럼주, 캡틴큐의 골 때리는 추억

요즘 내가 맛 들인 음료 중 하나가 '모히또(Mojito)'라는 칵테일인데, 시중 카페에서 판매되는 것들 중에는 무알콜음료로 판매되기도 하지만 본래는 럼주와 민트를 넣어 만든 칵테일로 쿠바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쿠바'하면 떠올리게 되는 헤밍웨이가 즐겨 마셨다고 해서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음료(칵테일)이다. 이처럼 럼을 베이스로 한 칵테일 중에 유명한 다른 한 가지가 ‘피나콜라다’다.

느닷없이 '모히또'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사실 럼주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하면 떠올리게 되는 '칼바도스(Calvados)'가 있듯(조앙 마두가 즐겨 마셨던 사과증류주) 근대 해양소설들을 읽노라면 절대 빠지지 않는 술이 바로 뱃사람들의 술인 럼주이고, 럼주하면 해적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인가? 국산 럼주였던 ‘캡틴큐’에는 애꾸눈 선장이 새겨져 있었다. ‘캡틴 큐’는 돈 없이 빨리 취하고 싶은 마음에 고딩 때 동네 친구들과 즐겼던 국산 양주 이름인데, 내 연령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 술 때문에 머리가 깨지도록 아팠던 기억들이 있으리라.

'럼주'하면 사탕수수와 카리브 해, 그리고 쿠바를 먼저 떠올리게 되지만, 사탕수수의 원산지는 본래 인도네시아였다. 동서 해상 무역을 관장하던 이슬람 상인들을 통해 인도와 중동을 거쳐 지중해 연안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이것이 신항로 개척 시대 스페인인들에 의해 카리브 해 서인도제도의 악명 높은 플랜테이션 농장 산업이 되었다.

어쩌면 스페인 사람들이 신대륙에서 발견한 진정한 황금은 사탕수수를 원료로 만들어진 ‘백색 황금, 설탕(sugar)’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탕수수를 원료로 하는 설탕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뽑아낸 뒤 남은 부산물인 당밀(Molasses)도 늘어나게 되었다. 인천 우리 사무실 바로 뒤편으로 제일제당 인천공장이 있는데, 주차장에 밤새 차를 주차해본 사람들은 차량 위로 뭔가 얇은 막이 도포된 것처럼 끈적끈적한 입자들을 느낄 수 있다. 추측컨대 당밀 입자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당밀은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뽑아낸 뒤 남은 끈적거리는 캐러멜 빛깔의 액체다.

17세기 초(1651년)쯤 누군가는 당밀을 발효시켜 술을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럼주다. 폐식자재(?)를 이용한 - 당밀 자체는 설탕 성분만 빼낸 것이고 사탕수수에 담겨있는 본래 영양분은 고농축된 재료 - 술이기 때문에 럼주는 매우 값싼 술이 될 수 있었고,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물론 부두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부두노동자들에게도 인기 있는 술이 될 수 있었다.

럼주를 구분하는 법은 일단 색깔로 구분하는 방법이 있는데, 진한 것을 다크럼(다크 럼은 당밀을 천천히 자연 발효시켜서 단식 증류), 갈색 빛의 럼을 골드럼, 그리고 무색의 투명한 럼을 화이트럼(발효를 빨리 시키고, 연식 증류기를 사용해서 증류)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색깔의 차이가 나는 것은 증류 과정에서 당밀의 잔류 유무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인데 이중에서 다크럼이 우리가 영화나 모험소설 등을 통해 접했던 것처럼 해적들과 뱃사람들이 즐겨 먹던 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외에도 생산지나 제조법에 따라 구분하는 법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①헤비 럼:자메이카산이 유명하다. 자연발효로 만들어지며, 다량의 에스테르를 함유하고 있어 강한 향기가 있다. 발효에는 효모 외에 부티르산균 (낙산균) 등이 간여하고, 증류는 포트스틸로 하며, 증류액은 통에 저장한다. 숙성기간은 최저 3년으로 규정되어 있다.
②미디엄 럼:가이아나에서 생산되는 데 메라라 럼이 유명하고, 향미는 헤비 럼과 라이트 럼의 중간이다.
③라이트 럼:순수하게 배양한 효모로 발효시키고 연속식 증류기를 사용한다. 바베이도스 · 쿠바 · 푸에르토리코 · 트리니다드토 바고산이 유명하며, 향미는 부드럽다. 한국에서도 럼이 생산되고 있는데, 라이트 럼에 속한다. 럼은 스트레이트로 마실 수 있는 외에 다이키리 등 칵테일의 바탕이 되는 술로서 널리 이용되며, 최근에는 라이트 럼이 많이 애용되고 있다. 또, 럼의 감미로운 향기는 양과자에 아주 적합하여 설탕의 감미와 달걀의 비린내를 완화시켜 준다고 해서 다량의 럼이 제과용으로 쓰인다. 또 크림이나 젤라틴에 섞거나 과실을 럼에 담그기도 하며, 아이스크림에 가미하여 맛을 더하는 데도 쓰인다. <출처: 네이버 백과 사전>

럼은 어떻게 해적의 술이 되었을까?
이번에 이사를 하면서 집안의 온갖 잡동사니들을 끄집어내어 정리하는데 우리 집에서 적지 않은 술이 나와서 놀랐다. 나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기 때문(진짜 1년에 서너 차례 정도)에 이렇게 많은 술이 있을 이유가 없는데 생각보다 많은 술이 나와서 놀랐고, 이 술들의 생산 연도가 너무 오래되어서 놀랐다. 대부분 2000년대 초반 것들이라 과연 이 술들을 버려야 하는지, 마셔도 되는 건지 궁금해서 네이버 지식in 검색을 해보니 술(알콜)은 과실주 같은 술들이 아니라면 모두 음용 가능한 것들이란다. 그래서 실제로 술병의 라벨들을 찾아보니 유통기한 표시 자체가 없었다.

가끔 회사 직원들이나 주변의 나보다 어린 친구들에게 냉장고나 컬러 TV가 집에 언제 처음 들어왔는지 아느냐고 물어보면 연령대가 높은 이들은 비교적 정확히 기억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백색가전의 3종 신기(神器)’ - TV, 냉장고, 세탁기 -를 누리며 살았던 세대들은 마치 자연의 일부인 양 이들 제품이 주는 혜택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도리어 신기해졌다. 이중에서 냉장고는 오늘날 우리 가정의 식품저장창고 역할을 하는데, 이것이 없을 때 우리는 식품들을 어떻게 저장해놓고 먹었을까? 음식의 부패를 어떻게 막았을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13세기부터 인류의 항해 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연안을 벗어나 먼 바다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베리아반도에서 무어인들을 몰아내는 레콩키스타가 완료되면서 드디어 ‘대항해시대’가 시작된다. 항해가 길어지면서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음식, 그 중에서도 식수였다. 원양에서 신선한 식수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바다에서 비를 만났을 때 이것을 잘 거두어 통에 보관해 마시는 방법밖에 없었다. 다른 식재료들은 말린다던지, 소금에 절이는 방법으로 일정 기간 동안 보관할 수 있었지만 식수는 오크통 같은 보관용기에 보관하다보면 금세 상해서 마실 수 없게 되거나 그 물을 마시더라도 세균이 번식하기 때문에 복통과 설사, 식중독 등을 유발하여 심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바로 술이었다. 어쨌든 술도 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음료로 사용할 수 있었다. 성경 등 사막 기후의 식생활 풍경을 보면 종종 포도주와 물을 섞어 마시는 대목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 그랬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 해상무역을 주름잡았던 한자동맹 등에서는 물과 함께 맥주와 와인을 식수로 제공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술들은 알코올 성분이 포함되어 있어 물보다 오래 보관할 수는 있었지만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좀더 먼 바다로 항해를 하는 과정에서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유럽보다 온도와 습도가 높은 대서양과 카리브 해를 지나면서 금방 상하게 된 것이다.

물론 위스키 같은 술은 알코올 농도가 높기 때문에 좀더 오래 보관할 수 있었지만 선원들에게 일상적으로 제공하기엔 가격대가 너무 높았다. 위스키는 귀족들이나 선장들의 술을 될 수 있어도 일반 선원들의 술이 될 수는 없었다. 그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럼’이었다. 럼은 위스키처럼 도수가 높아서 쉽게 상하지도 않았고,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뽑아내고 남은 재료로 주정을 만들었기 때문에 위스키처럼 비쌀 이유도 없었다. 그 결과 럼주는 해적은 물론 일반 상선의 선원들과 해군들까지 즐겨 마시는 뱃사람들의 술이 되었다.

‘캐리비언의 해적’ 처럼 해적이 등장하는 영화들을 보면 해적들은 언제나 럼주에 취해있는데 이것은 단지 해적들이 거친 사람들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였으며, 사실은 해적들뿐만 아니라 이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당시 해군들도 모두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당시 뱃사람들은 해적이든, 해군이든 누구나 항상 취해 있었다는 거다. 그런 까닭에 당시 배에서 선장이 선원에게 내리는 가장 큰 형벌 중 하나가 금주였다는 사실은 단순히 술을 주지 않는 문제가 아니라 식수를 공급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넬슨의 피(Nelson's Blood), 럼주

마커스 레디커의 "악마와 검푸른 바다 사이에서"에 보면 "술은 뱃사람의 육체와 정신이 함께 붙어있게 해주는 접착제"라는 구절이 있는데, 캐리비언의 해적들과 가장 치열하게 맞선 세력은 당연히 영국 해군이었지만 이들에게도 ‘럼주’는 필수였다. 영국 해군은 오랫동안 럼주를 병사들에게 럼주를 제공하는 전통을 유지해왔다. 그래도 명색이 군대인데 해적처럼 하루종일 진창 퍼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영국 해군은 럼주 배급에 대한 규칙을 정해놓고 있었다. 럼은 장교를 제외한 준사관 이하 승조원들에게만 지급되었는데(단 20세 이상인 자에 한해서), 하루에 약 0.5파인트(대략 260~280cc)씩 점심과 저녁으로 2번에 걸쳐 배급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오늘날의 양주잔(35cc)으로 환산하면 무려 55도에 달하는 술을 하루에 8잔씩 준 셈이다.

