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SY/한국시'에 해당되는 글 244건

  1. 2011.09.30 복효근 - 아름다운 번뇌
  2. 2011.09.22 윤제림 - 길
  3. 2011.09.21 백석 - 여승(女僧)
  4. 2011.09.19 나태주 - 산수유 꽃 진 자리
  5. 2011.09.14 강영환 - 여름에 핀 가을꽃
  6. 2011.09.09 김사인 - 늦가을 (2)
  7. 2011.09.08 김수영 - 강가에서
  8. 2011.09.07 마종기 - 證例6
  9. 2011.08.18 오세영 - 비행운
  10. 2011.08.17 안현미 - 여자비 (2)

아름다운 번뇌

- 복효근



오늘도 그 시간
선원사 지나다 보니
갓 핀 붓꽃처럼 예쁜 여스님 한 분
큰스님한테서 혼났는지
무엇에 몹시 화가 났는지
살풋 찌뿌린 얼굴로
한 손 삐딱하게 옆구리에 올리고
건성으로 종을 울립니다
세상사에 초연한 듯 눈을 내리감고
지극정성 종을 치는 모습만큼이나
그 모습 아름다워 발걸음 멈춥니다
이 세상 아픔에서 초연하지 말기를,
가지가지 애증에 눈감지 말기를,
그런 성불일랑은 하지 말기를
들고 있는 그 번뇌로
그 번뇌의 지극함으로
저 종소리 닿는 그 어딘가에 꽃이 피기를...

지리산도 미소 하나 그리며
그 종소리에 잠기어가고 있습니다.



*

승려란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의 인연(因緣)을 걸고 용맹정진(勇猛精進)하여 대오각성(大悟覺醒)하는 것을 목표로 수행하는 자를 말한다. 태어남과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생 한 번의 커다란 사건이다. 물론 불교에서는 윤회를 이야기하지만 무수한 윤회를 반복해도 도를 깨우칠 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또 다시 무수한 인연의 덕을 쌓아야만 가능하다. 한 번 인간으로 태어나는 일도 어렵건만 도를 깨우쳐 윤회의 사슬로부터 벗어나는 대오각성을 얻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번뇌를 깨뜨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겠는가.


그런데 시인은 그런 성불일랑은 하지 말라고 한다. 시인의 욕심이다. 하지만 그래서 시인이다. 모든 걸 초탈한다면 그는 이미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인을 지상에 유배된 자들이라 부른다. 지옥 같은 현실로 유배된 지장보살의 현신쯤 되는 자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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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2011.09.22 10:10




- 윤제림



   꽃 피우려고 온 몸에 힘을 쓰는 벚나무들, 작전도로 신작로 길로 살 하나 툭 불거진 양산을 쓰고 손으로 짰지 싶은 헐렁한 스웨터를 입고 곰인형 가방을 멘 계집애 손을 붙들고 아낙 하나가 길을 간다 멀리 군인트럭 하나 달려가는 걸 보고, 흙먼지 피해 일찍 피어난 개나리 꽃 뒤에 가 숨는다 흠칫 속도를 죽이는 트럭, 슬슬 비켜가는 짐 칸 호로 속에서 병사 하나 목을 빼고 외치듯이 묻는다 "아지매요, 알라 뱄지요?" 한 손으로 부른 배를 안고,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아낙이 수줍게 웃는다 금방이라도 꽃이 피어날 것 같은 길이다.


*

"아지매요, 알라 뱄지요?"

내가 아주 어렸을 적 동네 어귀에서 부른 배를 뒤뚱거리며 걷는 아줌마를 본 적이 있다.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아줌마 저 배에 들어있는 게 뭔지 몰라 저 아줌마는 뭘 먹었기에 저리 배가 나왔을까 했다. 그때는 그 뱃속에 끝없이 이어진 기나긴 탯줄의 길, 가도가도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바다, 숨막히는 미로를 뚫고 나올 꽃 같은 우주를 품고 있다는 걸 미처 몰랐다.

