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가에서

- 김수영

저이는 나보다 여유가 있다
저이는 나보다도 가난하게 보이는데
저이는 우리집을 찾아와서 산보를 청한다
강가에 가서 돌아갈 차비만 남겨놓고 술을 사준다
아니 돌아갈 차비까지 다 마셨나 보다
식구가 나보다도 일곱 식구나 더 많다는데
일요일이면 빼지 않고 강으로 투망을 하러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반드시 4킬로가량을 걷는다고 한다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래도 추탕을 먹으면서 나보다도 더 땀을 흘리더라만
신문지로 얼굴을 씻으면서 나보고도
산보를 하라고 자꾸 권한다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는데
남방셔츠 밑에는 바지에 혁대도 매지 않았는데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고
그는 나보다도 짐이 무거워 보이는데
그는 나보다도 훨씬 늙었는데
그는 나보다도 눈이 들어갔는데
그는 나보다도 여유가 있고
그는 나에게 공포를 준다

이런 사람을 보면 세상사람들이 다 그처럼 살고 있는 것 같다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이렇게도 가련한 놈 어느 사이에
자꾸자꾸 소심해져만 간다
동요도 없이 반성도 없이
자꾸자꾸 小人이 돼간다
俗돼간다  俗돼간다
끝없이 끝없이 동요도 없이

(1964년)

*


김수영을 일컬어 한국 현대시의 신화라고도 부르지만 아마도 이런 호명법에 대해 김수영 자신은 그다지 마뜩지 않게 여겼으리란 생각이다(개인적으로는 나역시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 한 명인 김수영은 물론 그처럼 높이 평가받을 만한 시인이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측면도 없지 않다). 무엇보다 그가 이런 평가를 마뜩지 않게 여겼을 것이란 사실은 김수영의 시 세계가 바로 신화 혹은 그 자신을 포함해 무엇이 되었든 덧씌우고 포장하는 코스튬을 경멸해 왔기 때문이다.


김수영의 시에서 자아는 거의 대부분 자아 과잉 상태에서 거울 혹은 도마 위에 올려진다. 이 시 "강가에서" 역시 첫 구절 "저이는 나보다 여유가 있다"로 시작한다. 시적 자아는 타인을 통해서 혹은 그 자신의 자아에 의해 분석대상이 되고 있다. 시 속의 '저이'는 '나'보다 가난해 보이지만 여유가 있고, 식구가 나보다도 일곱이나 많지만 돌아갈 차비만 남겨놓고 술을 사줄 만큼 호기롭다. 그리고 그는 일요일이면 빼지 않고 강으로 투망을 하러 나오고, 반드시 4킬로미터 가량을 걷는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이는 '애 업은 여자'와 오입한 자신의 부도덕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고, 애 업은 여자와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오입할 수 있었던 자신의 성적 능력을 아무 고민 없이 자랑할 만큼 속물이다. 게다가 그는 '나보고도/ 산보를 하라고 자꾸 권한다'. 시적 자아는 그와 나를 비교하면 할수록 안으로부터 파괴된다. 나의 어조는 그에 대해 부정적으로 비교하고 있으나 그는 이미 나의 염치나 윤리의식 따위 개나 물어가라는 식으로 전혀 개의치 않는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했던가? 그에게 그런 의식 따위 없으니 도리어 부끄러워진 건 '나'이다. 그런데 이 '나'는 사지육신 멀쩡한 나(자아)인가?

이런 사람을 보면 세상사람들이 다 그처럼 살고 있는 것 같다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고 느낄 만큼 왜소해진 '나'이다. "동요도 없이 반성도 없이/ 자꾸자꾸 小人"이 되어가는 나를 김수영은 마치 도마 위의 생선처럼 올려놓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생선이 너무나 생생하고, 신선해서 마치 금방이라도 바닷속에서 끄집어 올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린다는 거다.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이토록 파괴적인 정황을 시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쓰고 있는 김수영의 정직함은 무시무시하지만, 그가 느꼈을 위선과 암울한 시대가 또한 그를 사정 없이 내몰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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證例6
: 앤 선더스 아가에게

- 마종기


내가 한 아가의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환자는 늙으나 어리나 환자였고, 내가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나는 기계처럼 치료하고 그 울음에 보이지 않는 신경질을 내고, 내가 하루하루 크는 귀여운 아가의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내 같잖은 의사의 눈에서는 연민의 작은 꽃 한 번 몽우리지지 않았지.