병사들이 늘 술에 취해있으니 규율과 기강이 생명인 해군 고위층의 심사가 편할 리 없었다. 게다가 군대 물품을 임자 없는 물건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영국에도 있었기 때문에 선장이나 당직 사관이 럼주를 빼돌려 팔아먹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선원들은 늘 더 많은 럼주를 원했고, 선장이나 항해사 같은 장교들은 병사들을 관리하기 위해 술 배급을 놓고 자주 갈등해야만 했다. 꼭 럼주 배급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갈등은 종종 술로 인해 증폭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선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은 선원들에 의한 선상 반란이었다.

이런 갈등을 해결하고, 선원들이 럼주에 덜 취하도록 하기 위해 에드워드 버논(Admiral Edward Vernon)이란 해군 제독이 머리를 썼다. 그는 럼주에 물을 타서 배급하도록 했는데, 술에 물을 타니 맛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줄어든 향미를 보충하기 위해 레몬이나 라임 쥬스, 설탕 등을 럼주에 섞어 배급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칵테일 ‘핫 그로그(Hot Grog)’의 시작이었다. 이 말의 유래는 버논 제독이 항상 착용하던 방수망토(grogram)에서 따온 것인데, 이 칵테일에서 나온 말이 바로 권투에서 심한 타격을 받아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를 뜻하는 영어 단어 ‘그로기(groggy)’란 말이다.





럼주의 별명 중에 '넬슨의 피(Nelson's Bllod)'란 말이 있는데,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전사한 넬슨 제독의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럼주 통에 담아 영국까지 돌아왔는데 럼주 통을 열어보니 럼주가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넬슨 제독의 기함이었던 빅토리아호의 수병들이 럼주를 마시고 싶어서 넬슨 제독의 유해가 담겨있는 럼주 통에 작은 구멍을 내서 빨아먹다보니 술이 동이 나버리고 말았다는(다시 생각해보면 넬슨 제독을 과실주처럼 술 담궈 먹었다는 섬칫한 이야기) 이야기인데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만큼 럼주에 대한 영국 해군들의 애착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말해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을 게다.

이후 점차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원양 항해를 견딜 수 있는 식품용기와 냉장기술이 발달하면서 럼주의 효용이 사라지기 시작했지만 유독 영국 해군만큼은 럼주 배급의 전통을 꾸준히 유지해왔는데, 지난 1970년 7월 31일, 최후의 럼주 배급을 마지막으로 공식적으로 선상에서 럼을 식수로 사용하는 일은 사라졌다. 참고로 미국 해군은 1862년 9월부터 폐지되었다. 현대 해군은 술과 같은 알코올성 음료를 선상에서 제공하거나 마시는 일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데 과거에 비해 해군이 운용하는 장비의 가격대도 엄청나졌지만, 해군이 가진 파괴력 또한 엄청나게 커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선원 한 명이 술에 취해 실수로 누른 버튼 하나 때문에 세계가 멸망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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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많이 힘들어!
많이 힘들어?
우울해!
우울해?
고민있어요!
고민있어요?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말을 걸어주세요.
당신의 물음표 하나가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라고 하는 이 광고를 들어본 사람들도 제법 있으리라.

이 광고는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가 공익광고로 제작한 것인데, 이 라디오 CM을 들을 때마다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가 있어서 올려본다.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과거 내가 베트남전에 대해 공부할 때 처음 만났을 - 아마도 베트남전의 부도덕성에 대해 깨우치게 만드는 여러 사건 중 -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이 미라이 학살 사건이었으리라.




Q. And babies?(아기들은?)
A. And babies. (아기들도.)

이 포스터는 예술 노동자 연합(Art Workers Coalition)의 예술가 포스터 분과[Artists' Poster Committee (Frazier Dougherty, Jon Hendricks, Irving Petlin)]가 만든 포스터로, 베트남전에 저항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본래는 R.L. Haeberle가 찍은 미라이 학살 사진(1969)을 피처링한 것이다.

AWC의 한 분과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원래 이 포스터는 AWC와 MoMA의 공동작업으로 기획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MoMA가 이 작품의 발표를 거부한 뒤로도 Artists Poster Committee가 계속 진행해 결국 MoMA의 참여 없이 출판했다. 이 작업에 필요한 종이는 피터 브랜트가 기부하였다(그의 이름은 Artists Poster Committee의 멤버들과 나란히 포스터에 인쇄되었는데 그런 탓에 가끔씩 브랜트가 이 포스터를 디자인한 것으로 잘못 아는 이들도 꽤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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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김창남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공부란 콩나물을 기르는 일과 같아서 구멍난 시루에 매일같이 물을 주면 물이 다 빠져나가지만 그래도 콩나물은 자란다고 하셨었지. 공부란 '스며듬'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1.
춘추시대 거문고의 명수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의 일화를 사람들은 지음이란 두 글자로 기억한다. 백아가 거문고를 들고 높은 산에 오르고 싶은 마음으로 이것을 타면 종자기는 옆에서, "참으로 근사하다. 하늘을 찌를 듯한 산이 눈앞에 나타나 있구나"라 하였고, 백아가 흐르는 강물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기가 막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눈앞을 지나는 것 같구나"라며 감탄해 마지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를 부수고 줄을 끊은 다음 다시는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세상에 다시는 자기 거문고 소리를 알아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2.
거북이와 토끼의 달리기 우화(寓話)를 놓고 거북이가 어떻게 토끼를 이길 수 있느냐고 따지는 사람은 제 얕은 앎에 빠져 정작 핵심이 되는 우화의 중요한 교훈을 얻을 생각은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우화’라는 담화체제(談話體制)가 가진 고유한 구조를 먼저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과의 대화는 맥이 빠질 뿐만 아니라 상대의 소갈머리에 갑갑해진다. 하지만 잘못 들어선 길이 지도를 만든다는 말도 있듯 잘못된 해석, 오독(誤讀)이 없었다면 문학과 예술은 빛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3.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의 일화에서 일품의 거문고 솜씨를 지닌 백아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예술가는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동양적인 의미에서의 예술, 자기완성의 길만을 외롭게 고집해 나아가는 가는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예술관이 아니었을까. 혼자 쓰고, 혼자 읽는 글이 아닌 다음에야 오독의 위험은 피할 수 없는 것이겠다.

클래식 음악에서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파 등 고전 시대 이전의 옛 음악을 그 시대의 악기와 연주법으로 연주하는 것을 가리켜 일명 원전연주, 정격음악(authentic music)이라 부른다. 현대적인 피아노가 아닌 하프시코드, 바이올린이 아닌 비올로 연주하여 옛 소리를 재현해내는 것이다.

과연 이것은 재현일까? 우리는 예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재간이 없다. 작곡가 자신도 자신의 음악을 그대로 재현할 수 없으며, 화가의 작품도 결국 빛에 의해 반사되는 색감에 따라 매순간 다른 색으로 빛나게 되며 바라보는 이의 시선이나 감정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끔 타인의 글 읽기에 대해 그것이 설령 내 글에 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의미를 명확히 규정지으려 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게 읽었다면 그것이 그에겐 진실일 수 있기 때문이다.

4.
백아의 연주를 홀로 알아들었기에 종자기를 지음이라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백아의 연주는 듣는 이에 대한 배려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던 연주였으리라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예술에서 창작을 일 삼는 사람이란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타인의 시선 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집중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이 문제는 쉽게 정리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대중에게 인정받기 위한 예술의 추구란 한 마리 여왕벌을 향해 구애의 몸짓으로 날아오르는 무수한 수벌들의 허무한 비행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여왕벌의 사랑을 얻는 것은 가장 높이 날아오른 단 한 마리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떨어져 일생을 마치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예술의 세계에서 명성을 얻는다는 건 정자(精子)가 사람 되는 것처럼 힘든 일이겠지요. 더군다나 그 명성이 당대가 아닌 백 년 뒤나 오백년쯤 뒤에도 여전히 그 이름을 남긴다는 건). 그렇다고 이 수벌들의 비행이 허무할지는 몰라도 꿀벌사회의 체제를 생각했을 때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게다.

5.
가끔 세상살이가 무척 허무해지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곤충의 세계를 상상해보곤 한다. 일개미들의 행진, 수벌의 비행은 허무하지만 무의미하진 않다고... 콩나물 시루가 밑 빠진 독이라 그 위로 쏟아 붓는 물줄기들은 죄다 밑구멍으로 빠져나가지만 습기를 머금은 콩들은 어느새 자라나서 시루를 덮어 둔 묵직한 백과사전을 밀어 올리듯이... 이 허무를 반복할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 누구라도 콩나물쯤은 키울 수 있다고....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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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반가운 비를 몰고 온 손님, 박근혜 대통령


내정 때문에 위기를 맞은 정권은 외교 분야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는 법이다. 경제문제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기 어려운 상황, 남북관계 파탄, 국정원 정치개입, 정상회담 기록 공개 등 최악의 상황에 부닥친 박근혜 정부가 방중 외교에서 성과를 내고 싶은 조급증에 시달리리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방중 이전부터 정권 출범 갓 100일을 넘긴 박근혜 정부에 대한 용비어천가는 중국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인기가 매우 높다는 식의 언론보도는 이번 방중 외교에 대해 청와대가 걸고 있는 기대를 반증하고 있었다. 그러나 방중 외교의 성과와 질이 예상처럼 대단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우리 언론이 과소평가 또는 푸대접을 받고 돌아갔다고 단언하였던 김정은의 중국 특사가 예상과 달리 미·중정상회담을 앞둔 시진핑 주석에게 북한 측 입장을 전달한 것은 물론 중국으로 하여금 미국에 가서 이야기할 거리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에 한·중회담은 시작부터 김이 빠졌기 때문이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역사적으로 중국이 분열되어 있을 때, 우리 역사가 비교적 평온했던 것처럼 외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한반도의 분열 상황은 그만큼 강대국들이 외교 하기 편해진다. 최근 중국의 기류에 일부 변화의 기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과 미국의 관계 역시 항상 평탄했던 것만은 아니란 점을 고려해보면 지금의 상황이 우리에게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한국을 이용해 중국이 북한을 길들이려는 시도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좀 더 현실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을 방증하듯 방중 외교 직후 발표된 합의문부터 서로 엇박자를 내고 있다. 우리는 중국이 북핵 문제에 대한 한국의 의견을 지지했다고 발표했지만, 중국에 의해 곧바로 부인 당하는 아픔(?)도 맛보았다. 지금 우리는 과거 이명박 정권 당시 지나친 미국 중심 외교 탓에 중국과의 관계 개선이 절실한 상황이고, 그런 점에서 박근혜 정부에 대해 중국 측의 기대가 큰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한두 차례의 방중 외교로 이런 상황들이 극적으로 개선되고, 경제적인 측면이 아니라 정치적인 측면에서 구체적인 성과를 내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박 정권은 출범 초부터 남북 정상회담 기록을 공개해버린 상황이지 않은가.


