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스 쿼텟(Kronos Quartet) - Pieces Of Africa






어제는 편집자문회의가 있었던 데다가 편집위원들이 모두 귀가한 뒤에 한홍구 교수님이 차나 한 잔 하자고 하셔서, 여인들이 있는 카페에 가서 드립커피를 마셨다(정말 드립이더라.  보리차처럼 맑고 투명한, 커피만 마셨다. 믿어라~ 제발!).

요즘 시국 이야기로 시작해 현재의 상황이 지식인(사회)의 소멸로 치닫고 있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우려까지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집에 돌아가니 12시였다. 만약 예전처럼 파주에 살았다면 더 걸렸을 테지만 지금 우리 집은 인천이니까~ ㅋㅋ

집에 가서 '크로노스 쿼텟(Kronos Quartet)'의 초기 앨범 중 하나인 "Pieces Of Africa"를 오랜만에 들었다. 크로노스 쿼텟(Kronos Quartet)의 이 앨범만 듣노라면 아프리카의 젊은 뮤지션들이 클래시컬한 연주를 한다고 느낄 만큼 아프리카 냄새가 물씬 나는 앨범이지만 이 그룹은 미국의 현대음악 4중주단으로 매우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하는 그룹이다.

이들 음악세계의 폭이 하도 넓어서, 가끔은 이 녀석들이 음악으로까지 제국주의를 하는가 싶을 때가 있을 만큼 그 폭이 광대역이다.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지에서 서구 선진 국가들이 '생물학적 탐사(Biological Prospecting)'를 빙자한 '생물해적질Bio-Piracy'을 일삼는 것처럼 이들은 세계 각지의 음악적 전통을 자신들 것으로 가져와 현대음악으로 변주해낸다. 물론, '생물해적질'처럼 악의적으로 말할 성질의 일은 아니다.

K.마르크스가 "양이 질을 변화시킨다"고 했던 것처럼, 가끔은 폭이 깊이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폭 넓게 많이 아는 것[博覽强記]가 항상 지혜로운 것도 아니고, 때로는 깊이가 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것도 나름이다.

최근 지식사회 풍토를 보면 다방면으로 폭이 넒은 것처럼 보여도, 막상 자신이 아는 범위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일반 시민만 못한 인식을 보이는 경우도 많은데, 이건 비단 이공계열 지식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계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단 서로 만나질 않고, SNS로만 대화와 소통을 하니 일이 되지 않는 측면도 분명 있을 게다.

어제 한홍구 선생과 나눈 이야기도 그런 것이었다.





어쨌든 크로노스 쿼텟(Kronos Quartet)의 음악은 이처럼 광대역으로 전 세계의 음악적 전통과 자원을 두루 섭렵해 재해석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거친다. 그 깊이가 어느 정도 깊이를 가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제3세계를 사는 시민이라면 충분히 의심해보아야 할 일이지만 그들은 이런 작업을 제1집 "Winter Was Hard(1990)"부터 해왔다는 사실에 대해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란 관념도 궁극적으로는 지역이 아닌가. 난 크로노스 쿼텟(Kronos Quartet)의 이 꾸준한 축적과 탐사의 저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노마십가(駑馬十駕), 둔한 말도 열흘 동안 수레를 끌 수 있다는 뜻으로, 재주 없는 사람도 노력(努力)하고 태만(怠慢)하지 않으면 재주 있는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어제 크로노스 쿼텟(Kronos Quartet)의 음악을 들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http://www.youtube.com/watch?v=VNPn98_9jFM&feature=share&list=PLN83DP26dOxsIMfunwVsaavE3iMiKDID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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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믿어라"
- 윌리엄 E.B. 듀보이스


지금 내 책상에는 삼천리 출판사에서 나온 한 권의 책 "니그로:아프리카 흑인에 관한 짧은 이야기"가 있다. 책을 받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삼천리가 미쳤구나'란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물론 이 말은 나쁜 의미에서 한 말은 아니었다. 이 책의 저자가 '윌리엄 E.B. 듀보이스(William Edward Burghardt Du Bois, 1868~1963)'이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삼천리가 미쳤구나'란 말 속엔 '과연 이 책이 몇 권이나 팔릴까…. 그런데 왜 이 책을 냈을까…. 참 좋은 출판사구나.' 등등의 여러 가지 생각들이 함축되어 있다.  

듀보이스란 이름은 미국의 근현대사, 그중에서도 인종차별 문제에 대한 글을 읽다 보면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이름이자, 별 관심 없는 사람들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이름이다.

그는 1868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그레이트배링턴에서 태어난 흑인(아프로 아메리칸)이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을 발표한 것이 1863년 1월 1일의 일이었다. 노예해방이 있은 지 5년 후에 태어나 1895년 하버드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고, 이어 피스크대학과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한 뒤 흑인 최초로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애틀랜타 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역사학과 사회학, 경제학 등을 가르쳤는데, 1905년 사실상 최초의 흑인민권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이아가라 운동(Niagara Movement)'을 제창했다. 그는 1903년 "흑인의 영혼(The souls of Black Folk)"을 발표하며, 이전까지 교육을 통한 지위향상을 주장해온 '부커 T. 워싱턴(Booker T. Washington, 1856~1915)'의 온건 노선에 반대했다.

부커 T. 워싱턴은 흑인 민권운동의 '안창호'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이었는데, 그는 노예로 태어난 흑인민권운동 지도자 중 거의 마지막 세대라고 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투쟁할 때가 아니다'며 미국 남부 지역의 공공연한 흑백분리 정책 등과 대결을 회피하며 타협했기 때문에 '항복주의 노선'이란 비판을 받았다.  

B.T. 워싱턴의 온건노선에 반대한 듀보이스의 노선은 흑인지식층의 지지를 받았고, 1905년 나이아가라 운동은 1909년 '전국유색인종협회(NAACP)'의 창설로 이어졌다. 그는 1910∼1932년 NAACP의 기관지인 《크라이시스 Crisis》를 편집하면서 흑인민권운동의 기초를 다지는 한편 '범아프리카주의'를 제창했다.

범아프리카주의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인물이 가나의 초대 대통령인 '콰메 은크루마(Kwame Nkurmah, 1909 ~ 1972)'이다. 그는 이른바 '검은 황금(흑인 노예)' 무역의 집산지였던 아프리카 서남부 해안(골드코스트) 출신으로 가나의 독립운동을 지휘하여 1947년 통일골드코스트회의(UGCC)의 서기장이 되었고, 1957년 골드코스트가 가나로 독립하면서 1960년 가나의 초대대통령에 취임한다. 그는 듀보이스로부터 영감을 얻은 '범아프리카주의'를 표방하였는데, 1966년 쿠데타로 실각하여 기니로 망명한다.