가슴뼈 속에 대못 같은 바늘을 꽂아 비로소 오래 살지 못하는 병을 진단한 뒤에 나는 네 병실을 겉돌고, 열기 오른 뺨으로 네가 손짓할 때 나는 또다시 망연한 나그네가 되었지. 그리고 어느 날 엉뚱한 내 팔에 안겨 숨질 때, 나는 드디어 귀엽게 살아 있는 너를 보았다. 아, 이제 아프게 몽우리졌다. 네 아픔이 되어 낮에도 밤에도 속삭이는구나.


미워하지 마라 아가야. 이 땅의 한곳에서 죽고 나면 그만이라는 패기 있는 철학자들의 연구를 미워하지 마라. 너는 그이들보다 착하다. 나이 들어 자랄수록 건망증은 늘고, 보이는 것만 보는 눈은 어두워진단다. 그이들은 비웃지만 아가야, 너는 죽어서 내게 다시 증명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헤어지지 않는다.


*

마종기 시인은 시인이자 의사이고, 의사이자 시인이지만 그 전에 한 아이의 아비였고, 누군가의 자식이고, 누군가의 남편이다. 마종기 시인의 "證例" 연작 시리즈는 그가 시인이기 전에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란 사실을 새롭게 일깨워준다. 시인이 자신의 시에 주석을 다는 것은 부질 없는 짓이지만 마종기 시인은 이런 말을 했다.


"끝 연에서 이 시는 세상을 다 알고 경험한 척하며 철학자연하는 주위 사람들에 대한 불만을 보이고 있다. 도서관에 앉아 책만 들척이며 세상의 진리를 다 알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글을 쓰고, 세상의 만사를 자기식대로 난도질하는 지식인들이 나는 우습기까지 했다. 이런 의식의 변화는 내가 의대생으로 해부에 매달리면서 일어났다. 졸업 후에 밀어닥친 의사 생활 중에 더 두드러지게 되었지만, 문학이라면 적어도 그 당시 상당히 유행하던 행동주의 문학만이 구원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엉뚱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행동이 없이 관념의 추상 언어로만 지껄이는 문학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체험을 통한 현장의 은유야말로 살아 있는 시를 만드는 새로운 질료라고 생각했다. 그것만이 진정성을 갖춘 문학이라고 믿었다. 행동이 밑바탕이 되지 않는 문학은 공중누각이고 세상에 필요 없는 문학이라고 믿었다. 골방에만 박혀서 하루하루의 질박한 삶을 외면하는 의식의 조작이 아니고, 땀과 눈물과 피로 만들어내는 것만이 진정한 시의 길이라고 믿었다."


'진정성'이란 말은 국어사전에도 등재되지 않은, 다시 말해 정의되지 못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쉽게 내뱉어지고 쉽게 사용되는 말이다. 또 다시 말해 '진정성'이란 말은 쉽게 정의되지 않으며 어쩌면 정의될 수 없는 말이란 뜻이다. 진정성이란 말 자체가 본디 한자어에서 왔을 테지만 이 말의 '진정'이 명사 '眞情'인지 부사 '眞正'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내 경우엔 명사가 아니라 부사 '진정'이란 의미에서 "거짓이 없이 참으로"란 뜻으로 받아들인다. 진정성을 영어로는 'authenticity'라고 흔히 번역하는데 이 말은 진정성보다는 '진본성'에 더 가까운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말해 그 어떤 때보다 '진정성'이 강하게 요구되고, 자주 사용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이 말의 참 뜻을 아직 모르며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란 말이다.


비록 시인은 철학자들의, 지식인들의 창백한 지식과 이성이 빚어내는 냉정을 비난하고 있지만 그 역시 앞의 첫 연에서 의료시스템의 한 부분을 차지한 도구로서의 자신을 나무라고 있다. 그가 "한 아가의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그 역시도 알지 못했던 자각이다. "그리고 어느 날 엉뚱한 내 팔에 안겨 숨질 때"에야 비로소 시인은 환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이자 '앤 샌더스'라는 이름을 가진 "귀엽게 살아 있는 너"로 재인식하게 된다. 마종기의 이 시가 지닌 진정성의 근원은 다름 아닌 이 자각, 그 역시 창백한 지식과 이성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는 성찰에서 출발하는 것일 게다. 그가 마지막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던 자각도 아마 그것이었을 게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진정성은 그의 말대로 결국 '행동', "땀과 눈물과 피로 만들어내는 행동"만이 그 증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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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찾기

- 옥타비오 빠스(O
ctavio Paz)


나의 몸에서 너는 산을 찾는다
숲 속에 묻힌 산의 태양
너의 몸에서 나는 배를 찾는다
갈 곳을 잃은 밤의 한중간에서

*

나는 정신의 사랑보다 몸의 사랑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랑의 유물론'쯤이라고 해두자.

