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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 - 이별가 이별가 - 박목월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 나는 지금도 제일 처연한 시 중 하나로 신라 향가인 를 손꼽는데, 박목월 선생의 이 시 역시 못지 않다.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하는데 와락 눈물이 날 것 같다. 이승과 저승 사이 강은 걸어서도 건.. 더보기
단식부기와 복식부기를 두고 벌어진 이상한 논쟁 최악의 범죄자도 감옥에 보낼 수 있는 증빙자료, 회계장부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1987년에 감독한 영화 는 미국 역사상 가장 부패했던 시대였던 금주법 시대를 배경으로 경찰도, 검찰도 감히 손대지 못하던 갱단 두목 알 카포네(Al Capone)가 엘리오트 네스(Eliot Ness)라는 한 풋내기 열혈수사관에 의해 세금 포탈 혐의로 수감시키기까지의 과정을 다룬다. 알 카포네는 1920년대 당시 시카고의 라이벌 갱단 두목이었던 조지 벅스 모렌을 암살하기 위해 경찰관 복장을 한 부하들을 시켜 상대편 조직원 7명을 기관단총으로 살해할 만큼 잔인무도하기로 악명 높은 인물이었다. 경찰과 언론은 물론 시카고의 삼척동자도 이 범죄가 알 카포네의 짓이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무능한 경찰은 범죄의 증거를 찾아내지 못해 도.. 더보기
박영근 - 길 길 - 박영근 장지문 앞 댓돌 위에서 먹고무신 한 켤레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흙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 점 없고,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뒷산을 지키던 누렁개도 나뭇짐을 타고 피어나던 나팔꽃도 없다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거기 먼저 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시인의 시가 가슴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사실 이런 일이 좋은 건 아니다. 그건 내가 몹시 지쳤거나 다쳤거나 힘겹다는 증거다. 거기 먼저 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시인의 마지막 연이 나를 .. 더보기
내가 캠핑을 즐기는 까닭 내가 캠핑을 즐기는 까닭 요즘 나는 이중고, 아니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회사 일만 해도 종류별로 서너 가지가 넘는 데 6주마다 고정으로 돌아오는 칼럼 쓰는 일이 있고, 쓰기로 약속만 해놓고 제대로 시작도 못한 일거리가 서너 가지다. 거기에 내년엔, 내년엔 하면서 역시 마무리짓지 못한 논문이 남았다. 하나는 밥벌이용으로 꼭 필요한 일이니 절대로 줄일 수 없고, 칼럼 쓰는 일은 지역사회의 공익근무요원으로 차출된 셈이라 원고료가 거의 없다시피 한 일인데 그렇기 때문에 더욱 거절할 수가 없었다. 못 하겠다고 하면 마치 적은 원고료 때문에 피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단 염려가 들었다. 한편으론 일을 줄여야 한다고 끊임없이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당장 처리해야 할 스케줄들이 줄지어 달려온다. 참다못해 탈출을 꿈꾼 것.. 더보기
어니스트 볼크먼 - 스파이의 역사1:작전편-20세기를 배후 조종한 세기의 첩보전들/ 이마고(2003년) 스파이의 역사 1 : 작전편 - 20세기를 배후 조종한 세기의 첩보전들 어니스트 볼크먼 지음, 이창신 옮김 / 이마고 / 2003년 10월 어쩌다보니 별로 좋아하는 저자도 아닌 "어니스트 볼크먼Ernest Volkman"이 저술해 국내에서 출판된 3종의 책을 모두 읽고, 그 세 권의 책에 대해 모두 서평을 올리게 되었다. 저자 소개에는 그가 첩보기관 및 스파이 분야의 대단한(하긴 대단하다) 전문가인양 소개되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가 전문가인 영역은 이런 자료들을 쫓아가서 공부하고, 종합해내서 글로 써내는 저널리스트란 점에서 전문가라는 것이지, 이 분야에 종사한 경험을 지닌 전문가는 아니다. 어니스트 볼크먼의 저서 세 권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스파이의 역사 1 : 작전편", "20.. 더보기