콰메 은크루마(Kwame Nkurmah, 1909 ~ 1972)


범아프리카주의(Pan- Africanism)란 백인의 지배에서 탈피해 아프리카의 정치·경제적 연합을 결성하자는 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데, 시몬 볼리바르의 '범라틴아메리카주의'도 이와 비슷한 개념을 추구했다. 사실 범아프리카주의의 기원은 19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그 실질적인 출발은 1919년 윌리엄 듀보이스를 중심으로 파리에서 개최된 제1회 범아프리카회의를 통해서라고 할 수 있었다.

듀보이스는 뉴욕, 파리, 런던, 브뤼셀 등을 중심으로 흑인들과 연대하여 백인과 같은 수준의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운동을 개최했는데, 1930년대 들어 경제적 제약으로 인해 진척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1935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아프리카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국가이자 흑인 왕국) 침략은 범아프리카주의 운동가들의 공분을 불러 일으켰고, 전 세계 흑인들에게 범아프리카주의의 필요성을 새삼 부각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개최된 제5차 범아프리카대회에서 듀보이스는 은크루마와 함께 의장직을 맡았다. 범아프리카주의는 서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독립과 민족자결을 위한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범아프리카주의는 조지 패드모어(George Padmore, 1903~1959) 등에 의해 일정하게 공산주의로 경도되는데 그런 일련의 흐름 속에서 듀보이스는 인권과 평화, 사회변혁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다른 한편으론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소련의 이익에도 부합하여) 1958년 레닌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듀보이스는 1961년 공산당에 입당했다. 며칠 전(2013년 8월 24일) 마틴 루터 킹 목사 워싱턴 대행진 50주년 기념행사가 NAACP 주도 아래 성대하게 치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사후 50주년을 맞이한 듀보이스에 대해서는 부각되지 못한 까닭도 아마 거기에 있으리라.

미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흑인민권운동의 역사를 기술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마틴 루터 킹 목사나 말콤 엑스에 비해 거의 알려지지 않은 까닭(헬렌 켈러의 생애사가설리번 선생과의 관계라는 초기 역사 기술에 머무르는 까닭도 그녀가 생애 후반기를 사회주의자로 살았기 때문이다)도 거기에 있다. 윌리엄 듀보이스는 1961년 가나의 은크루마 대통령의 초청에 따라 가나에 갔고, 그곳에서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가나 국적을 취득했다. 그는 가나 아크라에서 정부 후원 아래 백과사전 편찬사업에 몰두하다가 1963년 세상을 떠났다.

이 책 "니그로:아프리카와 흑인에 관한 짧은 이야기"는 단지 미국 내 흑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아프리카의 역사, 백인들에 의해 날조되거나 왜곡된 아프리카와 흑인의 역사, 인종주의가 정치, 윤리적으로는 물론 학문적으로도 결코 올바른 것이 아니란 사실을 조목조목 반박하기 위해 쓰인 책이기도 하다. 그는 이 책을 1915년에 펴냈는데, 이 책이 나오던 해 미국에서는 D.W.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이 개봉되었다.

* '윌리엄 듀보이스'에 대해 언젠가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에서 다루고 싶었는데 공부는 부족하고, 그와 관련해 읽을 만한 책 한 권이 없어 언젠가는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그의 저작을 직접 만나게 되다니 꿈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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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보니 "‘헌정질서 파괴 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은 내란죄의 경우 공소시효를 두고 있지 않다. 내란음모죄가 인정되면 3년 이상의 유기징역형에 처해진다"고 되어 있더라.

그러므로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공소시효가 없는 범죄에 대한 고백으로서 처벌을 감수(?)하고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5~6년 전인 1987년 4~5월의 어느 따뜻한 봄날,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D고교의 교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운동장에선 이제 막 점심 도시락을 까먹은 학우들이 공을 차고, 놀거나 운동장 구석에서 산보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 친하게 지내던 친구 LSY군과 함께 점심 시간을 기해 학교 운동장을 바라보며 시국에 대한 한탄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 녀석이 '그날이 오면' 무엇을 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다짜고짜 그날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누구나 그날이 어떤 날인지 알고 있으면서 동시에 모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뮤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나오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다미르'처럼 아직 오지 않은 그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녀석은 갑자기 목소리를 나직하게 깔더니, 자기는 '그날이 오면 예비군 무기고를 털겠다'고 말했다. 나는 웃으며 '정말? 미친 놈!'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날'이 오면 정말 그래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내 은사 중 한 분은 나를 가리켜 '광주가 키운 마지막 아이'라고 하셨는데, 어찌보면 맞는 말씀이었다.

1980년 광주의 경험으로부터 채 10년도 경과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자라던 우리에게 '광주'란 지명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었다. 그 지명은 한 편에선 학살의 이름이었고, 다른 한 편에선 반란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에겐 '민주주의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당시 우리에게 민주주의란 '그날'만큼 멀고, 언제올지 알 수도 없는 대상이었다.

광주에 대한 기억은 한편에선 국민이 국가(더 정확하게 말하면 국가권력을 장악한 독재자)에게 자위권을 발동해 무기를 들고 항거한 기억이자 국가가 국민을 학살한 기억이기도 했다. '아, 그날이 그날이라면...' 이란 생각이 들자. 당시 17살이었던 나는 그에게 섣부른 약속을 하고 말았다.

"그날이 오면 나도 함께 할께."

이렇게 해서 나와 그 친구는 내란음모죄라는 공소시효도 없는 중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1987년의 찬란한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 우리는 그런 중대한 범죄음모를 꾸몄다. 어차피 시위나 데모는 고등학생인 우리에겐 이방인처럼 먼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해 6월이 지나고, 6.29선언이 있었다. 도저히 올 것 같지 않았던 '그날'이 도둑처럼 와버렸고, 우리의 무기고 탈취계획은 대신 그해 연말에 있을 대통령선거에 비록 선거권은 없지만 '공정한 대통령선거와 교육민주화를 주장하는 농성시위'를 통해 참여하자는 계획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해서 한 무리의 고등학생들이 그해 연말 명동성당의 콘크리트 바닥에서 서울지역고등학생운동협의회(나중에 연합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란 이름으로 농성시위를 치렀다. 결과는 허무했다. 그날은 올듯말듯 하다가 문턱에서 물러갔고, 우리는 그날이 오긴 온 건지, 아예 오지 않은 건지, 아예 올 수 없는 건지, 오지 않을 건지를 기다리며 10년, 다시 20년을 지나보냈고, 어느덧 불혹의 나이가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나는 공장, 공사판을 전전하다가 대학에 들어갔고, 나랑 함께 내란을 음모했던 친구는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 어쩌면 내가 일부러 찾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이듬해였던 1988년의 어느날 성당에서 신부님이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여기 모인 모든 이에게 강복하소서"란 말씀으로 미사를 끝마쳤고, 나는 성당 문을 막 나서던 찰나였다. 덩치가 곰만한 사내 두 사람이 문 앞에 서 있다가 아무 생각 없이 걸어나오는 내 배를 주먹으로 힘차게 쳤다. 아픈 건 둘째고 숨이 막혀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나동그라졌는데, 앞에 서 있던 형사가 말했다. "네가 전성원이지?" 나는 말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 LSY라고 알지?"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너! 걔가 월북한 거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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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놀라 눈을 떴을 때는 아직도 한밤중이었다. 하지만, 꿈이 너무 실감나고 무서워서 그 뒤로 아침이 될 때까지 뜬눈으로 지새웠다. 이건 괜히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자고 꾸민 것이 아니라 실화다. 나는 정말 그런 꿈을 꿨다. 다음날 학교에 나가 LSY에게 가봤더니 멀쩡하게 학교에 나와있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기억이 있다.

