담할 수 있는 거리가 되는 것을” 꿈꾸고 희망한다. 윤희상은 김수영의 “바로 보마”를 그 나름의 방식으로 변주한다. 윤희상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바로보마,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윤희상의 『소를 웃긴 꽃』을 관류하는 이미지는 이 같은 대면의 이미지이다. 시인은 거리를 두고 바로 보고자 한다. 다만 그 거리(距離)는 냉소도, 뜨거운 참여도 아닌 성찰(省察)의 거리이다.

거울이 여자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하지만 거울이 여자를 숨기고 있다 여자가
오면, 거울이 열린 문으로 여자에게만 숨기고
있는 여자를 보여준다 거울은 온몸으로
문이다 여자는 그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여자를 본다 들뜬다 그럴 때마다, 거울은
여자의 뒤로 숨는다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침묵한다
(<거울과 여자> 전문)

나에게는 금붕어가
어항 속에 있고,
금붕어에게는 내가
어항 속에 있다
그래서,
금붕어와
나는 밤이 새도록 싸웠다
(<금붕어와 싸웠다> 전문)


윤희상의 시세계에서 대면의 이미지는 여러 형태(거울, 어항 등)로 변주되지만, 대면 자체가 성찰로 고스란히 연결되지는 않는다. 차라리 그것이 정직하다. “거울이 여자를 숨기고 있다” 백설공주를 살해하는데 성공했다고 여긴 계모가 거울 앞에 서서 “거울아, 거울아”를 불러본다. 이때 거울은 계모의 모습을 비추는 것일까? 아니면 계모의 욕망을 비추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거울 자체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거울은 온몸으로 문”이지만 여자는 눈치 채지 못한다. 세상은 보고자 하는 이에게만 그것을 허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계모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계모는 끊임없이 욕망하고, 욕망을 추구하여 결국 거울 속에서 아무 것도, 자신조차 발견하지 못한다. 금붕어와 나는 마주 하고 있지만 ‘어항’이란 자의식, 세계에 갇혀 서로를 진실로 마주 대하지 못한다. 시인은 대면의 이미지를 사용하면서도 그저 대면한다는 것이 실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잘 알고 있다.

먼 곳의 길 끝에서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내 친구 9였다

9
(<먼 곳의 길 끝에서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내 친구 9였다> 전문)



나주 장날,
할머니 한 분이
마늘을 높게 쌓아놓은 채 다듬고 있다
그 옆을 지나가는 낯선 할아버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을 남기고 간다

“그것을 언제 다 할까”

그러자, 할머니가 혼잣말을 한다

“눈처럼 게으른 것은 없다”
(<눈처럼 게으른 것은 없다> 전문)


<먼 곳의 길 끝에서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내 친구 9였다>는 시의 제목과 내용이 반전되어 있다. 대개는 시의 제목이 시의 몸을 드러내고 상징하는데 비해 이 시에서는 시의 제목이 시의 내용보다 길어 시의 몸을 제목이 수식해주고 있다. ‘내 친구 9’는 ‘행인1,2,3’가 마찬가지로 익명(匿名)의 존재다. 그러나 익명이란 스쳐가는 존재인 ‘행인’에게는 어울리지만 친구에겐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대면의 소실점 저 멀리에 서 있는 친구, 끝끝내 익명으로 남아버린 친구, 그나마 자세히 보아야 내 친구인 줄 알지만, 자세히 본 것만으로 친구의 익명성이 제거되지 않는다. 설령, 시인이 친구의 실명을 거론했다 한들 우리에게 그 이름이 익명 이상의 의미로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 그저 대면한다는 것은 이처럼 허망한 것이기도 하다. <눈처럼 게으른 것은 없다>가 주는 깨달음은 마치 선사(禪師)들의 선문답 한 토막 같은 짧은 대화가 만들어내는 긴장이 절묘한 시이다. 이 깨달음을 속담으로 옮겨보자면 아마 그런 것일 게다. “부뚜막의 소금도 넣어야 짜다”는 바라보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삶, 그런 의미에서 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다 아는 듯 말하는 것은 얼마나 무책임하고 게으른 것인가를 시인은 말하고 있다.

시집의 전반부가 이처럼 극히 ‘개인적’인 성찰, 그래서 서정적인 의미에서의 성찰을 담고 있다면 시집의 후반부에 이를수록 대면의 이미지는 사회적인 확장 과정을 거친다. 편의상 전반부와 후반부로 구분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같은 대면의 이미지들이 사회적으로 확장되어가는 과정은 시집의 전체에서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어 <누가 깃발을 붙잡고 있다>, <시인에게, 숲 해설가는 말한다>, <田榮鎭>, <光州 五月團> 등의 시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윤희상 시인의 이번 시집 『소를 웃긴 꽃』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우리의 시 문학이 위기로 내닫고 있다는 전망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현실에서 보기 드물게 매우 뛰어난 시집이다. 나 스스로는 ‘입구(口)자 연작시’라고 호명할 만한 세 편의 시(<검색창, 세상에서 가장 큰 입>, <下官을 마친 뒤에 울었다>, <아이들아, 재래식 화장실은 무섭지 않다>)가 보여주는 촌철살인의 비유들이
 이 시집의 매력과 재미를 한껏 높여 준다. 이 가을에 자기만의 견고하고 튼실한 시세계를 구축해가는 시인을 만날 수 있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 사실 나는 학연이든, 지연이든, 혈연이든 하는 것에 연연하고 싶지 않지만(다시 말해 윤희상 시인과 내가 학연으로 얽혀있다고 해서 그의 시집을 서평하거나 호평을 하는 일은 결코 없지만), 가끔 추억이 겹친다는 점에서 현실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인연의 줄기를 더듬어 보게 되는 일조차 부인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이번 시집에서 특히 학연이라는 공통된 인연 때문에 더욱 재미나게 읽을 수 있었던 시가 ‘최인훈 선생님에게’란 부제가 달린 <참나리꽃이 피는 사연>이다.