길 위의 인생들이 만나 새로운 길을 만들고 있는 중이란 걸 미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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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승(女僧)

- 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山)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 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말이 담고 있는 정경이 구구절절하게 아프고, 아프다. 머리 깎은 여승이 속세에서 겪은 삶의 내력이 한 편의 짧은 시에 모두 담길 수 있을까? 아마도 삶의 이러한 면, 저러한 면을 사려 깊게 살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이 시가 보여주는 몇몇의 정경 그 너머에 있을 삶의 저 편이 보일 것이다.

시의 감동은 보이는 속에 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저 편에서 온다. 그런 의미에서 시를 읽는 것은 내 안에 등불 하나 밝히는 일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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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꽃 진 자리

- 나태주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
누구에겐가 말해주긴 해야 했는데
마음 놓고 말해줄 사람 없어
산수유꽃 옆에 와 무심히 중얼거린 소리
노랗게 핀 산수유꽃이 외워두었다가
따사로운 햇빛한테 들려주고
놀러온 산새에게 들려주고
시냇물 소리한테까지 들려주어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
차마 이름까진 말해줄 수 없어 이름만 빼고
알려준 나의 말
여름 한 철 시냇물이 줄창 외우며 흘러가더니
이제 가을도 저물어 시냇물 소리도 입을 다물고
다만 산수유꽃 진 자리 산수유 열매들만
내리는 눈발 속에 더욱 예쁘고 붉습니다.


*

"풀꽃"의 시인 나태주의 시들은 따사롭다. 얼핏 생각없이 바라보는 나태주 시인의 시들은 따사롭기 그지 없어 예쁘기만 한 시로 보이기 쉽다. 그러나 그의 따사로운 시어들을 곰곰이 씹고 있노라면 따사롭기 그지없는 시가 담고 있는 정신의 한 편은 고통을 참아내는 강인한 인고(忍苦)의 정신이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사랑을 가졌는데 누군가 마음 놓고 말해줄 사람 없어 산수유 꽃 옆에서 무심히 중얼거린다는, 얼핏 읽노라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 마음을 전할 길 없어 안타깝게 여기는 시적 화자의 목소리로만 읽기 쉽다. 그러나 첫 번째 행과 아홉 번째 행에서 반복되고 있는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는 내용적으로는 같은 말이지만 앞서의 말과 뒤에서 반복되는 말 사이엔 시간적 간격이 크다.

첫 번째 행에서 시인의 사랑 고백을 듣는 산수유는 아직 춥고, 쌀쌀한 바람이 피는 3월 초봄에 남들보다 이르게 피어난 산수유 꽃이지만 아홉 번째 행 이후 등장하는 산수유는 볕좋은 봄날과 뜨거운 여름 한철을 보내고 "이제 가을도 저물어 시냇물 소리"도 입을 다무는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는 계절의 산수유이기 때문이다. 겨울의 차가운 한기가 미처 떠나지 않은 황량한 산야에서 누구보다 먼저 피어나는 산수유는 샛노랗다. 이른 봄에 피는 꽃들은 대부분 아직 차가운 날씨에 행동이 굼뜨기 마련인 곤충들을 유혹해 수분을 유도하기 위해 노란 빛을 띈다는데 해마다 춘삼월, 깊은 계곡 시냇가는 아직도 얼어붙어 있는 그 계절에 남도땅으로부터 들려오는 산수유 소식으로부터 우리는 봄이 시작되고 있음을 안다.

개나리가 피어날 때쯤 꽃이 지고, 여름엔 잎만 무성하게 피었다가 우리 모두가 산수유 꽃이 피고 지었던 사실조차 기억에서 잊혀져갈 무렵에야 석조(石棗ㆍ돌대추)라는 별명처럼 작은 대추모양의 예쁘고 빨간 열매가 산수유 꽃 진 자리마다 알알이 맺힌다. 봄의 전령으로 남들보다 훨씬 일찍 꽃을 피웠던 산수유가 절기상 첫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이 지나서야 열매를 맺는다. 상강이란 절기는 가을도 다가고 이제 곧 겨울이 시작되어 나뭇잎들도 떨어질테니 다가오는 겨울을 준비하라는 절기다. 서리는 입춘(入春) 지나고도 여든 여덟 번의 밤낮이 바뀌고서야 '이별서리'로 그친다는데 그 긴 시간 동안 추위에 얼어죽지 않고 버티다가 다시 꽃을 피우는 것이 산수유나무다.