내란을 음모했던 탓인지 몰라도 학교 교련수업 시간 중 실시되었던 M1소총 분해결합시험에서 1등을 했다. 언젠가 쓸모가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그렇게 열심히 했던 것인지, 특전사 대위 출신으로 우리 학교 교련 선생으로 있던 이른바 '람보' 선생의 훈육 탓인지는 모르겠다. 들리는 풍문으로는 교련 과목이 폐지된 뒤로 그 선생님은 다른 과목을 가르치고 계시다고 한다. 어쨌든 체 게바라, 보구엔지압의 게릴라 전술 같은 책들을 한동안 열심히 탐독하거나 '스페인내전사연구' 같은 책들도 꽤 열심히 읽었다. 물론 이것이 내란을 음모하기 위해 그랬던 것인지 그때부터 이미 밀덕후의 자질이 싹튼 탓인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이 글이 이석기나 통합진보당 때문에 쓰는 글이란 오해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이 글은 그날이 오길 바랐으나 오지 않은 그날을 회상하며 쓰는 나의 자술서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해소되지 않을, 공소시효도 없는 범죄에 대한 나의 자술서니까...

* 만약 그때 내가 잘못되었더라면 이런 사진으로 나를 기억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구나.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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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로봇 - 01. 천공의 성, 라퓨타(로봇병사)

"리테 라토바리타 우르스 아리아로스 바르 네로리이르(우리를 구하라, 빛이여 소생하라!)"

이 주문이 기억나는 사람이라면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天空の城ラピュタ, 1986)"를 매우 인상깊게 본 사람일 게다. 물론 저 주문을 몰라도 인상적으로 보았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천공의 성 라퓨타"는 내가 좋아하는 아일랜드 작가 중 한 명인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여행기" 중 3부에 공중에 떠 있는 섬 '라퓨타'의 에피소드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조나단 스위프트를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당시 스위프트의 정치적 입장은 '보수주의'였다.

언젠가 진중권 선생이 보수주의자의 풍자에 대해 이야기하며 "스위프트는 모던의 과학과 모던의 정치를 신랄하게 풍자했으나, 역사의 흐름은 외려 그의 풍자를 우습게 만들어버렸다.이는 기독교의 목사이자 보수당의 당원으로서 스위프트가 가진 한계일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스스로 우스워지는 게 보수적 풍자의 운명이다. 하지만 오늘날 비판의 힘을 잃은 스위프트의 풍자는 당대를 넘어 문학의 고전으로 남았다. 나 역시 스위프트처럼 정치적 풍자를 한다. 사실 진보적 태도를 취하기만 하면 널린 게 풍자할 거리다. 하지만 그 풍자가 당대를 넘어서려면 정치적 올바름만으로는 부족하다. 문학의 본질은 정작 그 부족한 부분에 있다."고 말한 바 있는데, 나는 진중권이 오늘날 스위프트의 풍자는 비판의 힘을 잃었다는 지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풍자가 당대를 넘어서려면 정치적 올바름만으로는 부족하다. 문학의 본질은 정작 그 부족한 부분에 있다"는 지적에는 동의한다.





스위프트는 "걸리버 여행기"를 통해 실용에는 둔감한 채 공리공론(空理空論)에만 집중하는 라퓨타인들을 통해 당대의 과학 풍토를 풍자하고 있는데, 어떤 풍자들은 이후 실제 과학으로 입증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스위프트는 라퓨타 사람들이 화성 주위를 돌고 있는 두개의 위성을 발견하기도 했다고 썼는데, 실제로 이 위성들은 책이 씌여진지 150년 후에야 발견되었다.

어쨌든 라퓨타 사람들은 제대로 된 건물이나 옷은 만들어 입지 못했는데, 그 이유가 옷 치수를 재는데 줄자대신 천체고도 측정기인 사분의나 나침반 같은 것들을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거다. 이곳의 과학자들은 허황된 공상에 빠지는 것을 즐겨하기 때문에 이처럼 공상에 빠진 사람들을 전문적으로 깨워주는 직업이 있을 정도라고 기술하고 있다.

스위프트가 현실정치적 입장에서는 보수주의자였을지 몰라도 그의 문학이 그렇게 협소한 지점에만 머물렀다면 "걸리버 여행기"는 잠시 읽혀지다가 사라졌거나 그저 그런 판타지쯤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스위프트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걸리버 여행기"의 풍자는 성공했고, 고전의 지위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라퓨타는 남성위주의 가부장적 사회로, 권력의 정점에는 매우 포악한 왕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섬 아래 위치한 발니바르비를 식민지배하듯 하고 있는데, 왕은 때때로 거대한 섬(라퓨타)의 그림자를 이용해 발니바르비의 반란 지역에 해를 가리거나 비를 막거나 돌을 아래로 굴러떨어뜨리겠다는 협박으로 이 지역을 통치해왔다. 이것은 영국에 대한 아일랜드의 지배를 풍자한 것이지만 오늘날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지배 방식과 비견해봐도 풍자가 빛을 바래지 않는단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통치질서에 있기 때문에 이곳의 여성들은 라퓨타를 떠나고 싶어한다. 하지만 아내들이 아무리 섬을 떠나 육지를 방문하고 싶다고 요청해도 대개는 승인되지 않는다. 이유는 한 번 떠난 여성들이 단 한 번도 자발적으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 아, 오늘 쓰려고 했던 내용은 원래 이게 아니었지. ㅋㅋ 그냥 오늘은 스위프트와 걸리버여행기 그리고 천공의 성 라퓨타의 로봇병에 대한 이야기 맛보기 정도로 해두자. 벌써 에너지 달린다. ㅋㅋ 후속 이야기는 생각나면 또 언젠가...

http://youtu.be/5Hmn5ruzp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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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주, 캡틴큐의 골 때리는 추억

요즘 내가 맛 들인 음료 중 하나가 '모히또(Mojito)'라는 칵테일인데, 시중 카페에서 판매되는 것들 중에는 무알콜음료로 판매되기도 하지만 본래는 럼주와 민트를 넣어 만든 칵테일로 쿠바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쿠바'하면 떠올리게 되는 헤밍웨이가 즐겨 마셨다고 해서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음료(칵테일)이다. 이처럼 럼을 베이스로 한 칵테일 중에 유명한 다른 한 가지가 ‘피나콜라다’다.

