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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 뒤엔...  사랑한 뒤엔 한여름 꽃가슴에도 멍이 남는다 시인 고은의 짤막한 시 중에서 단 두 줄로 사람을 울컥하게 만드는 것이 몇 편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아래의 시인데요. 미안하다 나 같은 것이 살아서 오일장 국밥을 사먹는다 어제 제가 만드는 잡지의 편집주간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막판 교정을 마치고 교정지를 필름출력소로 보내놓고 두 사람이 함께 국밥집에 마주 보고 앉아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지요. 편집하는 이들이 자기보다 나이가 많건, 적건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선생이란 호칭일 겁니다. 어떤 경우엔 선생이라 부르는 것에 부아가 날 만큼 형편없는 글을 보내놓고 나 몰라라 하는 필자들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제 경우엔 그래도 비교적 행복한 편집자입니다. 사실 이번호 잡지.. 더보기
황지우 - 길 길 - 황지우 (黃芝雨)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돌아다녀보면 朝鮮八道, 모든 명당은 초소다 한려수도, 내항선이 배때기로 긴 자국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거품 같은 길이여 세상에, 할 고민 없어 괴로워하는 자들아 다 이리로 오라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 █ 나는 문학을 오랫동안 벗삼아 살아왔다고 감히 자평하고 싶은 인간 중 하나이지만, 여적 외우는 시가 없다. 물론 정현종 시인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나는 그 섬에 가고 싶다" 정도는 염치불구하고 빼놓아야하지만, 대학 다닐 때 어느 문학평론가가 강의하는 강의에서 자신이 외울 수 있는 시 한 편을 암기해서 적어내는 쪽지 시험이 있었다. 미리 예정된 시험이었으므로 나는 한.. 더보기
조지 오웰- 동물농장 █ 동물농장, 회의주의자 벤자민 보다 복서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1903년 6월 25일, 당시 인도의 식민지였던 벵골의 모티하리에서 식민지 하급관리의 아들(본명은 Eric Arthur Blair)로 태어난다. 그의 탄생일이 기묘하게도 한국전쟁 발발일인 6월 25일이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작가 오웰은 우리나라에 많은 인연을 맺고 있다. 그는 6.25에 태어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 사망했고, 1945년 출간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동물농장(Animal Farm)』이 외국어로 옮겨져 소개(1948년, 김길준)된 최초의 나라가 한국이었다.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한국이 냉전의 최전선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해외정보국(VSIA)은 19.. 더보기
마종기 - 성년(成年)의 비밀 성년(成年)의 비밀 - 마종기 최후라고 속삭여다오 벌판에 버려진 부정한 나목은 알고 있어, 알고 있어, 초저녁부터 서로 붙잡고 부딪치며 다치며 우는 소리를. 목숨을 걸면 무엇이고 무섭고 아름답겠지. 나도 목숨 건 사랑의 연한 피부를 쓰다듬고 싶다. 날아도날아도 끝없는 성년의 날개를 접고 창을 닫는다. 빛의 모든 슬픔을 닫는다. 출처 :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사> * 이 시 은 에 실린 시이다. 성년, 어른이 된다는 것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걸까. 오늘날 우리가 '번지 점프'라고 일종의 레저 스포츠 삼아 하는 놀이의 유래가 남태평양 펜타코스트 섬의 원주민들의 성인식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성인의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그만한 체력과 담력을 부족민들에게 보증하기 위해 3.. 더보기
오규원 - 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 오규원 죽음은 버스를 타러 가다가 걷기가 귀찮아서 택시를 탔다 나는 할 일이 많아 죽음은 쉽게 택시를 탄 이유를 찾았다 죽음은 일을 하다가 일보다 우선 한 잔 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기 전에 우선 한 잔 하고 한 잔 하다가 취하면 내일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무슨 충신이라고 죽음은 쉽게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이유를 찾았다 술을 한 잔 하다가 죽음은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것도 귀찮아서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생각도 그만두기로 했다 술이 약간 된 죽음은 집에 와서 TV를 켜놓고 내일은 주말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건강이 제일이지― 죽음은 자기 말에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그래, 신문에도 그렇게 났었지 하고 중얼거렸다. * 내일을 말하는 일에 두려움을 느.. 더보기
정희성 -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정희성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 사랑이란 게 함께 초코렛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으며 공원 벤치에 누워 밤하늘의 별이나 헤아려 보는 일이었으면 참말 좋겠다. 사랑이란 게 함께 백화점에 가서 사주지도 못할 물건이나마 맘껏 구경하다가 지하식품점에서 떡볶이 한 접시 사서 나눠먹고 웃으며 돌아올 수 있는 일이라면 참말 좋겠다. 사랑이란 .. 더보기
김지하 - 새벽 두시 새벽 두시 - 김지하 새벽 두시는 어중간한 시간 잠들 수도 얼굴에 찬 물질을 할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다 공상을 하기는 너무 지치고 일어나 서성거리기엔 너무 겸연쩍다 무엇을 먹기엔 이웃이 미안하고 무엇을 중얼거리기엔 내 스스로에게 너무 부끄럽다. 가만 있을 수도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새벽 두시다 어중간한 시간 이 시대다 * 나에게는 한 권의 오래된 시집이 있다. 조태일의 국토라는 시집이다. 1975년 5월 20일 인쇄, 1975년 5월 25일 발행이라는 판권에 적힌 세월만큼 낡고 시들해진 시집이다. 책값은 600원. 거기에 적힌 창작과 비평사의 전화번호는 국번이 두 자리다. 장난삼아 조태일이라는 시인의 고명한 이름을 "좆털"이라 불렀던...아, 이젠 고인이 된 시인의 시를 보면서...그의 시 후기.. 더보기
나희덕 - 길 위에서 길 위에서 - 나희덕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내었다 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 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질러버린 일이 있다. 돌아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 제 길 위에 놓아주려 했지만 그럴수록 개미는 발버둥치며 달아나버렸다. 길을 잃고 나서야 생각한다. 사람들에게도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냄새 같은 게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인연들의 길과 냄새를 흐려놓았던지, 나의 발길은 아직도 길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 때로 어떤 시인들의 깨달음은 흔하다. 시적인 성취나 문학적 성취에 앞서 소중한 깨달음이 있는 반면에 어떤 깨달음은 흔하디 흔하여 구태여 시인이 저런 깨달음에도 일일이 말 걸고, 정 주어.. 더보기
김수영 - 말 말 - 김수영 나무뿌리가 좀더 깊이 겨울을 향해 가라앉았다 이제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이 가슴의 동계(動悸)도 기침도 한기도 내것이 아니다 이 집도 아내도 아들도 어머니도 다시 내것이 아니다 오늘도 여전히 일을 하고 걱정하고 돈을 벌고 싸우고 오늘부터의 할일을 하지만 내 생명은 이미 맡기어진 생명 나의 질서는 죽음의 질서 온 세상이 죽음의 가치로 변해버렸다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거리가 단축되고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질문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에게 고해야 할 너무나 많은 말을 갖고 있지만 세상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 무언의 말 이때문에 아내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자식을 다루기 어려워지고 친구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이 너무나 큰 어려움에 나는 입을 봉하고 있는 셈이고 무서운 무성의를 자행하고 있다 .. 더보기
김수영 - 그 방을 생각하며 그 방을 생각하며 - 김수영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사지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 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 대신에 다시 쓰디쓴 냄새만 되살아났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