이 말은
지금 그대가 내 곁에 없어도 여전히 그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난 지금 그대가 내 곁에 없어 미칠 것 같이 괴롭다고 말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옥타비오 빠스의 "서로 찾기"가 말하는 사랑은 '에로스'다.

몸의 사랑.
여자는 남자에게서 산을, 남자는 여자에게서 배를 찾는다.
여자는 남자를 만나 머무를 곳을 찾고
남자는 여자를 만나 떠날 곳을 찾는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애타게 찾지만 만남은 잠시고 엇갈림은 영원히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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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飛行雲)


- 오세영


한낮

뇌우(雷雨)를 동반한 천둥번개로
하늘 한 모서리가 조금
찢어진 모양
대기 중 산소가 샐라
긴급 발진
제트기 한 대가 재빨리 날아오르더니
천을 덧 대 바늘로 정교히
박음질 한다.


노을에 비껴

하얀 실밥이 더 선명해 보이는
한줄기 긴
비행운(飛行雲)



출처 : 『황해문화』, 2009년 봄호(통권63호)


*


42년생 시인에게 천진(天眞)하단 말은 어폐가 있는 말이지만, 갈수록 오세영 시인의 시가 천진해진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분명한 건 나이가 들면서 더욱 천진해지는 시인들이 있으며 그 모습이 아름답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시인이기에 그럴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번에 오세영 선생의 시(詩) 3편을 받았는데 모두 비슷한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인이었기에 당신의 시를 받고 싶었는데 소원 풀었다. 이제는 퇴임하여 명예교수로 계시지만 당신이 문학하는 학자로 펼쳐보이던 문학관에는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았지만 시인으로서의 당신에게는 언제나 동의할 수 있다.


노년의 천진한 시들도 여전히 빛나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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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비

- 안현미


아마존 사람들은 하루 종일 내리는 비를 여자비라고 한다
여자들만이 그렇게 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우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울던 소리
오래 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에게서 나던 소리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젖 먹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우는 소리
오래 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의 목메이는 소리

*

사는 게 비루하다고 여기다가도
어제보다는 오늘이 그래도 좀 낫다 싶어
한숨을 푹 내쉰다

살아야 할 날이 어제보다 하루 줄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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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구렁달


- 신경림


지금쯤 물거리 한 짐 해놓고

냇가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볼 시간......
시골에서 내몰리고 서울에서도 떠밀려
벌판에 버려진 사람들에겐 옛날밖에 없다
지금쯤 아이들 신작로에 몰려
갈갬질치며 고추잠자리 잡을 시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목소리로 외쳐대고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몸짓으로 발버둥치다
지친 다리 끄는 오르막에서 바라보면
너덜대는 지붕 위에 갈구렁달이 걸렸구나
시들고 찌든 우리들의 얼굴이 걸렸구나



* 갈구렁달 : 황해도, 충청도 바닷가에서 쪽박같이 쪼그라든 달을 말함.


**


어릴 적엔 세상 모든 걸 다 아는 것 같고, 마음에 들지 않는 풍경들을 죄다 뜯어 고치겠다는, 아니 고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었었다. 그러다 언제인가부터 싫든 좋든 나도 그 세상 풍경의 일부란 사실을 알게 되고, 내가 이 세상의 문제들에 책임질 나이가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마도 나는 그때부터 늙어가기 시작했으리라.