느닷없이 '모히또'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사실 럼주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하면 떠올리게 되는 '칼바도스(Calvados)'가 있듯(조앙 마두가 즐겨 마셨던 사과증류주) 근대 해양소설들을 읽노라면 절대 빠지지 않는 술이 바로 뱃사람들의 술인 럼주이고, 럼주하면 해적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인가? 국산 럼주였던 ‘캡틴큐’에는 애꾸눈 선장이 새겨져 있었다. ‘캡틴 큐’는 돈 없이 빨리 취하고 싶은 마음에 고딩 때 동네 친구들과 즐겼던 국산 양주 이름인데, 내 연령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 술 때문에 머리가 깨지도록 아팠던 기억들이 있으리라.

'럼주'하면 사탕수수와 카리브 해, 그리고 쿠바를 먼저 떠올리게 되지만, 사탕수수의 원산지는 본래 인도네시아였다. 동서 해상 무역을 관장하던 이슬람 상인들을 통해 인도와 중동을 거쳐 지중해 연안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이것이 신항로 개척 시대 스페인인들에 의해 카리브 해 서인도제도의 악명 높은 플랜테이션 농장 산업이 되었다.

어쩌면 스페인 사람들이 신대륙에서 발견한 진정한 황금은 사탕수수를 원료로 만들어진 ‘백색 황금, 설탕(sugar)’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탕수수를 원료로 하는 설탕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뽑아낸 뒤 남은 부산물인 당밀(Molasses)도 늘어나게 되었다. 인천 우리 사무실 바로 뒤편으로 제일제당 인천공장이 있는데, 주차장에 밤새 차를 주차해본 사람들은 차량 위로 뭔가 얇은 막이 도포된 것처럼 끈적끈적한 입자들을 느낄 수 있다. 추측컨대 당밀 입자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당밀은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뽑아낸 뒤 남은 끈적거리는 캐러멜 빛깔의 액체다.

17세기 초(1651년)쯤 누군가는 당밀을 발효시켜 술을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럼주다. 폐식자재(?)를 이용한 - 당밀 자체는 설탕 성분만 빼낸 것이고 사탕수수에 담겨있는 본래 영양분은 고농축된 재료 - 술이기 때문에 럼주는 매우 값싼 술이 될 수 있었고,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물론 부두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부두노동자들에게도 인기 있는 술이 될 수 있었다.

럼주를 구분하는 법은 일단 색깔로 구분하는 방법이 있는데, 진한 것을 다크럼(다크 럼은 당밀을 천천히 자연 발효시켜서 단식 증류), 갈색 빛의 럼을 골드럼, 그리고 무색의 투명한 럼을 화이트럼(발효를 빨리 시키고, 연식 증류기를 사용해서 증류)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색깔의 차이가 나는 것은 증류 과정에서 당밀의 잔류 유무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인데 이중에서 다크럼이 우리가 영화나 모험소설 등을 통해 접했던 것처럼 해적들과 뱃사람들이 즐겨 먹던 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외에도 생산지나 제조법에 따라 구분하는 법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①헤비 럼:자메이카산이 유명하다. 자연발효로 만들어지며, 다량의 에스테르를 함유하고 있어 강한 향기가 있다. 발효에는 효모 외에 부티르산균 (낙산균) 등이 간여하고, 증류는 포트스틸로 하며, 증류액은 통에 저장한다. 숙성기간은 최저 3년으로 규정되어 있다.
②미디엄 럼:가이아나에서 생산되는 데 메라라 럼이 유명하고, 향미는 헤비 럼과 라이트 럼의 중간이다.
③라이트 럼:순수하게 배양한 효모로 발효시키고 연속식 증류기를 사용한다. 바베이도스 · 쿠바 · 푸에르토리코 · 트리니다드토 바고산이 유명하며, 향미는 부드럽다. 한국에서도 럼이 생산되고 있는데, 라이트 럼에 속한다. 럼은 스트레이트로 마실 수 있는 외에 다이키리 등 칵테일의 바탕이 되는 술로서 널리 이용되며, 최근에는 라이트 럼이 많이 애용되고 있다. 또, 럼의 감미로운 향기는 양과자에 아주 적합하여 설탕의 감미와 달걀의 비린내를 완화시켜 준다고 해서 다량의 럼이 제과용으로 쓰인다. 또 크림이나 젤라틴에 섞거나 과실을 럼에 담그기도 하며, 아이스크림에 가미하여 맛을 더하는 데도 쓰인다. <출처: 네이버 백과 사전>

럼은 어떻게 해적의 술이 되었을까?
이번에 이사를 하면서 집안의 온갖 잡동사니들을 끄집어내어 정리하는데 우리 집에서 적지 않은 술이 나와서 놀랐다. 나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기 때문(진짜 1년에 서너 차례 정도)에 이렇게 많은 술이 있을 이유가 없는데 생각보다 많은 술이 나와서 놀랐고, 이 술들의 생산 연도가 너무 오래되어서 놀랐다. 대부분 2000년대 초반 것들이라 과연 이 술들을 버려야 하는지, 마셔도 되는 건지 궁금해서 네이버 지식in 검색을 해보니 술(알콜)은 과실주 같은 술들이 아니라면 모두 음용 가능한 것들이란다. 그래서 실제로 술병의 라벨들을 찾아보니 유통기한 표시 자체가 없었다.

가끔 회사 직원들이나 주변의 나보다 어린 친구들에게 냉장고나 컬러 TV가 집에 언제 처음 들어왔는지 아느냐고 물어보면 연령대가 높은 이들은 비교적 정확히 기억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백색가전의 3종 신기(神器)’ - TV, 냉장고, 세탁기 -를 누리며 살았던 세대들은 마치 자연의 일부인 양 이들 제품이 주는 혜택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도리어 신기해졌다. 이중에서 냉장고는 오늘날 우리 가정의 식품저장창고 역할을 하는데, 이것이 없을 때 우리는 식품들을 어떻게 저장해놓고 먹었을까? 음식의 부패를 어떻게 막았을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13세기부터 인류의 항해 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연안을 벗어나 먼 바다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베리아반도에서 무어인들을 몰아내는 레콩키스타가 완료되면서 드디어 ‘대항해시대’가 시작된다. 항해가 길어지면서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음식, 그 중에서도 식수였다. 원양에서 신선한 식수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바다에서 비를 만났을 때 이것을 잘 거두어 통에 보관해 마시는 방법밖에 없었다. 다른 식재료들은 말린다던지, 소금에 절이는 방법으로 일정 기간 동안 보관할 수 있었지만 식수는 오크통 같은 보관용기에 보관하다보면 금세 상해서 마실 수 없게 되거나 그 물을 마시더라도 세균이 번식하기 때문에 복통과 설사, 식중독 등을 유발하여 심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바로 술이었다. 어쨌든 술도 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음료로 사용할 수 있었다. 성경 등 사막 기후의 식생활 풍경을 보면 종종 포도주와 물을 섞어 마시는 대목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 그랬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 해상무역을 주름잡았던 한자동맹 등에서는 물과 함께 맥주와 와인을 식수로 제공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술들은 알코올 성분이 포함되어 있어 물보다 오래 보관할 수는 있었지만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좀더 먼 바다로 항해를 하는 과정에서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유럽보다 온도와 습도가 높은 대서양과 카리브 해를 지나면서 금방 상하게 된 것이다.