순발력이라고나 할까, 빠르게 움직이잖아
기막히게 앞으로 내다본단 말이야
약효가 떨어지면, 재빨리 다른 약을 찾아야지
지금은 마오쩌둥이나, 마르크스도 아니고
레닌도 아니란 것이지
주체사상을 붙잡고 있는 북측이
다시 단군을 붙잡았단 말이야
(<참나리꽃이 피는 사연> 중에서)


나의 오래된 스승인 최인훈 선생과 시인이 나누었을 법한 대화의 한 장면이 연상되면서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떠오른다. 낯익고, 정겨운 장면, 그리하여 너무나 그리운 스승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마도 당신은 지금쯤 한창 북미관계의 변화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계실 터인데,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얼마나 신기하고 새로운 경험일까. 스승이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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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없는 - 가스파 노에 (Gaspar Noe) 감독, 뱅상 카셀 외 출연 / 파라마운트 / 2003년 5월




"가스파 노에" 감독의 "돌이킬 수 없는(Irreversible)"을 보던 날이 생각난다. 한 마디로 이토록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할 수 있는 영화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이 영화는 함께 본 친구들 앞에서 날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었다. 내 감정을 스스로 돌이켜 보건데 그건 분노도 무엇도 아닌 짜증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넘쳐나는 짜증이 날 분개하게 만들었고,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애꿎은 물만 벌컥벌컥 들이키게 만들었다. 영화의 내용은 사실 아주 간단하다. 아름다운 한 여인(모니카 벨루치)이 지하도에서 한 남자에게 강간당하고, 자신의 애인이 강간당했다는 것을 안 남자 친구가 분개해 그날 밤 내내 강간범을 찾아다니다 결국 강간범을 찾아내 그에게 끔찍한 복수극을 벌인다는 이야기이다. 얼개만 남겨놓고 보면 흔하디 흔한 할리우드 액션 영화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설정이지만 이 영화를 본 뒤에 느끼게 되는 감정들은 결코 간단치 않다.


최근 개봉되어 관객들을 들끓게 하고 결국 시민들의 분노가 쌓여 재수사하게 된 광주 인화학교의 실태를 다룬 영화 "도가니"를 본 사람들이 영화를 본 뒤 며칠동안 밥을 먹을 수 없었다며 영화 "도가니"를 보지 말라고 충고한다는 얘기를 들으니 문득 이 영화가 떠올랐다. 내게는 이 영화가 그랬으니까.



100분 동안 우리는 감독의 설계에 따라 시간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즉, 끔찍한 폭력이 발생한 순간부터 일상의 평온한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나 가스파 노에는 "돌이킬 수 없는"의 궁극적인 복선이 마치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운명론처럼 결코 "되돌이킬 수 없는" 잠재적으로 언젠가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혹은 반드시 그녀가 아니더라도 이 세상의 어딘가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분명히 반복되고 있을 상황으로 관객들을 내몬다.


어쩌면 내가 그토록 멈출 수 없는 짜증으로 몸부림친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나 역시 이런 강간 사건의, 폭력 사건의 공범일 수밖에 없는 냉정한 현실, 거미줄로 아름다운 나비를 몰아댄 또다른 범죄자가 아니냔 생각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더해 우리는 이 영화가 냉정하게 이야기하는 우리 모두는 "흘러버린 시간의 죄수들이지 않느냐"는 반문을 접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도가니"는 우리가 막을 수 있었던, 막아야 했던 시간의 범죄다. 내가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평범한 일상은 순식간에 파괴될 수도 있다. 그것이 내가 아니더라도 그 누군가에게는 말이다. 어쨌든 그 누구도 흘려보낸 시간을 되돌이킬 수 없다...시간의 냉정한 불문율. "모든 것을 파괴하는 시간."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알렉스(모니카 벨루치)의 현 애인 마르쿠스와 전 애인 삐에르는 한 게이 바에 들어가 사람 하나를 잔혹하게 소화기로 짓이겨 죽인다. 다시 역순 그들은 택시를 타고 게이 바로 들어가고, 게이바로 가기 전에 거리의 창녀들을 만나 그들이 찾는 사람이 게이바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거슬러 올라가 알렉스가 지하도에서 잔혹하게 강간당하는 장면이 나오고, 마르쿠스와 삐에르 그리고 알렉스가 파티장에서 행복한 순간들을 보내고, 그보다 다시 더... 더... 거슬러 올라가면서 이들의 이야기는 종말이 아닌 시작점에 이른다. 이 영화 "돌이킬 수 없는"은 그래서 내러티브의 강력한 힘을 보여준다. 참혹한 현재에서 시작해 행복했던 과거로 되돌아가는... 내러티브보다 더 무서운 건 인간의 감정이다. 후회가 없는 인간은 없으므로,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지 못하면 사랑이 없어진 뒤엔 더이상 사랑할 대상이 남아있지 않다는 후회가 이 영화의 진정한 힘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이라면 그렇듯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꼼짝할 수 없는 느낌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의 잘못은 오늘 당장은 아니라도 내일의 어느 날이라도 뒤통수를 가격한다. 가스파 노에는 마치 그리스희비극에서 운명의 노예가 된 오이디푸스처럼, 엘렉트라처럼 알렉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복선을 깔아둔다. 영화가 시작되면 첫 장면에서 우리는 앞으로 진행될 이야기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늙은 남자의 대화를 본의아니게 엿듣게 된다. 한 남자가 다른 남자에게 말한다.


"내가 왜 빵에 갔다 왔는지 자넨 모르지? 내가 내 딸을 강간했기 때문이야. 참 예쁜 애였는데 말이지."


