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구렁달


- 신경림


지금쯤 물거리 한 짐 해놓고

냇가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볼 시간......
시골에서 내몰리고 서울에서도 떠밀려
벌판에 버려진 사람들에겐 옛날밖에 없다
지금쯤 아이들 신작로에 몰려
갈갬질치며 고추잠자리 잡을 시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목소리로 외쳐대고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몸짓으로 발버둥치다
지친 다리 끄는 오르막에서 바라보면
너덜대는 지붕 위에 갈구렁달이 걸렸구나
시들고 찌든 우리들의 얼굴이 걸렸구나



* 갈구렁달 : 황해도, 충청도 바닷가에서 쪽박같이 쪼그라든 달을 말함.


**


어릴 적엔 세상 모든 걸 다 아는 것 같고, 마음에 들지 않는 풍경들을 죄다 뜯어 고치겠다는, 아니 고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었었다. 그러다 언제인가부터 싫든 좋든 나도 그 세상 풍경의 일부란 사실을 알게 되고, 내가 이 세상의 문제들에 책임질 나이가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마도 나는 그때부터 늙어가기 시작했으리라.


어머니와 연결된 탯줄은 10개월이 지나면 끊어지지만 과거 성장하며 겪어왔던 어려움들은 어느 순간 극복되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탯줄처럼 줄곧 내 뒤를 따라왔다는 걸 알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시들고 찌든 우리 얼굴처럼 시든 갈구렁달이 줄곧 내 뒤를 따라온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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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

- 윤성학


결혼 전 내 여자와 산에 오른 적이 있다
조붓한 산길을 오붓이 오르다가
그녀가 나를 보채기 시작했는데
산길에서 만난 요의(尿意)는
아무래도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가혹한 모양이었다
결국 내가 이끄는 대로 산길을 벗어나
숲속으로 따라 들어왔다
어딘가 자신을 가릴 곳을 찾다가
적당한 바위틈을 찾아 몸을 숨겼다
나를 바위 뒤편에 세워둔 채
거기 있어 이리 오면 안돼
아니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안돼 딱 거기 서서 누가 오나 봐봐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곳에 서서
그녀가 감추고 싶은 곳을 나는 들여다보고 싶고
그녀가 보여줄 수 없으면서도
아예 멀리 가는 것을 바라지는 않고
그 거리, 1cm도 멀어지거나 가까워지지 않는
그 간극
바위를 사이에 두고
세상의 안팎이 시원하게 內通하기 적당한 거리


출처 : <창작과비평>, 2003년 여름호(통권120호)



*

내외(內外). 한자어 뜻풀이대로라면 안팎이다. 그런데 이 안과 밖은 떼어놓을 수도, 한데 있기도 까다롭다. 그래서 남녀 사이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고 피하는 일 역시 내외(內外)한다고 말한다. 너무 가까이, 너무 멀리도 안 된다. 딱 그 정도 거리를 유지하기. 세상의 모든 슬픔은 어쩌면 그리 시원하게 내통(內通)치 못한 탓. 내 여자가 일러주는 대로 딱 그만큼만 만날 있다가는 “벼엉신~” 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 혹은 일러준 대로 하지 않아서 “음흉한~”소리를 듣고 ‘쬧겨’날 수도 있으니 남정네들아 기회가 오더라도 오금이 저리도록 적당히, 적당히 내외통(內外通)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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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瓜


- 김중식


사랑이 고통일지라도 우리가 고통을 사랑하는 까닭은

고통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감내하는 까닭은
몸이 말라 비틀어지고
영혼이 꺼멓게 탈진할수록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지속적인 냄새를
피우기 때문이다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집요한 냄새를 피우기까지
우리의 사랑은 의지이다
태풍이 불어와도 떨어지지 않는 모과
가느다란 가지 끝이라도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의지
는 사랑이다 

오, 가난에 찌든 모과여 亡身의 사랑이여!