방중 외교의 성과로 내세울 것이 많지 않은 상황임에도, 우리 언론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 기간 동안 가물었던 중국에 비가 내리자 중국 현지인들이 반가운 손님이 와서 비가 내렸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고 전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연설의 서두와 말미에 중국어로 연설하여 중국인들의 호응이 대단했다고 전하는 등 한국 언론 특유의 호들갑을 보여주었다. 그 와중에 작게나마 이슈가 되었던 것은 박 대통령이 국내에 묻혀있는 중국군 병사들의 유해를 판문점을 통하지 않고, 중국으로 송환하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만 보아도 박근혜 대통령은 물론 정부 인사들이 오늘의 중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해 수준이 얼마나 박약한지 알 수 있다.





전쟁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인식 차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군 규모나 사상자 수치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있을까?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는)은 사상자의 수치로 전쟁의 승패를 평가하는 전통이 있다. - 이와 같은 전통은 과거 그리스· 로마 시대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당시에는 주로 개활지에서 전투를 벌이고 사상자의 숫자로 전쟁의 승패를 가늠했다. 이런 전통이 있기 때문에 미국은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으로 기록된 장진호 전투에서도 승리했다고 주장(사상자 비율로 보면 중공군 측 사상자가 월등히 많았기 때문)한다. 전쟁을 이처럼 산술적인 개념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베트남전에서 단 한 차례의 패전도 없었지만, 전쟁에서 패배한 것일지 모른다. - 우리나라 역시 정치·경제·문화의 여러 측면에서 미국식으로 사고하는데 익숙해져서 한국 땅에 묻혀있는 중국군 유해를 송환하겠다고 하면 중국 측이 매우 감사하게 여기리라 생각한 모양이다. 북한 땅에 묻혀있는 미군 유해를 통해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 개선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우리 나름대로 응용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이것은 앞서 전쟁의 승패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개념 차이처럼 전사자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도 미국과 중국이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나라던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희생자를 추모하는 열기는 뜨겁지만, 추모의 방식까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육군 국가인 스파르타는 전사자의 유해가 그가 사용하던 방패에 올려져 고향으로 돌아와 매장되어야 했고, 전통적인 해군 국가였던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조차 전사자의 시신이 자국 영토(고향)에 매장되지 못하는 것을 대단한 수치로 여겼다. 전사자의 시신이 제대로 매장되지 못한다면 죽어서도 영혼이 구천을 헤맨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전투에서 승리했더라도 전사자의 유해를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장수는 개선할 수 없었으며(심지어 해상전투에서도) 지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당하는 형벌을 받기도 했다. 그에 비해 같은 해군 국가였던 영국은 굳이 전사자의 유해를 자국으로 이송하여 매장하지 않았다.

물론 미국은 영국과는 상황이 좀 달랐다.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은 단 한 구의 시신도, 단 한 명의 포로도 적진에 남겨두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정부는 전사자 유해 발굴 체계를 정립해 왔는데,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시기까지는 전사자 유해 발굴 신원확인부대를 잠정 운용했으나 이후 1976년부터는 전담부대를 창설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레이건 대통령은 전몰자 추모식에서 “우리는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전사자를 찾을 때까지 결코 당신을 잊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보면 미국이 해군 국가로 출발했던 것이 아닌 탓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로서 ‘국가 만들기’ 과정에서 국민의 충성심을 북돋는 차원에서 생긴 전통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중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에 파병된 중국군의 수치는 정확한 통계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 이유는 우선 당시 중국이 그럴 만한 여력이 없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왕수쩡의 『한국전쟁 - 한국전쟁에 대해 중국이 말하지 않았던 것들』(글항아리, 2013)을 보면 당시 중국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상대는 중국이었다. 전쟁의 폐허에서 막 일어난 중국은 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한 당일에도 중국 전역을 해방시키지 못해 인민해방군은 그때까지도 서남과 서북 지역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또한 이미 해방된 광활한 지역에서 신생 인민정권에 맞서는 국민당 군대의 잔존 세력은 여전히 군사적으로 골치 아픈 문제였다. 해를 거듭하며 지속된 전쟁은 취약한 공업을 철저히 파괴했고, 애초 원시경작 상태에 있던 농업은 더욱 쇠락했다. 1950년 신중국의 농공업 총생산 가치는 불과 574억 위안으로, 달러로 환산하면 미국 농공업 총생산 가치의 끝자리 수에 지나지 않았다.(본문 13쪽)

이처럼 당시 중국의 상황이 열악했기 때문에 추정치만 존재할 뿐 정확한 통계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다만, 미국 측 통계로는 당시 중공군 전체 사상자는 92만 명(북한군 포함 142~150만 명), 중국 측 통계에 의하면 전투 및 사고사망 11만 4천 명, 부상 38만 3천 명, 질병 치료 45만 명(또 다른 통계에 의하면 사망자 13만 3천~15만 2천 명 발표)으로 추정될 뿐이다. 한국전쟁 당시 병력보다 화력에 우선했던 미국과 부족한 화력을 병력으로 보충했던 중국의 전략 개념이 달랐던 것처럼 이후 전사자에 대한 양국의 차이도 뚜렷했다.





중공군 유해 송환은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둘까?

이제 중국이 지척이라 서로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혹시 중국을 방문했을 때 신중국 건국의 주역들인 저우언라이(周恩來), 후야오방(胡耀邦), 덩샤오핑(鄧小平) 등의 무덤을 찾아 참배하고 돌아온 사람이 있는가? 기념관이 아니라 그들의 무덤에 갔었다고 한다면 틀림없는 거짓말이다. 진시황의 병마용이 잘 보여주듯 중국은 한때 무덤의 나라였다. 그러나 현대의 중국은 더는 무덤을 만들지 않는다. 중국은 법으로 화장을 강제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에서 한 해 사망하는 인구가 600만 명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들이 전부 무덤을 만든다면 과연 어느 정도의 땅이 필요하겠는가? 중국의 정치지도자들은 그들이 세운 업적이나 권력만으로도 충분히 기념될만한 무덤을 만들 수 있었지만 스스로 모범을 보이기 위해 화장을 선택했다.

한국전쟁 당시 중국의 마오쩌둥은 수십만에 이르는 중국 병사들을 한국에 파병시켰다. 그는 수십만에 이르는 병사들을 사지로 내몰면서 내 자식만 안전한 중국 땅에 둘 수 없다 하여 아들 마오안잉(毛岸英, 양계혜와의 사이에서 나은 장남)을 한국전에 내보냈다. 그는 참전을 위해 압록강을 건넌지 한 달 만에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자세한 내용은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2』권을 참조). 과연 그의 시신은 어디에 있을까? 중국에 있을까? 아니다. 여전히 북한 땅에 있다(1949년 중국 건국 이후 해외 참전 중 전사해 현지에 묻힌 중공군 유해는 대략 11만 5217구 중 99% 이상인 11만 4000구(추정)가 한반도에 묻혀 있다. 북한은 200여 곳에 중국군 기념지와 묘지를 조성했다고 한다. 1973년 김일성 주석의 지시로 평안남도 회창군 등 8곳에 ‘중국 인민지원군 열사묘’를 조성 관리하고 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도 회창군 열사묘에 묻혀 있다. 이 묘역엔 2009년 원자바오(溫家寶) 총리, 2010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후계자인 3남 정은을 데리고 참배했다).

장남의 시신 송환문제가 논의되자 마오 주석은 딱 잘라 말했다.

“중국 인민의 의리를 말해주는 표본입니다. 그냥 조선반도(한반도)에 두십시오.”

그리고는 이렇게 공식발표했다.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희생없이는 승리도 없습니다. 세상에 자기자식을 아끼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보통사람들 중에도 자기 자식이 혁명을 위해 피를 뿌리고 희생된 이가 아주 많습니다.”

그런 중국에게 남한 땅에 묻혀있는 너희 병사 시신을 돌려보내겠다고 제안하는 한국 대통령과 그걸 무슨 대단한 성과인양 대서특필하는 언론을 보면서 과연 중국, 중국인들은 대한민국이 중국에 대해 아니, 중국과 북한의 관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할까? 평소 중국 고전을 많이 읽고, 중국 노래를 즐겨 중국을 문화로부터 접근한다는 우리 대통령을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물론 이명박 전임 대통령보다는 조금 낫게 평가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언론이 떠드는 것만큼 유해 송환을 통해 거둘 성과는 크지 않을지 모른다. 신뢰를 쌓는다는 것은 이처럼 힘든 일이다. 더군다나 상대가 정상 간에 나눈 회담 내용조차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공개해버리는 정부라면 더욱더 그렇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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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쟁이가 가고 새 글쟁이가 왔다
<남편의 서가>/신순옥 지음/북바이북 펴냄


[302호] 2013년 06월 24일 (월) 10:22:26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신간 서평을 하면서 출판평론가 최성일과 나의 인연을 펼쳐놓는 것은 남부끄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와 내가 호형호제한 일도 없거니와 두 사람이 만난 것도 어른이 된 뒤의 일이며, 우리는 그야말로 일로 만난 사이였기 때문이다. 살면서 뒤돌아보니 새삼 친구라 부를 만한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울해지는 날이 꽤 많았다. 오래된 고향 친구, 같이 학교에 다닌 친구들이 없지는 않으나 1980년대 내가 만났던 책들과의 인연이 그러했듯 시대가 험난했던 탓에 서로 소식을 주고받지 못하여 저절로 스러진 인연들이 있었고, 사랑에 굶주렸던 탓에 우정으로 만나 사랑이란 이름으로 불타버린 인연들도 있었다. 그런데 일 때문에 만난 사이의 우정을 되새김질할 수 있을까. 어느덧 고인이 세상을 뜬 지도 2년이다. 우리는 친구라는 달콤한 이름으로 부른 적은 없으나 언제나 벗이었다.