그러자 다른 남자가 말한다.


"아, 그놈의 근친상간!"


다음 장면에서 카메라는 그 남자들이 대화를 나눈 방 근처의 게이 바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리고 연이어 파티장을 빠져나온 알렉스가 지하도를 홀로 걸어가다가 강간당하는 장면에서 강간범은 알렉스에게 말한다.


"네 아버지에게도 이렇게 당했지? 아, 죽이는 엉덩이군." 



 

물론 알렉스가 실제로 자기 아버지에게 강간당한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 노에 감독은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내러티브의 배치 구조 상 우리는 아마 그랬을 것이다라고 추측하게 될 뿐이다. 우연의 동시성. 알렉스는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하듯 지하 터널의 꿈을 꾼다. 두 갈래의 길... 그 어느 한 편에서 그녀는 참혹한 범죄의 희생자가 된다. 노에 감독은 삐에르와 마르쿠스에게 복수를 허용하지 않는다. 만약 신화적 세계 속에서 진짜 복수가 이루어져야 한다면, 그 처음은 알렉스의 아버지까지 거슬러 올라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쿠스와 삐에르가 게이바에서 강간범이라고 생각해 소화기로 얼굴을 짓이겨 죽인 사람은 알렉스의 강간범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가 선량한 희생자일까? 글쎄, 그렇게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 까닭은 마르쿠스와 삐에르조차도 선량한 알렉스의 남자 친구들이기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두 사람은 알렉스의 복수랍시고, 한 남자를 곤죽이 되도록 패 죽이고 만다. 하지만 강간범은 바로 그들 곁에서 이 광경을 희희낙락 지켜보고 있다.


시간이 그러하듯 운명은 우리들 사이를 빗겨간다. 이제 세 사람은 과거로부터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지닌 채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 이걸 알렉스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는가? 강간당해야 할 운명, 복수되지 않는... 그걸 운명이라고 한다면, 오늘날을 살아가는 여성들 가운데, 아니 지난 역사 시대를 모두 통틀어 어느 시대의 여성이 강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운명을 살아가고 있는가? 알렉스가 강간당하던 바로 그날. 알렉스는 자신의 임신 사실을 확인했지만 마르쿠스에게 말하지 못했다. 세상은 과연 합리적인 이성의 적절한 통제를 받아가며, 서로 소통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글쎄... 노에는 그걸 믿지 못하는 듯 하다. 내가 짜증이 났던 이유가 생각났다. 그건 어쩌면 노에 감독에게 내가 그런 건 아니야 혹은 꼭 당신이 말하는 대로 그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도가니"를 정말이지 보고 싶지 않다. 그 통증과 슬픔을 외면해선 안된다는 건 알지만 정말이지, 정말이지 두렵다. 나는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싶어서 이 영화를 다시 불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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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명품이다 - 조미애 (지은이) | 홍시(2009년)



"이것이 명품이다"란 책이 어쩌다 보니 집구석에 굴러 다녔다. 아마도 아내가 어디서 구해왔을 것이다. 뒹굴거리다 손에 잡힌 이 책을 나는 나름대로 참 재미있게 보았다. 우선 코코 샤넬 이야기가 재미있었고, 트렌치코트의 대명사 버버리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사실 이 책에 실린 내용 가운데 상당수는 시공사에서 나온 "남자의 옷 이야기1.2"를 통해 이미 아는 내용도 있었지만, 명품을 중심으로 꾸려나간 책 이야기는 윤광준 선생이 쓴 책 등이 있긴 하지만 읽어보긴 처음이기도 하다. 이 책에 나오는 브랜드들을 살펴보니 샤넬이나 아르마니, 크리스찬 디올, 휴고 보스, 버버리, 루이 비통 처럼 낯익은 브랜드들도 있고, 에르메네질도 제냐, 에르메스, 세린느, 아 테스토니 처럼 낯선 브랜드들도 있었다. 잘 아는 브랜드라고 해서 내가 이들 제품을 하나라도 써본 적이 있다는 건 아니다. 물론 잘 뒤져보면 어딘가에서 한 두 개쯤은 튀어나올지도 모르겠다.


책제목이 "이것이 명품이다"라고 해서 우리 사회 모든 분야의 명품을 총망라하고 있지도 않을 뿐더러 패션 전분야를 아우르고 있지도 않다. 대신에 이 책은 저자가 선정한 패션 디자인 분야의 주목해봄직한 브래드들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읽는 이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이 책은 명품을 옷장 안에 가득 채워둔 이들보다는 명품을 실제로 소장할 수 없는 세대와 연배를 위한 입문서, 대리만족을 위해 쓰여진 것 같다. 아니면 이제 막 패션 디자인쪽 공부를 시작하고 싶은 이들에게 세계적 디자이너들에 대한 입문서의 용도로 읽을 수 있다. 자신을 잘 가꾸고자 하는 욕망이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망이며, 구태여 이들에 대해 금욕적인 자세를 강요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상식을 좀더 넓힌다고 생각하는 차원에서 접근하며 읽기엔 혹평을 들을 이유가 별로 없는 책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중반을 대표하는 여성 디자이너 코코 샤넬에 대한 저자의 글은 아주 읽을 만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코코 샤넬에 대한 일반론을 전개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 뒤에 다루고 있는 디자이너들에 대한 내용도 특별한 폄하나 상찬없이 지극히 일반적인 이야기를 평이하게 전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적당한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기사 명품에 대한 책을 내려는데 그만한 거리조절도 못한다면 안 되겠지만 말이다. 디자이너들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그보다는 디자이너에서 다음 디자이너로 넘어가는 대목 중간 부분에 다루고 있는 복식사의 자잘한 숨은 역사에 대한 이야기들이 더욱 재미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스트라이프" 무늬는 오늘날엔 남성의 복식에서 가장 흔한 문양이자 기본적인 문양으로 취급받지만 과거에 이런 스트라이프 무늬는 악마의 천으로 비하되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중세 시대 스트라이프 무늬의 원조가 광대, 나병환자, 사형집행인, 매춘부 등 소외계층이었기 때문이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갱스터들이나 지골로들이 즐겨 입으며 이들의 유니폼화되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갱스터 무비의 갱들이 스트라이프 무늬를 즐겨입긴 했다.