어머니와 연결된 탯줄은 10개월이 지나면 끊어지지만 과거 성장하며 겪어왔던 어려움들은 어느 순간 극복되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탯줄처럼 줄곧 내 뒤를 따라왔다는 걸 알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시들고 찌든 우리 얼굴처럼 시든 갈구렁달이 줄곧 내 뒤를 따라온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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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

- 윤성학


결혼 전 내 여자와 산에 오른 적이 있다
조붓한 산길을 오붓이 오르다가
그녀가 나를 보채기 시작했는데
산길에서 만난 요의(尿意)는
아무래도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가혹한 모양이었다
결국 내가 이끄는 대로 산길을 벗어나
숲속으로 따라 들어왔다
어딘가 자신을 가릴 곳을 찾다가
적당한 바위틈을 찾아 몸을 숨겼다
나를 바위 뒤편에 세워둔 채
거기 있어 이리 오면 안돼
아니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안돼 딱 거기 서서 누가 오나 봐봐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곳에 서서
그녀가 감추고 싶은 곳을 나는 들여다보고 싶고
그녀가 보여줄 수 없으면서도
아예 멀리 가는 것을 바라지는 않고
그 거리, 1cm도 멀어지거나 가까워지지 않는
그 간극
바위를 사이에 두고
세상의 안팎이 시원하게 內通하기 적당한 거리


출처 : <창작과비평>, 2003년 여름호(통권120호)



*

내외(內外). 한자어 뜻풀이대로라면 안팎이다. 그런데 이 안과 밖은 떼어놓을 수도, 한데 있기도 까다롭다. 그래서 남녀 사이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고 피하는 일 역시 내외(內外)한다고 말한다. 너무 가까이, 너무 멀리도 안 된다. 딱 그 정도 거리를 유지하기. 세상의 모든 슬픔은 어쩌면 그리 시원하게 내통(內通)치 못한 탓. 내 여자가 일러주는 대로 딱 그만큼만 만날 있다가는 “벼엉신~” 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 혹은 일러준 대로 하지 않아서 “음흉한~”소리를 듣고 ‘쬧겨’날 수도 있으니 남정네들아 기회가 오더라도 오금이 저리도록 적당히, 적당히 내외통(內外通)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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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瓜


- 김중식


사랑이 고통일지라도 우리가 고통을 사랑하는 까닭은

고통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감내하는 까닭은
몸이 말라 비틀어지고
영혼이 꺼멓게 탈진할수록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지속적인 냄새를
피우기 때문이다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집요한 냄새를 피우기까지
우리의 사랑은 의지이다
태풍이 불어와도 떨어지지 않는 모과
가느다란 가지 끝이라도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의지
는 사랑이다 

오, 가난에 찌든 모과여 亡身의 사랑이여!


*


'사람의 발목을 잡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체념,

사람을 앞으로 가게 만드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의지'


사랑이 이성의 일이 아니란 것은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진리 같다.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사랑도 호르몬의 작용이라 길어야 3년이란다. 사랑이 이성의 일이 아니든, 호르몬의 작용이든 아니든 그것이 감각이든, 직관이든, 계급의 일이든 그도 아니면 그 무엇이든 그것을 지속시키는 것은 의지란다.


의지에게 묻는다. 정말이냐고, 정말 그러하냐고...


"분노, 상처, 고통에 빠져들지 말라. 그것들은 당신의 에너지를 훔쳐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 레오 버스카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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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못된 것들


- 이재무


저 환장하게 빛나는 햇살

나를 꼬드기네
어깨에 둘러멘 가방 그만 내려놓고
오는 차 아무거나 잡아타라네
저 도화지처럼 푸르고 하얗고 높은
하늘 나를 충동질하네
멀쩡한 아내 버리고 젊은 새 여자 얻어
살림을 차려보라네
저 못된 것들 좀 보소
흐르는 냇물 시켜
가지 밖으로 얼굴 내민 연초록 시켜
지갑 속 명함을 버리라네
기어이 문제아가 되라 하네


*


내가 나이를 먹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 있다. 노래방에 갔을 때 더이상 내가 부르는 노래들이 신곡 코너가 아닌 '가나다'순 어딘가를 뒤져보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가끔 어쩌다 알바생들이랑 일을 하게 되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 친구들이 88올림픽을 본 적이 없는 세대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다. 90년대에 태어난 아이들이 올해 대학생이 되었다. 그런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나도 모르게 어느새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살라고 충고하고 있는 나를 느끼면서 혼자 속으로 웃었다.


남자들은 영원히 철이 들지 않는다.