*


'사람의 발목을 잡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체념,

사람을 앞으로 가게 만드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의지'


사랑이 이성의 일이 아니란 것은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진리 같다.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사랑도 호르몬의 작용이라 길어야 3년이란다. 사랑이 이성의 일이 아니든, 호르몬의 작용이든 아니든 그것이 감각이든, 직관이든, 계급의 일이든 그도 아니면 그 무엇이든 그것을 지속시키는 것은 의지란다.


의지에게 묻는다. 정말이냐고, 정말 그러하냐고...


"분노, 상처, 고통에 빠져들지 말라. 그것들은 당신의 에너지를 훔쳐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 레오 버스카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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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못된 것들


- 이재무


저 환장하게 빛나는 햇살

나를 꼬드기네
어깨에 둘러멘 가방 그만 내려놓고
오는 차 아무거나 잡아타라네
저 도화지처럼 푸르고 하얗고 높은
하늘 나를 충동질하네
멀쩡한 아내 버리고 젊은 새 여자 얻어
살림을 차려보라네
저 못된 것들 좀 보소
흐르는 냇물 시켜
가지 밖으로 얼굴 내민 연초록 시켜
지갑 속 명함을 버리라네
기어이 문제아가 되라 하네


*


내가 나이를 먹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 있다. 노래방에 갔을 때 더이상 내가 부르는 노래들이 신곡 코너가 아닌 '가나다'순 어딘가를 뒤져보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가끔 어쩌다 알바생들이랑 일을 하게 되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 친구들이 88올림픽을 본 적이 없는 세대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다. 90년대에 태어난 아이들이 올해 대학생이 되었다. 그런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나도 모르게 어느새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살라고 충고하고 있는 나를 느끼면서 혼자 속으로 웃었다.


남자들은 영원히 철이 들지 않는다.


동서양의 모든 여자들이 느끼는 부분이다. 영원히 철 들지 않는 남자들의 삶은 사실 비슷하다. 특히 한국에서 태어난 남자들은 더욱더 비슷하게 산다. 고추 달고 태어나서 가족의 환호를 받는 것은 잠시 그 뒤부터 내내 고추달린 값을 해야 한다. 남자니까 울어도 안 되고, 남자니까 말을 많이 해도 안 되고, 남자니까 남에게 맞고 다녀도 안 되고, 남자니까 육체적으로 힘든 일은 도맡아야 하고... 여자들도 할 말은 많겠고, 이재무 시인이 말하는 저 감정이 여성이라고 해당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나도 고추 달린 남자라서 그냥 남자 이야기만 하는 거다.


남자로 살아보니 고등학교 졸업한 뒤의 인생은 그냥 쭈욱 직장생활 내지는 돈벌이에 연관된 것들뿐이었다. 한 번도 그 궤도에서 벗어나보지 못한 채 평생을 산다. 아이들이 죽을동살동 대학가고 싶어하는 이유가 단지 대학을 나와야 취업이 잘 되고, 사람 취급 받기 때문만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4년의 유예기간을 번다는 거, 어쩌면 그게 더 간절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대학에 들어가기 전 3년간 떠돌이 생활을 한 것이 당시엔 너무나 비참하고 서러웠지만 이제 는 그때가 내 인생의 가장 자유로운 시간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물론 그 시간들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거절하겠지만...).


그리고 원통하고 분하기도 하다. 당시 나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어디 한둘이었겠냐만 외부적인 요인을 제외하고도, 막 살아버리고 싶었던 나의 충동을 가로막은 것은 정작 나 자신이기도 했다. 난 좀더 막 살아버릴 수 있었는데, 내 안의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갈망은 끝끝내 남았다. 시인은 "저 환장하게 빛나는 햇살"이 꼬드긴다고 말하지만 시인이 말하는 햇살은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한 햇살은 아니다. 이재무 시인이 말하는 '햇살'은 젊은 시절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회한, 일상에 가로막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움, 자유에 대한 갈망을 뜻한다.