명품에 대한 책을 읽었다고 해서 대뜸 우리 사회의 소비 양태나 명품에 대한 태도를 두고 설교를 늘어놓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다.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마음을 감추고서 다른 이가 누리는 명품 소비를 비난하는 자세가 과연 허위의식은 아닌지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건 명품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중성에 일조하는 것에 불과할테니 말이다. 사실 명품에 대한 나의 기본적인 생각은 "아라한 장풍대작전"에 등장하는 생활도인의 개념과 어느 면에선 흡사하다. 류승완 감독은 신도시무협이란 새로운 장르를 한국에서 처음 시도해보고 있는데, 이 영화의 코믹한 요소 중 한 부분은 바로 "생활도인"이란 컨셉이다. 누구나 자기 분야에서 오랜 시간을 일을 하고, 공을 들이다보면 공력이 늘어나고 보통 사람들은 할 수 없는 능력이 생겨나는데 이들이 바로 생활도인이며, 도(道)란 이렇듯 우리네 일상에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어쩌면 윤광준 선생이 이야기하는 "생활명품"이란 개념이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펜을 예로 들어 "모나미153 볼펜"은 명품인가? 아닌가? 만약 이것을 대량생산된 그저 공산품 중 하나라고 본다면 대량생산, 대량소비든, 소품종 소량생산이든 오늘날의 관점에서 진정한 명품은 무엇인가?를 되물어봐야 한다.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품에 대한 질문 말이다. 모나미153볼펜은 1963년 생산이래 지금까지도 계속 생산되고 판매되는 인기제품이다. 이 볼펜은 국내에서 생산하는 모든 공산품 중에서 최장기 베스트셀러에 속한다. 명품인가? 이것이 명품인가?


이에 대한 답을 하기에 앞서 우리 사회는 자본과 노동이 따로 떼어져 살 수 있는 사회인가를 묻고 싶다. 우리 사회는 자본과 노동의 적절한 동거 방식을 아직까지 창출해내지 못했으며, 이런 방식을 실험해 보지도 못한 상황에서 자본의 일방적 독주 체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노동은 천시되고, 자본은 각광받는다. 이렇듯 불합리한 동거 체제 속에서 노동은 끊임없이 사회 불안을 야기할 것이고, 자본은 위험상황에 노출될 것이다. 에드워드 팔머 톰슨은 명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노동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만들어진 피동적 계급이 아니라 스스로 사상과 문화를 창조한 주체적 계급"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한 반론, 비판의 여지는 있겠으나 그가 영국이란 특수한 구조와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 노동계급의 역사를 피동적인, 사회구조에 따른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닌 주체적 계급이라 주장한 것은 의미심장한 해석이다. 종종 영국 영화에서 블루컬러(노동계급)들이 지닌 놀라운 자부심에 경탄할 때가 있었고, 전통적인 노동계급 출신 아버지가 보수화된 정치인 자식을 일갈했다는 뉴스를 볼 때 그들의 자부심이 부러웠다.


이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노동계급의 체념이나 포기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런 자세를 스스로 깨닫고 낙향하여 자연을 벗삼아 살았던 어떤 이들(스콧 니어링 같은)에 대한 모독이라 생각한다. 우리 역시 지난 80년대 많은 이들이 출세라는 궤도에서 스스로 일탈해 노동자의 삶을 선택하지 않았나? 그런 이들의 선택을 희생이라고 말하는 건 지나치게 도도하고, 거만한 태도가 아닐까? 노동으로 사는 삶이 멸시되고, 천시받아야 한다면, 우리 사회는 병든 것이다. 노동자가 좀더 부자가 되고 싶은 열망을 품는 것은 당연지사겠지만, 노동자로 사는 일을 부끄럽게 여겨야 할 필요 또한 없지 않은가? 만약 우리 사회의 노동이 그런 체념이나 포기가 아니라 당당한 주체계급의 인식과 그에 합당한 실제 역할이 이뤄지고, 대접받는 사회라면 명품은 좀더 다양해질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성이란 명품에 대한 우리 사회의 허위의식이 증명하듯, 종종 욕망의 일원화로 귀결되는 파탄의 상황을 의미한다. 모두가 부자만을 꿈꾸는 사회에서 부자가 되기 위한 욕망의 고속도로만을 지향할 때, 고속도로의 정체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닌가. 모두가 명품을 지향하는데, 명품을 얻지 못할 때 소위 짝퉁이 등장하는 것도 당연하다. 욕망의 다원화는 그 욕망이 지탄받지 않고, 사회적으로 존중받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이뤄진다. (노동자로서의 삶이 사회적으로 존중받을 때, 나 같은 사람에겐 그런 순간의 자본주의가 가장 무섭긴 하다.) 루이 비통이 명품일 수 있는 이유가 모나미 153볼펜에도 똑같이 해당되지만, 어느 것은 명품이고, 다른 하나는 명품이 아닌 차이 또한 거기에 있는 건 아닐까?