최성일은 나보다 몇 살 많았다. 그리고 이제야 말이지만 그는 곧잘 남들에게 편벽된 사람으로 오해 아닌 오해를 받기도 했다. ‘출판평론’이란 것이 문학평론이나 미술평론처럼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자리가 잡힌 일도 아니며, 크게 돈이 되는 일도 아니므로 내심 그것이 무슨 평론할 거리나 되느냐 무시하는 이들도 종종 만났으리라. 그는 사람들과 종종 논쟁했다. 듣기로 그중에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유명 작가도 있었다. 그럴 때면 지나가는 말로라도 다투지 말기를 충고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그는 나의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뜨거운 사람이었다. 옳지 않다고 여기는 일에는 싸움을 마다치 않았다. 나는 그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해 나서는 일마다 동감할 순 없었으나 그가 사회적 명리를 바라고 그러는 사람이 아니란 사실만은 인정할 수 있었다.

내가 아는 한 세상의 모든 남편은 자신의 아내에게 평가받는 일이 가장 두렵다. 그것은 나 또한 그렇다.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사람들은 상대가 비밀리에 적은 글이 그렇게 궁금할 수가 없다. 남편은 내가 집을 비운 사이 내 일기를 훔쳐보고 그것을 내 일기장에 증거로 남겼다. 고백건대 나 역시 남편의 일기를 자주 훔쳐봤다. 나는 안 본 척 시치미를 뚝 떼버리지만, 남편은 몰래 본 것을 마음에 담아두지 못하는 양심적인(?) 사람이다.” 아내의 일기장에 ‘일기 봤음’이라는 표시를 해둘 정도로 무섭게 양심적인 사람이 최성일이었다. 내가 읽은 책들의 저자 가운데 아내에게 이처럼 높이 평가되는 걸 읽어본 것은 최성일 이전에는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었던 역사학자 김성칠(<역사 앞에서>)이 유일하다.

무섭도록 양심적인 사람, 최성일

그가 나를 좋게 봐주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잘 모르겠으나 몇 차례 그와 아내, 두 아이가 사는 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었다. 겉보기에 그의 집은 보통 우리가 사는 집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남들의 몇몇 배는 될 법한 책 속에 살았기에 그의 집은 집이 책을 품었는지, 책이 집을 받치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의 아이들이 “우리 집 책은 아빠 같다”라며 아빠의 서재를 그냥 두게 했다는데, 그의 책은 최성일이 남기고 간 거대한 기억일 것이다. 고인이 된 최성일은 편집자들에게도 까칠한 글쟁이였다. 그만의 미문(美文) 의식이 있었고, 그의 문장 원칙, 한국어 쓰기에 대한 강한 자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조차 인정하는 몇 안 되는 글쟁이가 바로 자신의 아내 신순옥씨였다. 나 역시 그에게 직접 아내 글솜씨 자랑을 여러 차례 들은 바 있다.

아내가 남편을 회상하고, 추모하며 책을 낸 것이 이번이 처음 일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비록 최성일은 가고 없지만, 신순옥이란 새로운 글쟁이가 왔음을 비로소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6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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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역사는 무엇입니까

[301호] 2013년 06월 14일 (금) 23:46:57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2012년 8월 내 나이 마흔셋에 처음으로 단독 저서(<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를 썼다. 그 책을 펴내기 전에도 나는 글쟁이였고, 편집자였고 공저자였지만 그냥 아는 사람들만 아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 책을 낸 뒤라 해서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그나마 내가 쓴 책 한 권 있다는 점이 남들에게 나란 사람을 다르게 볼 이유가 된다는 것을 20여 년 가까이 책을 만들며 사는 동안에는 미처 실감하지 못했다.

여기 한 권의 책이 있다. 책 제목이 의미심장하게도 <대한국民 현대사-국민으로 살아낸 국민의 역사>이지만, 이것만으로는 이 책이 지닌 뜻 깊은 속이 고스란히 전달되지 않는다. ‘아버지의 스크랩으로 본 현대사 1959~1992’라는 설명까지 따라붙어야 이 책이 지닌 의미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책은 오랫동안 <한겨레>에서 기자로 <한겨레21> <씨네21> 등 잡지에서 편집장으로 살아온 고경태의 부친이 34년간 모아온 손때 묻은 신문 스크랩북 스물다섯 권을 매개로 보수적인 목사 아버지(세대)와 진보 성향의 기자 아들(세대)이 때로는 회한의 시선으로, 때로는 불꽃 튀는 시비로 나눈 길고 긴 대화를 엮은 책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저자 성명에는 ‘고경태’라는 이름 옆에 아버지 존함 석 자도 함께 박혀 있어야 마땅했으리라.

개인 저서를 펴내는 가장 마지막 과정은 저자 약력을 스스로 기록해 편집자에게 넘기는 일이다. 나는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내 삶이 굴절을 겪었다고 여긴 순간을 중심으로 약력을 적었는데, 되돌아보니 내 삶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어떤 순간마다 본의든 아니든 언제나 역사의 현장이나 그 시간대에 있었다. 사실 이 말은 매우 우스운 말이기도 하다. 보통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역사를 내 삶과 무관한 것이라 여기기 쉽지만 우리는 항상 역사의 순간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 책을 기준 삼아 자신의 연보를 기록해보길

만약 지금의 내 말이 의심스럽거든 이 책을 기준 삼아 자신의 연보를 따라서 기록해보라. 자신이 태어난 해, 태어난 날, 처음 학교에 입학하던 해, 중학교·고등학교에 진학하던 해, 그 외에 자기가 살면서 의미 있었던 순간이라 기억하는 날들을 찾아 그 시절에 일어났던 사건들과 대비해보면 누구나 자신이 역사의 한순간을 살아냈다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공교롭게도 내 책의 추천사를 써주기도 한) 역사학자 한홍구 선생의 말대로, “역사는 남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개입하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주인이고 내가 기록한 가장 생생한 한국 현대사”를 누구나 쓸 수 있다.

그렇게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이 역사책이지만, 고경태의 이 책 <대한국民 현대사>가 유별난 점은 아버지가 선택하고, 아들이 개입한 역사책이라는 점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고(高), 봉(逢), 성(星)이었다. 그동안 아버지의 스크랩에 관해 쓰며 수백 번 아버지를 들먹였지만, 실명을 꺼낸 적은 없었던” 아버지와 아들이 이 책을 통해 만나고 대화를 시도한다. 어쩌면 역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과거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정작 과거와는 거의 무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가 힘을 갖는 이유는 내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아버지의 자식인 것처럼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동안 역사가 이미 내 안에 들어와 내 삶의 일부, 그리하여 내가 행하는 모든 것 속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6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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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이 위기에 처했다. 민중이여, 일어나라!"
- 김혜린의 『테르미도르』


세 가지 색(블루, 화이트, 레드)과 줄르, 유제니, 알릐느




김혜린의 『테르미도르』는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순정만화 전문잡지 <르네상스>를 통해 발표되었던 만화를 다시 엮은 복간본 만화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예술 장르가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만화만큼 성별분업(性別分業)이 확실한 장르도 드문 편입니다. 순정만화란 카테고리는 그 자체로 여성들만 보는 작품이란 뜻으로 받아들여지니까요. ‘앤서니와 테리우스’로 표상되는 순정만화 특유의 캐릭터들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순정만화란 호명 속에는 여류 시인이란 호명이 지닌 문제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도 김혜린의 『테르미도르』는 순정만화라고 하기보다는 작품의 주제나 소재 면에서 역사만화로 분류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김혜린의 『테르미도르』는 1789년 7월, 왕과 특권층이 삼부회의를 전복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프랑스 전역이 혁명의 열기로 들끓던, 이른바 1789년 ‘7월의 대공포’로 시작해 1794년 7월 27일 ‘테르미도르 9일의 쿠데타’에 이르는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얼마 전 『레미제라블』이 큰 인기를 끌었는데, 그보다 조금 앞선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인 실존인물들이 무수히 교차하는 대하서사만화이지만, 주인공은 혁명의 대의에 동감하는 귀족 청년 ‘줄르’, 귀족이 되려고 자신과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를 원망하며 성장한 혁명주의자 ‘유제니’, 폭도들에게 부모를 잃고 사랑하는 연인이었던 줄르의 생사마저 알 수 없게 된 귀족 아가씨 ‘알릐느’, 이렇게 세 명의 가상인물입니다. 이들은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삼색기처럼 『테르미도르』를 이끌어가는 세 가지 색 주인공들입니다. 줄르는 ‘자유’, 유제니는 ‘평등’, 알릐느는 ‘박애’를 상징하지요.

김헤린의 『테르미도르』를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 프랑스 혁명사를 줄줄 꿰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도리어 그 반대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유익할 수도 있지요. 역사를 재구성하는 이른바 ‘팩션:팩트(fact)와 픽션(fiction)의 합성어’가 하나의 흐름이 되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역사를 멋대로 희화화하거나 근거도 없이 왜곡을 일삼는다는 비판도 많습니다. 허구(虛構)라 할지라도 역사를 배경으로 삼는 이상 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되는 것들도 있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김혜린의 『테르미도르』는 굳이 홍세화 선생의 추천사가 아니어도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작품으로 평가받을 만합니다.

민중이라는 괴물의 등에 올라탄 부르주아지 혁명


프랑스 혁명을 정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간단히 정리해보면 전제왕정 밑에서 세력을 형성해 가던 시민 부르주아지 세력이 절대 군주가 개최한 삼부회의를 통해 그들이 국민을 대변하는 존재임을 자처하며 국왕(및 왕당파 귀족 세력)과 벌인 권력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퀼로트도, 상퀼로트도 입을 수 없었던 노동자, 농민(무산계급)의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용해 왕과 귀족들을 제압하고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부르주아지들은 왕을 살해한 뒤에야 자신들이 얼마나 무서운 일을 저질렀는지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르주아지들이 왕을 처형한 최초의 권력찬탈자들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왕은 원시 시대 이래 꾸준히 살해당해왔고, 프랑스 혁명 바로 얼마 전에도 영국의 청교도들이 왕을 효수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진정으로 경악시킨 것은, 자신들이 왕을 제거하고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그보다 더 무서운 괴물을 감옥에서 풀어주었으며, 그들이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는 ‘민중’이라는 괴물 등에 올라타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이전의 혁명(영국 혁명, 미국 혁명)과 달랐던 점은 특권계급에 속했던 왕과 귀족, 부르주아지들이 서로 적당한 지점에서 권력을 나눌 수 있는(타협할 수 있는) 지점을 무서운 속도로 지나치면서 민중의 등에서 안전하게 내릴 수 있는 때를 놓쳤기 때문이었습니다.