동서양의 모든 여자들이 느끼는 부분이다. 영원히 철 들지 않는 남자들의 삶은 사실 비슷하다. 특히 한국에서 태어난 남자들은 더욱더 비슷하게 산다. 고추 달고 태어나서 가족의 환호를 받는 것은 잠시 그 뒤부터 내내 고추달린 값을 해야 한다. 남자니까 울어도 안 되고, 남자니까 말을 많이 해도 안 되고, 남자니까 남에게 맞고 다녀도 안 되고, 남자니까 육체적으로 힘든 일은 도맡아야 하고... 여자들도 할 말은 많겠고, 이재무 시인이 말하는 저 감정이 여성이라고 해당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나도 고추 달린 남자라서 그냥 남자 이야기만 하는 거다.


남자로 살아보니 고등학교 졸업한 뒤의 인생은 그냥 쭈욱 직장생활 내지는 돈벌이에 연관된 것들뿐이었다. 한 번도 그 궤도에서 벗어나보지 못한 채 평생을 산다. 아이들이 죽을동살동 대학가고 싶어하는 이유가 단지 대학을 나와야 취업이 잘 되고, 사람 취급 받기 때문만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4년의 유예기간을 번다는 거, 어쩌면 그게 더 간절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대학에 들어가기 전 3년간 떠돌이 생활을 한 것이 당시엔 너무나 비참하고 서러웠지만 이제 는 그때가 내 인생의 가장 자유로운 시간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물론 그 시간들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거절하겠지만...).


그리고 원통하고 분하기도 하다. 당시 나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어디 한둘이었겠냐만 외부적인 요인을 제외하고도, 막 살아버리고 싶었던 나의 충동을 가로막은 것은 정작 나 자신이기도 했다. 난 좀더 막 살아버릴 수 있었는데, 내 안의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갈망은 끝끝내 남았다. 시인은 "저 환장하게 빛나는 햇살"이 꼬드긴다고 말하지만 시인이 말하는 햇살은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한 햇살은 아니다. 이재무 시인이 말하는 '햇살'은 젊은 시절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회한, 일상에 가로막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움, 자유에 대한 갈망을 뜻한다.


여자들은 남자들이란 영원히 철 들지 않는 존재라고 말하지만, 일찌감치 철 들어버린 남자는 또 어디에도 쓸모가 없는 법이다. 철 없는 남자는 꿈꾸는 남자고, 꿈꾸는 남자가 못된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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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그 사람의 손을 보면

- 천양희


구두 닦는 사람의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구두 끝을 보면
검은 것에서도 빛이 난다
흰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창문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창문 끝을 보면
비누거품 속에서도 빛이 난다
맑은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청소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길 끝을 보면
쓰레기 속에서도 빛이 난다
깨끗한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마음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마음 끝을 보면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빛이 난다
보이는 빛만이 빛은 아니다
닦는 것은 빛을 내는 일

성자가 된 청소부는
청소를 하면서도 성자이며
성자이면서도 청소를 한다


*

천양희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은은하다'는 표현이 절로 떠오른다. 스테인레스처럼 녹 하나 슬지 않는 반듯함도 아니고, 크롬도금처럼 윤기와 광택이 자르르 흐르는 인위적인 광택이 아니라 시인 자신이 말하는 바와 같은 오랜 세월이 주는 은은한 광택이다. 은은하다. 겉으로 뚜렷하게 드러나지 아니하고 어슴푸레하며 흐릿하다. 그러나 그 흐릿함이 주는 온기와 정감은 허기진 위장을 채워주는 장국밥, 할머니가 내어주시는 달지 않은 감주, 어머니가 밥을 푸며 먼저 건네주는 말랑말랑한 누룽지 조각이다.

어쩐지 물끄러미.
시인이 길을 가다 멈춰서서 오랫동안 지켜보았을 그 사람들.

'구두 닦는 사람, 창문 닦는 사람, 청소하는 사람'

부처의 눈엔 부처가 보이고, 보살의 눈엔 보살이 보인다는, 우리도 익히 알아서, 이미 세상의 때가 묻을데로 묻어서 시인의 웬만한 온기쯤 '가비압게' 개구라로 튕겨낼 수 있는 내공의 빈틈을 겨냥한다.


그러나 시인의 어조는 세상은 다 그런 거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거라는 사파무공의 신조를 깨뜨리고, 파헤치는 날카로운 비검이 아니라 은은하게 스며드는 달빛 같은 것이다. 섣달 그믐밤길을 걸어본 이들은 안다. 보름달이 휘엉청 떠오른 밤길이 얼마나 환한지... 얼마나 포근한지... 보이지 않는 것들이 빛을 내도록 도와주는 깊은 밤 한 줄기 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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