 

쓰다보니 흥분하는 버릇은 올해 들어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내가 이 책을 왜 읽게 되었더라. "신강균의 사실은"이란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이젠 "있었다"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미디어 비평'이란 성격상 다소 딱딱해지기 쉬운 프로그램이었지만 생각외로 많은 이들의 호응을 받으며 방영되던 프로그램의 진행자와 기자가 구찌 핸드백이란 명품 선물을 받는 스캔들에 휩싸이며 프로그램 자체의 존폐를 불러왔다. 우리 언론의 여건상 시도하기 힘들고, 성공하기 힘든 것이 보도탐사 분야다. 실제 언론선진국들에서도 가장 힘들어 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매스미디어의 특성상 대량으로 쏟아지는 뉴스 거리들 속에서, 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파헤치는 보도 탐사 분야는 들어가는 공에 비해 주목받기는 참 어려운 분야다. 다른 뉴스 프로그램들이 뉴스를 받아서 전하는 것이라면 보도 탐사 분야는 자신들이 뉴스를 만들어내는 분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자리에 선 사람들은 다른 기자들에 비해 더 많은 전문성과 도덕성, 청렴성을 요구받기도 한다.


이 두 사람이 받았다는 소위 명품 "구찌" 핸드백은 얼마나 하는 걸까? 이들말고, 다른 기자들. 서울 시장의 외국 순방에 혜택을 받으며 따라갔다던 시청 출입 기자들의 외유 비용에 비해 더 비싼 핸드백이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신강균, 이상호 씨의 경우 나는 이들이 처신을 크게 잘못했다기 보다는 이들에게 요구되었던 엄격한 잣대가 다른 이들의 잘못보다 더 많은 처벌을 요구한다는 생각에서 안 되었단 마음이 들었다. 부디 이번 일이 이들 자신에게도 우리들 모두에게도 새로운 마음의 각오를 다질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더불어 이런 이들이 한 번의 실수로 영영 우리 곁을 떠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 이 책은 2002년에 '시지락'이란 출판사에서 나왔던 책의 개정판으로 내가 읽은 것은 구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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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 화성인 우주인 : 움베르토 에코가 들려주는 이야기 -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운찬 옮김 / 웅진주니어(2005년)




불경하게도 움베르토 에코의 이 책을 피터 L. 버거의 "사회학으로의 초대"를 읽다가 머리를 잠시 식힌다는 의미에서 옆으로 젖혀두었다가 붙잡고 10여분만에 읽어 버렸다. "지구인 화성인 우주인"에는 모두 3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첫 번째 이야기는 원자폭탄을 사랑한 지구의 장군 이야기이고, 두 번째 이야기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지구인 화성인 우주인 이야기이며, 세 번째 이야기는 우주 탐사를 나서 작은 난장이 외계인을 만난 지구 우주인의 이야기다.


당연한 말이지만, 에코라는 이름이 없었다면... 오히려 편안하게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그렇다고 에코가 지은 유일한 어린이 책이라는데 실망스러울 것까지는 없다.


평범한 이의 걸작보다는 비범한 이의 졸작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훨씬 많다는 영화계 속설처럼 움베르토 에코라는 이름에 짓눌리지만 않는다면 나름대로 괜찮은 작품이다. 그런데 문제는 에코의 잘못인지, 역자의 잘못인지(분명 에코의 잘못이다) ... 문장이나 내용, 그림투도 그렇고 주요 대상층으로 어딜 겨냥하고 있는지 모호하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다.


성인들을 위한 동화라고 하기엔 너무 단순한 이야기고,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동화라고 하기엔 기존의 동화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데다(이 부분이 에코라고 해서 큰 기대를 걸어선 안 된다는 것이고, 역시 제아무리 뛰어난 석학이라도 어린이 문학은 참 어려운 거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불친절하게 보이기까지 한다(에코라서 그런 선입견을 갖게 되는지도).

 

 

 




"에코"란 이름에선 에코 페미니즘을 비롯한 생태의 냄새가 자연스레 흘러나온다. 그런 탓일까? 이 책에서도 요사이 우리 사회에서 생태와 환경 문제, 그리고 배타성 문제에 대해 조금만 관심 있는 이라면 알 법한 내용과 주제가 담겨져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반전반핵에 대한 이야기다. 원자를 의인화하여 그들이 원자폭탄이 되기 싫어 탈출을 감행하고, 장군은 창고에 하나 가득 쌓인 폭탄을 쓰지 못해 안달한 나머지 폭탄을 썼으나 원자들이 탈출하여 원자폭탄은 불발탄이 되고 "blahblahblahblah" 그런 얘기다.


그리고 두 번째 이야기는 화성에 간 미국인, 러시아인, 중국인들이 처음엔 서로 어색해하다가 팔이 여섯개 달리고 코끼리 코를 한 화성인을 만나자 금새 지구인이란 이유로 단합하는 모습을 보이는 광경에서 타자화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우리와 다르니 넌 적이다"란 세 우주인의 생각은 화성인도 역시 새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금새 풀린다. 차이를 인정하니 다를 것이 없는 생명체더란 이야기다.


세 번째 이야기는 지구의 지리상 대발견을 종료하신 황제 폐하께서 지구의 문명을 드디어 우주로 전파하기 위해 파견한 우주탐험가가 발견한 외계 행성인들과 나눈 대화라 할 수 있다. 에코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 초반부터 쉽게 이해되는 내용이다. 서구인들이 신대륙을 발견(?)하고, 원주민들을 문명화한다면서 그네들의 생명과 재산을 노략질하고 약탈한 뒤에 이룩한 문명이 과연 무엇을 주었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면 말이다.