혁명을 통해 분출되기 시작한 민중의 각성은 그들이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고, 도시 민중들과 결합한 부르주아지 지식인들의 숫자도 많았습니다. 이들이 훗날 자코뱅이라 불렸던 마라와 당통, 에베르와 로베스피에르, 생쥐스트 같은 이들이었습니다. 혁명은 처음부터 혁명의 자식들을 제물로 삼을 운명이었습니다. 부르주아지의 국가 프랑스를 살려내기 위해 민중의 활력은 소진되어야 했고, 혁명적 부르주아지(혁명가)들은 죽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공포정치의 내용이었고, 희생자들의 명단은 민중의 자발성이 거세되는 전개과정의 화려한 프랑스식 만찬 메뉴였습니다.

프랑스식 공포의 만찬을 능숙하게 요리한 김혜린

김혜린의 『테르미도르』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이케다 리요코(池田理代子)의 『베르사유의 장미』나 러시아혁명을 다룬 『올훼스의 창』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김혜린의 『테르미도르』는 작품의 여주인공인 알릐느가 자신의 여성성을 유지하면서도 자신이 속했던 계급을 뛰어넘어 진정한 자아(박애의 길)를 찾아 각성해가는 과정을 그린다는 점에서 이전의 다른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습니다. 김혜린은 이처럼 복잡한 프랑스식 만찬(대혁명의 역사)을 훌륭한 솜씨로 요리합니다.

혁명 과정에서 폭도들에게 부모(귀족)를 잃은 알릐느는 혁명에 앞장선 유제니에게 복수하기 위해, 고아 출신의 유제니는 혁명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떠납니다. 죽은 줄 알았던 알릐느의 연인 줄르 역시 혁명에 동참하기 위해 이미 파리에 있었습니다. 이들 세 사람은 각기 자신만의 이유로 혁명의 수도에 모입니다. 알릐느는 혁명에 복수하기 위해 왕당파의 끄나풀이 되어 자신의 미모와 노래를 팔고, 줄르는 프랑스 혁명을 기록하고, 자신이 쓴 글을 익명으로 잡지에 기고하는 작가가, 유제니는 혁명가 마라의 하수인이 되어 반혁명세력을 감시하는 특무대원이 됩니다. 이렇게 두 명의 남자를 앞에 놓고, 한 명의 여자는 처음부터 사랑한 남자와 처음엔 증오했지만 사랑하게 되는 남자 사이에서 복잡한 감정들을 엮어나가게 됩니다.

테르미도르의 반동 이후 유제니가 적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자, 알릐느는 줄르와 함께 유제니가 보살폈던 거리의 아이들을 거둡니다. 그리고 두 사람(알릐느와 줄르) 사이에 태어난 아이에게 유제니란 이름을 붙이죠. 평등을 상징하는 유제니는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자유를 상징하는 줄르는 살아남았습니다. 자유와 박애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지만, 살아남았고 평등은 죽임을 당했지요. 어쩌면 그것이 프랑스 대혁명의 진정한 비극이었을 겁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로베스 피에르, 혁명의 탄생』 - 장 마생 (지은이) | 양희영 (옮긴이) | 최갑수 | 교양인 | 2005

* 지난 2012년 2학기부터 2013년 1학기까지 "인천교사신문"에 만화비평을 연재하고 있는데(모두 6회)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다. 선생님들과 함께 만화를 통해 역사와 우리 사회의 현실 문제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도록 기획해보았는데 원래는 한 학기만 하기로 했던 것이었지만 반응이 좋아서 한 번 연장했었다. ^^

덕분에 나도 오랜만에 옛날 만화들을 뒤적이며 재미있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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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은 어려서부터 재기가 넘치는 인물이었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운했다. 그의 나이 9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16세에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고아가 된 신세였지만 이항복의 나이 19세 때에 그의 재능을 높이 산 당대의 권신 권철은 아들(권율)에게 시켜 손녀사위로 삼도록 했다. 아마도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일화 - 실화일지 아닐지는 모르겠으나 - 가 만들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그의 옆집에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영의정 권철이 살았다.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이라는 영의정의 지위가 높다보니 그의 집 하인들도 기세가 등등하여 함부로 굴었다.

이항복의 집에는 해마다 감이 주렁주렁 열리는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나뭇가지가 이웃한 권철의 집으로 넘어가자 그 집 하인들이 감을 함부로 따가는 통에 나무가 상할 지경이었다. 이항복 집 하인들이 나무라자 "우리 집 담으로 넘어왔으니 우리 것"이라며 몇 차례 대거리를 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들의 행실이 고쳐지지 않자 이항복에게 그런 사실을 고해바쳤다.

이항복은 권철이 집에 있는 날을 골라 그를 찾아갔다. 이항복은 권철이 머무는 방문을 뚫고 다짜고짜 자기 팔뚝을 밀어 넣었다. 권철이 "어허, 이 무슨 해괴한 짓인가?" 묻자 이항복은 "대감마님! 이 팔뚝은 누구의 팔뚝입니까?"라고 되물었다. 권철이 "자네 몸에 붙어 있으니 자네 팔이 아닌가."라고 했다. 그러자 이항복은 "그런데 어찌하여 대감 집 하인들은 저희 집 감나무가 담장을 넘었다고 제 집 감이라고 하는 것입니까?"라고 따졌다. 그제야 전말을 깨달은 권철이 하인들을 불러 크게 야단을 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항복의 기개와 기지를 높이 평가해 그를 손녀사위로 삼았다. 

이런 고사를 들먹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나눈 정상회담 문건은 국가기록원에 '대통령 지정 기록물'*로 지정되어 있어 아무나 함부로 볼 수 없도록 법으로 보호되고 있다. 그러나 처음 녹음 상태가 좋지 않았기에 청와대 비서실에서는 녹음원본을 국정원에 보내 새로 녹취하도록 시켰다. 원본은 국가기록원에서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국정원에 보관된 기록물은 국정원이 임의로 보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일설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한 부는 국가기록원에서 '대통령지정기록물'로 보관하게 했으나 다른 한 부는 국정원에 맡겨 공공기록물로 관리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 까닭은 대통령지정기록물로 보관되면 후임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기 때문에 후임 대통령이 앞으로 있을 정상회담에 나서게 될 때, 참고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국정원에 공공기록물로 남기는 선의를 베풀었다고도 한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나의 마음은 복잡다단하다. 그에게 표를 준 적이 없고, 그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 개인의 선의에 대해선 일정한 믿음이 있다. 그는 거칠었지만, 한 편으로 매우 섬세한 대통령이었고, 무엇보다 사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후임 대통령들은 그가 살았을 때나 죽은 뒤에도 이처럼 욕을 보인다.

노무현 정부 시절 국정원장을 지냈던 김만복은 퇴임한 뒤 공저로 펴낸 책에 당시 정상회담 내용 일부를 소개했다. 국정원은 그를 '기밀누설' 혐의로 고발했고, 검찰은 고의성은 없었다며 기소유예처분을 내렸다. 당시 보수언론들은 이 사건을 과연 무어라 했을까? 남재준 현 국정원장은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이번 문건을 공개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애초에 이런 사태가 벌어진 까닭이 무엇이었나를 생각해본다면 국정원이 지켜야 할 명예 같은 건 존재한 적조차 없었을지 모른다. 국가의 이익과 명예 보다 조직 논리와 이익이 앞서는 자질 없는 사람이 국가정보원 원장에 취임했다.

이것이 누구의 책임일까? 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대한민국만큼 재미있는 나라도 참 드물다. 용산참사 재판 당시 검찰은 법원의 공개 명령에도 불구하고 수사기록 3천 쪽을 끝끝내 공개하지 않았고, 과잉진압의 희생자들을 감옥으로 보냈다. 또 노회찬 의원은 검찰을 비롯한 고위공직자들에게 떡값 명목의 뇌물을 제공한 기업을 폭로하고, 그 명단을 공개했다는 이유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런 비상식적인 일들이 상시적으로 벌어지는 나라는 누구의 책임인지 또한 묻지 않을 수 없다.

* 대통령 지정 기록물

대통령 기록물의 안전한 보존을 위해 중앙 기록물 관리 기관으로 이관 시 대통령이 지정한 기록물은 국회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 의결이 이루어지거나, 관할 고등 법원장이 중요한 증거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여 영장을 발부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반 지정 기록물은 15년, 개인의 사생활 관련 기록물은 30년의 범위 내에서 열람 · 사본 제작을 허용하지 않거나, 자료 제출에 응하지 않고 보호할 수 있는 제도

** 공공기록물관리법(공공기관의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정부 내 모든 기관의 문서 보관을 의무화하는 법으로 국가기관, 지방자치단체, 정부투자기관 등 공공기관에 모두 적용되며, 국가 전반의 기록물을 안전하게 보존하고 체계적ㆍ통일적으로 관리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1998년 말에 제정되어 2000년 1월부터 시행에 들어갔으며, 2012년 3월 21일 일부 개정되어 같은 해 7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이 법률에 따르면 공문서뿐만 아니라 회의록, 비공식보고서, 비밀기록, 메모노트까지도 보존대상에 포함시켜 국정의 입안단계부터 최종종결까지 전 과정을 사후에 규명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후대의 역사적 심판을 거쳐야 할 핵심기록을 철저히 보존하고 공개할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대통령 통치문서는 대통령 임기종료 6개월 전부터 '국가기록원(옛 정부기록보존소)'에 이관하도록 하였다. 또한 정부 기록물을 무단으로 은닉하거나 국외로 유출했을 경우, 기록물을 중과실로 멸실했을 경우, 기록물을 고의 또는 중과실로 그 일부 내용이 파악되지 못하도록 손상시킨 경우 등에는 7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국가기록원장은 국장급이므로 장관의 지휘를 받는 다른 부처의 기록관리 실태를 지도ㆍ감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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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나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 그래서 야근한다!"

[프레시안 books]스베냐 플라스푈러의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노동'을 '섹스'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요?

스베냐 플라스푈러(Svenja Flasspöhler)의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장혜경 옮김, 로도스 펴냄)는 현대사회의 노동이 더 이상 먹고살기 위해 의무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즐기거나 즐길 수 있는 모든 향락을 압도하는 노동으로 새롭게 위치되는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 막스 베버로부터 한병철의 <피로사회>(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에 이르는 여러 문헌들을 인용해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고 있다.