물론 위스키 같은 술은 알코올 농도가 높기 때문에 좀더 오래 보관할 수 있었지만 선원들에게 일상적으로 제공하기엔 가격대가 너무 높았다. 위스키는 귀족들이나 선장들의 술을 될 수 있어도 일반 선원들의 술이 될 수는 없었다. 그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럼’이었다. 럼은 위스키처럼 도수가 높아서 쉽게 상하지도 않았고,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뽑아내고 남은 재료로 주정을 만들었기 때문에 위스키처럼 비쌀 이유도 없었다. 그 결과 럼주는 해적은 물론 일반 상선의 선원들과 해군들까지 즐겨 마시는 뱃사람들의 술이 되었다.

‘캐리비언의 해적’ 처럼 해적이 등장하는 영화들을 보면 해적들은 언제나 럼주에 취해있는데 이것은 단지 해적들이 거친 사람들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였으며, 사실은 해적들뿐만 아니라 이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당시 해군들도 모두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당시 뱃사람들은 해적이든, 해군이든 누구나 항상 취해 있었다는 거다. 그런 까닭에 당시 배에서 선장이 선원에게 내리는 가장 큰 형벌 중 하나가 금주였다는 사실은 단순히 술을 주지 않는 문제가 아니라 식수를 공급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넬슨의 피(Nelson's Blood), 럼주

마커스 레디커의 "악마와 검푸른 바다 사이에서"에 보면 "술은 뱃사람의 육체와 정신이 함께 붙어있게 해주는 접착제"라는 구절이 있는데, 캐리비언의 해적들과 가장 치열하게 맞선 세력은 당연히 영국 해군이었지만 이들에게도 ‘럼주’는 필수였다. 영국 해군은 오랫동안 럼주를 병사들에게 럼주를 제공하는 전통을 유지해왔다. 그래도 명색이 군대인데 해적처럼 하루종일 진창 퍼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영국 해군은 럼주 배급에 대한 규칙을 정해놓고 있었다. 럼은 장교를 제외한 준사관 이하 승조원들에게만 지급되었는데(단 20세 이상인 자에 한해서), 하루에 약 0.5파인트(대략 260~280cc)씩 점심과 저녁으로 2번에 걸쳐 배급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오늘날의 양주잔(35cc)으로 환산하면 무려 55도에 달하는 술을 하루에 8잔씩 준 셈이다.

병사들이 늘 술에 취해있으니 규율과 기강이 생명인 해군 고위층의 심사가 편할 리 없었다. 게다가 군대 물품을 임자 없는 물건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영국에도 있었기 때문에 선장이나 당직 사관이 럼주를 빼돌려 팔아먹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선원들은 늘 더 많은 럼주를 원했고, 선장이나 항해사 같은 장교들은 병사들을 관리하기 위해 술 배급을 놓고 자주 갈등해야만 했다. 꼭 럼주 배급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갈등은 종종 술로 인해 증폭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선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은 선원들에 의한 선상 반란이었다.

이런 갈등을 해결하고, 선원들이 럼주에 덜 취하도록 하기 위해 에드워드 버논(Admiral Edward Vernon)이란 해군 제독이 머리를 썼다. 그는 럼주에 물을 타서 배급하도록 했는데, 술에 물을 타니 맛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줄어든 향미를 보충하기 위해 레몬이나 라임 쥬스, 설탕 등을 럼주에 섞어 배급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칵테일 ‘핫 그로그(Hot Grog)’의 시작이었다. 이 말의 유래는 버논 제독이 항상 착용하던 방수망토(grogram)에서 따온 것인데, 이 칵테일에서 나온 말이 바로 권투에서 심한 타격을 받아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를 뜻하는 영어 단어 ‘그로기(groggy)’란 말이다.





럼주의 별명 중에 '넬슨의 피(Nelson's Bllod)'란 말이 있는데,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전사한 넬슨 제독의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럼주 통에 담아 영국까지 돌아왔는데 럼주 통을 열어보니 럼주가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넬슨 제독의 기함이었던 빅토리아호의 수병들이 럼주를 마시고 싶어서 넬슨 제독의 유해가 담겨있는 럼주 통에 작은 구멍을 내서 빨아먹다보니 술이 동이 나버리고 말았다는(다시 생각해보면 넬슨 제독을 과실주처럼 술 담궈 먹었다는 섬칫한 이야기) 이야기인데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만큼 럼주에 대한 영국 해군들의 애착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말해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을 게다.

이후 점차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원양 항해를 견딜 수 있는 식품용기와 냉장기술이 발달하면서 럼주의 효용이 사라지기 시작했지만 유독 영국 해군만큼은 럼주 배급의 전통을 꾸준히 유지해왔는데, 지난 1970년 7월 31일, 최후의 럼주 배급을 마지막으로 공식적으로 선상에서 럼을 식수로 사용하는 일은 사라졌다. 참고로 미국 해군은 1862년 9월부터 폐지되었다. 현대 해군은 술과 같은 알코올성 음료를 선상에서 제공하거나 마시는 일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데 과거에 비해 해군이 운용하는 장비의 가격대도 엄청나졌지만, 해군이 가진 파괴력 또한 엄청나게 커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선원 한 명이 술에 취해 실수로 누른 버튼 하나 때문에 세계가 멸망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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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힘들어!
많이 힘들어?
우울해!
우울해?
고민있어요!
고민있어요?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말을 걸어주세요.
당신의 물음표 하나가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라고 하는 이 광고를 들어본 사람들도 제법 있으리라.

이 광고는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가 공익광고로 제작한 것인데, 이 라디오 CM을 들을 때마다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가 있어서 올려본다.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과거 내가 베트남전에 대해 공부할 때 처음 만났을 - 아마도 베트남전의 부도덕성에 대해 깨우치게 만드는 여러 사건 중 -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이 미라이 학살 사건이었으리라.




Q. And babies?(아기들은?)
A. And babies. (아기들도.)

이 포스터는 예술 노동자 연합(Art Workers Coalition)의 예술가 포스터 분과[Artists' Poster Committee (Frazier Dougherty, Jon Hendricks, Irving Petlin)]가 만든 포스터로, 베트남전에 저항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본래는 R.L. Haeberle가 찍은 미라이 학살 사진(1969)을 피처링한 것이다.