요즘 세태가 하도 급해서 연인끼리의 사랑도 1000일은 커녕, 100일도 안돼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풍속도이라고 한다. 성미급한 사람들은 100일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만난지 10일, 20일만 되어도 그것을 기념하는 것이 요즘 우리네 사랑 풍습이라고 하는데 산수유는 그래서 기다림의 나무다. 산수유의 꽃말이 '지속ㆍ불변'인 까닭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시인은 산수유 꽃 진 자리에 빗대어 오래 참고, 기다리는 사랑을 찬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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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핀 가을꽃

- 강영환


때도 없이 가을꽃이 피었다
자갈밭으로 난 작은 길 위에
마른 눈을 들어 들어서
안간힘으로 버텨선 흔들림으로
가을꽃이 피었다
먼 원시림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로
한쪽으로 기울어진 건강한 뼈대
자갈밭에 내려 쌓이는
수천의 빛 무리를 넘어뜨리며
위태로이 홀로 서서
말라비틀어진 이 계절의 중심에서
억센 근육을 부러뜨려
때도 없이 가을꽃이 피었다


[출처] 칼잠, 시로사(1983)


*

"여름에 핀 가을꽃"은 강영환 시인의 등단작이자 첫 시집 칼잠에 수록된 시인데 아쉽게도 시집 자체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시에는 "때도 없이 가을꽃이 피었다"란 구절이 첫 행과 마지막 행에서 반복(5행에서도 축약된 형태로 '가을꽃이 피었다'가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이 반복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5행 이전에 피어난 가을꽃은 자갈밭으로 난 작은 길 위에 피어난 현실 속의 가을꽃이지만 5행 이후에 피어난 가을꽃은 꽃을 바라보는 시인의 심상에 피어난 꽃이기 때문이다. 수천의 빛무리를 넘어뜨리며 위태롭지만 굳건하게 피어난 꽃이다. 철모르고 여름에 핀 가을꽃. 때를 제대로 만나지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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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 김사인


그 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

불혹을 넘어
손마디는 굵어지고
근심에 지쳐 얼굴도 무너졌네


사랑은

늦가을 스산한 어스름으로
밤나무 밑에 숨어기다리는 것
술 취한 무리에 섞여 언제나
사내는 비틀비틀 지나가는 것
젖어드는 오한 다잡아 안고
그 걸음 저만치 좇아 주춤주춤
흰고무신을 옮겨보는 것


적막천지

한밤중에 깨어 앉아
그 여자 머리를 감네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흐른 불 아래
제 손만 가만가만 만져보네


*


요즘 시인들은 왜 달에 대한 멋진 시 하나 토해내지 않는 건지. 제가 가장 마지막에 주목했던 소설가는 "마루야마 겐지"였습니다. 이 말은 최근엔 소설을 읽지 않는 제 현실의 문제이죠. 어쨌거나 그의 소설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는 참 특이한 소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소설을 읽고 난 뒤 낡은 오토바이를 사서 한계령도 넘고, 한반중에 동해안 모래 사장도 달려보고 싶었지만 울애인이 다른 건 다 되어도 그것만큼은 허용해줄 수 없고 해서 결국 포기했습니다.