지방출장 중에도 틈만 나면 이 책을 꺼내 읽으며, 나 자신이 저자가 말하는 향락 노동자가 아닌지 고민하는 한편 저자가 펼쳐놓은 다채로운 지식의 향연, 다른 말로 촘촘한 요설(饒舌)들을 따라가느라 다소 힘겨웠음을 먼저 고백한다. 책의 원제이기도 한 1장 '향락노동-고통의 즐거움과 즐거움의 고통'부터 시작해 14장 '놓아두기의 칭송 - 무위에 대하여'에 이르기까지 모두 14개 장(章), 200여 쪽이 조금 넘는 책이지만 한두 페이지를 넘기기가 무섭게 등장하는 수많은 인용문구가 촘촘하다.


철학자들이 쓴 책들 가운데에는 두껍고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책들도 많지만, 얇고 읽기 쉬운 책들도 제법 많이 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거닐고 있다 - 공산당이라는 유령이"라는 문구로 시작해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는 구호로 끝맺음하는 <공산당선언>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이 읽고 있으며 현대 사회의 향방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 책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역시 독일 철학자가 쓴 책으로 그다지 많지 않은 분량에 제법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은 물론 작년 국내에 소개되어 주목받았던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연상하게 하는 책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웃음의 의미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처럼 방대한 문헌을 읽고 책을 저술한 저자야말로 향락노동자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야릇한 상상이 들어서였고, 다른 하나는 1장 '향락 노동-고통의 즐거움과 즐거움의 고통'만으로도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모두 나왔는데, 구태여 부연일 수밖에 없는 나머지 장들을 왜 그리 힘들게 썼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차라리 1장만으로 책을 만들었더라면 더 많은 사람이 읽었을 테고, 후반부에 간단하게 제시하고 있는 해법도 좀 더 설득력 있게 보였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었다.

저자 소개를 살펴보니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30대 후반의 젊은 여성철학자로 현재 <철학 잡지(Philosophie Magazin)>의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여러 매체에 철학 관련 글들을 기고하고, 몇 권의 책을 냈으며, 그 성과를 인정받아 아르투어-쾨스틀러 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의 첫 단락부터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다. 무슨 취지인지 못 알아먹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당장 나 자신부터 그런 향락 노동자(Wir Genussarbeiter)인지 새삼 반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사 동료는 물론 SNS의 지인들에게도 저자의 이 선언적인 구절에 대해 의견을 물었으나 누구 한 사람도 노동을 '섹스'는커녕 '휴가'보다 더 좋아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나를 비롯해 내 주변의 누구도 노동을 자기실현의 수단으로 여기거나, 노동을 통해 향락같이 고차원적인 즐거움을 찾을 만한 여유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왜 저자는 '왜 오늘날의 우리는 탈진할 때까지 일에 매진할까? 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즐기지 못하는 걸까?'라고 물으며 현대사회에서 노동은 이제 다른 모든 향락을 압도하는 최고의 '향락'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물론, 반어법일지도 모른다.

다음은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의 첫 단락이다.

오 늘날 우리에게 노동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우리는 좋아서 일을 하고,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일에 쏟아붓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의무 노동자가 아니라 향락 노동자이다. 이 단어는 몇 십 년 전부터, 실제로는 이미 200년 전 시민 계급의 시대가 시작된 이후 지속되어 온 발전의 정점을 표현한다. 인간이 제 몸을 망가뜨리는 노동을 기계에 떠맡기고 직업 교육을 통해 적성에 따라 직업을 선택하며 자신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달라지게 된 이래로, 노동이야말로 행복을 약속하는 것이 되었다. 노동은 이제 쾌락의 다른 원천들마저 몰아내고 있다. 섹스? 그럴 여유 없어. 휴가? 쉴 틈 없어. 실컷 놀아보는 건 어때? 에이, 너무 유치해. (8쪽)

향락 노동은 개인적 병리현상인가? 자본주의적 질환인가?

<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의 독일어 원제 'Wir Genussarbeiter'에서 'Genuss'란 '즐김, 향유', 'arbeiter'란 노동자란 의미이니 두 단어를 합치면 '노동을 즐기는 사람, 노동을 향유하는 사람', 즉 '향락 노동자'란 뜻이다.

저자는 원인을 분석하는 데 있어 우선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중요한 근거로 인용하고 있다. 금욕과 신을 위한 근면, 재산 축적은 초기 산업 자본주의의 프로테스탄트적 노동 윤리였고, 현재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고 분석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란 말을 '성장 사회'란 표현으로 교묘히 대체하고 있다. 저자는 현대 사회에서 프로테스탄트적 노동윤리는 다음과 같이 변화했다고 말한다.

첫째, 신의 뜻에 따르려는 노력의 자리에 오늘날 노골적인 야망과 끝을 알 수 없는 인정 투쟁이 들어섰다. 부지런하게 주어진 일만 하는 사람,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해서 마감이 코앞이더라도 원칙적으로 일요일에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일할 의욕이 없는 사람, 심지어 쓸모없는 사람으로 취급된다. 일을 향한 끝없는 열정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미리 알아서 주말에도 일을 하고 밤중에도 메일을 쓰는 사람, 출세의 기회라면 무조건 움켜잡는 사람, 때로 자신을 과대평가할 줄도 아는 사람들만이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자리 보존을 할 수 있고 나아가 출세도 할 수 있다.

둘째, 베버와 달리 오늘날의 우리는 세계화된 바겐세일 자본주의의 시대를 살고 있다. 독실한 기독교인에게는 죄악인 탐욕과 인색함이 널리 칭송받는 세상이다. 인색한 소비는 프로테스탄트의 근검절약과 비슷해 보이지만 그건 겉모습일 뿐이다. 오늘날의 인색함은 절약하여 돈을 모으려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적게 주고 최대한 많은 것을 얻는 것이 요점이다. 바겐세일 자본주의는 낭비 자본주의이다. 저렴한 텔레비전이나 적당한 가격의 소파를 혹시라도 놓칠세라 꼼꼼하게 세일 광고를 살피고 경매 사이트에 들락거린다. 오늘날 향락이 노동이라는 사실은, 군중들이 한밤중에도 할인행사장으로 달려가, 서로 앞다투어 물건을 잡아채는 신종 국민체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자들은 절대 누릴 수 없었던 세속적 향락에게서 죄의 비늘을 벗겨내 줄 적절한 수단과 방법이 우리에게는 존재한다. 결백한 향락! 이것이 오늘날 웰니스 시대의 모토이다. 무알콜 맥주, 저지방 치즈, 사이버 섹스를 보라. (10~11쪽)

역사 이래 노동은 인간 존재, 인간의 도덕, 그리고 인간의 자화상을 형성해 왔고,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전통 속에 노동은 정치적 좌우,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서로 분리해낼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16세기 종교 개혁이 있던 무렵은 훗날 대규모 자본주의 생산에 필요한 자본축적의 기회가 과거 어느 때보다 컸던 시기였다. 자본주의의 핵심을 자본이라 했을 때, 자본주의에는 가능한 많은 돈을 벌려는 상인 근성과 그렇게 모은 돈을 써서 인생을 즐기려는 향락주의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점에서 보자면 신약성서에도 나오듯 - 예수가 교회에서 세리와 고리대금업자의 돈 상자를 뒤집는 - 기독교는 상업적 행위, 영리목적의 장사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모든 향락에 대해 금욕적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돈을 벌기 위한 상업 활동에 아무런 터부가 없었으며 사람들이 마음대로 영리를 추구할 수 있었던 중국이나 인도 혹은 이슬람 세계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했다손 치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런데 어째서 실제의 역사는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을까?

그 의문에 대해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만든 것은 프로테스탄트(신교도)들이었으며 그들은 근면과 절약을 좌우명으로 삼아 자신의 직업을 신에게 부여받은 '천직(天職)'이라 생각하여 신앙생활을 하듯 자기 목적적으로 노동한 결과라고 분석하고 있다. '영성의 거장'이라 불리는 청교도 목사 리처드 백스터는 "만약 하느님이 어떤 방법보다 더 많이 벌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데도, 여러분이 이 방법을 거부하고 이익이 적은 방법을 택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소명 가운데 하나를 거스르는 것이며, 하느님의 종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여 하느님이 요구하실 때 하느님을 위해 그 은총을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육체와 죄악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여러분은 부자가 되려고 힘써도 된다"라며, 신도들에게 부를 얻을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설교하기도 했다.

물론 서구의 근대인들이 모두 프로테스탄트들이었던 것은 아니었고, 그들 모두가 자본가였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처럼 일하기 위해 일한다는 자본주의의 정신이 부르주아지에서 다시 노동자 계급에 침투하여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게 되고, 근대에 이르러 가정과 노동 현장이 분리되면서 노동자가 마치 수도사들이 삼종 기도하듯 일정한 시간과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일을 한다는 생활 태도가 일상화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란 세속화된 기독교이며, 자본가는 세속화된 수도원 원장, 노동자는 세속화된 수도사라 할 수 있다. 자본의 축적 과정이 신의 소명을 받든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자본의 은총이겠지만 제품을 만들기만 하고 스스로 소비하지 않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자본주의의 정신)는 - 생산된 제품에 대해 계속 금욕적이라 한다면 - 자본의 순환(성장)에 문제를 일으킨다.

자 본주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만들어진 제품을 소비하는 사람들 역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본주의(국가)가 식민지를 필요로 하는 이유를 엿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제국주의란 자신들이 직접 소비할 수 없을 만큼 제품을 과잉 생산한(과잉 노동한) - 소비는 식민지, 타국인들에게 강제했던 - 국가가 세계를 제패했던 역사를 말한다. 만일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이 없었다면, 즉 일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어 인생을 즐기려는 사람만 있다면 자본주의 사회는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만 있다면 생산과 소비는 국내에서 나름대로 자급자족에 만족하게 될 것이고, 특별히 예외적 상황이 아니라면 타국을 침략하거나 착취할 필요도 없으며 대자본이 축적되어 자본주의가 크게 발전할 가능성도 없다.

예컨대 어떤 선진국이 이른바 미개사회에서 산업을 증진하고 자본주의적 성장을 도모하고자 할 때, 선진국은 원주민들에게 그들 사회에서 볼 수 없는 사치품들을 제공(사치품을 생필품화)하여 맛을 들인 후 돈을 내지 않으면 그것들을 손에 넣을 수 없게 만드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완벽하게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본에 의해 고용된 원주민들의 의식 또한 '자본주의화'되어야만 한다. 만약 어떤 원주민이 한 달분 급료를 받은 뒤 다음 날부터 한 달 간 출근하지 않는다면 자본에 의한 고용은 실패하기 때문이다. 식민화 과정에서 기독교화 과정이 필수적으로 병행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향락 노동은 비록 외견상으론 노동자 개개인의 정신적 병리 현상처럼 보일지라도 그 본질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이상 더 많이 일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빚어낸 일종의 사회적 질환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스푈러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

향락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은 사토리 세대(さとり世代)가 되는 길밖에 없는가?