AWC의 한 분과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원래 이 포스터는 AWC와 MoMA의 공동작업으로 기획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MoMA가 이 작품의 발표를 거부한 뒤로도 Artists Poster Committee가 계속 진행해 결국 MoMA의 참여 없이 출판했다. 이 작업에 필요한 종이는 피터 브랜트가 기부하였다(그의 이름은 Artists Poster Committee의 멤버들과 나란히 포스터에 인쇄되었는데 그런 탓에 가끔씩 브랜트가 이 포스터를 디자인한 것으로 잘못 아는 이들도 꽤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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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의 사랑

- 김경미

똥 빼고 머리 떼고 먹을 것 하나 없는 잔멸치
누르면 아무데서나 물 나오는
친수성
너무 오랫동안 슬픔을 자초한 죄
뼈째 다 먹을 수 있는 사랑이 어디 흔하랴

* 요 근자 들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성 시인은 김경미...
시는 '묘사'라고 배웠지만, 시의 묘미 중 하나는 분명 '진술'.
진술이야말로 시의 진경이기도 하다.
다만, 조심할 것 한 가지는 '진술하되 진부하지 않을 것!'

"뼈째 다 먹을 수 있는 사랑이 어디 흔하랴"

어디 멸치 같은 사랑만 그러하랴.
사랑이라 이름 붙은 것들은 죄다 그 모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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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김창남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공부란 콩나물을 기르는 일과 같아서 구멍난 시루에 매일같이 물을 주면 물이 다 빠져나가지만 그래도 콩나물은 자란다고 하셨었지. 공부란 '스며듬'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1.
춘추시대 거문고의 명수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의 일화를 사람들은 지음이란 두 글자로 기억한다. 백아가 거문고를 들고 높은 산에 오르고 싶은 마음으로 이것을 타면 종자기는 옆에서, "참으로 근사하다. 하늘을 찌를 듯한 산이 눈앞에 나타나 있구나"라 하였고, 백아가 흐르는 강물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기가 막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눈앞을 지나는 것 같구나"라며 감탄해 마지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를 부수고 줄을 끊은 다음 다시는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세상에 다시는 자기 거문고 소리를 알아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2.
거북이와 토끼의 달리기 우화(寓話)를 놓고 거북이가 어떻게 토끼를 이길 수 있느냐고 따지는 사람은 제 얕은 앎에 빠져 정작 핵심이 되는 우화의 중요한 교훈을 얻을 생각은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우화’라는 담화체제(談話體制)가 가진 고유한 구조를 먼저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과의 대화는 맥이 빠질 뿐만 아니라 상대의 소갈머리에 갑갑해진다. 하지만 잘못 들어선 길이 지도를 만든다는 말도 있듯 잘못된 해석, 오독(誤讀)이 없었다면 문학과 예술은 빛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3.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의 일화에서 일품의 거문고 솜씨를 지닌 백아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예술가는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동양적인 의미에서의 예술, 자기완성의 길만을 외롭게 고집해 나아가는 가는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예술관이 아니었을까. 혼자 쓰고, 혼자 읽는 글이 아닌 다음에야 오독의 위험은 피할 수 없는 것이겠다.

클래식 음악에서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파 등 고전 시대 이전의 옛 음악을 그 시대의 악기와 연주법으로 연주하는 것을 가리켜 일명 원전연주, 정격음악(authentic music)이라 부른다. 현대적인 피아노가 아닌 하프시코드, 바이올린이 아닌 비올로 연주하여 옛 소리를 재현해내는 것이다.

과연 이것은 재현일까? 우리는 예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재간이 없다. 작곡가 자신도 자신의 음악을 그대로 재현할 수 없으며, 화가의 작품도 결국 빛에 의해 반사되는 색감에 따라 매순간 다른 색으로 빛나게 되며 바라보는 이의 시선이나 감정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끔 타인의 글 읽기에 대해 그것이 설령 내 글에 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의미를 명확히 규정지으려 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게 읽었다면 그것이 그에겐 진실일 수 있기 때문이다.

4.
백아의 연주를 홀로 알아들었기에 종자기를 지음이라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백아의 연주는 듣는 이에 대한 배려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던 연주였으리라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예술에서 창작을 일 삼는 사람이란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타인의 시선 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집중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이 문제는 쉽게 정리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대중에게 인정받기 위한 예술의 추구란 한 마리 여왕벌을 향해 구애의 몸짓으로 날아오르는 무수한 수벌들의 허무한 비행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여왕벌의 사랑을 얻는 것은 가장 높이 날아오른 단 한 마리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떨어져 일생을 마치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예술의 세계에서 명성을 얻는다는 건 정자(精子)가 사람 되는 것처럼 힘든 일이겠지요. 더군다나 그 명성이 당대가 아닌 백 년 뒤나 오백년쯤 뒤에도 여전히 그 이름을 남긴다는 건). 그렇다고 이 수벌들의 비행이 허무할지는 몰라도 꿀벌사회의 체제를 생각했을 때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게다.

5.
가끔 세상살이가 무척 허무해지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곤충의 세계를 상상해보곤 한다. 일개미들의 행진, 수벌의 비행은 허무하지만 무의미하진 않다고... 콩나물 시루가 밑 빠진 독이라 그 위로 쏟아 붓는 물줄기들은 죄다 밑구멍으로 빠져나가지만 습기를 머금은 콩들은 어느새 자라나서 시루를 덮어 둔 묵직한 백과사전을 밀어 올리듯이... 이 허무를 반복할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 누구라도 콩나물쯤은 키울 수 있다고....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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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비를 몰고 온 손님, 박근혜 대통령


내정 때문에 위기를 맞은 정권은 외교 분야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는 법이다. 경제문제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기 어려운 상황, 남북관계 파탄, 국정원 정치개입, 정상회담 기록 공개 등 최악의 상황에 부닥친 박근혜 정부가 방중 외교에서 성과를 내고 싶은 조급증에 시달리리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방중 이전부터 정권 출범 갓 100일을 넘긴 박근혜 정부에 대한 용비어천가는 중국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인기가 매우 높다는 식의 언론보도는 이번 방중 외교에 대해 청와대가 걸고 있는 기대를 반증하고 있었다. 그러나 방중 외교의 성과와 질이 예상처럼 대단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우리 언론이 과소평가 또는 푸대접을 받고 돌아갔다고 단언하였던 김정은의 중국 특사가 예상과 달리 미·중정상회담을 앞둔 시진핑 주석에게 북한 측 입장을 전달한 것은 물론 중국으로 하여금 미국에 가서 이야기할 거리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에 한·중회담은 시작부터 김이 빠졌기 때문이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역사적으로 중국이 분열되어 있을 때, 우리 역사가 비교적 평온했던 것처럼 외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한반도의 분열 상황은 그만큼 강대국들이 외교 하기 편해진다. 최근 중국의 기류에 일부 변화의 기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과 미국의 관계 역시 항상 평탄했던 것만은 아니란 점을 고려해보면 지금의 상황이 우리에게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한국을 이용해 중국이 북한을 길들이려는 시도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좀 더 현실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을 방증하듯 방중 외교 직후 발표된 합의문부터 서로 엇박자를 내고 있다. 우리는 중국이 북핵 문제에 대한 한국의 의견을 지지했다고 발표했지만, 중국에 의해 곧바로 부인 당하는 아픔(?)도 맛보았다. 지금 우리는 과거 이명박 정권 당시 지나친 미국 중심 외교 탓에 중국과의 관계 개선이 절실한 상황이고, 그런 점에서 박근혜 정부에 대해 중국 측의 기대가 큰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한두 차례의 방중 외교로 이런 상황들이 극적으로 개선되고, 경제적인 측면이 아니라 정치적인 측면에서 구체적인 성과를 내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박 정권은 출범 초부터 남북 정상회담 기록을 공개해버린 상황이지 않은가.