앞서도 누차 이야기하고 있지만 에코의 이름에 걸맞는 무언가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고, 그런 기대없이 편하게 대한다면 나름대로 좋은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어린이 책이 넘쳐나는 세상에 너무 쉽게(이 말은 어린이들이 읽기 쉽다는 뜻이 아니라, 작가가) 쓰인 건 아닌가 하는 ... 그런 선입견을 완전히 거둬들이기엔 미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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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그'와의 짧은 동거 : 장모씨 이야기 - 장경섭 지음 / 이미지프레임(길찾기) / 2005년



장경섭과 최초의 인연을 창비에서 나온 『십시일반』으로 생각했는데 어제 후배가 전해준 『저예산독립만화지 1996년 6월호 통권 제2호-화끈』을 보니 그와 나의 인연은 그가 데뷔한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야 했다. 그런데 고백할 것은 그에 대한 내 기억을 되살려 준 것은 『화끈』에 실린 그의 작품 때문이 아니라 여기에 실렸던 김동고의 "돌아온 조단" 때문이었다. 이 작품의 그림체가 당시 내게는 꽤 특이하게 느껴졌고, 그 무렵 시카고 불스의 마이클 조단이 은퇴와 복귀를 반복하던 무렵이라 특별히 기억에 남았던 모양이다. 그런 점만 놓고 보자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획하고 창비에서 펴낸 작품집 『십시일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작품집에서도 장경섭이란 이름은 내 기억 속에 명확하게 새겨지지 못했다. 『십시일반』에서 내가 눈여겨 본 작품은 조남준의 「누렁이1.2」였다. 조남준의 「누렁이2」는 훌륭한 단편 옴니버스 만화집인 『십시일반』의 여러 좋은 작품들 가운데서도 확실히 뛰어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장경섭이란 이름은 내게 확실히 각인되었고, 그것도 매우 뛰어난 작가로 기억될 것이다. 그와의 오래된 인연에 비해 장경섭이란 이름은 내게 오래도록 각인되지 못하고 표류해왔다. 그 이유는 뛰어난 작가를 선별해내지 못한 나의 둔함 때문이자, 이런 작가의 작품을 자주 접할 수 없게 만드는 우리 만화계의 고질적인 구조 탓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제라도 발견할 수 있게 된 그의 작품들은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지금도 장경섭 못지않은 실력과 진지한 작가 정신을 바탕으로 무명의 설움을 경험하고 있을 작가들은 많을 테니 말이다. 현재까지 내가 읽은 장경섭의 작품들은 『화끈』에 실린 「張某씨 이야기」와 『십시일반』에 수록된 「커밍아웃블루스」 그리고 이제 발간된 개인작품집 『'그'와의 짧은 동거』가 전부이다. 좀 더 노력한다면 그의 다른 작품들도 구해서 읽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나는 이 세 권에 수록된 장경섭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이 작가에 대해 일단 세 가지를 먼저 떠올리게 되었다. 우선 그가 나랑 동갑이란 사실인데 그 때문인지 이념적 퇴조기를 살아낸, 살아내고 있는 이들이 표출하는 비릿한 삶의 비애가 느껴졌다. 다른 한 가지는 장경섭이란 작가가 매우 고집스럽고, 우직한, 그리하여 매우 호흡이 느리거나 긴 작가일 것이란 추측이다. 앞서 삶의 비애감에 대한 나의 주장이 다소 근거 없는 추측이라면 그의 호흡에 대한 이야기는 내 나름대로는 비평적 근거가 존재한다. 우선 그의 데뷔작이랄 수 있는 『화끈』부터 꾸준하게 주인공(화자)으로 등장하고 있는 '張某씨'와 작가 사이의 길고 긴 인연이 그것이다. 데뷔작이랄 수 있는 96년 작의 "張某씨"의 얼굴선을 그린 펜촉의 느낌은 매우 굵은데 반해 마른 얼굴로 묘사되고 있다. 이에 반해 『'그'와의 짧은 동거』에 등장하는 "張某씨"의 얼굴선을 표현하는 선(line) 자체는 가늘지만 얼굴은 이전의 작품보다 상당히 둥글둥글해졌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張某씨"를, 작가 자체와 동일시할 필요는 없지만 주인공 화자가 만화가의 또 다른 페르소나임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더군다나 작가의 작품들이 내보이는 자의식들, 분명히 때로는 과잉으로 보이는 그 느낌들은 작품의 리얼리티와 관련해 그만의 독특한 세계를 이룬다. "작가의 말"을 살펴보니 "출판사에서 만화책을 만들자는 제안을 해온 것이 지난해 12월이었다. 10년 가까이 만화판의 언저리에서 머물렀으니 이제는 한 권쯤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나름의 초조감과 아직도 헤매는 모습을 꼭 드러내야 하나, 하는 부담감에 시달리며 5년 전에 시작만 했다가 끝내지 못했던 원고를 꺼내어 마무리에 들어갔다"고 말한다. 웃고 있는 작가의 안경 낀, 힘없이 열린 입모습에서 어쩐지 "張某씨" 캐릭터에 대해 그가 느꼈을 법한 애정과 슬픔이 동시에 느껴졌다.


장겹섭의 첫 작품집 『'그'와의 짧은 동거』는 표제작인 중/장편에 「'그'와의 짧은 동거」 이외에도 매우 뛰어난 단편 「즐거운 나의 방」, 「즐거운 나의 방 - 다시 열기」를 비롯해 「서브웨이 카니발」, 「히.말.라.야.에.가.보.셨.나.요?」까지 모두 5편이 수록되어 있다. 만화체로 그려진 「히.말.라.야.에.가.보.셨.나.요?」를 제외하곤 극화체와 만화체가 혼재되는 느낌(그러나 전반적인 경향을 놓고 살필 때, 장경섭에겐 이런 구분이 거의 필요 없어 보인다) 속에 자연스럽게 경계를 허물고 있다. 그림체만 놓고 보자면 『십시일반』에 수록된 「커밍아웃블루스」가 가장 세련된 그림체이다. 문학에 있어 문체는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 중 하나이며 이것은 만화의 그림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장경섭의 그림체는 매우 어눌해 보인다. 세련된 그림체를 선호하는 이들에겐 그의 어눌해 보이는 그림체가 거슬릴 수도 있겠으나 작가 대신에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문체가 작가의 자의식을 반영하기 위한 선택적 글쓰기 전략의 일환이라면 만화가의 그림체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어떤 작가에게 장면 혹은 다루는 이야기에 따라 문체나, 문장의 호흡에 변화를 주는 방식을 택한다면 만화가에겐 만화체와 극화체, 혹은 펜의 선택,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그림체를 통해 자신만의 이야기(이 속에는 작가의 주제의식과 세계관, 그에 따른 표현방식을 모두 포함하는)를 전개해나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만화가의 그림체는 캐릭터 못지않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그'와의 짧은 동거』가 선보이는 어눌한, 어쩌면 아마추어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그림체는 작품에 대한 몰입의 과정에서 다큐멘터리적인 진실함을 보인다. 이것이 독자로 하여금 카프카의 『변신』 같은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리얼리티의 문제로 이의를 제기하거나 과잉되어 보이는 자의식의 세계를 낯설면서 낯설지 않게 느끼도록 하는 힘의 원천이다.