이 쯤 어디선가 '파놉티콘(Panopticon)'에 의한 시선의 권력(미시권력, 문화권력)에 의해 노동자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던 미셸 푸코가 등장할 때라고 생각했지만, 플라스푈러는 뜻밖에 이 책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에 의존하고 있다고 밝힌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타인에게 의존한다. 인간은 타인의 사랑과 인정을 갈망한다. 그것은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하다. 애정 관계에서뿐 아니라 일에서도 탈진할 때까지 자신을 혹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런 욕망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타인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좀 더 노력하면 가능할 거란 희망으로 인정에 대해 끝없는 야망을 불태운다"가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의 모든 원인은 아닐지라도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성 장사회(혹은 성과사회)가 되어버린 현대에 노동은 인간 생활의 다른 모든 향락을 대체할 만큼 강력하고 유일한 향락(일에 대한 현대인들의 리비도적 집착)이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그 사례로 노동중독, 영어로 '워커홀릭(Workaholic)', 일 중독자를 제시한다.

워커홀릭은 이런 강박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지 않고 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일의 마음에 들기 위해, 일을 잃지 않기 위해 일에게 봉사한다. 하루 종일 요구 조건을 들어주고 연락이 끊어질까 봐 전전긍긍이며 언제나 대기 상태다. 일과 연결되어 있다는, 필요한 사람이라는 기분을 위해, 혹은 중요한 순간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항상 온라인 상태다. 누군가 그에게 무언가를 원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때 연락이 안 되면 어떻게 하나? 워커홀릭은 자신이 언제나 대체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에 그리고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 때문에 미리 알아서 복종한다. (110~111쪽)

이런 노동중독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저자는 2장에서 13장에 걸쳐 프로이트를 비롯한 다양한 사례들을 원용해 현대의 노동이 가상의 향락 노동으로 전락하는 문명적 과정을 면밀히 해부해 그 정신분석적 토대를 파악하고자 했다는데, 그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된 것은 이 책의 마지막 장인 14장 '놓아두기의 칭송 - 무위에 대하여'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 가서 고작 몇 개의 단락들이다.

인간이 자신의 창조자라면 인간을 잡아줄 수 있는 단 하나는 자기 자신이다. …(중략)… 절대적 권력의 망상을 쫓지 말고 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나아가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몸을 맡겨야 한다. 이것은 수영을 하는 원리와 아주 흡사하다. 물에 나를 맡기면 저절로 몸이 물에 뜬다. 하지만 겁이 나서 물 위로 오르려고 버둥거리며 팔을 저으면 점점 더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물을 믿고 물을 잘 다룰 줄 알아야 몸이 물 위로 떠오르는 것이다. (197쪽)

앞서 이 책의 거의 모든 내용이 1장에 압축되어 있다고 했는데, 향락 노동의 문제점도, 그 해법도 사실 1장에 이미 등장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

노 동과 관계없는 향락은 강박적인 향락 노동자들을 불안하게 한다. 그들은 "쓸모없는" 무목적성을 두려워하며, 그것을 공허하다고 느낀다. 또한 이중적 의미에서 불쾌로 느낀다. 일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에 위협을 느끼기 때문에 불안해하고, 다른 한 편으로 때로는 자신에게 때로는 타인에게 공격적으로 반응한다. 이런 이유로 과도한 향락 노동자들은 어린이들과 보내는 시간을 잘 못 참는 경향이 있다. 놀이터에서도 열심히 스마트폰을 두드리고, 손으로는 블록을 쌓으면서도 생각은 계속해서 급히 처리해야 하는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향해 달려간다. 아이들은 오직 놀기 위해서 놀고 도대체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다. 아이들은 신비한 존재이다. 시간을 초월하며 비밀스럽게 모든 것을 결정하는 더 높은 힘에 자신을 내맡긴다. 아이들은 운명에 몸을 맡긴 존재이며 부모와 신의 힘에 자신을 내던진 존재이다. 그렇게 평화로운 마음으로 자신을 잊은 채 놀이에 몰두할 수 있다. 버팀목을 신뢰하는 자만이 놀이에 전념할 수 있다. (13~14쪽)

<개그콘서트>에 등장해 우리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는 개그우먼 박지선의 과거 유행어 "참 쉽죠! 잉"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플라스푈러는 우리에게 '아이들처럼 평화로운 마음으로 운명에 몸을 맡기고, 물 위로 오르려고 버둥거리며 팔을 저으면 점점 더 물속으로 가라앉게 되니, 아이가 버팀목을 신뢰하듯 물을 믿고 물에 몸을 맡기라'고 말한다.

이런 물에 떠 있는 인간의 이미지는 <물 위에 누워>라는 제목의 아도르노의 잠언을 떠오르게 한다. "짐승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물 위에 누워 평화롭게 하늘을 바라보는 것, 그저 존재하는 것, 그밖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 더 어떤 규정할 것이나 실현할 것도 없이…." 그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생산의 맹목적 분노"를 규탄하고, 놓아두기를 진정한 자유로 이해하라고 제안한다. "아마 진실된 사회는 발전을 식상해 하면서, 무언가에 쫓기듯 낯선 별을 정복하러 돌진하기보다 가능성들을 다 쓰지 않은 채 남겨둘 것이다."
아도르노의 구절은 지난 세기의 작품이다. 오늘날, 인간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자신의 정신과 삶의 기반인 지구마저 망가뜨리고 있는 성장과 진보의 광기 한 가운데에서, 그의 잠언은 더욱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21세기에는 행동뿐 아니라 "그렇게 놓아두기"도 적절하고 타당하다. (197~198쪽)


과연 우리 사회는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평화로운 마음으로, 버팀목을 신뢰하듯 사회를 믿고 몸을 맡길 수 있을까?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OECD 국가들 중 1위인데, 8년 연속 1위 자리를 놓쳐본 적이 없다. 인구 10만 명당 OECD 국가들의 평균 자살률은 12.8명인데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33.5명으로 평균보다 무려 2.6배가 높다. 언론에서는 청소년들이 학교폭력이나 학업 스트레스 탓에 자살하는 경우를 많이 보도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자살률 세계 1위가 청소년들의 자살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우리나라 자살률이 급격히 높아진 이유 중 하나는 고령화 사회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노인인구는 늘어났지만, 사회적 안전망이 확보되지 못한 탓에 경제적 극빈층으로 내몰려 생계가 어려워진 노인들의 자살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또 대한민국 남자들의 평균 퇴직 나이는 53세로 평균 취업연령을 군 제대 후 27세로 보면 평균 26년간 일하는 셈이다. 이것은 OECD 국가들의 평균 생애 근로 연수보다 10년 이상 짧다. 문제는 생애 주기로 보았을 때 이 시기가 자녀 교육과 결혼 등으로 생애 가장 큰돈이 드는 시기에 퇴직 위기를 맞게 된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직장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수당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밥 먹듯 연장근로를 하지 않을 수 없고, 그 결과 우리의 연간 근로시간은 OECD 평균보다 440시간이나 길어서 세계 최장 노동 시간을 자랑한다.

이외에도 우리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항목은 더 있다. 산재 사망률, 성별 임금 격차, 인구 10만 명당 산재 사망자 수, 노동조합 조직률 최하위 등에서도 대한민국은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과연 이 사람들이 자아실현을 위해 섹스나 휴가보다 노동을 통해 향락을 즐기는 사람들이라 그렇게 장시간 노동하며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

세상에는 자기 직업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대체로 두 부류이다. 하나는 의사, 변호사, 교수같이 은행에 가서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말하기만 해도 은행이 알아서 그들이 종사하는 직종에 따라 가능한 신용대출 액수가 정해져 있는 부류가 있고, 다른 한 부류는 사람들에게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대기업에 다니는 부류가 그렇다. 모두가 선망하는 전문직 종사자들조차 장래가 암담하다고 하소연하는 시대, 정년이 보장되지 않아 불안한 시절을 보낸다며 우울해하는 노동자라 할지라도 대기업에 다닌다는 사실만으로도 여전히 그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의 불안하고 우울한 직업(직종)을 선망하는 타인들이 이미 모든 조사를 완료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이 하는 일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은 타인이 선망하는 직업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런 세계에 속하기 위해 아등바등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런 세계에 속하기 위해서는 단지 개인의 타고난 능력과 노력뿐만 아니라 "할아버지의 경제력, 아빠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 동생의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말처럼 더욱더 많은 자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어려워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 2030세대를 일컬어 '삼포세대'라고 하는데 어느덧 삼포를 넘어 4포 세대, 5포 세대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스펙' 쌓기와 취업경쟁에 치여서 인간관계마저 포기한 세대라 하여 '4포 세대', 내 집 마련을 포기한 세대라 하여 '5포 세대'라 한다는 것이다.

그 런데 최근 일본에서는 이들 세대를 가리켜 '사토리 세대'라고 부른다고 한다. 우리말로는 '득도의 세대, 깨달음의 세대'라는 뜻이다. 사토리 세대는 지난 20년간 일본의 거품 붕괴 후유증과 장기 불황을 온몸으로 느끼며,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10대와 20대 초중반 세대를 말한다. 즉 사회 현실이 너무나 절망적이기 때문에 어떤 꿈도, 목표도 실현하기 어렵다는 것을 너무 일찍 깨달아 버린 세대라는 것이다. 이들 세대의 특징은 깨달음에 도달한 성직자들처럼 소비에 무관심하다. 이들은 자동차를 사려 하지도 않고 브랜드 옷을 입으려 하지도 않으며, 스포츠도 안 하고, 술도 안 마시고, 여행도 하지 않는다. 연애나 결혼에도 관심이 없고 돈을 많이 벌겠다는 의욕도 없으며 주목받는 일을 할 생각도 없다.(바로가기☞ 홍헌호 시민경제사회연구소 소장 , "'삼포 세대'의 미래는 일본 '사토리 세대'?") 절망에 빠져 너무 이른 나이에 득도해버린 '사토리 세대(さとり世代)'야 말로 플라스푈러가 제시한 해법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세대가 아닌가?