여자들은 남자들이란 영원히 철 들지 않는 존재라고 말하지만, 일찌감치 철 들어버린 남자는 또 어디에도 쓸모가 없는 법이다. 철 없는 남자는 꿈꾸는 남자고, 꿈꾸는 남자가 못된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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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의 손을 보면

- 천양희


구두 닦는 사람의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구두 끝을 보면
검은 것에서도 빛이 난다
흰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창문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창문 끝을 보면
비누거품 속에서도 빛이 난다
맑은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청소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길 끝을 보면
쓰레기 속에서도 빛이 난다
깨끗한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마음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마음 끝을 보면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빛이 난다
보이는 빛만이 빛은 아니다
닦는 것은 빛을 내는 일

성자가 된 청소부는
청소를 하면서도 성자이며
성자이면서도 청소를 한다


*

천양희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은은하다'는 표현이 절로 떠오른다. 스테인레스처럼 녹 하나 슬지 않는 반듯함도 아니고, 크롬도금처럼 윤기와 광택이 자르르 흐르는 인위적인 광택이 아니라 시인 자신이 말하는 바와 같은 오랜 세월이 주는 은은한 광택이다. 은은하다. 겉으로 뚜렷하게 드러나지 아니하고 어슴푸레하며 흐릿하다. 그러나 그 흐릿함이 주는 온기와 정감은 허기진 위장을 채워주는 장국밥, 할머니가 내어주시는 달지 않은 감주, 어머니가 밥을 푸며 먼저 건네주는 말랑말랑한 누룽지 조각이다.

어쩐지 물끄러미.
시인이 길을 가다 멈춰서서 오랫동안 지켜보았을 그 사람들.

'구두 닦는 사람, 창문 닦는 사람, 청소하는 사람'

부처의 눈엔 부처가 보이고, 보살의 눈엔 보살이 보인다는, 우리도 익히 알아서, 이미 세상의 때가 묻을데로 묻어서 시인의 웬만한 온기쯤 '가비압게' 개구라로 튕겨낼 수 있는 내공의 빈틈을 겨냥한다.


그러나 시인의 어조는 세상은 다 그런 거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거라는 사파무공의 신조를 깨뜨리고, 파헤치는 날카로운 비검이 아니라 은은하게 스며드는 달빛 같은 것이다. 섣달 그믐밤길을 걸어본 이들은 안다. 보름달이 휘엉청 떠오른 밤길이 얼마나 환한지... 얼마나 포근한지... 보이지 않는 것들이 빛을 내도록 도와주는 깊은 밤 한 줄기 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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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


- 이면우


숲의 나무들 서서 목욕한다 일제히
어푸어푸 숨 내뿜으며 호수 쪽으로 가고 있다
누렁개와 레그혼, 둥근 지붕 아래 눈만 말똥말똥
아이가, 벌거벗은 아이가
추녀 끝에서 갑자기 뛰어나와
붉은 마당을 씽 한바퀴 돌고 깔깔깔
웃으며 제자리로 돌아와 몸을 턴다
점심 먹고 남쪽에서 먹장구름이 밀려와
나는 고추밭에서 쫓겨나 어둔 방안에서 쉰다
싸아하니 흙냄새 들이쉬며 가만히 쉰다
좋다.


*


나이 먹고 제일 많이 달라진 게 있다면... 비 맞는 일이 줄었다는 거다. 비 오는 날... 나갈 일도 없고, 비가 와도 우산 없이 다닐 일도 별로 없다. 게다가 비 온다고 젖어들, 손바닥만한 맨 땅도 도시에선 구경하기 힘들다. 이제 비오면 맨먼저 비릿하게 달려들던 흙 냄새 대신 콘크리트 냄새와 열기가 먼저 후욱 하고 달려드는 도시의 삶. 태어나면서부터 도시인이었으나 나는 흙과 콘크리트의 경계에 섰던 변방인이었기에 양쪽의 냄새를 알고 있다. 