「'그'와의 짧은 동거」가 주는 첫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어두컴컴한 싱크대 앞 펑퍼짐한 몸매의 누군가가 설거지를 하고, 침대에 누운 채 책을 보며 과일을 먹고 있는 "張某씨"의 모습은 낯이 익다. 아버지나 남편은 소파에 누워 TV를 보고, 어머니나 아내는 홀로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아버지 혹은남편이 쉬고 있는 모습은 매우 낯익은 정경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 낯익은 정경으로부터 시작하는 ‘낯설게 하기’를 시도한다. 갑자기 "쨍그랑" 소리가 들린다. 설거지 도중에 컵을 놓쳐 깨뜨린 것이다. 그런데 깨진 컵을 주워 담는 손이 이상하다. 깨진 컵을 주워 담는 건 바퀴벌레였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장면 분할에 있어 바퀴벌레의 손이 등장하는 것은 다음 페이지로 넘겼으면 좀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란 생각.) 


"張某씨"는 컵을 줍고 있는 바퀴벌레에게 다가가 "야! 손으로 만지면 안돼! 다친단 말야!"라며 바퀴벌레를 걱정하듯 말한다. 그러나 바퀴벌레는 화를 내며 다시 싱크대로 가 설거지를 한다. "張某씨"는 다시 침대로 돌아와 ‘후욱’하고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대체 왜 그래? 그래 불만 있는 거 알아. 아무래도 요새는 일이 좀 바쁘니까 신경도 못 쓰고.... 그래도 그렇게 꽁하니 말도 안하고 그러면 답답해서 어쩌냐. 우리 기분전환 삼아서 해남이나 한 번 다녀올까? 전번에 갔던 갯벌이 근사하던데 가서 갯지렁이도 잡고."라며 바퀴벌레의 마음을 달래주고자 한다. 마치 부부의 대화처럼 낯익지만 이질적인 존재들의 동거가 이 작품의 긴장과 매력 속으로 우리들을 끌어당긴다. 바퀴벌레는 검은 비닐봉지에서 수거한 '컴배트 파워(바퀴벌레약)'를 늘어놓으며 말한다. "화장실에 2개, 침대 밑에 2개, 싱크대 밑에 2개. 이건 무슨 뜻이지? 이젠 끝인가?" 작가 "張某씨"가 의뭉스럽게 깔아놓은 컴배트 파워, 삶이란 지뢰밭 사이로 이 제 우리들은 끌려들어간다.




"張某씨"는 외로운 사람이다. 그의 집은 마치 김중식의 시 속에 등장하는 귀가할 때마다 "세상의 끝에 대해/ 끝까지 간 의지와 끝까지 간 삶"에 대해 생각해야 할 만큼 멀고도 먼 곳이다. "큰길이 뚫려 있어도 사방이 막다른 골목"처럼 힘주어 올라간 계단 끝 막다른 옥탑방이었다. 그는 아무도 없는 방으로 들어간다. 치약을 밟고 그는 혼자 말한다. '오늘은 어째 도가 좀 지나친 날이다. 외로움의 정도가...' 그런데 그의 방 침대에 바퀴벌레 한 마리가 미처 피하지 못한 것인지 그처럼 피곤에 지친 탓인지 침대 위에 올라가 있다. "張某씨"는 너무나 외로웠고, 오늘은 그 정도가 좀 지나친 날이었기에 바퀴벌레를 잡아 죽이거나 집 밖으로 내?는 대신에 침대를 바퀴벌레에 내어주고, 대신 방바닥에 입던 옷을 덥고 잠이 든다. "외로움의 도가 지나친 날이었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깐을 제외하곤 결혼할 때까지 10여년을 혼자 살았던 경험이 있다. "張某씨"처럼 옥탑방에 산적도 있지만 바퀴벌레와 가장 오랫동안 동거한 것은 인천의 허름한 연립 원룸에 살던 때였다. 아무도 없는 방, 아침에 출근할 때 급한 마음에 휙휙 던져 논 옷가지 그대로 쌓여있고, 싱크대 통에 누렇게 말라가는 밥풀과 하수도를 메우며 시큼하게 상해 가는 음식찌꺼기들. 그곳은 네가 떠나있는 동안엔 마치 네모난 관(棺)처럼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돌연 출현한 바퀴벌레들, 분명 함께 살고 있는데도 불을 켜면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가끔 살충제나 방충제를 뿌려놓으면 죽은 채 발견되는 시신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다. 정둘 것 없어 병에도 정을 준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너무나 외로웠기에 밤이면 자기 자신에게라도 말을 걸지 않을 수 없던 외롭고 쓸쓸하게 보낸 밤들이 있었다. 그런 어느 아침에 눈을 떠보니 어젯밤 그 바퀴벌레가 설거지를 하고 있다. 작가 "張某씨"는 말한다. "혼자서 생활할 때는 자잘한 모든 것을 내가 선택해야 한다. 어떤 신문을 사야할지부터 재떨이를 비워야 하는 시점까지 일일이 신경을 쓰다보면 예민한 자아는 지칠 수밖에 없고 한 번 지치고 나면 무서운 고독감에 라면 한 봉지 사러 나가는 데도 하루 종일을 고민해야 한다."