방중 외교의 성과로 내세울 것이 많지 않은 상황임에도, 우리 언론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 기간 동안 가물었던 중국에 비가 내리자 중국 현지인들이 반가운 손님이 와서 비가 내렸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고 전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연설의 서두와 말미에 중국어로 연설하여 중국인들의 호응이 대단했다고 전하는 등 한국 언론 특유의 호들갑을 보여주었다. 그 와중에 작게나마 이슈가 되었던 것은 박 대통령이 국내에 묻혀있는 중국군 병사들의 유해를 판문점을 통하지 않고, 중국으로 송환하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만 보아도 박근혜 대통령은 물론 정부 인사들이 오늘의 중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해 수준이 얼마나 박약한지 알 수 있다.





전쟁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인식 차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군 규모나 사상자 수치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있을까?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는)은 사상자의 수치로 전쟁의 승패를 평가하는 전통이 있다. - 이와 같은 전통은 과거 그리스· 로마 시대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당시에는 주로 개활지에서 전투를 벌이고 사상자의 숫자로 전쟁의 승패를 가늠했다. 이런 전통이 있기 때문에 미국은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으로 기록된 장진호 전투에서도 승리했다고 주장(사상자 비율로 보면 중공군 측 사상자가 월등히 많았기 때문)한다. 전쟁을 이처럼 산술적인 개념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베트남전에서 단 한 차례의 패전도 없었지만, 전쟁에서 패배한 것일지 모른다. - 우리나라 역시 정치·경제·문화의 여러 측면에서 미국식으로 사고하는데 익숙해져서 한국 땅에 묻혀있는 중국군 유해를 송환하겠다고 하면 중국 측이 매우 감사하게 여기리라 생각한 모양이다. 북한 땅에 묻혀있는 미군 유해를 통해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 개선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우리 나름대로 응용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이것은 앞서 전쟁의 승패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개념 차이처럼 전사자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도 미국과 중국이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나라던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희생자를 추모하는 열기는 뜨겁지만, 추모의 방식까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육군 국가인 스파르타는 전사자의 유해가 그가 사용하던 방패에 올려져 고향으로 돌아와 매장되어야 했고, 전통적인 해군 국가였던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조차 전사자의 시신이 자국 영토(고향)에 매장되지 못하는 것을 대단한 수치로 여겼다. 전사자의 시신이 제대로 매장되지 못한다면 죽어서도 영혼이 구천을 헤맨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전투에서 승리했더라도 전사자의 유해를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장수는 개선할 수 없었으며(심지어 해상전투에서도) 지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당하는 형벌을 받기도 했다. 그에 비해 같은 해군 국가였던 영국은 굳이 전사자의 유해를 자국으로 이송하여 매장하지 않았다.

물론 미국은 영국과는 상황이 좀 달랐다.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은 단 한 구의 시신도, 단 한 명의 포로도 적진에 남겨두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정부는 전사자 유해 발굴 체계를 정립해 왔는데,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시기까지는 전사자 유해 발굴 신원확인부대를 잠정 운용했으나 이후 1976년부터는 전담부대를 창설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레이건 대통령은 전몰자 추모식에서 “우리는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전사자를 찾을 때까지 결코 당신을 잊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보면 미국이 해군 국가로 출발했던 것이 아닌 탓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로서 ‘국가 만들기’ 과정에서 국민의 충성심을 북돋는 차원에서 생긴 전통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중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에 파병된 중국군의 수치는 정확한 통계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 이유는 우선 당시 중국이 그럴 만한 여력이 없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왕수쩡의 『한국전쟁 - 한국전쟁에 대해 중국이 말하지 않았던 것들』(글항아리, 2013)을 보면 당시 중국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상대는 중국이었다. 전쟁의 폐허에서 막 일어난 중국은 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한 당일에도 중국 전역을 해방시키지 못해 인민해방군은 그때까지도 서남과 서북 지역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또한 이미 해방된 광활한 지역에서 신생 인민정권에 맞서는 국민당 군대의 잔존 세력은 여전히 군사적으로 골치 아픈 문제였다. 해를 거듭하며 지속된 전쟁은 취약한 공업을 철저히 파괴했고, 애초 원시경작 상태에 있던 농업은 더욱 쇠락했다. 1950년 신중국의 농공업 총생산 가치는 불과 574억 위안으로, 달러로 환산하면 미국 농공업 총생산 가치의 끝자리 수에 지나지 않았다.(본문 13쪽)

이처럼 당시 중국의 상황이 열악했기 때문에 추정치만 존재할 뿐 정확한 통계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다만, 미국 측 통계로는 당시 중공군 전체 사상자는 92만 명(북한군 포함 142~150만 명), 중국 측 통계에 의하면 전투 및 사고사망 11만 4천 명, 부상 38만 3천 명, 질병 치료 45만 명(또 다른 통계에 의하면 사망자 13만 3천~15만 2천 명 발표)으로 추정될 뿐이다. 한국전쟁 당시 병력보다 화력에 우선했던 미국과 부족한 화력을 병력으로 보충했던 중국의 전략 개념이 달랐던 것처럼 이후 전사자에 대한 양국의 차이도 뚜렷했다.





중공군 유해 송환은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둘까?

이제 중국이 지척이라 서로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혹시 중국을 방문했을 때 신중국 건국의 주역들인 저우언라이(周恩來), 후야오방(胡耀邦), 덩샤오핑(鄧小平) 등의 무덤을 찾아 참배하고 돌아온 사람이 있는가? 기념관이 아니라 그들의 무덤에 갔었다고 한다면 틀림없는 거짓말이다. 진시황의 병마용이 잘 보여주듯 중국은 한때 무덤의 나라였다. 그러나 현대의 중국은 더는 무덤을 만들지 않는다. 중국은 법으로 화장을 강제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에서 한 해 사망하는 인구가 600만 명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들이 전부 무덤을 만든다면 과연 어느 정도의 땅이 필요하겠는가? 중국의 정치지도자들은 그들이 세운 업적이나 권력만으로도 충분히 기념될만한 무덤을 만들 수 있었지만 스스로 모범을 보이기 위해 화장을 선택했다.