김사인의 이 시를 읽고난 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인이 한창 때 연애 좀 하지 않았을까. 저는 마지막 행에 가서 폭발하는 시를 좋아하는 편인데, 김사인의 <늦가을>은 특히 첫 구절이 매력적입니다. "그 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라는 구절 말이죠. 시에서 노래하는 대상은 불혹을 넘긴 중년의 여성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남과 북을 모두 통틀어 고달프기 마련입니다(예전에 <북한의 여성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란 책을 읽었는데 남한에 비해 반드시 평등하다고 말할 순 없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여간 시인은 늦가을을 불혹을 맞은 여성에 비유한 건지, 불혹을 맞은 여성을 늦가을에 비유한 건지 몰라도 이 둘 사이에 공통점이 있긴 있어 보입니다. 늦가을. 9월에서 11월까지를 가을이라고 한다면, 늦가을은 11월에 해당하겠죠. 늦가을 스산한 어스름에 숲속에 가보셨나요. 11월의 가을 숲속은 추워요. 술먹고 그런데서 잠들었다간 입 돌아가기 딱이죠. 오한이 들죠. 바람도 차갑고... 그런 적막천지 한밤중에 머리를 감는 여자.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외롭다는 감정은 아마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어젯밤엔 갑자기 잠이 안 오더군요.


잠자리에 든 아내를 깨워 자유로라도 나가보자고 꼬셨습니다. 추석을 며칠 앞둔 자정 무렵... 문득 여전히 달이 내 뒤를 쫓는지 알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은 그냥 자자고 쿨쿨... 잠이 오지 않아 부대끼는 밤에 문득 일산 가던 길에 내 뒤를 쫓던 커다란 달이 그리웠어요. 사랑은 어느덧 늦가을에 접어들어 오한이 들고, 주춤주춤 고무신을 옮겨보아도 오는 이도, 가는 이도 없지요. 잠도 오지 않는 밤에 찬물로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고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워뭅니다. 이유야 어쨌거나 다음날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내일모레 불혹을 바라보는 사내가 창 밖을 바라봅니다.


늦가을엔 정말 쓸쓸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나이가 들 수록 나의 세상은 깊어지겠지만 그 세계에 깃드는 사람이 없으면 참말 쓸쓸할 거예요. 그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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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서

- 김수영

저이는 나보다 여유가 있다
저이는 나보다도 가난하게 보이는데
저이는 우리집을 찾아와서 산보를 청한다
강가에 가서 돌아갈 차비만 남겨놓고 술을 사준다
아니 돌아갈 차비까지 다 마셨나 보다
식구가 나보다도 일곱 식구나 더 많다는데
일요일이면 빼지 않고 강으로 투망을 하러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반드시 4킬로가량을 걷는다고 한다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래도 추탕을 먹으면서 나보다도 더 땀을 흘리더라만
신문지로 얼굴을 씻으면서 나보고도
산보를 하라고 자꾸 권한다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는데
남방셔츠 밑에는 바지에 혁대도 매지 않았는데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고
그는 나보다도 짐이 무거워 보이는데
그는 나보다도 훨씬 늙었는데
그는 나보다도 눈이 들어갔는데
그는 나보다도 여유가 있고
그는 나에게 공포를 준다

이런 사람을 보면 세상사람들이 다 그처럼 살고 있는 것 같다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이렇게도 가련한 놈 어느 사이에
자꾸자꾸 소심해져만 간다
동요도 없이 반성도 없이
자꾸자꾸 小人이 돼간다
俗돼간다  俗돼간다
끝없이 끝없이 동요도 없이

(1964년)

*


김수영을 일컬어 한국 현대시의 신화라고도 부르지만 아마도 이런 호명법에 대해 김수영 자신은 그다지 마뜩지 않게 여겼으리란 생각이다(개인적으로는 나역시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 한 명인 김수영은 물론 그처럼 높이 평가받을 만한 시인이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측면도 없지 않다). 무엇보다 그가 이런 평가를 마뜩지 않게 여겼을 것이란 사실은 김수영의 시 세계가 바로 신화 혹은 그 자신을 포함해 무엇이 되었든 덧씌우고 포장하는 코스튬을 경멸해 왔기 때문이다.