외로움 때문에 시작된 바퀴벌레와의 동거는 여러 측면에서 알레고리로 읽힌다. 장경섭은 이미 전작 『십시일반』에 수록된 「커밍아웃블루스」를 통해 외국인 이주노동자와의 동성애를 그린 바 있다. 바퀴벌레는 문명화된 도시의 삶(자연, 사회, 공동체로부터 고립된 개인) 속에서 초대받지 못한 곤충 바퀴벌레 그 자체를 의미할 수도 있고, 주류 세계에 포섭되지 못한 배타적 소수자(동성애자, 외국인 이주노동자 등)를 우의(寓意)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바퀴벌레와 동거하는 "張某씨"는 마치 우렁각시처럼 설거지하고 살림을 도와주고, 친밀한 동료로서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는 바퀴벌레와 함께 일상의 생활을 영위한다. 그러나 사회가 허락하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협소한 통념(通念)의 세계, 일상은 고통의 나날이다. 나이트클럽에서 볼 일을 보던 바퀴벌레는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고 쫓겨나고, 친구 바퀴벌레와 함께 탄 택시에서도 다시 쫓겨난다. "張某씨"에게도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주변의 시선이 그를 괴롭히고, 생활 자체도 그를 힘겹게 한다. 다만 바퀴벌레와 동거하는 "張某씨"를 이해해주는 ‘그녀’를 통해 그는 숨구멍을 열어놓을 수 있었다.('그녀'를 통해서도 극적인 반전이 기다리고 있지만 스포일러일 듯하여 말을 아낀다.)



 

전세계에 걸쳐 4,000여종이 존재하고, 한국에도 7종이 살고 있는 바퀴벌레는 아프리카가 원산이라 따뜻하고 어두운 곳을 즐겨 찾는다. 그런 바퀴벌레가 아프리카를 벗어나 세계로 퍼지게 된 것은 흑인 노예들을 잡아다 팔던 노예 상인들의 선박에 의한 것이었다. 본래 추운 곳에서는 살 수 없는 바퀴벌레는 화석에너지를 통해 난방을 해결한 문명적 삶의 혜택(?)으로 오늘날 우리가 거주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살게 되었다. 마치 이주노동자들이 자본의 이동 경로를 따라 삶의 정주지를 옮기는 것처럼, 그러나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허용되는 반면, 노동의 이동은 엄격하게 통제되는 것처럼, 이주노동자들은 사회적 통합을 가로막는 골칫거리로 치부되곤 한다. 이주노동자들, 피부색, 인종에 대해 비교적 열린사회로 평가 받아오던 프랑스에서 일어난 폭동 사건은 이를 잘 반증한다. 「'그'와의 짧은 동거」에서는 사마귀가 사귀어오던 여성을 과실치사한 사건에서 비롯되는 폭동 사건과 이의 전개 과정을 삽입하고 있다. 「'그'와의 짧은 동거」는 그간 문학의 영역에서 감당해왔던 우리 시대와 사회에 대한 작가 나름의 치열한 고뇌와 사투의 흔적을 담고 있으며, 이는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말」에서 말하듯 “근대에서 소설이라는 형식이 역사적으로 이상하게 팽대해진 현상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왜 소설일까. 그것은 다른 수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다른 수단이 있었다면 굳이 소설이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란 것처럼 이제 과거의 문학 특히 소설이 감당하던 몫을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더욱 커다란 미덕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말한다면 내 판단이 지나친 비관에 의존한 것일까.


그의 다른 작품들 특히 단편 「즐거운 나의 방」, 「즐거운 나의 방 - 다시 열기」은 만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놀라운 표현들로 가득하다. “내 방에 들어와 보니 누군가 죽어 있었다. 나였다”로 시작되는 이 단편에서 그는 마치 유체이탈한 영혼처럼 자신이 죽음(주체의 죽음)을 목격하는 또 다른 주체로서의 나를 보여준다. 내가 나를 잡고 슬퍼하고, 내가 나를 위로하며, 다시 “내 방에 들어와 보니 누군가 죽어 있었고” 다시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달려온 내가 “내 방에 들어와 보니” 나 아닌 내가 나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 그 중 누군가인 내가 “내 방에서 뭐 하는 짓들이야. 이게 다 뭐야! 집어치우지 못해!”라며(이 또한 장례식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들 중 하나다)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다시 나 아닌 나가 “저 자식, 또 지랄이네...”, “받아들이기 힘든가봐.”라며 술잔을 들이킨다. 「즐거운 나의 방」, 「즐거운 나의 방 - 다시 열기」은 마치 에셔의 무한순환하는 그림처럼 그렇게 삶과 죽음의 곡절들을 보여준다. 나는 과연 나를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과연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작가는 그렇게 원자화되고 고립된 개인, 일상의 주체이자 소멸되어버린 몰개성의 주체들에게 묻고 있다.


나는 감히 장경섭의 이 작품들 『'그'와의 짧은 동거』를 2005년, 올해 내가 만난 내러티브 있는 모든 이야기(작품)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첫손에 꼽을 책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에게서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 인간에 대한 우울하기 그지없는 온갖 예언들로 가득한 2005년, 대한민국 문학 판이 온갖 상업주의의 만신전(萬神殿)으로 변해버린 이 시간, 이 시대를 보내며 내가 발견한 희망과 절망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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