누렁이를 앞세워 논두렁을 달려본 기억과 학교 앞에 라면박스 안에 들어있던 레그혼 새끼들을 길러 본 경험이 함께 유년의 기억 속에 늘어서 있다. 태어나 한 번도 변방에서 중심으로 들어서본 경험이 없는 나는 산 속에서 비를 맞을 때 생생하게 살아나는 기분이 든다. 알고 보면 나도 식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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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에 대한 성찰


- 복효근



어디까지가 삶인지...

다 여문 참깨도 씹어보면 온통 비린내 뿐
이쯤이면 되었다 싶은 순간에도 또 견뎌야할 날들은 남아


참깨는 기름집 가마솥에 들어가 죽어서 비로소

제 몸을 참깨로 증명하는구나


그렇듯 죽음 너머까지가 참깨의 삶이라면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다
살과 피에서 향내가 날 때까지
어떻게 죽음까지를 삶으로 견디랴


세상의 가마솥에서


삶까지는 멀다


*


복효근 시인의 <가마솥에 대한 성찰>은 성찰(省察)이 지닌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들어주는 시이다. 비록 시의 길이는 그리 길지 않지만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다향적(polyphonic)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훌륭한 시의 품격을 지니고 있다.


먼저 시인은 묻는다. "어디까지가 삶이냐?"


참깨라는 익숙한 사물을 통해 시인은 우리에게 삶을 성찰해보도록 한다. '여물다'는 말은 과실이나 곡식이 알이 들어 잘 익었다는 1차적인 뜻이 있지만, '여물다'란 말에는 사물이나 자연현상이 본래 지닌 특성이 활발해져서 제가 지닌 본성을 있는 그대로 잘 드러내고 있다는 뜻을 지녔다. 예전에 미학 세미나를 진행하다가 문화예술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친구에게 얻어들은 이야기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는데, 본래 우리 말인 "아름답다"의 어원은 "나답다"에서 유래한 것이란다.


내가 나 다울 때, 비로소 우리들은 아름다워진다. 그런데 우리가 아름답기 위해선 즉, 나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잘 드러내기 위해선 먼저 잘 여물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 여문 참깨는 아름답다. 그러나 아름다운 참깨조차도 이쯤이면 되었다 싶은 순간에 씹어보면 아직도 비린내가 난다. 비린내란 속세의 냄새다. 시인은 참깨의 효용을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참깨의 존재를 "어디까지가 삶이냐?"고 묻기 위해 '세상의 가마솥'에 들어가 참깨가 죽을 때에만 비로소 참깨의 살과 피에서 존재의 향내가 풍겨올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안다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간극이 있는가? 시인이나 작가들이 종종 스스로를 자학하고, 부끄러워하는 까닭, 자괴심으로 몸부림치며 스스로를 속물로 표현하길 주저하지 않고, 술안주거리로 올리는 까닭이 모두 거기에 있다. 우리는 아는 데로 살 수 없기 때문에 성찰하는 것이다. 가톨릭에서는 고해성사를 하기 전에 자신의 죄를 낱낱이 생각해내는 일을 성찰이라 부른다.


죽음 너머까지가 참깨의 삶이라면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다


죽음이란 존재의 소멸이다. 나란 존재가 소멸되는데 어떻게 그것조차 긍정하고 삶의 일부라며 견뎌낼 수 있을까? 삶은 무한의 허무를 반복(윤회)하는 것이므로 이 허무를 초극하기 위해서는 깨닮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니체는 이 같은 삶의 허무를 무한반복할지라도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인간이 위대해지기 위해 내가 제안하는 공식은 '너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이다. 즉 현재의 자신 이외에는 아무 것도 되기를 바라지 않는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미래에도 과거에도 그리고 영원히."


그렇기에...