김수영의 시에서 자아는 거의 대부분 자아 과잉 상태에서 거울 혹은 도마 위에 올려진다. 이 시 "강가에서" 역시 첫 구절 "저이는 나보다 여유가 있다"로 시작한다. 시적 자아는 타인을 통해서 혹은 그 자신의 자아에 의해 분석대상이 되고 있다. 시 속의 '저이'는 '나'보다 가난해 보이지만 여유가 있고, 식구가 나보다도 일곱이나 많지만 돌아갈 차비만 남겨놓고 술을 사줄 만큼 호기롭다. 그리고 그는 일요일이면 빼지 않고 강으로 투망을 하러 나오고, 반드시 4킬로미터 가량을 걷는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이는 '애 업은 여자'와 오입한 자신의 부도덕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고, 애 업은 여자와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오입할 수 있었던 자신의 성적 능력을 아무 고민 없이 자랑할 만큼 속물이다. 게다가 그는 '나보고도/ 산보를 하라고 자꾸 권한다'. 시적 자아는 그와 나를 비교하면 할수록 안으로부터 파괴된다. 나의 어조는 그에 대해 부정적으로 비교하고 있으나 그는 이미 나의 염치나 윤리의식 따위 개나 물어가라는 식으로 전혀 개의치 않는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했던가? 그에게 그런 의식 따위 없으니 도리어 부끄러워진 건 '나'이다. 그런데 이 '나'는 사지육신 멀쩡한 나(자아)인가?

이런 사람을 보면 세상사람들이 다 그처럼 살고 있는 것 같다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고 느낄 만큼 왜소해진 '나'이다. "동요도 없이 반성도 없이/ 자꾸자꾸 小人"이 되어가는 나를 김수영은 마치 도마 위의 생선처럼 올려놓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생선이 너무나 생생하고, 신선해서 마치 금방이라도 바닷속에서 끄집어 올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린다는 거다.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이토록 파괴적인 정황을 시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쓰고 있는 김수영의 정직함은 무시무시하지만, 그가 느꼈을 위선과 암울한 시대가 또한 그를 사정 없이 내몰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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證例6
: 앤 선더스 아가에게

- 마종기


내가 한 아가의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환자는 늙으나 어리나 환자였고, 내가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나는 기계처럼 치료하고 그 울음에 보이지 않는 신경질을 내고, 내가 하루하루 크는 귀여운 아가의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내 같잖은 의사의 눈에서는 연민의 작은 꽃 한 번 몽우리지지 않았지.


가슴뼈 속에 대못 같은 바늘을 꽂아 비로소 오래 살지 못하는 병을 진단한 뒤에 나는 네 병실을 겉돌고, 열기 오른 뺨으로 네가 손짓할 때 나는 또다시 망연한 나그네가 되었지. 그리고 어느 날 엉뚱한 내 팔에 안겨 숨질 때, 나는 드디어 귀엽게 살아 있는 너를 보았다. 아, 이제 아프게 몽우리졌다. 네 아픔이 되어 낮에도 밤에도 속삭이는구나.


미워하지 마라 아가야. 이 땅의 한곳에서 죽고 나면 그만이라는 패기 있는 철학자들의 연구를 미워하지 마라. 너는 그이들보다 착하다. 나이 들어 자랄수록 건망증은 늘고, 보이는 것만 보는 눈은 어두워진단다. 그이들은 비웃지만 아가야, 너는 죽어서 내게 다시 증명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헤어지지 않는다.


*

마종기 시인은 시인이자 의사이고, 의사이자 시인이지만 그 전에 한 아이의 아비였고, 누군가의 자식이고, 누군가의 남편이다. 마종기 시인의 "證例" 연작 시리즈는 그가 시인이기 전에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란 사실을 새롭게 일깨워준다. 시인이 자신의 시에 주석을 다는 것은 부질 없는 짓이지만 마종기 시인은 이런 말을 했다.


"끝 연에서 이 시는 세상을 다 알고 경험한 척하며 철학자연하는 주위 사람들에 대한 불만을 보이고 있다. 도서관에 앉아 책만 들척이며 세상의 진리를 다 알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글을 쓰고, 세상의 만사를 자기식대로 난도질하는 지식인들이 나는 우습기까지 했다. 이런 의식의 변화는 내가 의대생으로 해부에 매달리면서 일어났다. 졸업 후에 밀어닥친 의사 생활 중에 더 두드러지게 되었지만, 문학이라면 적어도 그 당시 상당히 유행하던 행동주의 문학만이 구원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엉뚱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행동이 없이 관념의 추상 언어로만 지껄이는 문학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체험을 통한 현장의 은유야말로 살아 있는 시를 만드는 새로운 질료라고 생각했다. 그것만이 진정성을 갖춘 문학이라고 믿었다. 행동이 밑바탕이 되지 않는 문학은 공중누각이고 세상에 필요 없는 문학이라고 믿었다. 골방에만 박혀서 하루하루의 질박한 삶을 외면하는 의식의 조작이 아니고, 땀과 눈물과 피로 만들어내는 것만이 진정한 시의 길이라고 믿었다."