한국전쟁 당시 중국의 마오쩌둥은 수십만에 이르는 중국 병사들을 한국에 파병시켰다. 그는 수십만에 이르는 병사들을 사지로 내몰면서 내 자식만 안전한 중국 땅에 둘 수 없다 하여 아들 마오안잉(毛岸英, 양계혜와의 사이에서 나은 장남)을 한국전에 내보냈다. 그는 참전을 위해 압록강을 건넌지 한 달 만에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자세한 내용은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2』권을 참조). 과연 그의 시신은 어디에 있을까? 중국에 있을까? 아니다. 여전히 북한 땅에 있다(1949년 중국 건국 이후 해외 참전 중 전사해 현지에 묻힌 중공군 유해는 대략 11만 5217구 중 99% 이상인 11만 4000구(추정)가 한반도에 묻혀 있다. 북한은 200여 곳에 중국군 기념지와 묘지를 조성했다고 한다. 1973년 김일성 주석의 지시로 평안남도 회창군 등 8곳에 ‘중국 인민지원군 열사묘’를 조성 관리하고 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도 회창군 열사묘에 묻혀 있다. 이 묘역엔 2009년 원자바오(溫家寶) 총리, 2010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후계자인 3남 정은을 데리고 참배했다).

장남의 시신 송환문제가 논의되자 마오 주석은 딱 잘라 말했다.

“중국 인민의 의리를 말해주는 표본입니다. 그냥 조선반도(한반도)에 두십시오.”

그리고는 이렇게 공식발표했다.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희생없이는 승리도 없습니다. 세상에 자기자식을 아끼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보통사람들 중에도 자기 자식이 혁명을 위해 피를 뿌리고 희생된 이가 아주 많습니다.”

그런 중국에게 남한 땅에 묻혀있는 너희 병사 시신을 돌려보내겠다고 제안하는 한국 대통령과 그걸 무슨 대단한 성과인양 대서특필하는 언론을 보면서 과연 중국, 중국인들은 대한민국이 중국에 대해 아니, 중국과 북한의 관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할까? 평소 중국 고전을 많이 읽고, 중국 노래를 즐겨 중국을 문화로부터 접근한다는 우리 대통령을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물론 이명박 전임 대통령보다는 조금 낫게 평가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언론이 떠드는 것만큼 유해 송환을 통해 거둘 성과는 크지 않을지 모른다. 신뢰를 쌓는다는 것은 이처럼 힘든 일이다. 더군다나 상대가 정상 간에 나눈 회담 내용조차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공개해버리는 정부라면 더욱더 그렇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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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한 글쟁이가 가고 새 글쟁이가 왔다
<남편의 서가>/신순옥 지음/북바이북 펴냄


[302호] 2013년 06월 24일 (월) 10:22:26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신간 서평을 하면서 출판평론가 최성일과 나의 인연을 펼쳐놓는 것은 남부끄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와 내가 호형호제한 일도 없거니와 두 사람이 만난 것도 어른이 된 뒤의 일이며, 우리는 그야말로 일로 만난 사이였기 때문이다. 살면서 뒤돌아보니 새삼 친구라 부를 만한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울해지는 날이 꽤 많았다. 오래된 고향 친구, 같이 학교에 다닌 친구들이 없지는 않으나 1980년대 내가 만났던 책들과의 인연이 그러했듯 시대가 험난했던 탓에 서로 소식을 주고받지 못하여 저절로 스러진 인연들이 있었고, 사랑에 굶주렸던 탓에 우정으로 만나 사랑이란 이름으로 불타버린 인연들도 있었다. 그런데 일 때문에 만난 사이의 우정을 되새김질할 수 있을까. 어느덧 고인이 세상을 뜬 지도 2년이다. 우리는 친구라는 달콤한 이름으로 부른 적은 없으나 언제나 벗이었다.

최성일은 나보다 몇 살 많았다. 그리고 이제야 말이지만 그는 곧잘 남들에게 편벽된 사람으로 오해 아닌 오해를 받기도 했다. ‘출판평론’이란 것이 문학평론이나 미술평론처럼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자리가 잡힌 일도 아니며, 크게 돈이 되는 일도 아니므로 내심 그것이 무슨 평론할 거리나 되느냐 무시하는 이들도 종종 만났으리라. 그는 사람들과 종종 논쟁했다. 듣기로 그중에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유명 작가도 있었다. 그럴 때면 지나가는 말로라도 다투지 말기를 충고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그는 나의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뜨거운 사람이었다. 옳지 않다고 여기는 일에는 싸움을 마다치 않았다. 나는 그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해 나서는 일마다 동감할 순 없었으나 그가 사회적 명리를 바라고 그러는 사람이 아니란 사실만은 인정할 수 있었다.

내가 아는 한 세상의 모든 남편은 자신의 아내에게 평가받는 일이 가장 두렵다. 그것은 나 또한 그렇다.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사람들은 상대가 비밀리에 적은 글이 그렇게 궁금할 수가 없다. 남편은 내가 집을 비운 사이 내 일기를 훔쳐보고 그것을 내 일기장에 증거로 남겼다. 고백건대 나 역시 남편의 일기를 자주 훔쳐봤다. 나는 안 본 척 시치미를 뚝 떼버리지만, 남편은 몰래 본 것을 마음에 담아두지 못하는 양심적인(?) 사람이다.” 아내의 일기장에 ‘일기 봤음’이라는 표시를 해둘 정도로 무섭게 양심적인 사람이 최성일이었다. 내가 읽은 책들의 저자 가운데 아내에게 이처럼 높이 평가되는 걸 읽어본 것은 최성일 이전에는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었던 역사학자 김성칠(<역사 앞에서>)이 유일하다.

무섭도록 양심적인 사람, 최성일

그가 나를 좋게 봐주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잘 모르겠으나 몇 차례 그와 아내, 두 아이가 사는 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었다. 겉보기에 그의 집은 보통 우리가 사는 집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남들의 몇몇 배는 될 법한 책 속에 살았기에 그의 집은 집이 책을 품었는지, 책이 집을 받치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의 아이들이 “우리 집 책은 아빠 같다”라며 아빠의 서재를 그냥 두게 했다는데, 그의 책은 최성일이 남기고 간 거대한 기억일 것이다. 고인이 된 최성일은 편집자들에게도 까칠한 글쟁이였다. 그만의 미문(美文) 의식이 있었고, 그의 문장 원칙, 한국어 쓰기에 대한 강한 자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조차 인정하는 몇 안 되는 글쟁이가 바로 자신의 아내 신순옥씨였다. 나 역시 그에게 직접 아내 글솜씨 자랑을 여러 차례 들은 바 있다.

아내가 남편을 회상하고, 추모하며 책을 낸 것이 이번이 처음 일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비록 최성일은 가고 없지만, 신순옥이란 새로운 글쟁이가 왔음을 비로소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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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