세상의 가마솥에서


삶까지는 멀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정토(淨土)인 극락(極樂) 가는 길이 어째서 나를 버리는 무아(無我)의 삼매(三昧)에 들어야만 하는지 시인은 말한다. 세상의 가마솥에 갇혀 비린내만 풀풀 풍기는 참깨 한 알에게는 극락 가는 길이 참으로 아득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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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2
---- 붉은 달


기형도



1


그대, 아직 내게

무슨 헤어질 여력이 남아 있어 붙들겠는가.
그대여, X자로 단단히 구두끈을 조이는 양복
소매끈에서 무수한 달의 지느러미가 떨어진다.
떠날 사람은 떠난 사람. 그대는 천국으로 떠난다고
짧게 말하였다. 하늘나라의 달.



2

너는 이내 돌아서고 나는 미리 준비해둔 깔깔한 슬픔을 껴입고
돌아왔다. 우리 사이 협곡에 꽂힌 수천의 기억의 돛대, 어느 하나에도
걸리지 못하고 사상은 남루한 옷으로 지천을 떠돌고 있다. 아아 난간마다 안개
휘파람의 섬세한 혀만 가볍게 말리우는 거리는
너무도 쉽게 어두워진다. 나의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 속에서
폭풍주의보는 삐라처럼 날리고 어디선가 툭툭 매듭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내가 떠나기 전에 이미 나는 혼자였다. 그런데


너는 왜 천국이라고 말하였는지. 네가 떠나는 내부의 유배지는

언제나 푸르고 깊었다. 불더미 속에서 무겁게 터지는 공명의 방
그리하여 도시, 불빛의 사이렌에 썰물처럼 골목을 우회하면
고무줄처럼 먼지 튕겨나와 도망치는 그림자를 보면서도 나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떨리는 것은 잠과 타종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내 유약한 의식이다.
책갈피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우리들 창백한 유년, 식물채집의 꿈이다.
여름은 누구에게나 무더웠다.


3

잘 가거라, 언제나 마른 손으로 악수를 청하던 그대여
밤새워 호루라기 부는 세상 어느 위치에선가 용감한 꿈 꾸며 살아 있을
그대, 잘 가거라 약기운으로 붉게 얇은 등을 축축히 적시던 헝겊 같은
달빛이여. 초침 부러진 어느 젊은 여름밤이여.
가끔은 시간을 앞질러 골목을 비어져 나오면,
온통 체온계를 입에 물고 가는 숱한 사람들 어디로 가죠? (꿈을 생포하러)
예? 누가요 (꿈 따위는 없어) 모두 어디로, 천국으로


세상은 온통 크레졸 냄새로 자리잡는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턱턱, 짧은 숨 쉬며 내부의 아득한 시간의 숨 신뢰하면서
천국을 믿으면서 혹은 의심하면서 도시, 그 변증의 여름을 벗어나면서.



*


언젠가 요설(饒舌)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쓸데없이 말을 많이 함"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는데, 나는 기본적으로 모든 예술은 낭비의 속성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예술을 미메시스의 개념으로 파악하든, 다른 무엇으로 파악하든 모든 예술은 기본적으로 낭비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예술은 인간의 사랑과 공통된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죽음(상실 혹은 소멸)을 초월하려는 헛된 의욕에 기반한다. 만약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라면 구태여 존재하는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므로 낭비라는 것이고, 그것이 인간의 현존재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라면 감동을 위해 장치된 수식들이 낭비의 범주에 든다. 지나치게 교과서적으로 이야기해보면 만약 저 위의 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삶의 허망함'이라면 사실 그 객관적인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에겐 그저 한마디 "삶은 허망하다" 혹은 "삶의 인연, 관계는 허망하다"란 한 마디면 족하다. 문학은 은폐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누구나 알고 있는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쓸데없이" 많은 말을 지껄이도록 되어 있는 예술이다. 다른 예술들 역시 이와 다를 바 없다. 어째서 인간의 사랑은 허망한가?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후세로 이어가기 위해 생식활동을 한다. 오로지 인간만이 쾌락을 위해 혹은 갖은 이유로 허무를 반복한다.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으므로 무의미하다. 구스 반 산트의 영화 <굿윌헌팅>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넌 진정한 상실감을 모른다. 그건 타인을 네 자신보다 사랑할 때 느끼는 거니까." 기형도의 이 시에 붙은 제목이 "비가"인 까닭? 타인을 사랑한다는 허무의 반복이야말로 어쩌면 우리가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 삶의 진정한 의미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 세상에 무언가를 얻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기 위해 온 것이다. 기형도의 이 시에서 느껴지는 내 감각은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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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 이성복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짝짝인 신발 벗어 들고 산을 오르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보았니 한 쪽 신발 벗어
하늘 높이 던지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들었니
인플레가 민들레처럼 피던 시절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소리