'진정성'이란 말은 국어사전에도 등재되지 않은, 다시 말해 정의되지 못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쉽게 내뱉어지고 쉽게 사용되는 말이다. 또 다시 말해 '진정성'이란 말은 쉽게 정의되지 않으며 어쩌면 정의될 수 없는 말이란 뜻이다. 진정성이란 말 자체가 본디 한자어에서 왔을 테지만 이 말의 '진정'이 명사 '眞情'인지 부사 '眞正'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내 경우엔 명사가 아니라 부사 '진정'이란 의미에서 "거짓이 없이 참으로"란 뜻으로 받아들인다. 진정성을 영어로는 'authenticity'라고 흔히 번역하는데 이 말은 진정성보다는 '진본성'에 더 가까운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말해 그 어떤 때보다 '진정성'이 강하게 요구되고, 자주 사용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이 말의 참 뜻을 아직 모르며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란 말이다.


비록 시인은 철학자들의, 지식인들의 창백한 지식과 이성이 빚어내는 냉정을 비난하고 있지만 그 역시 앞의 첫 연에서 의료시스템의 한 부분을 차지한 도구로서의 자신을 나무라고 있다. 그가 "한 아가의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그 역시도 알지 못했던 자각이다. "그리고 어느 날 엉뚱한 내 팔에 안겨 숨질 때"에야 비로소 시인은 환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이자 '앤 샌더스'라는 이름을 가진 "귀엽게 살아 있는 너"로 재인식하게 된다. 마종기의 이 시가 지닌 진정성의 근원은 다름 아닌 이 자각, 그 역시 창백한 지식과 이성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는 성찰에서 출발하는 것일 게다. 그가 마지막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던 자각도 아마 그것이었을 게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진정성은 그의 말대로 결국 '행동', "땀과 눈물과 피로 만들어내는 행동"만이 그 증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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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飛行雲)


- 오세영


한낮

뇌우(雷雨)를 동반한 천둥번개로
하늘 한 모서리가 조금
찢어진 모양
대기 중 산소가 샐라
긴급 발진
제트기 한 대가 재빨리 날아오르더니
천을 덧 대 바늘로 정교히
박음질 한다.


노을에 비껴

하얀 실밥이 더 선명해 보이는
한줄기 긴
비행운(飛行雲)



출처 : 『황해문화』, 2009년 봄호(통권63호)


*


42년생 시인에게 천진(天眞)하단 말은 어폐가 있는 말이지만, 갈수록 오세영 시인의 시가 천진해진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분명한 건 나이가 들면서 더욱 천진해지는 시인들이 있으며 그 모습이 아름답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시인이기에 그럴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번에 오세영 선생의 시(詩) 3편을 받았는데 모두 비슷한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인이었기에 당신의 시를 받고 싶었는데 소원 풀었다. 이제는 퇴임하여 명예교수로 계시지만 당신이 문학하는 학자로 펼쳐보이던 문학관에는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았지만 시인으로서의 당신에게는 언제나 동의할 수 있다.


노년의 천진한 시들도 여전히 빛나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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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비

- 안현미


아마존 사람들은 하루 종일 내리는 비를 여자비라고 한다
여자들만이 그렇게 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우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울던 소리
오래 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에게서 나던 소리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젖 먹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우는 소리
오래 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의 목메이는 소리

*

사는 게 비루하다고 여기다가도
어제보다는 오늘이 그래도 좀 낫다 싶어
한숨을 푹 내쉰다

살아야 할 날이 어제보다 하루 줄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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