<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에서 느꼈던 가장 큰 아쉬움은 빈약하게 제시된 해법보다 향락 노동(혹은 노동중독) 증상에 대한 원인과 진단이었다.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예술을 정치나 사회와 무관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체의 예술 지상주의는 결국 파시즘의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하면서, 파시즘의 특징은 '소유관계는 일절 건드리지 않으면서 사회적 모순을 정신의 강조를 통해 제거하려는 특유의 정신주의에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향락 노동의 문제와 원인을 진단하면서 현대인들을 노동중독에 빠지게 하는 원인을 자본주의가 아닌 개인의 병리현상에서 찾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향락 노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를 해보아야 하겠지만, 향락 노동이 스스로를 과잉 착취하는 정신병리학적 현상이라고 했을 때(자본주의적 착취를 자신의 행동원리로 적극 수용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그렇게 만드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와 원리에 대해 분석하지 않고, 원인을 노동자 개개인에게서 찾는 것은 결국 자본주의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일 이상이 아닐 것이다.

기사입력 2013-05-31 오후 7:13:48

* 프레시안측이 뽑은 글 제목이 내 의도와 약간 다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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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한반도의 밤하늘에서 펼쳐진 프롭전투기들의 사투


나는 항공기 매니아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내가 뭐는 매니아가 아니냐는 반문이 스스로 들어서 좀 웃었다. 얼마 전 백일장을 치른 뒤 백일장 심사가 있었는데 김영승 시인이 오더니 반갑게 웃으며 당신도 항공기 매니아인데 내 블로그를 즐겨 보고 있다고 말씀하셔서 약간 겸연쩍은 적이 있었다. 만약 기회가 닿는다면 김영승 선생과 항공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봐도 재미있을 듯 싶다. 어쨌든 난 여러 방면의 매니아이지만 그 중에서 '항공기도 매니아'인데, 항공기 중에서도 특히 프롭(프로펠러)기 매니아다. 프롭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현재는 전쟁 무기로서의 효용 가치가 없는 종류라 정말 순수하게 좋아한다고 말해도 내 양심에 그렇게 걸리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혹 여전히 현역 군사 무기로 이용되는 무기가 있으니 이제부터 소개하려고 하는 "AN-2"기이다.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 그러니까 정확히는 국민학교 다닐 때 학교 정문 게시판에 민방위 사이렌 안내판과 더불어 적기의 실루엣을 그려놓고 이런 항공기가 날아오면 가까운 군부대에 신고하거나 방공호로 대피하라는 적기 식별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80년대까지는 학교마다 붙어있었던 것 같은데 최근엔 어떤지 잘 모르겠다. 이곳에도 AN-2기에 대한 제법 상세한 안내가 있었는데, 사실 이런 종류의 비행기들은 대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특수 임무용(적진 정찰 및 탄착 관측, 구조 및 물자 투하 임무)으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영국 웨스트랜드 라이산더(Westland Lysander)같은 기종인데 유고슬라비아 지역의 빨치산을 지원하거나 특수요원들을 적 후방으로 실어나르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라이산더의 경우 동체는 금속골조에 캔버스 천으로 외피를 둘러싸고 있어 레이더에 잘 포착되지 않으며 고도15m까지 이르는 이륙거리가 불과 250m(축구장 두개 반 정도의 길이)에 불과했다. 아마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레지스탕스가 등장하는 영화 중 야간에 몰래 내리는 비행기를 본 적이 있다면 바로 이 비행기라고 보면 된다.





소련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중 매우 뛰어난 항공기들을 많이 개발했는데, AN-2기는 ANTONOV BYREV 설계국에서 1940년 초부터 설계를 시작하여 1947년 8월 최초의 시험비행을 실시하였고, 1948년부터 양산 체제를 갖추고 대량 생산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같이 크지 않은 나라에서도 군 내부 수요로 연락기 등 프롭 항공기의 필요성이 요구될 때가 있는데(물론 최근엔 헬리콥터가 일반적이긴 하다) 러시아 같이 땅덩이가 큰 나라에서 수송기 혹은 연락기 용도로 개발되었었다. 어쨌든 당시는 동서냉전 시대였으므로 소련이 개발한 무기체계는 곧 이웃한 사회주의 블록의 여러 국가들로 이전되었는데, AN-2의 경우 중국은 1957년부터 Y-5(YUN SHUJI-5)란 이름으로 생산되기 시작했고, 1960년엔 폴란드 역시 생산면허권을 획득해서 현재까지 생산하고 있다.

"안토노프 AN-2는 단발엔진을 갖춘 복엽 수송기로, 시속 160km의 저속·저공비행이 가능한 경수송기이다. AN-2는 실내 공간을 넓게 하기 위해 세미-모노코크 구조이며, 기골과 표피는 가벼운 합금의 금속으로 제작되었고, 상하날개는 레이더 파를 흡수하는 도료로 피복된 특수천(?)으로 제작되었다. 200m의 짧은 활주로에서도 이착륙이 가능하며 기상 관측 사진 촬영, 낙하산 훈련 및 소규모의 병력 투입 등에 운용된다"고, 대체로 이렇게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 이 비행기의 외피 역시 캔버스천이고, 도료를 특수도료를 발랐을지는 모르겠지만, 특수 도료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이처럼 저속의 비금속제 항공기들은 레이더에 잡히더라도 큰 새 정도의 크기 정도로 밖에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이른바 북한이 가지고 있는 '스텔스' 항공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이 역시 비대칭무기인 셈이다. 북한의 재래식 소형 잠수함을 놓고 그렇게 평가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동안 우리나라에서는 AN-2의 공포를 과대평가(?)하여 당장이라도 AN-2에 탑승한 북한군 특수부대가 서울 한복판을 아수라장으로 만들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일부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정도 이상으로 과대평가된 측면도 없지 않다. 영화를 많이 본 분들은 알겠지만 상대가 무시무시해야 그들과 싸워 이기는 우리 편이 더 위대해보이는 것처럼, 국방안보 분야에 있어서도 자칭타칭 이 분야 전문가들이 상대방의 무기체계를 과도하게 높이 평가하는 경향은 언제나 있어왔다. 그 이유는 국방안보 분야는 언제나 새롭고 비싼 무기체계를 도입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AN-2의 위협에 대적한다는 이유로 휴즈사로부터 500MD헬기를 도입했고, 최근 아파치 헬기 도입 근거 중 하나로도 이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맥락이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올해로 한국전쟁 휴전 60주년이지만 한국전쟁은 항공전사에 있어 제트기 간의 공중전이 벌어졌던 최초의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은 소련의 항공기 개발 능력을 비롯해 여러 방면에서 근거 없는 자신감에 넘쳐 있다가 몇 차례 커다란 충격에 휩싸이는 데,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소련이 개발한 미그(Mig)15와 미그21기의 놀라운 성능 때문에 놀랐고(미그 쇼크), 소련이 독자적인 핵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로젠버그 부부 사형), 소련의 우주기술(스푸트니크 쇼크)에 놀랐다. 그러나 실제 전사를 살펴보면 한국전쟁 당시 이루어졌던 제트기 간의 공중전은 물론 베트남전에서도 미국은 사실상 압도적인 우세였다. 그런데 이처럼 압도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미국 공군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일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은 야간 폭격을 주장했고, 미군은 주간 폭격을 고집했는데 한국전쟁 당시에도 제공권은 거의 완전히 UN(미)군 측에 있었고, 미군의 대규모 폭격능력은 마오쩌둥의 아들을 참전 일주일만에 전사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처럼 대낮의 하늘은 미공군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야간의 하늘은 북한이 압도적 우세라고 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미군을 골치아프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제공권을 빼앗겨 주간에 작전을 펼칠 수 없었던 북한 공군은 주로 야간을 이용해 동해안의 강릉비행장을 비롯해 백령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야간 폭격 작전을 펼쳤다. 물론 주요 목표는 미군의 공군기지가 밀집해 있던 김포와 평택 등 서부전선 지역이었다.

북한의 남한 야간 공습은 1950년 11월 18일 춘천 소양강 근처의 미군 부대를 공습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1953년 7월 16일 까지 계속되었는데, 가장 활발할 때인 1952년 5월에는 한 달 동안 50여기가 남한 상공에 잇따라 출현하기도했다. 북한 야간폭격기들은 미군 기지를 목표로 했지만, 1952년 6월 15일에는 당시 대통령 이승만이 머물고 있던 경무대를 폭격한 적도 있었다. 당시에는 다행히 별다른 피해는 없었지만 이후 옛 청와대 건물에는 그물 모양의 위장망이 설치되었는데, 박정희 시절에 가서야 제거되었다. 하마터면 전쟁 중에 대통령 유고라는 큰 일을 치를 뻔 했지만 이것은 실제 전과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실제로 커다란 피해를 입기도 했는데, 1953년 6월 15,16일 밤에는 북한 공군기 17기가 야간에 침투해 인천의 니군 유류 저장 시설을 전소시켜 버렸다(당시 오백만 갤런에 이르는 엄청난 연료가 손실). 또 당시 미국의 최신예 주력전투기였던 F-86 세이버의 기지로 이용되던 수원 비행장을 야간 기습해 세이버 전투기 9대를 파괴하기도 했다.





야심한 밤이면 덜덜거리는 엔진 소리를 내며 날아오다가 기지 상공에서 엔진을 끄고 슬그머니 침투해 폭격을 하고 사라졌기 때문에 기지 방공을 책임진 미군들은 이들을 ‘야간 점호 적기(Bed time check charlie)'라고 불렀다. 간혹 제트기를 가진 미 공군이 저속의 프롭기들을 격추하지 못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할 수도 있겠으나 제트기는 기본적으로 고공, 고속 성능을 위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목표물을 지나칠 수 있었는데, 당시 북한의 전투기들은 저속으로 저공을 비행하기 때문에 이들을 격추시키기엔 미 공군 제트 전투기들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문제였다. 결국 미 공군은 더이상 전쟁에 쓰일 일이 없을 거라고 여겼던 과거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야간 전투기들을 다시 불러들였고, 북한 공군과 심야의 하늘에서 물고 물리는 치열한 공중전을 벌여야 했다. 이것이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의 밤하늘에서 펼쳐진 프롭전투기들 간의 사투였다.

사진1) 웨스트랜드 라이산더, 2)AN-2, 3)라보치킨 La-9, 4)Yak-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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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