우우우, 어디에도 닿지 않는 길 갑자기 넓어지고
우우,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기억하니

오른손에 맞은 오른뺨이 왼뺨을 그리워하고
머뭇대던 왼손이 오른뺨을 서러워하던 시절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소리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그리워하니 우리 함께
술에 밥 말아 먹어도 취하지 않던 시절을


*


시인도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늙는다. 그럼에도 시는 아직도 저렇게 푸르고 아프도록 시리게 빛난다. 1977년 '정든 유곽에서'를 통해 혜성처럼 등장해 1980년대 한국 시문학의 절정을 찍었던 시인 이성복의 시는 늪처럼 묵직하고 끈적거렸다. 그의 시에서 깨달음은 멀고도 먼 세월 저편의 일이었다. 그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 시인은 늪처럼 허우적대는 청춘의 무게를 질질 끌고 玉山에 올랐으리라.

그와 함께 玉山에 오른 것이 어디 개 한 마리뿐이었으랴. 비록 청춘의 무게는 그를 내리 눌렀을 테지만 "인플레가 민들레처럼 피던 시절"에도 그의 웃음소리는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기만 했다. 이성복은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란 시에서 시적 묘사와 진술을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분명 그 자신의 체험이었을 청춘의 연대기 "술에 밥 말아 먹어도 취하지 않던 시절"은 이제 흘러가고 없지만 기억과 그리움은 여전히 그를 괴롭힐 것이다. 아니 그의 시와 함께 지난한 세월을 견뎌 간신히 "어디에도 닿지 않는 길"에 도달한 우리들을 괴롭힐 것이다.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그리워하니" 어디에도 닿을 수 없는 그 길을 찾자고 죽도록 헤매고 다녀야 했던 고통의 뻘밭을...

그럼에도 이처럼 환하게 빛났던 청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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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故鄕

- 백석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어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씰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寞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 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1938년, 삼천리문학>


백석의 이 시 "고향"은 그 자체로 참 따스하다. 하나의 에피소드, 하나의 국면만으로  구축된, 보기에 따라 참 단순한 시(미의 세계)인데, 고향이란 무엇인지 참으로 정겹다. 나는 혼자 앓아 누웠다. 굳이 여러 말하지 않아도 이 정황만으로도 충분히 쓸쓸하다. 앓아누운 탓에 어느 아침 의원을 만났는데, 인상은 좋지만 시인은 몸만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도 쓸쓸하다. 그러다 고향 이야기로 말문을 틔운다.
알고보니 아버지의 친구다. 몇 마디 대화, 고향 이야기를 하고 나니 묵묵하니 맥이나 짚던 의원은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길을 가진 아버지 친구가 된다. 백석에겐 고향 정주 자체가 부처님 품 속인 거다.

이 무렵의 그는 "자야"와 부모 사이에 참 많은 고민을 끌어 안고 사는 젊은 시인이었을 텐데, 그의 시는 참 따숩기 그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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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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