오규원 - 모습 모습 - 오규원 살아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 만의 잎은 제각기 몸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하나, 들판의 고독 하나 들판의 고통 하나도 다른 곳에서 바람에 쓸리며 자기를 헤집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 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 * 시인을 직접 보지 않았다면 나에게 이 시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시인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의 육체는 명동 골목 사이로 쏴아하고 불어가는 한 줄기 바람에도 가늘게 흔들렸으므로... 그러나 그는 피하지 않았다. 그 흔들림을... ** 교수가 되기 전에 시인이란 생업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직업으로 오랫동안 편집자로 .. 더보기
윤희상 - 소를 웃긴 꽃 소를 웃긴 꽃 ㅣ 문학동네 시집 90 윤희상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6월 지난 언젠가 화요일에 나는 선배 박형준 시인과 함께 국밥을 먹었다. 지금 한국의 시인들이 처해있는 다소 비극적인 상황에 대해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는 꾸역꾸역 국밥을 밀어 넣었다. 밥알을 씹으며 한 편으론 한국의 시인들이 현대미술이 처한 난관과 흡사한 난관에 처했다는 생각을 했다. '형, 문학이 문학 그 자체의 힘을 잃고, 자꾸만 철학이 되고, 정치가 되어 가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아직 시 문학은 살아있다. 비록 커다란 변화의 조짐들이 불길한 징조가 되어 연이어 출현하고 있지만. 오늘 아침 출근을 하니 또 한 명의 선배 시인이 새로 시집을 냈다고 시집을 보내주었다. 간만에 읽는 신간 시집이다. 첫 .. 더보기
이성부 - 슬픔에게 슬픔에게 - 이성부 섬 하나가 일어나서 기지개 켜고 하품을 하고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느냐. 바다 복판에 스스로 뛰어들어 그리움만 먹고 숨죽이며 살아남던 지난 십여년을, 파도가 삼켜버린 사나운 내 싸움을, 그 깊은 입맞춤으로 다시 맞이하려 하느냐. 그대, 무슨 가슴으로 견디어 온 이 진흙투성이 사내냐 ! * 오래전 어느 시절 나는 내 삶에도 노래처럼 어떤 음계가 있다면 그것은 국악 장단 중에서도 가장 느리게 흘러간다는 진양조 장단에 발맞춘 슬픔이 아닐까 결론짓고 홀로 힘없이 미소지은 적이 있었다. 사람마다 제각각의 호흡과 리듬을 타고 난다면 나는 아마도 진양조 늦은 장단에 내 삶을 맞추고 싶었다. 내 삶은 언제나 손아귀에 가득 쥔 모래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그렇게 너무 쉽고 빠르게 새어나가버리.. 더보기
가스파 노에 (Gaspar Noe) - 돌이킬 수 없는(Irreversible) 돌이킬 수 없는 - 가스파 노에 (Gaspar Noe) 감독, 뱅상 카셀 외 출연 / 파라마운트 / 2003년 5월 "가스파 노에" 감독의 "돌이킬 수 없는(Irreversible)"을 보던 날이 생각난다. 한 마디로 이토록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할 수 있는 영화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이 영화는 함께 본 친구들 앞에서 날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었다. 내 감정을 스스로 돌이켜 보건데 그건 분노도 무엇도 아닌 짜증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넘쳐나는 짜증이 날 분개하게 만들었고,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애꿎은 물만 벌컥벌컥 들이키게 만들었다. 영화의 내용은 사실 아주 간단하다. 아름다운 한 여인(모니카 벨루치)이 지하도에서 한 남자에게 강간당하고, 자신의 애인이 강간당했다는 것을 안 남자 친구가 분개.. 더보기
안나 아흐마또바 - 이별 이별 - 안나 아흐마또바(Anna Akhmatova, 1889-1966) 내 앞에는 저녁의 비스듬한 길이 놓여 있네 어제는 사랑에 빠진 채 "잊지 말아요" 속삭이던 사람 오늘은 다만 바람소리뿐 목동들의 외침과 맑은 샘가의 훤칠한 잣나무뿐 * 어제는 사랑에 빠져 행복했던 사람 그 사람이 사라진 뒤의 나에겐 저녁의 비스듬한 길이 있을 뿐이다. 사랑은 '침묵'이 아니라 '대화'로 이루어진 탓에 사랑은 말의 연금술사이자 말의 포로가 된다. 그러나 비스듬한 길을 걸어 나조차 사라진 뒤에도, 모든 말들이 허공으로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맑은 샘가의 훤칠한 잣나무는 남아 있겠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